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상>
중국 학술사나 사상사에 있어서
춘추, 전국 시대를 논하지 않고는
중국 사상사의 흐름을
놓치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제자백가들의 활약은
중국 사상계의 꽃을 피웠고
면면한 중국 사상계의
큰 줄기들을 이룬다.
가장 혼란한 시대에
시대를 극복하고자
나름의 사상을 전개해
목숨과 혹은 인생을 바꾼
인물들을 공부하며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과 비교도 안 될
조무래기에 불과한
‘나’ 이지만,
오늘도
공동체를 위한
변들을 세우기 위해
열공 중!
(참고문헌: 『노자와 도가 사상』, 김학주, 明文堂)
* 춘추 시대(BC. 770~BC. 403)
왕, 또는 천자(왕기王畿를 다스림) – 제후(國을 다스림) 경(卿), 대부(大夫)(경, 대부들도 采邑채읍을 다스림), 사(士) - 농민(같은 성을 지닌 농민) . 농노(農奴성이 다른 농민), 예농(隸農농사일을 하는 노예). 노예(奴隸, 농업 이외의 생산업 또는 잡일을 하는 자들)이 있어 생산업에 종사했다.
따라서 나라의 땅은 왕 이하 대부들에 이르는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가 있었고 또 그것은 그 집안의 맏아들인 종자(宗子)에 의하여 소유가 계승(종법제도)되었기 때문에 그 종자 밑에 온 친족의 무리들이 모여 살았다. 한 나라나 채읍(采邑)은 종족을 중심으로 한 지배질서에 의하여 제각기 다스려지는 공동체여서 한 종족은 독립된 토지와 군대와 경제력 및 법(살인권 포함)을 갖고 있으며 거기의 종자는 그 종족의 모든 남자들을 거느리고 종부(宗婦)는 모든 집안의 여자들을 거느리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거와 행동의 구속을 받는 반면 또 종족의 비호 없이는 생존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물론 이 종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의 넓이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나라 초기의 오랜 동안의 안정은 제후들의 세력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농기구 사용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 급증, 인구 급증. 기후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한 생산력과 사회 규모가 커졌고 그 격차가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후들간에 차이로 인한 갈등이 혼란으로 이어지고 특히 서주 말엽에는 주나라 왕실이 크게 악화되어 왕실이 제후들을 통제할 능력을 거의 잃게 되었다. 그러자 제후들은 강한 나라가 멋대로 약한 나라를 쳐서 병합시키며 앞을 다투어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쓴 결과 주나라 왕실의 세력을 능가하는 큰 나라들이 생겨나 왕실을 정점으로 하고 그 밑에 제후들이 놓여 있던 봉건 질서가 파괴되기 시작하여 춘추시대의 약육강식의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때 노나라에서는 인의를 설교하여 봉건체제를 부흥시키려 애쓴 공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오고 송나라에서는 겸애와 근검을 역설하며 이전의 봉건 질서를 반대하고 서민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상가인 묵자가 나왔고 다시 초나라에서는 노자를 비롯한 도가 사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의 사상이나 부드럽고 약한 것을 주장하는 태도 등은 그대로 중국 남방의 낭만적인 기질의 소산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묵자가 주나라의 봉건 질서를 부정하던 입장의 밑바닥에는 주나라에게 멸망당했던 은나라 후손들의 감정이 서려 있듯이 노자가 일체의 봉건 체제와 가치를 부정하는 태도속에는 오랑캐 나라 사람으로서의 중원에 대한 반감도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자가 이성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술(道術)을 논하고 병법까지고 중시한 것은 오랑캐인 초나라가 나라 땅을 넓히고 국력을 키우려고 애쓰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국시대의 도래(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는 기원전 476년(기원전 403년)부터 진(秦)나라가 중국 통일을 달성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
BC. 403년 진(晉)나라가 한(韓), 조(趙), 위(衛)의 세 나라로 쪼개지면서 제후들 사이의 겸병전쟁은 더욱 극렬화하여 이른바 전국시대가 전개된다. 이때부터 주 왕조는 천하의 대종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주나라가 망하기까지(BC. 256) 오직 나라로서의 명맥만을 겨우 유지할 뿐이다.
