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중국의 전국 말기 혼란의 시대에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하고자 노력한
현실주의자 한비자,
도덕보다 법을 우위에 두며
공자의 仁이든
묵자의 兼愛든
사랑의 원리는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한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정치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믿어
상벌의 체계를 가진
법치주의 국가를 꿈꾸던,
전국 시대의 핏빛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절대 군주론을 주장하지만
그의 본심은 민중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시대의 고민을
자신의 목숨과 바꿨던
철학자의 아우라 속에 깃든
그 간절함이
오늘은
짙어가는 초록과 함께
아른거린다.
한비자의 생애와 사상
1. 한비자韓非子의 전기
2. 법가 사상이 발생한 이유 – 봉건국가의 합리화
3. 한비자의 사상
4. 한비자의 저서의 내용
5. 도덕에 대한 법의 우위
6. 법 운용의 기술 – 형명참동(刑名參同)
7. 노장사상의 흡수 –허정무위(虛靜無爲)
8. 진시황제가 채용한 법가 사상
9. 법가, 한비자의 47가지 망징론
10. 한비자, 법가사상의 현대적 의의
11. 한비자, 법가사상의 비판
법가(法家)는 중국의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770~221 BC)의 제자백가 가운데에서도 주요 유파 넷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셋은 공자의 유가, 노자의 도가 그리고 묵자의 묵가이다. 법가측은 자신들은 유가의 분파라고 자인(自認)하였다. 그러니까 공자→순자→법가 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법가 사상가는 상앙(商鞅), 신도(愼到), 신불해(申不害), 이회(李悝), 한비자(韓非子)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로는 진 효공(嬴渠梁), 진 소양왕(嬴稷), 진 시황제(嬴政), 조조(曹操)등이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과거 경험을 중시하는데, 이것은 농본 중심 사회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공자(孔子)는 주(周) 문왕과 주공에, 묵자(墨子)는 우임금, 맹자(孟子)는 요·순 임금, 도가(道家)들은 복희씨(伏羲氏)와 신농씨(神農氏)를 논거로 제시해 각자의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들 대부분은 모두 복고적(復古的)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상평(常平)을 기초로 한 중농주의 경제관, 모든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토지국유제의 원칙, 부자에게 과세를 물어 빈자에게 분배하여 경제적 평등을 달성한다는 빈치균민(貧治均民), 그리고 국가 주도의 공업화를 기반으로 한 통제 경제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부분은 상업에 기초한 경제관을 주창했던 상가(商家)의 이론과는 상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법가(法家)는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유가가 인 · 의 · 예와 같은 덕치(德治)가 근본이라고 주장했던 유가(儒家)를 비롯한 기존의 여러 학파들과 달리는 모든 구성원이 믿고 따를 법(法)으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가 사상은 춘추시대의 패도(覇道)에 부응해서 일어났는데, 전제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나라 · 한나라의 중앙집권적 고대 제국의 형성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줌으로써 봉건적 지배를 약화시키고 관료제적 성격을 강화하여 이들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앞당겼다. 그러나 전한 무제 이후에는 유가(儒家)가 국가의 관학으로 정통시되면서부터는 유가가 중국 사상계의 주류가 되고 법가 사상은 독자적인 발전에 있어 방해를 받았다.
이들은 백성이 피폐해지고 예와 덕이 땅에 떨어진 이 시기에 백성을 먹이고 살리는 일을 우선시했다. 법가의 관점은 그들의 독특한 역사관에 기인한다. 즉 그들은 법(法)은 군주가 정하는 규범을 뜻하며 술(術)은 법을 행하는 수단을 뜻한다. 또한, 세(勢)는 군주가 신하를 관리하고 주도권을 잡는 방법론을 말한다. 또한 법가는 술(術)의 핵심은 명(名: 군주의 명령)과 형(形: 신하가 이루어낸 실적)의 일치 · 불일치에 따른 시비의 판단이라고 보았다. 법가는 법(法:군주가 정하는 규범)의 엄중한 이행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입헌적 전제군주 권력의 확립을 꾀하였다.
법가는 시대 변천에 따른 사회적 요구를 파악하고, 그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하고자 노력한 학파에 해당한다.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법가사상은 변화를 인정하고 그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상앙(商鞅)의 법치(法治), 신불해(申不害)의 술치(術治), 신도(愼到)의 세치(勢治)를 통합한 한비자는 발전적 변화사관을 근거로 그의 법사상을 전개한다.
<한비자韓非子의 전기>
법가의 한비자는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제의 밑에서 재상이 된 이사(李斯)와 함께 일찍이 순자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법가의 책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진 것으로는 『한비자』 외에 『管子』,
『商子』, 『申者』. 등이 있는데 모두 한비자와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말기에 쓰여진 것이다.
