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노자의 생애와 사상>
노자의 전기
2. 신선으로서의 노자
3. 『노자』의 저자와 그 시대
4. 노자의 시대 배경
1) 주(周)의 건국과 발전
2) 춘추시대
3) 전국시대의 도래
5. 노자의 도론(道論)
1) 도(道)와 덕(德)
2) 우주의 본원으로서의 도
3) 만물의 존재 원리로서의 도 – 무위. 자연
4) 도의 성격 – 반(反), 약(弱)
6. 노자의 덕론(德論)
1) 상급의 덕(上德)과 하급의 덕(下德)
2) 성인(聖人)과 군자(君子)
3) 양생론(養生論)
4) 가치관
5) 지식론
7. 노자의 도술(道術)
1) 처신(處身)과 처사(處事)
2) 정치론
3) 후왕론(侯王論)
4) 병술(兵術)
8. 노자의 이상사회(理想社會)
9. 도교의 성립과 노자
10)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
참고 문헌
1. 김학주 『노자와 도가 사상』, 명문당, 2007.
2. 왕혜천 외 편저, 송준남, 송종서 옮김, 『도가 철학 이야기 100』, 서책, 2011.
3. 『중국 철학의 기원과 전개』 丁爲祥 지음, 예문서원
4. 『철학VS철학』 강신주 지음, 오월의 봄
5. 『중국 사상사』 森三樹三郞 지음, 온누리
노자의 전기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제자백가의 시초격인 인물로, 당대 최초로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道)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 인물로 대표 저서로는 『도덕경』이 있으며, 이 때문에 도가의 창시자로 불리는, 또는 도교에서는 신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고 불리는 노자(老子)가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史記』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가장 자세하다. 노장신한이란 노자, 장자(莊子),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의 네 사람을 뜻하며 노자의 전기는 이들의 전기와 함께 한 편으로 묶여져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후세 도가들의 저서 속에는 노자에 관한 전설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들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
노자의 생애에 관한 기록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이 『사기(史記)』이나 실상『사기(史記)』의 기록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노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느 시대 사람인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존재 했었는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하더라도 그가 바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노자』란 책의 저자인가? 이런 등등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기(史記)』는 정확히 기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들 근거로 해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勵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라 하였다 주(周)왕실의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를 지냈다.”
라고 사기에 적혀 있다.
도교의 태상노군 전설에도 이씨라고 나온다. 노자(老子)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후 선천태후의 뱃속에서 70년을 태아 상태로 있다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옆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를 나의 성씨로 해 주시오'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이 오얏나무 '李'(리)가 되고, 이후에 성장하면서 귀가 컸기 때문에 이름은 '耳(귀 이)'자가 되었다.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에 따르면 본명은 이중이(李重耳) 자는 백양(伯陽)으로 초나라 고현 곡인리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현대에는 노자의 원래 성이 노(老)씨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역사학자 카오헝(高亨)은 저서 『노자전전증(老子傳箋證)』 에서 춘추시대에는 노씨성이 있었으나 이씨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노자의 본래 성은 노(老)라고 주장했다.
2. 신선으로서의 노자
전국 시대 말엽부터 중국에는 신선 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진(秦), 漢대에는 스스로 불로장생술(不老長生術)을 익혔다고 내세우는 방사(方士)등이 수없이 나왔다. 이들은 흔히 자기네 사상적 근거를 노자에 두었으므로 후세로 갈수록 애매한 노자의 생애에는 전설적이고 신비스러운 여러 가지 전설들이 가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후한에 장릉(張陵)이란 사람에 의하여 도교가 창시되고, 『노자』를 그들의 기본 경전으로 삼아 신도들에게 그것을 외우게 한 이래로 더욱 심해졌다. 곧 노자는 후대로 갈수록 특수한 모습과 기이한 술법을 행하는 신선으로 변해 갔다.
3. 『노자』의 저자와 그 시대
지금 우리가 보는 『노자』나 『도덕경』은 누가 쓴 것인가?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노자』나 『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이이(李耳) 또는 이담(李聃)이 지은 책으로 믿어 왔다. 그리고 그 이이는 공자(BC, 551~BC, 479)보다 나이가 20~30세 더 많은 선배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송대에 섭적(葉適, 1150~1223)이 『습학기언(習學記言)』에서 『사기』 열전에 전기가 실려 있는 『노자』의 저자는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의심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노자』의 저자와 그 저작 연대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학계의 큰 문제로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청대에 들어와 고증학이 크게 발달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회의주의적 학문 경향은 노자란 실제로 존재한 일도 없는 가공적 인물이라는 주장까지도 낳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자에 대한 지나친 의심은 노자에 관한 전설을 긍정하는 것 이상으로 근거가 박약한 일이다.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 70여 년이나 있다가 나왔다든가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터무니 없는 전설들까지도 믿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도가 사상이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창설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공자라는 위대한 인물이 나와 중국의 전통 사상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유학을 이룩하고 있을 때 이와 대가 되는 초현실적이고 반이성적인 도가 사상도 상대적으로 무르익어 갔다.
공자는 그 시대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주나라 초기의 봉건제도를 부활시키려고 애썼으나 도가에서는 그 시대의 혼란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예의 제도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단정하고 주나라 초기의 봉건제도는 물론 모든 인위적인 수단을 부정하고 나섰다.
어떻든 전국시대(BC, 402~BC. 256)에 와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의 하나로 도가 사상이 발전하여 있었고 그들의 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노자』가 전해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도가 사상이 공자보다 선배였던 노담 한 사람에 의하여 창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세의 도가들은 그들 사상의 구심점으로 유가의 공자와 비길 만한 그들의 시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공자보다도 선배인 노담을 끌어내어 노자라 부르며 그를 자기네 시조로 받드는 기풍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미 춘추시대(BC. 770~BC. 403)에도 노자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세상을 숨어 사는 많은 어진 이들이 있었다. 다만 수많은 이전의 어진 이들 중에서도 노담의 행적이 비교적 뚜렷했고 그들과 사상적으로 대가 되는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보다도 선배라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노자로서 도가의 시조라 존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숨어 사는 은자들 중에는 노담과 비슷한 사상과 비슷한 행적을 남긴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또 그와 혼동을 일으키는 노래자(老萊子)나 태사담(太史儋) 같은 사람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도가에서는 논리조차도 부정하고 있으므로 초기의 도가들은 자기의 사상을 글로 적어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도가들이 ‘우주의 기본 원리로서의 도’의 개념이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한계’의 인식 또는 ‘무위자연’의 사상들을 구체화하는 한편 다른 학파들을 상대로 토론하고 다투게 되면서 자기네 사상의 바탕이 될 경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전국 시대로 들어오면서 어떤 이가 자기 스승들의 가르침, 곧 간단한 말이나 교훈을 모아 책으로 엮고 그 스승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노자의 이름을 따서 그 책을 『노자』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노자』가 뚜렷한 체계 없이 간단한 도가의 사상을 설명하는 말이나 교훈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점이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말들이 운문에 가까운 문장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본시는 입으로 전해지는 말에 의하여 전승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 책에 씌어 있는 기본 사상들은 이미 노자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노자』와는 다르지만 춘추시대의 노자에 의하여 쓰여진 간단한 책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자(BC.?~BC. 275전후)가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고 또 여러 곳에 노자의 말을 인용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자』는 장자보다는 앞서 이루어졌던 것이라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닌 듯하고 또 전국 시대의 사상을 대표하는 말들이 섞여 있으므로 전국 시대 도가들의 손질이 많이 가해졌다는 것도 부정할 길이 없다.