그리고 이 시기로 들어오면서 작은 나라들은 거의 모두 합병당하고 서쪽의 진(秦)나라를 비롯하여 동쪽의 제(齊), 남쪽의 초(楚), 북쪽의 연(燕), 중부의 한(韓), 위(魏), 조(趙)의 일곱 나라가 서로 치열한 침략 전쟁을 일삼게 된다. 이 때문에 일곱 나라의 영토는 늘 빼앗고 빼앗기고 하여 언제나 변동하고 있는 양상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들의 생활에 큰 변동이 일어난다. 특히 춘추 시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토지의 종족 소유제도는 더욱 심하여져 각 지방마다 새로운 지주계급이 셩겨난다. 이들은 완전히 영주(領主)들의 세력을 압도하지는 못하였지만 일단 영토 내에서의 영주의 권세는 약화되고 이들의 경제 정책에는 많은 견화가 일어나게 된다. 특히 종족들의 속박아래 묶여 있던 수많은 농노(農奴)들이 이 시기에 와서는 대량 자유로운 농민으로 탈바꿈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다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중국은 완전히 철기시대로 바뀌어 갔으므로 여러 가지 농구와 공구들이 크게 개량되어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능력이 크게 증진되었고 상업도 눈에 띄게 발달하여 여러 도시들이 크게 발전하고 새로은 거상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호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들의 침략전쟁은 제각기 많은 병력과 경제력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농민을 중심으로 한 서민들의 수가 크게 불어났다.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을 극하였지만 서민사회는 뚜렷한 발전상을 보여준 시대였다.
전국시대에는 또한 나라나 귀족마다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남보다 뛰어나 학문이나 지혜, 기술 등을 지닌 사람을 다투어 보호하는 기풍이 성행하였다.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 위(魏) 나라 신릉군(信陵君) 등이 모두 수천 명의 식객들을 늘 집안에서 먹여 길렀고 또 이들의 힘을 빌려 많은 공을 세워 유명하다 이것은 서민사회의 발전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다.
특히 서민 출신의 낙양 사람 소진(蘇秦)이 합종설(合從說)로 진(秦)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임금들을 설복시켜, 여섯 나라로 하여금 힘을 합쳐 강한 진나라에 대항케 함으로써 구변 하나로 일시에 여섯 나라 재상이 되었고 뒤의 장의(張儀)는 반대로 연횡책(連橫策)을 내세워 진나를 위해 공헌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본위의 사회 풍조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런 중에도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은 제자백가라 불리는 학자들이다. 이미 춘추시대에 공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와 인의와 예악을 바탕으로 하여 주 초의 봉건제도를 부흥시킴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 보려고 하였고 다시 노자는 사회의 혼란과 인간의 불행은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의 추구와 인위적인 행동 때문이라 생각하고 사회의 모든 예의제도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원초적인 자유와 평화를 달성하려 하였다.
이런한 공자의 유가 사상과 노자의 도가 사상은 전국시대로 들어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크게 발전한다. 유가에도 맹자, 순자가 나와 활약하였고 도가에도 장자, 열자(列子)가 나와 노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상가들이 다른 천하를 올바로 이끌 사상의 체계를 이룩하여 자기의 이상을 정치적으로 살려 보려고 활약하였다. 묵자의 묵가, 관중(管仲),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 그밖에도 명가, 농가, 음양가, 잡가, 종횡가 들이 나와 유가, 도가와 함께 중국 사상계의 꽃을 피웠다.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2천수백 년을 두고 발전한 중국의 학술과 중국 사상은 중간에 불교 사상의 유입과 변용이 있기는 했지만 그 뿌리를 거의 모두 이 시기의 학술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 학술사나 사상사에 있어서 춘추, 전국 시대에는 이보다 중요한 시대는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은 후세에 전개된 중국 사상사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줄기의 하나로서 중국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 전국시대의 도래(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는 기원전 476년(기원전 403년)부터 진(秦)나라가 중국 통일을 달성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
BC. 403년 진(晉)나라가 한(韓), 조(趙), 위(衛)의 세 나라로 쪼개지면서 제후들 사이의 겸병전쟁은 더욱 극렬화하여 이른바 전국시대가 전개된다. 이때부터 주 왕조는 천하의 대종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주나라가 망하기까지(BC. 256) 오직 나라로서의 명맥만을 겨우 유지할 뿐이다.