한비자(?~B.C.234년)는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공자, 즉 공실의 일족으로 이름을 비(非)라 했다. 후에 시황제의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유가의 순자에게 배웠는데 그의 말은 어눌하였지만 글은 매우 훌륭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시 그의 조국인 한은 주위 강대국의 위협을 받아 국토을 일방적으로 빼앗겼기 때문에 여러 번 부국강병을 한의 군주에게 역설했지만 한 번도 채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그가 쓴 글이 이웃나라 진의 국왕, 후의 진시황제의 눈에 띄여 시황제는 그것을 보고 감동하여 즉시 한비자를 만나보고자 했다. 그 때 한비자와 함께 순자에게서 배웠던 이사가 시황제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그 글은 한비자가 쓴 것입니다.”라고 고하자 시황제는 곧 사자를 보내어 한비자를 초대하고자 하였지만 한의 군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시황제가 한을 공격하여 강제로 한비자를 빼앗으려 한을 공격했다. 이에 한나라는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어 침공을 막으려고 하였고, 한비자는 진시황에게 가서 한나라를 공격하지 말고 조나라를 공격해야 하는 이유를 진시황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한나라는 이미 진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어 한나라를 공격하면 아무도 진나라를 믿지 않게 될 거다.
둘째. 한나라가 멸망하면 조나라가 즉각적으로 위나라와 동맹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기 힘들어진다.
마지막 이유. 조나라를 먼저 공격해 위나라와 제나라를 정벌하면 한나라는 편지 한 통으로 항복하게 되니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다.
이상 3가지 이유를 들었다. 한비자는 원래 말더듬이라 달변가는 아니였지만 논리정연한 글솜씨에 진시황은 넘어가 버리고 게다가 한비자는 진나라 같은 대국이 요가를 이용하여 뇌물로 타국의 관리를 매수하는 건 법가 사상을 기초로 하는 진나라에겐 맞지 않다고 요가를 욕하였다.( 요가는 중국 전국시대의 조나라, 진나라의 인물로 위나라에서 문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위나라에서 도둑질을 하고 조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쫓겨났다고 하며, 이후 진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기원전 233년에 연, 조, 위, 초 등이 연합해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때 요가가 4개의 나라를 찾아가 유세해 이들의 계획을 철회시켜 출병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들과의 교류 관계까지 맺고 돌아와 1천 호에 식읍을 받고 상경에 임명되었다. 한비자가 진시황에게 요가가 사자로 돌아다니면서 국교를 맺은 것도 아니면서 재물만 소모한데다가 요가가 제후들과 사사로이 교분을 맺은 것이라 하면서 요가의 과거 이력을 설명했는데, 요가가 진시황의 부름을 받자 자신을 변호해 참언을 들으면 충신은 사라질 것이라 하면서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는 태공망, 관중, 백리해 등이 등용되기 이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등용된 것을 이야기해 진시황을 납득하게 해서 본래의 지위를 회복하고 한비자가 참살되었다.)
이에 시황제가 한을 공격하여 강제로 한비자를 빼앗았다. 시황제는 크게 기뻐하지만 이를 알게 된 이사와 요가는 진시황에게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 출신이라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도 없고 한비자가 이야기한 계책은 전부 한나라를 위한 계책이라고 설득하여 한비자를 감옥에 가두고 독살시켜 버렸다. 후에 시황제는 생각을 고쳐 사면하고자 했지만 그 때는 이미 이사가 한비자에게 독약을 주어서 죽여버린 후였다.
<법가 사상이 발생한 이유 – 봉건국가의 합리화>
왜 전국 말기에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가 출현했던 것일까?
전국 말기의 열국이 종래 봉건국가의 조직으로는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가 나타난 것도 새로운 사상의 도입이 요구되었기 때문인데 전국시대의 말기가 되자 그것만으로는 틈을 메울 수 없게 되었고 봉건국가의 기구를 합리화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 봉건국가를 합리화하기 위한 새로운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법이었다. 종래의 봉건국가를 지탱해준 것은 충효의 도덕이나 의리, 인정이라 하는 인간적인 것이었다. 인간적인 것은 이치로는 캘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법은 비정한 것이고 기능적,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한비자를 위시한 법가가 출현한 것도 이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한비자의 사상>
옛날과 지금은 관습이 다르며, 시대에 따라서 방책도 달라야 되는 것이다. 만일 관대하고 여유 있는 정치로 절박한 시대의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면, 그것은 채찍을 쓰지 않고 억센 말을 다루려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유가나 묵가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선왕(先王)들은 천하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백성 대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느냐고 반문하면 그들은 말한다.