이상을 종합하면 춘추시대에 공자보다 20~30년 선배인 노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도가의 초기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도가 사상이 그 노자라는 한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자』라는 책도 적어도 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기록이나 그의 말 같은 것을 근거로 하고 다시 거기에 전국 시대 이후 도가들이 기록을 더 보태어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 발전한 것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란 책은 저자인 노자는 반드시 공자가 만났던 노담과 꼭 같은 사람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이러한 옛 책에 더 보태어진 후세 사람들의 손길은 『노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중국의 옛 전적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4. 노자의 시대 배경
1) 주(周)의 건국과 발전
중국의 역사는 반고(盤古)를 필두로 하는 고황(古皇)과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BC. 2698년 왕 위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황제가 그들의 시조로서 가장 존중되고 있다. 황제의 黃자가 중국인들이 오방색 중에서도 가장 높이는 중앙의 황색에서 나왔고 황하(黃河)가 연상되며, 또 후세의 도가들이 노자와 함께 황제를 그들의 교조로 받들어 황로지학(黃老之學)이란 말이 생겼다는 사실들이 모두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황제의 뒤를 이었던 옛날 황제 중에 전욱(顓頊), 제곡(帝嚳) 등이 황제와 함께 주나라 왕실과 같은 희(姬) 성이라는 것은 한편 주나라의 중국 역사상 정통적인 지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서경(書痙)』은 요, 순에서 시작되고 있는데 요임금은 BC. 2357년 순임금은 BC. 2256년 무렵에 각각 황제 자리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가에서는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가 실제로 이루어졌던 시대로 요, 순 시대를 들고 있는 것은 그들의 경전인 『서경(書痙)』의 기록과 합치되는 것이다. 순임금에 뒤이어 우(禹)가 천하의 홍수를 다스린 공로로 임금 자리를 물려받아 하(夏)나라를 세우는데 중국의 본격적인 세습 왕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뒤에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포악한 정치를 일삼자 탕(湯)임금이 나와 걸왕을 정벌하고 상(商)나라를 세운다. (BC. 1766 무렵)
탕임금 이후로 상나라는 여러 번 도읍을 옮기다가 제17대 반경(盤庚) 입금이 도읍을 은(殷)으로 옮긴 뒤 나라 이름도 은이라 부르게 된다. 따라서 중국의 유사 시대는 이 탕임금의 상나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문물제도에 관한 기록들은 거의 전하지 않고 있으므로 역시 본격적인 유사 시대는 다음의 주나라로 미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마지막 입금 주왕(紂王)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무왕(武王)이 그를 정벌하고 호경(鎬京)에 도읍함으로써 이룩한 나라이다. (BC.1122 무렵) 주나라는 이미 무왕의 아버지 문왕(文王)이 서방 제후들의 우두머리인 서백(西伯)으로 훌륭한 정치를 하여 나라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국세를 크게 떨쳤다. 일설에는 이미 문왕 때 주나라가 온 천하를 다스리도록 천명을 받았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아들 무왕이 천명을 완성시켰던 것이라고도 한다.
무왕은 온 천하를 통일한 지 7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어린 아들 성왕이 잇는다. 이때 어린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여러 가지 문물제도를 마련하고 봉건 체제를 완성시켰던 주공이 나와 활약한다. 여기에서 주나라의 문화는 그 발전을 극하게 되고 중국 전통문화의 기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자는 요, 순 시대에 이어 하, 은, 주의 세 시대를 삼대라 하여 실제로 이상적인 봉건 정치가 행해졌던 시대로 높이 떠받들었다.
주나라는 건국 초기 60년 간은 태평성대를 누리더니 차츰 정치 질서가 어지러웠다. 특히 유왕(幽王)은 포사(褒姒)라는 여자에 혹하여 나라를 극도로 어지럽힌 끝에 서쪽 오랑캐인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에 그의 태자 의구(宜臼)가 유왕의 뒤를 계승하는데 그가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나라의 도읍 호경이 크게 파괴된 데다가 서쪽 견융의 세력이 무척 강성하였으므로 도읍을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옮기어 나라의 중흥을 꾀한다. 이 해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을 서주, 그 이후를 동주라 부른다. 이 동주는 다시 마지막 난왕(赧王)이 진(秦)나라에게 나라 땅을 바치고 굴복하기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서주가 도합 11세(世) 12군(君)에 약 350년, 동주가 도합 22군에 514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동주 시대야말로 노자가 생존하였고 또 도가가 이룩되었던 시대이다. 그런데 이 동주 시대는 흔히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 시대로 구분한다. 춘추라는 말은 공자가 직접 편찬한 그의 시대에 그가 살았던 노(魯)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년체 역사책인 『춘추(春秋』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실상 공자가 쓴 『춘추(春秋』는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에서 시작하여 노나라 애공(哀公) 14년에서 끝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역사적으로는 평왕이 도읍을 낙읍으로 옮긴 해로부터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의 세나라로 갈라지기 전해까지의 367년 동안을 춘추시대라 부른다. 그리고 그 다음 해(BC. 402)부터 주나라가 망할 때(BC. 256)까지의 147년 동안이 전국 시대가 된다.
이 동주 시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을 극한 겸병전쟁(兼倂戰爭)이 계속된 시대였지만, 춘추시대와 전국 시대는 성격상 큰 차이가 있다. 곧 춘추시대는 제후들 사이에 세력이 가장 강했던 패자(覇者, 이른바 春秋五霸)가 있었고 여러 나라들은 서로 싸우기는 하면서도 한편 패자를 중심으로 모여 주나라 천자를 떠받들며 봉건 질서를 유지하려 애쓰고 또 힘을 모아 오랑캐들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이 뚜렷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로 들어가서는 그러한 명분도 완전히 사라지고 전국칠웅이라 불리던 일곱 나라들이 서로 남의 나라 땅을 빼앗고 침략하고 하는 전쟁만을 일삼던 시대이다. 그러한 전국의 혼란은 결국 엄격한 법과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에 의하여 종결을 맺게 된다.
그런데 이렇듯 혼란을 극하던 춘추시대가 바로 노자가 생존하고 도가 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대이며 더욱 약육강식이 성행한 전국 시대가 도가 사상이 완성되고 우리가 보는 『노자』란 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가 사상은 이러한 혼란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여 발전했다.