그리고 이 시기로 들어오면서 작은 나라들은 거의 모두 합병당하고 서쪽의 진(秦)나라를 비롯하여 동쪽의 제(齊), 남쪽의 초(楚), 북쪽의 연(燕), 중부의 한(韓), 위(魏), 조(趙)의 일곱 나라가 서로 치열한 침략 전쟁을 일삼게 된다. 이 때문에 일곱 나라의 영토는 늘 빼앗고 빼앗기고 하여 언제나 변동하고 있는 양상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들의 생활에 큰 변동이 일어난다. 특히 춘추 시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토지의 종족 소유제도는 더욱 심하여져 각 지방마다 새로운 지주계급이 셩겨난다. 이들은 완전히 영주(領主)들의 세력을 압도하지는 못하였지만 일단 영토 내에서의 영주의 권세는 약화되고 이들의 경제 정책에는 많은 견화가 일어나게 된다. 특히 종족들의 속박아래 묶여 있던 수많은 농노(農奴)들이 이 시기에 와서는 대량 자유로운 농민으로 탈바꿈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다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중국은 완전히 철기시대로 바뀌어 갔으므로 여러 가지 농구와 공구들이 크게 개량되어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능력이 크게 증진되었고 상업도 눈에 띄게 발달하여 여러 도시들이 크게 발전하고 새로은 거상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호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들의 침략전쟁은 제각기 많은 병력과 경제력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농민을 중심으로 한 서민들의 수가 크게 불어났다.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을 극하였지만 서민사회는 뚜렷한 발전상을 보여준 시대였다.
전국시대에는 또한 나라나 귀족마다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남보다 뛰어나 학문이나 지혜, 기술 등을 지닌 사람을 다투어 보호하는 기풍이 성행하였다.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 위(魏) 나라 신릉군(信陵君) 등이 모두 수천 명의 식객들을 늘 집안에서 먹여 길렀고 또 이들의 힘을 빌려 많은 공을 세워 유명하다 이것은 서민사회의 발전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다.
특히 서민 출신의 낙양 사람 소진(蘇秦)이 합종설(合從說)로 진(秦)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임금들을 설복시켜, 여섯 나라로 하여금 힘을 합쳐 강한 진나라에 대항케 함으로써 구변 하나로 일시에 여섯 나라 재상이 되었고 뒤의 장의(張儀)는 반대로 연횡책(連橫策)을 내세워 진나를 위해 공헌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본위의 사회 풍조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런 중에도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은 제자백가라 불리는 학자들이다. 이미 춘추시대에 공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와 인의와 예악을 바탕으로 하여 주 초의 봉건제도를 부흥시킴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 보려고 하였고 다시 노자는 사회의 혼란과 인간의 불행은 사람들의 그릇된 가치의 추구와 인위적인 행동 때문이라 생각하고 사회의 모든 예의제도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원초적인 자유와 평화를 달성하려 하였다.
이런한 공자의 유가 사상과 노자의 도가 사상은 전국시대로 들어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크게 발전한다. 유가에도 맹자, 순자가 나와 활약하였고 도가에도 장자, 열자(列子)가 나와 노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상가들이 다른 천하를 올바로 이끌 사상의 체계를 이룩하여 자기의 이상을 정치적으로 살려 보려고 활약하였다. 묵자의 묵가, 관중(管仲),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 그밖에도 명가, 농가, 음양가, 잡가, 종횡가 들이 나와 유가, 도가와 함께 중국 사상계의 꽃을 피웠다.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2천수백 년을 두고 발전한 중국의 학술과 중국 사상은 중간에 불교 사상의 유입과 변용이 있기는 했지만 그 뿌리를 거의 모두 이 시기의 학술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 학술사나 사상사에 있어서 춘추, 전국 시대에는 이보다 중요한 시대는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은 후세에 전개된 중국 사상사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줄기의 하나로서 중국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춘추시대
#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
#중국사상사
#혼란의시대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자의 이상사회: 도원명의 무릉도원 (0) | 2024.05.24 |
---|---|
노자의 도론(道論) (0) | 2024.05.22 |
김제 금산사 1박 2일 템플스테이 (0) | 2024.05.19 |
자기 방어 기제란? (0) | 2024.05.18 |
아론 벡의 인간의 인지 오류 (0) | 2024.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