「사법관이 형을 집행하면 그로 인해 군주는 즐기던 음악을 멈추고, 사형의 통지를 받게 되면 그 때문에 군주는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그들이 극찬하는 현명한 왕인 것이다. 군신 관계를 부자 관계처럼 하면, 세상은 반드시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대로라면 화목하지 않은 부자는 전혀 없어야 한다. 사람에게 부모의 애정보다 더한 것은 없고, 부모면 누구나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식을 반드시 잘 다스리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군주가 아무리 신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어찌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선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비길 수 없으며, 더욱이 자식이 반드시 반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하물며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다시 또 법률에 의해서 법을 집행하고, 군주가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는 인의를 나타내고 있지만 정치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형을 집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형을 중지시킬 수 없는 것은 법 때문인 것이며, 선왕이 그 법을 없애지 않고 눈물을 별로 문제시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더라도 인(仁)만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비자』 <오두편>
지금 정치를 모르는 자는 반드시 ‘민심을 얻으라’라고 말한다. 민심을 얻는 것으로 치세가 될 수 있다면, 이윤이나 관중은 쓸모가 없는 것이며, 다만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백성의 지혜는 쓸 수 없으니, 마치 갓난애기와 같다. 대저 어린애는 뼈를 발라주지 않으면 복통을 일으키며, 고름을 짜 주지 않으면 점점 (병세가) 더해진다. (생선의) 머리를 발라주고 고름을 짜는 일은, 반드시 한 사람의 품에서 자애로운 어머니가 할 일이나, 오히려 아기가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것은, 갓난애기가 그 작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중에)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윗사람이 밭을 갈고 풀을 뽑으라고 재촉하는 것은 백성들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을 가혹하다고 여기고, 윗사람이 형벌을 엄중하게 고치는 것은 사악을 금지시키기 위해서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을 지독하다고 여기며, 세금과 곡식을 거두어서 창고를 채우는 것은 또한 기근을 구하고 군대를 준비하려는 것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이 탐욕스럽다고 여기고, 경내에는 반드시 본분을 알아 사사로움이 없음을 설명하고 아울러 신속한 싸움에 힘쓰는 것은 종들을 관리하기 위해서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이 포악하다고 여긴다. 이 네 가지는, 나라를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인데도, 백성들은 기뻐할 줄 모른다.
대저 성인(聖人)에 통하는 선비를 구하더라도, 백성들의 지혜를 참고하는 것은 기준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옛날에 우(禹)임금은 양자강의 물을 틔어서 황하로 통하게 하였으나 백성의 무리들은 기와나 돌을 던졌으며, 자산(子産)은 밭을 개간하여 뽕나무를 심었는데도 정나라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우는 천하를 이롭게 했으며, 자산은 정나라 사람을 보살폈는데도, 모두 백성들에게 비방을 받은 것이다. 대저 백성의 지혜는 쓰기에 부족하다는 것이 또한 명백하다. 그러므로 선비를 천거하여 어질고 지혜로운 자를 구해놓고선, 정치를 할 때 백성들에게 맞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두 난리의 실마리가 되니, 그와는 함께 정치할 수 없다.
『한비자』 <현학편>
술수를 아는 선비(智術之士)는 반드시 멀리 보고 밝게 살피니, 밝게 살피지 않으면 사사로운 것을 간파할 수 없다. 법에 능한 선비(能法之士)는 반드시 강인함을 꾀하며 굳세고 곧으니, 굳세고 곧지 않으면 간사함을 바로잡을 수 없다.
그 신하가 명령에 미적거리면서 일을 좇으며 법을 어루만져서 관리를 다스린다고 하여 중인(重人:권세가)이라 말하지 않는다. 중인이라는 자는 명령 없이 멋대로 하고, 법을 이지러지게 하여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축내어 내 집을 편하게 하는데, 그 힘이 그의 군주에게 까지 이를 수 있으면, 이를 중인(重人)이라 말하는 것이다.
술수를 아는 선비는 밝게 살피니 받아들여서 쓰게 된다면, 또한 중인들의 숨은 뜻(情)을 간파할 것이다. 법에 능숙한 선비는 굳세고 곧으니 받아들여서 쓰게 된다면, 중인들의 간사한 행실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므로 술수를 아는 선비와 법에 능한 선비를 쓰게 된다면, 귀하고 중한 신하들은 반드시 줄 밖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술수를 알며 법에 능숙한 선비는, 더럽히는 것이 마땅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있을 수 없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더럽히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 중요한 일을 멋대로 하면, 나라 안팎이 그를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이로써 제후가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일에 반응하지 않으므로, 적국까지도 그를 위해서 칭찬하게 된다.
모든 관료가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업무가 진행되지 않으므로 군신이 그를 위하여 사용된다.
낭중(郎中:벼슬 이름)이 그를 의지하지 않으면, 군주를 가까이 할 수가 없으므로 좌우가 그를 위해 숨겨준다.
학자가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녹봉이 박해지고 대우가 낮아지므로 학자는 그를 위한 말을 하게 된다.
이 네 가지 도움은 사악한 신하들의 스스로를 꾸미는 수단이 된다. 중인은 '군주에게 충실하여 그 원수(술수는 아는 선비와 법에 능한 선비)가 다가오게 하는 것'을 할 수 없으며, 그 군주는 '(간신들의) 네가지 도움을 뛰어 넘어 그 신하를 살피고 간파하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군주가 더욱더 가려질수록, 대신은 더욱더 (권력이) 무거워진다.
『한비자』 <고분편>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비자의 법치 국가 철학은
"1.'인의'가 아니라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함.
2.백성의 생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함.