2) 춘추시대(BC. 770~BC. 403)
왕, 또는 천자(왕기王畿를 다스림) – 제후(國을 다스림) 경(卿), 대부(大夫)(경, 대부들도 采邑채읍을 다스림), 사(士) - 농민(같은 성을 지닌 농민) . 농노(農奴성이 다른 농민), 예농(隸農농사일을 하는 노예). 노예(奴隸, 농업 이외의 생산업 또는 잡일을 하는 자들)이 있어 생산업에 종사했다.
따라서 나라의 당은 왕 이하 대부들에 이르는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가 있었고 또 그것은 그 집안의 맏아들인 종자(宗子)에 의하여 소유가 계승(종법 제도)되었기 때문에 그 종자 밑에 온 친족의 무리들이 모여 살았다. 한 나라나 채읍(采邑)은 종족을 중심으로 한 지배 질서에 의하여 제각기 다스려지는 공동체여서 한 종족은 독립된 토지와 군대와 경제력 및 법(살인권 포함)을 갖고 있으며 거기의 종자는 그 종족의 모든 남자들을 거느리고 종부(宗婦)는 모든 집안의 여자들을 거느리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거와 행동의 구속을 받는 반면 또 종족의 비호 없이는 생존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물론 이 종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의 넓이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나라 초기의 오랜 동안의 안정은 제후들의 세력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농기구 사용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 급증, 인구 급증. 기후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한 생산력과 사회 규모가 커졌고 그 격차가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후들 간에 차이로 인한 갈등이 혼란으로 이어지고 특히 서주 말엽에는 주나라 왕실이 크게 악화되어 왕실이 제후들을 통제할 능력을 거의 잃게 되었다. 그러자 제후들은 강한 나라가 멋대로 약한 나라를 쳐서 병합시키며 앞을 다투어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쓴 결과 주나라 왕실의 세력을 능가하는 큰 나라들이 생겨나 왕실을 정점으로 하고 그 밑에 제후들이 놓여 있던 봉건 질서가 파괴되기 시작하여 춘추 시대의 약육강식의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때 노나라에서는 인의를 설교하여 봉건 체제를 부흥시키려 애쓴 공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오고 송나라에서는 겸애와 근검을 역설하며 이전의 봉건 질서를 반대하고 서민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상가인 묵자가 나왔고 다시 초나라에서는 노자를 비롯한 도가 사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의 사상이나 부드럽고 약한 것을 주장하는 태도 등은 그대로 중국 남방의 낭만적인 기질의 소산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묵자가 주나라의 봉건 질서를 부정하던 입장의 밑바닥에는 주나라에게 멸망당했던 은나라 후손들의 감정이 서려 있듯이 노자가 일체의 봉건 체제와 가치를 부정하는 태도 속에는 오랑캐 나라 사람으로서의 중원에 대한 반감도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자가 이성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술(道術)을 논하고 병법까지고 중시한 것은 오랑캐인 초나라가 나라 땅을 넓히고 국력을 키우려고 애쓰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전국시대의 도래(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는 기원전 476년(기원전 403년)
(秦)나라가 중국 통일을 달성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
BC. 403년 진(晉)나라가 한(韓), 조(趙), 위(衛)의 세 나라로 쪼개지면서 제후들 사이의 겸병전쟁은 더욱 극렬화하여 이른바 전국시대가 전개된다. 이때부터 주 왕조는 천하의 대종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주나라가 망하기까지(BC. 256) 오직 나라로서의 명맥만을 겨우 유지할 뿐이다.
그리고 이 시기로 들어오면서 작은 나라들은 거의 모두 합병당하고 서쪽의 진(秦)나라를 비롯하여 동쪽의 제(齊), 남쪽의 초(楚), 북쪽의 연(燕), 중부의 한(韓), 위(魏), 조(趙)의 일곱 나라가 서로 치열한 침략 전쟁을 일삼게 된다. 이 때문에 일곱 나라의 영토는 늘 빼앗고 빼앗기고
하여 언제나 변동하고 있는 양상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들의 생활에 큰 변동이 일어난다. 특히 춘추시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토지의 종족 소유제도는 더욱 심하여져 각 지방마다 새로운 지주계급이 생겨난다. 이들은 완전히 영주(領主)들의 세력을 압도하지는 못하였지만 일단 영토 내에서의 영주의 권세는 약화되고 이들의 경제 정책에는 많은 견화가 일어나게 된다. 특히 종족들의 속박 아래 묶여 있던 수 많은 농노(農奴)들이 이 시기에 와서는 대량 자유로운 농민으로 탈바꿈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다 전국 시대로 들어오면서 중국은 완전히 철기시대로 바뀌어 갔으므로 여러 가지 농구와 공구들이 크게 개량되어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능력이 크게 증진되었고 상업도 눈에 띄게 발달하여 여러 도시들이 크게 발전하고 새로운 거상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호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들의 침략전쟁은 제각기 많은 병력과 경제력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농민을 중심으로 한 서민들의 수가 크게 불어났다.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을 극하였지만 서민사회는 뚜렷한 발전상을 보여준 시대였다.
전국 시대에는 또한 나라나 귀족마다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남보다 뛰어나 학문이나 지혜, 기술 등을 지닌 사람을 다투어 보호하는 기풍이 성행하였다.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 위(魏) 나라 신릉군(信陵君) 등이 모두 수천 명의 식객들을 늘 집안에서 먹여 길렀고 또 이들의 힘을 빌려 많은 공을 세워 유명하다 이것은 서민사회의 발전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다.
특히 서민 출신의 낙양 사람 소진(蘇秦)이 합종설(合從說)로 진(秦)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임금들을 설복시켜, 여섯 나라로 하여금 힘을 합쳐 강한 진나라에 대항케 함으로써 구변 하나로 일시에 여섯 나라 재상이 되었고 뒤의 장의(張儀)는 반대로 연횡책(連橫策)을 내세워 진나를 위해 공헌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본위의 사회 풍조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런 중에도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은 제자백가라 불리는 학자들이다. 이미 춘추시대에
공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와 인의와 예악을 바탕으로 하여 주 초의 봉건제도를 부흥시킴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 보려고 하였고 다시 노자는 사회의 혼란과 인간의 불행은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의 추구와 인위적인 행동 때문이라 생각하고 사회의 모든 예의 제도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원초적인 자유와 평화를 달성하려 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유가 사상과 노자의 도가 사상은 전국 시대로 들어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크게 발전한다. 유가에도 맹자, 순자가 나와 활약하였고 도가에도 장자, 열자(列子)가 나와 노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상가들이 다른 천하를 올바로 이끌 사상의 체계를 이룩하여 자기의 이상을 정치적으로 살려 보려고 활약하였다. 묵자의 묵가, 관중(管仲),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 그 밖에도 명가, 농가, 음양가, 잡가, 종횡가들이 나와 유가, 도가와 함께 중국 사상계의 꽃을 피웠다.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2천 수백 년을 두고 발전한 중국의 학술과 중국 사상은 중간에 불교 사상의 유입과 변용이 있기는 했지만 그 뿌리를 거의 모두 이 시기의 학술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 학술사나 사상사에 있어서 춘추, 전국 시대에는 이보다 중요한 시대는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은 후세에 전개된 중국 사상사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줄기의 하나로서 중국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5. 노자의 도론(道論)
1) 도(道)와 덕(德)
『노자』는 『도덕경』이라고도 부르며, 그 책의 내용은 도경과 덕경의 상, 하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상편의 첫머리가 도에 관한 얘기로 시작되고 하편의 첫머리는 덕에 관한 말로 시작되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마천이 『사기』에서 『노자』는 “도와 덕의 뜻을 얘기한 5천 언(言)으로 이루어졌다.”고 얘기하고 있듯이 노자의 중심 사상이 도와 덕으로써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유가에서도 그 함축적인 의미는 다르지만 역시 도와 덕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자가 생각하던 도와 덕은 어떤 것이며 유가의 그것들에 대한 개념과는 어떻게 서로 다른가? 도란 유가든 도가든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를 뜻하고 덕이란 도를 따라 사람들이나 사물을 통하여 발휘되는 ‘훌륭한 성능’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덕이란 도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덕의 성격은 도에 의해 결정된다.