3. 지혜롭고 강직한 사람을 등용해서, 능력 없는 권세가를 쫓아내야 함"으로 정리된다.
<한비자의 저서의 내용>
전한 시대에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비자와 그 후학들이 쓴 논저이다. 55편 2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한비자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저서는 오두(五蠹), 현학(顯學), 고분(孤憤)이다.
성인은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니 평범한 사람들로도 굴러가는 제도 구축에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 역설하였다. 성인의 현능함을 이용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역설한 것은 법가의 공통된 견해이다. 또한 한비자는 다른 학자들이 옛 성인들을 언급하는 것을 비판했다. 한비자 본인도 옛사람들이나 그들의 시대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허나 시대가 바뀐 까닭에 옛날과 같이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옛날에는 사람의 숫자가 적었으므로 재화가 넉넉하였다는 것이다. 허나 오늘날을 돌이켜 보면 백성들은 아들 다섯을 부양하기에 많다고 여기지 않으나, 이 다섯 아들이 제각기 다섯 아들을 낳으면 할아버지는 스물다섯의 손자가 생기니 자연히 차지할 수 있고, 재화가 줄어들어 다툼이 생긴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맞는 새 정책이 필요하며, 한비자는 이를 옛 성인의 시대라 할지라도 제각기 다른 시대의 성인의 계책을 실행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금 수주대토에도 빗대어 설명하였다.
법(法)과 술(術)과 세(勢)를 중시했다. 이는 한비자가 최후의 법가이자 동시에 법가를 집대성한 법가의 거두로 불리는 이유이다. 한비자 이전의 법가에는 크게 3가지의 계통이 있었다. 첫째로 신도의 계통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세를 중시했다. 둘째로 신불해의 계통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술을 중시했다. 셋째는 상앙의 계통인데 이들은 법을 중시했다. 한비자는 어느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다고 여겼다.
한비자에 따르면 세는 군주에게 있어서 밑천이다. 일찍이 신도가 두 신하와 한 군주가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를 언급했다. 임금은 두 신하 중 하나를 쳐서 세력의 절대 우위를 점하라는 충신의 간언을 무시하였다가 한 명의 신하가 다른 신하를 쳐서 세력을 흡수하자 열세에 놓여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세는 군주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밑천이다. 술은 군주가 신하를 부리는 술수이다. 군주는 적절한 신하를 뽑아 임용해야 하며 신하의 실적에 따라 상벌을 명확히 해야 한다. 군주가 신하를 제대로 부리지 못하면 국정은 온전히 운영될 수 없다. 법은 신하가 백성을 다스리는 규칙이다. 법이 엄정하지 못하면 나라가 어지럽다. 세, 술, 법을 적절히 병용하는 것이 치국의 요체이다. 법과 술은 군주의 수단이며 세가 없으면 수단을 부릴 힘이 없다. 한비자의 많은 부분은 술에 할애되어 있다.
고분편에서 한비자는 술과 법을 다루는 선비에 대해 논한다. 지술지사, 술을 아는 선비는 식견과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신하들이 꾸미는 음모를 밝힐 수 있다. 능법지사는 법을 아는 선비인데 굳세고 곧아야 한다. 굳세고 곧지 못하면 간교함을 바로잡을 수 없기에, 이를 등용해 사리사욕을 꾸미는 간신과 귀족을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세를 따르지 못할 경우 법술지사는 누명이 씌워져 죽거나,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법술지사는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저러한 운명에 취할 것이다.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므로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 순자는 유가 중에서도 상당히 논리적인 부분을 중시했는데 이는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명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명가의 영향도 받았다. 명가의 주된 노력 중 하나는 이름과 실질을 알맞게 부합시키려는 것이었다. 유가에서는 이것이 부모가 부모답고 자녀가 자녀다운 윤리론으로서 나타난다. 한비자에서는 이름과 실질의 부합이 관직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긴다. 재무부 장관이라는 이름이면 재무부 장관다운 실적이 있어야 하며, 임명한 이후에는 명과 실이 잘 부합되는가 심사하여 상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법가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형명(形名)이다.
다시 말하자면 재무부 장관은 관명이다. 재무부 장관이 해야 할 일은 이름의 내용이자, 직(職)이다. 재무부 장관, 곧 재무부 장관직을 맡은 사람이 바로 실이며, 다른 말로는 형이다. 형명상합, 명실상합등은 명과 실, 직과 형이이 조화로운 상태를 이른다. 순명핵실(循名核實), 종합명실(綜合名實)은 이를 잘 판단해 상과 벌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술에 속하는 것이다. 한비자는 상벌은 군주의 두 가지 권병, 도구라 말한다.
그러기에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기 때문에 더욱 상벌을 중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디 호오의 감정을 지닌 존재이다. 이익을 좇고 해를 꺼린다. 그러므로 이해로써 사람을 부릴 수 있다. 인간이 선하지 않음은 모든 법가가 주장하는 바이지만 한비자는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한비자 육반편에는 부모 자식의 관계에 멋지게 빗대어 설명한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아들은 기뻐하나 딸은 꺼린다. 같은 몸에서 나왔으나 아들과 딸 사이에 구별이 생기는 것은 부모가 훗날의 장기적인 이익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계산하는 마음이 있는데 부모 자식도 아닌 관계는 어떠하겠는가?
외저설좌상편도 비슷하다.
품꾼을 샀을 때 주인이 돈을 주고 밥을 맛있게 해주는 것은 품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품꾼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품꾼이 열심히 일하는 까닭은 주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반찬이 맛있고 품삯도 쉽게 받기 때문이다. 주고 받음이란 이러하다. 마음의 모든 작용은 한결같이 자신을 위하는 마음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익이 걸리면 적이라도 화해하나 손해가 생기면 부모 자식 간에도 원망한다.
앞서 옛날에는 사람이 적었고 재물이 많았으며, 오늘날에는 사람이 많아 재물이 적어졌다고 한비자는 말한다. 봄에는 형제끼리도 양식을 양보하지 않지만 가을에는 나그네에게도 밥을 준다. 사람의 인성이 옛날에는 관대했고 오늘날 야비하지 않다. 다만 환경의 차이이다.[9] 형벌과 정치는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강하고 약하고 차등이 필요하다. 현학편에서 한비자는 공맹의 덕치와 예치는 무시한다. 흉포를 막는 것은 위세일 뿐이지, 덕후(德厚) 따위로는 혼란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남이 내게 선행할 것을 의지치 않고, 남이 내게 감히 나쁜 짓을 못 하도록 하겠다. 남이 내게 선행할 것을 의지하면 한 나라 안에 열댓 명도 의지할 수 없겠지만, 감히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면 한 나라를 숙정할 수 있다. 통치자는 다수에게 통할 방법을 택해야 하므로 덕은 버리고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은 필연이지만, 선행은 우연인 것이다.
한비자의 사상은 도가 사상과도 통한다. 한비자와 명가도 그렇듯 당대의 제자백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법가의 통치술과 도가의 통치술은 본래부터가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개중에서도 대단한 지혜를 가진 성인이 쓸데없다고 주장하는 거나 무위의 통치술 등은 도가와 법가가 특히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 도가의 통치술은 많은 부분이 무위의 통치술로 화를 피해 은거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는 앞서 논한 신도가 세를 중시함과 통한다. 군주는 현명함으로 세에 거스르는 일을 꾸밀 필요가 없이 세에 따라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앞서 두 명의 신하와 한 명의 군주의 이야기를 했는데 군주가 세에 따라 두 명의 신하 중 한 명을 쳐서 세를 흡수했거나, 한 명의 신하가 승리한 후에는 늦더라도 왕위를 내려놓고 은거했다면 화를 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도는 때로는 법가로 분류되고 때로는 도가로 분류된다.
본래 무위의 술은 공자가 먼저 주창한 것이다. 공자의 주장에 따르면 순이 바로 무위의 술을 활용하였다. 순은 그저 조정에 장중하고 단정하게 앉아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유가에서 말하는 덕치라고 할 수 있다. 덕으로 사람을 교화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는 작위가 없어 몸이 안전한 은자의 경우를 이른다. 한비자는 이를 결합시킨 것이다. 무위는 무위이되 그 꾸밈이 없음은 유가도 아니고 도가도 아니다. 세에 있어서 무위는 두 신하와 한 명의 군주의 경우처럼 세를 따라가는 무위를, 술에 있어서 무위는 군주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신하를 세워서 상벌을 다루는 것을, 법에 있어서 무위는 역시 군주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신하가 법을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보면 신도는 법가와 도가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때로 법가로 분류되고 때로 도가로 분류되는 것이 각자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권편은 자못 명가와 도가의 흥취가 섞여 있다. 군주는 중앙에서 세를 쥐고 있으면서 신하들을 열심히 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군주는 신하의 일처리를 관찰하며 형과 명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이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각 사물과 재료는 그에 적합한 일과 용도가 있다. 모든 것이 적합한 곳에 처하면 군신 상하는 무위의 도로 다스릴 수 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 신하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군주는 닭과 고양이를 기르면 그만이지 결코 쥐를 잡을 재능, 새벽을 알릴 재능이나 근면함을 갖출 필요가 없다. 만약 군주가 어떤 능력을 특별히 더 귀중하게 여긴다면 신하는 그 능력을 이용해 군주를 기만할 것이다. 논변과 총명함을 군주가 사랑한다면 신하가 그 능력을 이용할 것이니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명가와 도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군주는 이처럼 신하에게 일을 맡긴 채, 명과 실의 조화를 살펴 상벌이라는 두 권병을 이용해 그들의 공효를 평가한다. 이전 버전의 한비자 문서에서는 한비자가 도가와 통하지만 노자에 국한되지 장자와는 별 관련이 없다고 말했으나, 장자 천도편에도 비슷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도덕경을 인용하는 해노, 유노 편 등은 비록 사마천은 한비자의 저작으로 여겼지만, 사실 후세의 편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이들이 도가와 통하기는 한다. 말하자면 장자는 그냥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 살지 않겠냐고 했다. 노자는 덜 욕심내고 무지한 상태에 머물면 순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도가의 일파는 사물이란 영위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영위하지 않을 수 없고, 일은 은닉되어 있지만 도모하지 않을 수 없고, 법은 조잡하지만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분수, 형명, 인임, 원성, 시비, 상벌 등을 논하긴 하였으나 역시 하늘, 도덕, 인의 등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도가와 통하되, 또 다르다.