공자의 도는 결국 인(仁), 지(知), 용(勇), 서(恕) 등 여러 가지 유가의 덕목을 통하여 발휘되는 ‘올바른 도리’인 것이다. 곧 공자의 도는 인간으로서는 인으로 발휘되고 사리를 판단하여야만 할 때에는 지로서 발휘되고, 불의와 대처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용으로 발휘된다. 이밖에도 경우에 따라 사람을 통하여 발휘되는 ‘도의 효틍’이 곧 덕인 것이다. 곧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훌륭한 행위를 통털어 덕이라 부르는 것이다.
노자의 도는 공자의 그것에 비하여 더욱 절대적이고 본원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 관계되는 올바른 될뿐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인간과 만물과 우주 전체의 본체를 뜻한다. 유가의 『역경』 계사전(繫辭傳)에도 “일음(一陰) 일양(一陽)을 도라고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고 『중용』에서는 인간으로서의 도뿐만이 아니라 ‘하늘의 도(天之道)’에 대하여도 말한 대목이 있지만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도에 대한 유가의 개념은 전국 말엽 이후에 생겨난 것일 것이다.
어떻든 유가의 이러한 도에 대한 개념조차도 모두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도리’ 곧 ‘사람의 도(人之道)’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노자의 도는 인간의 존재 이전의 우주의 본원이며 만물의 생성과 존재의 법칙인 것이다.
노자의 도는 공자처럼 인간의 당위법칙으로서의 범주를 뛰어넘어 우주의 생성보다도 앞선, 그리고 “천하의 모체”가 되는 그런 절대적인 것이다. 곧 우주의 모든 존재는 도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고 도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란 인간의 지성의 한계를 초월한 절대적인 것이어서 사람으로서는 그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어렵고 말로써 그것을 표현하기도 어려운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듯 이러한 도에 대한 인식은 노자의 학문 내용을 도에 관한 추구가 중심이 되게 하였고 그의 사상의 전개는 도에 대한 순종의 길을 모색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노자의 학파를 도가라 부르고 이들의 사상을 ‘도가 사상’이라 부르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자의 도에 관한 이런 성격 때문에 ‘도가 드러나는 것’인 덕도 따라서 공자의 덕과는 그 성격이 판이해진다. 노자의 도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도가 인간을 통하여 발현되어 덕으로 드러날 때에도 그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판단이나 상식을 초월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공자는 사람을 통하여 발휘되는 올바르고 훌륭한 효능이 곧 덕이라 생각하였지만 노자의 덕은 인간의 올바르다는 판단이나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초월한 것이 된다. 노자는 인간들이 올바르다, 그르다는 판단이나 모든 의식적인 행위 자체가 도에 어긋나는 그릇된 것이라 생각하였다.
곧 덕이란 도가 우주를 생성하고 존재케 하고 있는 상태와 같이 극히 자연스럽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이어야만 하며 저기에는 아무런 인간의 의식적인 작위도 가하여지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자 사상의 기본 개념 때문에 공자의 유가 사상이 현실주의적이라면 노자의 도가 사상은 초현실적이다. 노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이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데서 인간의 모든 갈등과 불행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노자는 도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사회의 부조리뿐만 아니라 인간이 타고난 모든 불행의 요인으로부터 해방되자는 것이다.
곧 노자 사상의 근본 목표는 도가 지나는 무위하고 자연스런 덕을 터득함으로써 우주의 한 구성 요소로서의 인간 본연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이성이나 감정 또는 욕망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인간의 완전한 자유 곧 완벽한 행복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2) 우주의 본원으로서의 도
『노자』에 의하면 도란 바로 우주의 본원이다. 하늘이며 땅이며 온 만물이 도를 바탕으로 하여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도란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존재하는 것이며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모체로서 영원히 변함없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의 존재나 성격은 사람의 이성으로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는 것이며 적당한 명칭도 없어 임시로 도라 부르기로 하였지만 그 위대한 작용에서 볼 때에는 대(大)라 불러도 좋을 듯한 것이라는 것이다.
노자에게 도란 사람의 지각으로 파악했을 때는 이미 진정한 의미의 도가 못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람들의 도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이미 진정한 도를 지칭하는 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 볼 때에는 유보다 무쪽이 도에 더 가깝다. 도는 이처럼 사람으로서는 그 존재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작용은 오묘하기 이를 데가 없다는 것이다.
3) 만물의 존재 원리로서의 도 – 무위. 자연
도는 만물 생성의 본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변화케 하고 존재케 하는 기본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우주의 만물을 생성하고 존재케 하고 있는 도는 어떠한 원리에 입각하여 작용하고 있는가?
위대한 도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만물을 생성케 하고 또 그것을 존재케 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능력이나 공로를 내세우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의 존재조차도 소홀히 하기 쉽다. 도는 실체가 무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작위까지도 무인 것이다.
곧 도의 작용은 만물을 생성케 하고 존재케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의식적인 작위도 가해지는 것이 없다. 도는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고 도란 언제나 이름도 없는 것(道常無名)이라 말하고 있듯이 도의 본체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고 움직이는 모양도 없는 것이며 그 작용 또한 무위한 것이다. 모든 것을 생성하고 존재케 하고 있지만 도는 ‘언제나 욕심이 없음’으로 전혀 만물을 차지하거나 지배하려 들지도 않고 자기의 공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
노자는 도를 만물의 기원으로 지칭했으며,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것을 굳이 명명해야 한다면 '도'라고 했다. 또 노자는 도를 '무(無)'라고도 했다. 여기서 무는 존재를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도덕경』은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라고 적고 있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생성되고, 유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원리에 따라 만물이 생성되고 멸한다고 보았다. 또한 만물의 생성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불변의 법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원리에 따르며, 인간도 천지 만물의 구성체인 만큼 무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정치 사상이다.