현학편에서는 자유주의 경제학 비슷한 이야기도 한다. 곧 유가에 대한 비판인데, 유가는 빈궁한 자에게 토지를 나눠주자고 하지만 똑같은 조건하에서 빈궁한 자와 부유한 자는 그 노력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유가의 주장은 공리공담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냥 내버려 두면 모두 열심히 일할 것이기 때문에 생산이 증가될 것이라는 얘기도 한다.
위 문장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한다.
<도덕에 대한 법의 우위)
한비자가 배움을 받은 순자는 예에 중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유가의 사람이었을 뿐, 한비자에 이르러 여러 가지 각도에서 법의 도덕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이 강조된다.
첫째로 유가의 주장처럼 도덕에 의한 정치라고 하는 것은 인구가 적고 생활이 편안하였던 고대에서만 효과를 거두는 것이고 인구가 증가해서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옛날의 사람들에게 도덕심이 강하였다고 하는 것은 재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이고 현재의 사람들이 재산을 다투는 것은 도덕심이 저하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재산이 결핍된 결과이다. 이처럼 경쟁이 격심한 시대에는 도덕은 쓸모없고 오로지 법에 의해 다스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에 나오는 고대의 요순처럼 성왕의 시대에 유효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지금까지도 도덕정치의 필요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처사이다.
둘째로 도덕은 소수에게만 통용되는 원리여서 다수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본디 도덕을 지키는 사람은 한나라에서 열 사람 있으면 좋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이 같은 소수자의 원리를 한나라라는 다수자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것에 근본적인 무리가 있다.
본디 다수자에게 착한 일을 행하게 하고자 할 경우에는 절망적인 곤란을 수반하지만 악한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쉽다. 예컨대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우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을 만들면 길에 백냥의 금이 떨어져도 이것을 줍는 것은, 붉게 달은 철을 손으로 잡는 것과 똑 같으므로 대도라 할지라도 손을 내밀지는 않을 것이다.
도덕은 인저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정이라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고 더욱이 그것조차 충분하게 행해지지 않는다. 예컨대 가정 내에도 부친은 자식을 사랑하지만 아들은 부친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많다. 유가는 가족 도덕의 정신으로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지만 이것은 한 칸의 집조차 충분히 다스릴 수 없는 원리로 커다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어서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섯째로 도덕은 본질적으로 사적인 것이고 국가의 공공성과는 상반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말이 있다. 옛날 노나라의 병사 중에 전쟁에 나갔다 하고서 도망한 자가 있었다. 공자가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 이유를 묻자 그 병사는 “내 집에는 연로한 아비가 있어서 내가 죽으면 부양할 자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거기에 공자는 “이 사람은 감복할 만한 親孝行者이다.”라고 하며 칭찬해 노나라 군주에게 올려서 상을 주었다. 그 후 노나라의 군대가 전쟁에 출동할 때에 병사들은 한결같이 도망가게 되어 노나라는 패해 버렸다.
넷째로 처음부터 인간에게 도덕을 가르친다고 하는, 소위 도덕 교육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도덕성이 목숨의 장단 등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을 결정된 것이고 인위에 의해서는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인의 전기를 읽고서 자신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원하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다. 그것은 모장(毛嬙)과 서시(西施)같은 미인을 보고서 몇 번이나 아름답다고 감동해보아도 자신의 얼굴은 예뻐질 수 없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보다도 집으로 돌아가서 紅이나 백분(白粉)을 바르면 조금은 불만하게 된다. 그 홍이나 백분에 해당하는 것이 법이다. 법은 인간에게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요컨대 인공적인 선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한비자는 그 특유의 독설과 풍자를 교체해가면서 유가의 덕치주의를 통렬히 비판해 법치주의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법 운용의 기술 – 형명참동(刑名參同상벌과 공죄를 따라 벌을 내린다)의 설
한비자는 법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그 법을 운용하는 기술, 즉 법률이 필요한 것을 설명한다. 그 기술의 제 1은 형(形 또는 刑) 명참동(刑名參同)이라 하는 것이다. 形은 구체적인 실질, 名은 표면의 명의(名義)라는 의미에서 명실(名實)이 일치되고 있는가 어떤가를 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어느 직명을 가진 관리가 그 직명에 다라서 실적을 거두고 있는가 어떤 가를 검토하는 것이 즉 형명참동이다. 그 직명보다도 이하의 실적을 거둔 경우에는 물론 벌하지만 그 직명을 벗어난 실적을 거둔 경우에도 벌한다.