노자는 무위를 통한 지배를 강조해 사회 진보는 혼란을 야기할 뿐이고, 생산의 발전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길 뿐이며, 탐욕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또한 문화는 지식의 발전을 가져오고, 이는 결국 전쟁에 이용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문명이 없던 시대, 어리석을 정도로 순박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노자의 이상적 국가 형태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이다.
이상과 같이 노자가 말한 도는 무위이고 이 무위는 자연을 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무위하고 욕심도 없고 사사로움도 없고 내가 없는 상태가 자연이다.
4) 도의 성격 – 반(反), 약(弱)
무이며 무위하고 자연스러운 도는 실제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우리 앞에 드러나고 있는가? 노자는 도는 무위하고 자연스럽지만 한편 그 작용은 반(反)이라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이란 도의 움직임이다. (反者道之動)”라고 말하는데 이 반이란 도의 움직이는 방향은 두 가지 면에서 파악된다.
첫째, 도는 언제나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지만 반드시 “근본으로 되돌아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도란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지며, 천하의 모든 것의 모체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도는 ”반이란 도의 움직임이다. (反者道之動)이란 말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가치? 또는 <반대의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 (道常無爲, 而無不爲) 라는 말은 이러한 도의 성격에 대한 단적인 표현이다. 이는 상대적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그릇된 일반적인 가치판단을 경고한다.
이 밖에도 “부드럽고 약함이 억세고 강함을 이긴다.”(柔弱勝剛强) “강하고 사나운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 (强梁(들보량)者, 不得其死), “천하의 부드럽고 약한 것으로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지만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는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을 이긴다는 것은……” (天下 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知能勝 弱之勝强 柔之勝剛 천하 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 막지능승 약지승강 유지승강),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억센 것을 부리고 있다.”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천하지지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守柔曰强) 등 도처에 부드러움과 약함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의 작용 자체가 부드럽고 약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도의 성격을 이처럼 반과 약의 면에서 파악한 것은 노자의 인생론이나 정치론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6. 노자의 덕론(德論)
1) 상급의 덕(上德)과 하급의 덕(下德)
노자는 도의 무위함을 근거로 덕을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덕에는 상급의 덕과 하급의 덕이 있다고 하였다. 덕이 사람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드러나는 덕은 사람의 수양이나 교양 정도에 따라 차별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상급의 덕이란 바로 도에 합치되는 완전히 무위, 무욕한 덕으로써 그러한 덕을 지닌 사람은 덕 자체를 의식하는 일도 없고, 덕 있는 행동을 하되 그 행동은 아무런 목표도 없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반대로 하급의 덕은 덕을 닦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그의 행동에 뚜렷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곧 노자는 무위의 원리를 기준으로 하여 덕을 평가한다.
다시 노자는 최상급의 인애(仁愛)를 뜻하는 상급의 인은 남을 위하여 사랑하는 행동을 하되 거기에는 어떤 보답 같은 것을 기대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다시 상급의 의란 자기와 남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최상급의 정의를 뜻하는데 그 행동에는 뚜렷한 목표와 신념이 있다. 끝머리의 상급의 예는 자기와 남들 사이의 관계를 적절히 구별하여 사회에서 올바른 몸가짐과 적절한 행위를 하는 최상급의 예를 뜻하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자기뿐만이 아니라 남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자에 의하면 이 상급의 인, 상급의 의, 상급의 예도 모두 하급의 덕에 속하는 것이다. 그는 무위를 근거로 하여 하급의 덕에는 다시 상급의 인, 상급의 의, 상급의 예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급의 인은 행동의 보상을 바라는 것 같은 목표는 없지만 이것은 훌륭한 일이니 하여야만 하나는 행위 의식은 있다. 곧 상급의 인은 이미 유위한 행위이다. 상급의 의, 상급의 예로 가면 행동이나 의식이 더욱 유위의 도를 더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상급의 예는 상급의 의만 못하고 상급의 의는 상급의 인만 못하다고 생각하여, “덕을 잃은 뒤에야 인이 드러나며, 인을 잃은 뒤에야 의가 드러나고, 의를 잃은 뒤에야 예가 드러난다.”고 한 것이다. 물론 상급의 인이나 상급의 의, 상급의 예보다도 훨씬 못한 하급의 인, 의, 예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부러 최상급의 인, 의, 예를 얘기하고 있는 것은 유가를 비롯하여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것들을 훌륭한 덕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그것은 의식적인 행동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덕이 아닌 하급의 덕에 속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가 “남보다 앞서 아는 것은 도의 형식적인 겉치레”라고 말한 것은 유가의 덕목인 지(知)조차도 진실한 덕이 못됨을 첨가하여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자의 생각에 의하면 진실한 덕이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어야 하며 도처럼 완전히 무위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도 일단 유위하기만 하면 그것은 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노자가 덕으로서 숭상하는 것은 완전히 무위한 상급의 덕이지 유위한 하급의 덕이 아니다. 또한 덕은 사물이나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 드러나고 있는 도의 효능이기 때문에 “도는 생성하고 덕을 길러준다.” 도가 만물 생성의 본원이라면 그 도에 따라 자라나고 성숙하고 변화하는 성능이 덕인 것이다. 도가 “무위하면서도 이루지 않는 것이 없듯이” 덕도 “무위하고 아무런 행위의 의식도 없지만” 여러 가지 현상과 변화를 나타내게 한다.
2) 성인(聖人)과 군자(君子)
『노자』에서 말하는 성인이란 추상적이고 가공적인 인물이 아니라 “온전한 도를 터득한 사람” 또는 “완전한 덕의 실현자”인 것이다. 곧 성인은 자신이 무위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무이하고 욕심이 없도 아는 것이 없게 한다. 그리고 “성인은 일정한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마음으로써 자기 마음을 삼는다.” (聖人無常心 百姓心爲心) 이것이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이다,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으니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버려둔다.” (天地不仁천지불이 以萬物爲蒭狗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성인불인 以百姓爲추狗이백성위추구)라고 말한 것도 도를 따르는 성인의 ‘무위지치’를 설명한 말이다.
노자는 이러한 성인의 모습은 마치 갓난아기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노자가 생각한 무위하고 욕심이 없고 하는 일이 없어서 맑고 고요하고 텅 비고 참된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무 의식도 없고 깨끗하기만 한 갓난아기와 같다는 것이다.
어떻든 성인이란 무위한 도를 따르며 지극한 덕을 이룩한 이상적인 인간에 대한 노자의 칭호이다. 노자는 그런 사람에 가까운 사람들은 가끔 선한 사람, 도를 지닌 사람, 대장부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3) 양생론(養生論)
노자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무위, 욕심이 없음, 하는 일이 없음, 함으로써 소박하여야만 한다고 하였다. 소박하다는 것은 나무토막이 본래의 자연의 바탕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한다. 곧 소박하다는 것은 물건이 지극히 순박한 자연의 상태를 뜻한다. 도를 따름으로써 무위한 자연의 상태는 소박해야만 하는 것이다.
노자는 또 도의 극치에 이른 상태를 맑음, 고요함, 텅빔이란 말로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소박함이 그 외형적인 면을 표현한 말인데 비하여 그 정신 또는 그 상태와 성격 등의 면을 표현한 말이다. 사람들은 올바르게 도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소박한 자연스러움, 맑음, 텅 빔, 고요함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무위를 주장하기는 하였지만 얼핏 보면 유위(有爲)한 일이라 볼 수 있는 양생에 대한 개념도 갖고 있다.
곧 사람이란 스스로 죽을 곳으로 가게 되는 일이 없도록 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을 곳이 없는 삶이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소박하고 맑고 텅 비고 고요한 상태의 삶인 것이다. 그러면 사나운 짐승이나 무기를 든 강도라 할지라도 그를 해칠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 이것이 노자의 양생론이며 양생론도 결국의 무위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4) 가치관
노자 사상의 다른 한 가지 특징은 일반적인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고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긴 것이나 짧은 것 도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나 나쁜 것 등이 있을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상대적인 그러한 가치를 믿고 뒤쫓는 데서 불행이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기본 원리인 도가 언제나 “근본으로 되돌아가고 있고(反)” “부드럽고 약한 상태로 드러난다.(弱)”는 성격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은 모든 상대적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그릇된 가치판단은 사람들의 올바를 기능이나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노자는 진정한 사물의 가치란 겉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모양에 대한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한편 도의 원리가 근본으로 돌아가는 반(反)의 작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영원히 아름답고 영원히 길고 영원히 좋은 것은 같은 물건이란 있을 수 없다. 아름다운 것, 긴 것, 좋은 것은 모두 일정한 극점을 넘어서면 다시 추해지고 짧아지고 나빠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판단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아는 동시에 또한 우리가 보는 그러한 현상과는 정반대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수가 많으며 다시 우리가 보고 판단한 가치는 진실한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결국은 그 반대의 가치를 향해서 변화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윤리면에서 있어서도 공자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갖게 하고 있다. 공자는 인의(仁義)를 크게 내세우고 있지만 노자는 인의란 도에 어긋나는 유위(有爲)한 행위로써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람들을 불행케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유가에서 존중하는 인, 의, 지, 효, 자, 충 같은 윤리는 모두 혼란이 산물임을 지적하고 있다. “예라는 것은 충실함과 신의가 박약해진 것으로서 혼란의 시작인 것이다.”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고 하면서 예가 혼란의 산물이라고 한 말을 앞에서 인용했다. 그러기에 유가적인 덕의 추구가 일반적인 가치의 추구를 접어치우고 사사로움도 없고 욕심도 없음으로써 소박한 몸가짐을 지닐 것을 설교한다.
노자는 정말로 아는 사람은 그 예리한 것을 꺾고 분규를 해결하며, 밝은 빛을 조화시키고 먼지 같은 것과 함께 어울린다고 똑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도를 터득한 사람뿐만 아니라 도 자체가 예리하지 않고 혼란하지 않으며 빛나지 않고 먼지나 비슷한 흐리멍덩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의 성격이 일반적으로 부드럽고 약한 상태로 나타난다는 원리와도 통한다. 그러기에 노자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남의 아래쪽에 처신하고” “남보다 뒤처질 것”을 설교한다. 그것은 “모든 귀한 것이란 천한 것으로써 근본을 삼고 있고 높은 것은 낮은 것으로써 기초를 삼고 있기 때문이다.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고귀이천위본 고이하위기) 남보다 낮고 남보다 뒤지게 처신한다는 것은 자신의 양생을 위해서뿐 만이 아니라 큰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원리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노자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판단이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게 되고 언제나 만족하게 될 것이로 그 사람은 언제나 검소하고 남에게 겸손하게 처신하는 태도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5) 지식론
노자는 일반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지식 또는 지각 자체를 부정한다. 노자의 양생론이나 가치관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다시 반학문(反學問), 반문화(反文化)인 논리에까지 발전한다. 한자의 지(知)와 지(智)는 서로 통하는 글자이며 지혜뿐만이 아니라 지식의 뜻도 지니고 있다. ”잘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듯하는 것이 훌륭한 태도이고,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은 병폐이다. (知不知上 不知知病)이라고 할 때의 지는 지혜보다는 지식 쪽의 뜻을 지닌 것으로 봄이 옳으며 이것은 반지식의 선언이다.
노자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이다. 모두가 선하게 보이는 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之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혜나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지각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무위하고 욕심이 없고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이론이 아는 것이 없는 것에까지 발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노자가 여러번 덕을 잘 닦은 사람의 모양을 ”흐리멍덩하고“ ”어리섞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는 것이 없는 것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노자로서는 일반적인 학문을 반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학문을 끊어 버리면 걱정이 없게 된다. (絶學無憂) 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노자는 학문을 한다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고 불완전한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무한하고 완전한 진리를 탐구하려는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무모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근심 걱정을 안겨주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숙 지식을 얻고 능력을 기르려는 학문이란 도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배우지 않는 것을 학문으로 삼아라.” (學不學)하고 가르치고도 있다. 모든 지식과 능력을 버리고 어리석은 상태로 있는 것이 무위한 도에 합당한 처신이라는 것이다. 이토록 노자의 사상은 반문명, 반문화적이다. 노자가 생각하는 무위하고 맑고, 고요하고, 텅 비고 소박한 인간이란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세계에 있어서의 동물이나 식물에 가까운 상태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각조차도 부정하고 나면 공중에 떠다니는 구름이나 땅 위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나 같은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사람이란 지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노자도 그러한 사실까지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노자가 생각했던 진실한 앎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에 대하여 아는 것과 참된 도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무엇이 도에 합당한 일인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이이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총명한 이이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부자이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知足者富)”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안다. (不出戶知天下)”
“조화를 아는 것을 법도에 맞는 것이라 하며, 법도에 맞는 것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 知和曰常 知常曰明)”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 (故知足不辱 知止不殆 고지족부욕 지지불태)
노자가 이처럼 앎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다는 것은 지혜와 총명함, 부에 대하여 설교한 것과 아울러 생각할 때 아무리 그것들이 진실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순되는 이론이 아닐 수가 없다. 이미 어떤 것은 진실이고 어떤 것은 허위이며 이것은 올바른 일이고 저것은 그릇된 일이라는 구별이나 판단 자체가 그의 무위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사람의 지각을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에 합당한 앎”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노자가 말하는 참된 앎이란 도에 대하여 올바로 알고 덕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7. 노자의 도술(道術)