어느 날 韓의 소공(召公)이 요란하게 잠을 자고 있을 때 전관자(典冠者)가 이것을 보고서 옷을 소후(昭侯)에게 입혔다. 소후는 잠을 깬 후, 옷이 걸쳐져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누가 옷을 덮었는가?”라고 묻자 “전관자입니다.”라고 보고가 있었다. 그러자 소후는 전의자(典衣者)를 직무태만으로 벌함과 동시에 전관자에게도 월권이란 면에서 벌하였다고 한다. 이 직명을 넘은 실적이 있는 자를 벌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스운 것 같지만 사실은 법의 일률성, 그 기계적, 형식논리적 적용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근대법의 정신에 합치되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법의 운용은 재판관의 인정에 의한 것이 모범이지만 거기에는 재판관의 개성이라 하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강해지고 법 적용의 공평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손상된다. 근대법은 이같은 결합을 제거하기 위해 인정이라고 하는 비합리적 요소를 배제하여 법문을 기계적, 형식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적용하고자 한다. 한비자의 형명참동의 사상은 근대법의 정신을 앞서 가졌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장사상의 흡수 –허정무위(虛靜無爲텅 비어 고요하고 담박하게 무위하라.)>
(韓非子集解한비자집해
虛靜無爲는 道之情也요 參伍比物은 事之形也니라
마음을 비우고 고요한 상태로 작위를 하지 않는 것이 도의 참모습이고,
여러 가지를 섞어 사물을 비교하는 것은 일의 형상이다.에서 유래)
한비자의 법술, 즉 법 운용의 기술 중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법의 운용자인 군주가 가능한 한 허정무위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하여 도가의 노자 사상을 채용하고 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대단히 기묘한 결합이다. 법가는 극단적인 통제주의의 입장이고 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역설하여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양극단에 있는 사상이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 하는 사실을 살펴보면 한비자는 노자의 말을 자기 입장에 유리하게 해석해서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비자는 군주는 허정(虛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정하면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물을 냉정히 판단할 수 있다. 또 군주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군주가 스스로를 욕망의 밖에 두어버리면 신하가 이로 인하여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또 군주는 무위이어야 한다. 군주는 형명참동이라는 무기가 있으므로 정치의 실무는 모두 신하에게 맡기어 조용히 이것을 관찰하면 된다. “명군이 위에서 무위하면 군신은 아래에서 두려워 긴장한다.”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生道篇)
이와 같이 허정무위라 하는 말, 그것은 노자와 똑같지만 그 내용은 훨씬 법가적이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 법가 특유의 음험함이 살펴진다. 따라서 한비자가 이용한 노자의 사상은 노자 본래의 성격과 다르다.
(중국 고래의 책은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한비자의 책도 원저 부분과 후대 사람이 가필한 부분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문제의 노자 사상을 도입한 부분을 떼어보면 『主道篇』이나 『楊槯篇』에는 노자의 사상을 법가류로 해석하고 있는데 『解老篇』이나 『喩老篇』 은 노자의 말을 비교적 충실히 해석하였고 법가류의 해석은 그다지 표면에 나와 있지 않다. 또 『六反篇』이나 『忠孝篇』이 원저, 혹은 거기에 가까운 것이라고 본다. 또한 好適은 『六反篇』을 제외하고는 전부 후대 사람의 가필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국 말부터 진한의 초기에 이르면 상호교류의 풍조가 나타난다. 도가의 『장자』등을 보아도 후기 도가의 사상을 서술한 外篇이나 雜篇에는 유가나 법가의 설에 가까운 것이 보인다. 이점에서 보면 법가가 도가의 사상을 도입한 것뿐만 아니고 도가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법가와 교류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법가와 도가의 접근에 의해서 생긴 것이 ‘黃老’ 사상이라 불리운 것이다. 전한 초기(B.C. 202)부터 武帝에 의한 유교의 관학화에 이르기까지 약 7,80년간에 전성을 이루었던 것이 黃老사상이었다.)
<진시황제가 채용한 법가 사상>
춘추전국의 5백년을 넘는 분열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대제국의 통일을 이룩한 것은 진나라의 시황제다. 그 통일의 원리로서 채용된 것은 바로 이 법가 사상이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리우는 강경한 수단에 의해 사상통일은 완전히 한비자의 사상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보아도 된다. 한비자는 “儒는 文으로써 法을 어지럽힌다.”라 하고 “明主의 나라는 書簡의 文이 없이 法으로써 가르친다. 先王의 말이 없이 吏(벼슬아치 리)로써 帥로 한다.” 라고 하여 법률적 이외에는 쓸모가 없고 관리를 교사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시황제는 이것을 그대로 진의 제국의 방침으로 삼고 있다. 또 진시황제가 천년의 전통을 가진 봉건제를 폐하고 새로이 군현제를 실시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혁신인데 이것을 헌책한 것은 한비자의 친구로 진의 제상이었던 이사였다. 이사도 순자의 문하에서 나와서 법가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법가의 주장이 시황제에 의해서 실현 된 것은 법가 사상이 백가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이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만 진이 불고 15년도 채 못되어 멸망한 것은 그 법가 정책이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이었으므로 천하의 반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漢이래의 역대왕조는 이 진의 실패를 거울삼아 법가에 대신해서 유가의 사상을 간판으로 내걸고자 하지만 이것이 법가 사상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제국의 통일이 도덕만으로 유지될 수 없음은 분명하므로 당연히 많은 법률이 만들어져 법가주의가 관철되었다. 따라서 유교주의의 가면에 숨겨져도 한비자의 정신은 영구히 살아있는 것이다.