도술이 일종의 술법이며 기교에 속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도를 바탕으로 한 술법이라 하더라도 노자의 무위하고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상의 근본 원리와 모순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먹고 자며,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끼는 동물이기 때문에 완전히 자연의 풀과 나무나 흙과 돌 같은 상태에 놓여 있을 수는 없다. 더구나 사람은 남과 어울려야만 하고 사회를 올바로 다스려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완전한 무위나 무사는 있을 수가 없다. 이에 노자도 도에 합당하게 올바로 움직이고 올바로 생각하며 제대로 느끼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노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처신과 올바로 일에 대처하는 방법과 올바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 올바로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 등을 한데 묶어 ‘도술/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도를 따르는 노자의 방법은 오묘한 술법의 경지처럼 느껴지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아무리 도에 합당한 행위라 하더라도 “행한다.”는 것은 완전한 무위가 아닌 것이다. 노자 스스로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과 무위의 이익은 천하에 이것을 따를 것이 드물다.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고 얘기하고 있듯이 곧 무위고 하는 일이 없는 것이고 간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이라는 전제가 붙는 이상 그것은 술법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 처신(處身)과 처사(處事)
노자는 사람으로서 움직이고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처신이나 행동에 있어 그 흔적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다. 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생성시키고도 차지하지 않으며 행동을 하더라도 의지하는 데가 없고 생장케 하면서도 지배하지 않는다.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생이부유 위이불시 장이불재)“고 했듯이 행위의 뚜렷한 목적이나 자기를 위하려는 노력이 없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잘 세워 놓은 것은 뽑히지 않으며 잘 끌어안고 있으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선건자불발 선포자불탈)“ 라고도 하였다. 문제는 노자가 생각한 ”잘하는 것“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잘 한다.“고 하는 이상 ”잘하는“ 이상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2) 정치론
노자는 무위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의 정치 이상이었다. 세상은 인위적으로 다스리지 않고 아무런 일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명령하는 일 없어도 스스로 다스려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성인은 노자에게 있어 이상적인 인간형인 동시에 이상적인 통치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하는 일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남보다 겸손하게 처신하며 맑고 고요한 태도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성인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게 된다하더라도 무위하여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자 스스로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일과 같다.” (治大國 若烹小鮮 치대국 약팽소선),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묘한 책략으로 용병을 하여야 한다. ” ( 以正治國 以奇用兵 이정치국 이기용병), “나라의 이기는 남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국지이기 불가이시인)라는 등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자 자신도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이미 남과의 접촉이나 혼란의 해결을 뜻하는 것이므로 도에 따른 미묘한 술법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노자 스스로 나라의 이기라는 말을 쓰고 있거니와 그 자신이 다스림을 위한 정치제도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천하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노자의 도술은 어떠한가? “첫째 자애로움, 둘째 검약, 셋째 감히 천하에서 앞서지 않음”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일왈자 이왈검 삼왈불감위천하선)의 세 가지를 ’세 가지 보배‘라 말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 보배가 바로 노자의 정치술을 요약한 것이다.
노자에게 정치는 도의 원리를 따라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는” (無爲而無不爲 무위 이무불위)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정치의 술법을 통하여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만물을 생성시키고도 얘기하지 않고 생겨나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으며 행동을 하더라도 의지한 데가 없고 공로를 이룩하더라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음”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으로써 “공이 이룩되고 일이 잘 이루어져도 백성들은 모두 우리가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功成事逐 百姓皆謂我自然 공성사축 백성개위아자연) 경지에 도달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는 “성인은 제물을 축적하지 않는다. 모두 그것을 남을 위하여 쓰지만 자기는 더욱 많이 갖게 되고,, 모두 그것을 남에게 주지만 자기는 더욱 많아진다.”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성인불적 기이위인 기유유 기이여인 기유다)고 하는 경지를 이룩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3) 후왕론(侯王論)
노자의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나 나라를 다스리는 후왕에 대한 개념은 독특하다. 『노자』만 보더라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왕이란 유가에서의 왕자(王者)의 개념과 흡사하다. 그는 영원불변하는 법칙을 알고 모든 것을 용납하며 극히 공정하게 처신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천연스러울 수도 있고 도에 합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인 왕을 하늘, 땅, 도와 함게 이 세상의 “네 가지 위대한 것(四大)중의 하나”라고 한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진실로 무위의 다스림을 이룩하여 임금이나 백성이 모두 무위하고 아무런 욕심도 없고 하는 일도 없게 되면 임금이란 지위는 실제로 별 뜻 없는 지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이처럼 극히 위대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왕이 도술에 의한 인간을 다스리는 자이며 세상을 조화시키는 자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떻든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은 도를 따르며 도에 합당한 행동을 하여야만 한다. 곧 임금이란 도의 이름도 없고 무위한 경지를 터득하여야만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의 천자나 나라의 임금에 대한 견해는 긍정적인 일면과 부정적인 일면을 함께 갖고 있었다. 임금의 자리가 이처럼 두 면으로 갈라지는 근거는 도술의 응용 여하에 달려 있다. 도술을 제대로 응용하지 못하여 인위적인 정치를 하는 임금은 나라의 모든 추악한 현상을 책임지고 나라의 불행을 떠맡는 좋지 않은 임금이 되고, 도술을 제대로 응용하여 무위의 다스림을 이룩하는 임금은 하늘과 땅과 도와 함께 이 세상의 “네 가지 위대한 것”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노자가 현(玄), 묘(妙)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는 것은 이러한 도술의 오묘한 효용 때문이기도 하다.
4) 병술(兵術)
병가에서는 노자의 도술을 바탕으로 하여 병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노자』 중에는 직접 병법 또는 병술을 논한 대목이 적지 않게 들어있어 일부 학자들 중에는 노자를 실제로는 병가라고 보려는 이들도 있다.
춘추시대에 노자의 초나라는 남만(南蠻)의 오랑캐 나라로 이제 겨우 나라를 세우고 싸움을 통하여 나라 땅을 넓혀가기 시작하면서 중원의 문화를 받아들이어 나라를 발전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나날이 국세를 확장시키고 있는 초나라를 진(晋)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힘을 합쳐 견제하였다. 『노자』는 중국 남방의 따스한 날씨와 풍부한 자원으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낭만적인 사상도 지니고 있지만 전쟁의 실제 체험을 통하여 우러나온 정치철학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살았던 나라는 전쟁을 도외시하고는 살아 남을 수 조차도 없는 조건이었다. 그 때문에 『노자』 속에는 ’무위자연‘의 사상과 함께 모순이 되는 ’도술‘을 바탕으로 한 병가의 철학도 함께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여 초연한 듯이 보이는 면보다도 『노자』의 병가적인 성격, 곧 병술이 보다 원초적인 것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8. 노자의 이상사회(理想社會)
노자가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무위하고 무위의 다스림이 이루어져 모두가 소박하고 맑고 고요한 자연의 상태를 이룩한 사회란 어떤 모습일까?
첫째, “나라는 작고 백성들은 적어야 한다.”
둘째, “비록 갖가지 연모가 있다 하더라도 쓰지 않는다.” 이러한 반문명의 태도는 기교를 반대하는 그의 입장과 합치되는 것이다.
셋째,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기고 멀리 이사 다니지 않도록 한다.” 이때의 죽음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본능적인 욕구의 충족만을 위한다는 뜻이고 멀리 이사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명예와 이익을 뒤쫓지 않음을 뜻한다.
넷째, “비록 배와 수레가 있다 하더라도 탈 일이 없어야 한다.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벌여 놓고 쓸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완전한 무위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산태에서는 배나 수레를 타고 먼 곳을 쫓아다닐 일도 없을 것이며 전쟁할 필요는 더욱이 없게 될 것이다.
다섯째,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새끼줄에 매듭을 지어 기호로 사용하던 옛 상태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말은 유가에서는 하, 은, 주의 삼대, 빨라야 요, 순, 시대를 그들의 이상 정치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받드는 데 비하여 노자는 철저히 옛날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여 중국 최초의 제왕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황제(皇帝)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원시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것을 근거로 하여 후세에 황로지학(黃老之學)으로 도가 사상이 발전하게 된다.
여섯째, ”그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 그들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들의 사는 집에 편안히 살며, 그들의 풍속을 즐긴다.“ ’만족할 줄 안다.” (知足)는 것은 노자의 행복의 요체(要締)이기도 한 것이다.
일곱째,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내왕하는 일이 없다. “노자의 이상향은 부락국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원시적인 것이기에 이웃 나라의 닭과 개가 우는 소리까지 도 잘 들리는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다른 나라와 내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이상향은 『장자』에 이르러 더욱더 구체화 된다.
9. 도교의 성립과 노자
전국 말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신선 사상은 한 대로 들어오면서 도가 사상과 결합되어 노자의 사상은 장생불사의 신선가(神仙家)와 혼동하게 되었다. 『사기』의 노자의 전기에는 노자가 200년도 넘게 살았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었거니와 유향(劉向 BC.77~BC.6)의 『열선전(列仙傳)』에서도 노자가 신선의 도를 닦았던 진인(眞人)인 듯이 쓰고 있다.
후한으로 들어와서는 노자는 완전한 신선가로 변한다. 왕충(王充 BC.211~BC.97?)의 『논형(論衡)』 도허(道虛)편에서는 황제(黃帝)와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은 ”수도학선(修道學仙)“하여 상천(上天)하였다. 또 도를 공부한 사람은 ”금옥(金玉)의 정기를 복용하고 자지(紫芝)의 꽃을 먹는다.“ 또는 무제(武帝) 때의 방사 이소군(李小君)은 ”시해(尸解) 되었다.“ 그리고 동방삭(東方朔)도 도인이었다.”는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노자에 대하여는 본격적으로 도기양성(導氣養性)하여 장수를 누렸던 진인이라고 쓰고 있다. 어떻든 노자는 갈수록 신비스런 구름에 싸여 갔다. 그런 추세 끝에 순제(順帝 후한의 8대 황제) 때에 장릉(張陵 후한 ? ~ 216년)이 나와 천사도(天師道) 또는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새로운 교단을 시작함으로써 『노자』를 그들의 기본 경전으로 받드는 새로운 도교가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장릉은 본시 후한 말엽에 각지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도적 무리 중의 하나였는데 다른 자들은 도적 무리로 끝난 데 비하여 장릉 후세 도교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노자』를 기본 경전으로 내세운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노자』에는 “섭생(攝生)”, “죽어도 도를 잃지 앓는 사람은 오래 산다.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장생하며 오래도록 본다. (長生久視장생구시)“는 등 장생술 또는 무병식재(無病息災앓지도 않고 건강함)의 개념과 관련되는 말들이 있다.
둘째, 『노자』에는 ”하늘의 망(網)은 광대하여 성근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 天網恢恢 疏而不失 천강회회 소이불실), “하늘의 도는 친한 사람 없이 언제나 선한 사람 편을 든다. (天道無親 常與善人 천도무친 상여선인)”는 장릉의 인과응보에 따르는 도덕적 요소를 제공해 주는 대목들이 있다.
셋째, 『노자』에는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그들이 다스리는 사람들이 거두는 세금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민지기 이기상식세지다 시이기)”, “하늘의 도는 남음이 있는 것은 덜어 주고 부족한 것은 보충해 준다.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것을 더 덜어냄으로써 남음이 있는 편을 받들어 준다. (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천지도 손유여이보부족 인지도즉부연 손부족이봉유여) 등 장릉의 교단이 행한 사회주의적 행위의 근거가 될 만한 구절들이 있다.
넷째, 장릉은 그의 교도들에게 『노자』를 외우도록 요구했는데 『노자』의 문장은 많은 부분이 압운(押韻)을 한 짧은 구절로 이루어져 있어 외우기에 매우 편리하다. 그리고 그 내용도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고 표현이 함축적이어서 그들 교리의 근거로 둘러대기에 편했다.
그리고 한나라 여향의 『열선전(列仙傳)』에 이미 노자는 신선으로 변해 있거니와 『사기』의 노자의 전기 이래로 노자의 생애는 갈수록 신비의 구름에 싸여 도교에서 그들의 교조로 모시기에 알맞은 인물로 변해 있었다는 데도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실은, 『노자』가 도교의 바탕을 이루었지만 후대에 들어서면서 그 책으로서의 성격은 잡박(雜駁)하게 변했다.
<노자와 장자>
흔히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도가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목(錢穆첸무 1895년 7월 30일~1990년 8월 30일, 20세기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뤼쓰몐, 천인커, 천위안과 함께 "중국 근대 4대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처럼 노자를 제쳐놓고 장자를 도가의 창시자라 보는 이도 있다. 어떻든 도가를 대표하는 이들 두 사상가는 그들의 사상에 있어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는가?
첫째, 장자는 공자의 유가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둘째, 노자는 우주의 본체를 일(一)이라 한 데 비하여 장자는 그것을 태일(太一)이라 하였다. 도란 우리가 아는 현상계의 상대적인 기준을 초월한 절대적인 것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인데 노자도 사람이 인식하거나 형용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진실한 도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장자는 숫자로서의 일의 개념을 초월한 모든 것의 절대적인 근원임을 강조하기 위햐어 태일이라고 한 것이다.
섯째, 노자는 “도라는 물건 됨은 황홀하기만 한 것이다.”라고 표현한데 대하여 장자는 “도란 아무런 조짐(朕)도 없는 것”(齊物論)이라면서 무의 개념을 더욱 강조했다. 장자의 본체론은 노자보다도 더욱 철저한 무의 개념을 근거로 했다.
넷째, 따라서 장자는 노자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무아(無我)의 경지를 추구했다. 장자의 무대(無待)의 경지란 자아 뿐만이 아니라 밖의 사물에 대한 의식조차도 초월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자유의 경지, 곧 인간의 타고난 속성조차도 모두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따라서 노자는 어느 정도 국가나 사회를 의식하며 사회생활을 긍정한 데 비하여 장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려 했다. 노자는 도를 바탕으로 한 도술로써 세상을 오묘하게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 데 비하여 장자는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이다.
어떻든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어서 간단히 말하면 그는 노자의 적극적인 지지자라 할 만한 성격의 인물이다. 도가 사상은 장자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되고 더욱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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