<법가 한비자의 47가지 망징론>
출처 : 경남매일(http://www.gnmaeil.com)
<한비자>5권 15편 '망징'에는 법가사상가답게 나라가 망하게 되는 47가지 징조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논리정연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중 일부를 발췌해 서술한다. 임금이 법치를 가볍게 여기며 법령과 금제를 따르지 않고, 모략과 책략에만 의존해 나라를 다스리면 국정의 혼란을 가져와 외세에 의존하게 돼 나라가 망한다. 신하들이 실사구시가 아닌 공리공론과 형식에 치우치고, 상인들이 탈세를 위해 재산을 도피시키고, 일반백성들이 법을 우습게 여겨 폭력을 일삼으면 국가 기강이 무너져 나라가 망한다. 중신에게 잘 보여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매관매직이 성행하면 나라가 망한다. 군주가 법률을 왜곡하여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법령을 함부로 고쳐 수시로 명령을 내리면 그 나라는 망한다. 귀족이 투기를 일삼고, 대신의 세도가 당당하고, 외부의 강한 세력의 지원으로 백성을 못살게 구는데도 그런 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대신이 극진히 존경받고 당파의 힘이 강대하고, 그 대신이 군주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국정을 멋대로 농단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정실인사로 탐관오리를 중용하고 유능하고 강직한 신하들이 배척당하며, 변방에서 행한 보여주기식 작은 실적이 높이 평가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신하의 공로를 저버리면 그 나라는 망한다. 군주가 국가재정에 도음 되는 좋은 기회를 어물어물하다 포착하지 못하거나, 환란이 미칠 징조가 있음에도 태만하여 그것을 경계하지 않고, 오직 인의(仁義)만을 가지고 형식과 겉치레(전시행정)만 힘쓰면 그 나라는 망한다.
이렇듯 법치와 부국강병을 주장한 한비자의 사상은 인의(仁義)를 주장한 유가 사상과 배치되는 점은 있지만, 그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생각하면 법가사상의 당위성을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시대는 시대적 상황뿐만 아니라 시대적 환경과 시대적 요청 또한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고, 상고(上古)시대에는 사람이 적고 재화는 많아서 사람 사이에 다툼이 적었으나 오늘날에는 사람은 많고 재화는 적어 다툼이 많아지게 되었음을 한비자는 받아들인다. 한비자는 유가나 묵가 등이 말하는 고대의 성왕들은 단지 각각의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훌륭하게 통치한 인물들로 평가하지만, 한비자의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인물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하고, 정치란 현재의 긴박한 사정에 부합해야 한다고 한비자는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실용성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한비자를 이해함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악(惡)하다고 본다. 인간은 본성이 악해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본 것이다. 악한 인간 본성 때문에 인간을 그대로 두면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되고, 그러다 보면 국가는 없어지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백성이 법(法)을 지키면 상을 주고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법 시행만이 악한 인간의 본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비자의 엄형중벌론(嚴刑重罰論)은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도출된 처방이라 하겠다. 한비자는 법을 시행함에 있어, 엄형중벌(嚴刑重罰) 외에도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는 법을 시행하는 양대 원칙으로 볼 수 있다.
원래부터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을 잘 다스려 상생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법치밖에 없다고 한비자는 본 것이다. 강력한 법 시행만이 다섯 가지 좀벌레인 오두(五蠹)의 횡포에서 국가를 구할 수 있고, 악한 인간의 본성을 억누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비자가 법치(法治)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당시 어지러운 시대 상황에서 각국은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그 상황에서 나라를 안정되게 하고 통치하는 데 가장 쓸모 있다고 판단된 것이 강력한 법을 통한 군주의 통치로 본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고 힘없는 국가는 망하는 위기 속에서, 한비자는 절대 군주의 통치를 통한 강력한 법 시행만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봤다.
인간 본성을 성악설(性惡說)로 보고 법치를 통해 부국강병을 경주했던 법가사상은 현재 중국(China)의 토대가 된 진(秦)나라를 세우고 유지함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진나라가 법가사상을 통해 중국 고대의 혼란 시기인 춘추(春秋)시대를 지나 전국(戰國)시대를 종식시킨 점은 높게 평가할 수 있으나, 백성에 대한 엄형중벌과 법치만을 강요했던 통치체제는 그리 오랜 영광을 누리지 못한 불명예를 낳았다. 이처럼 진나라의 15년이라는 극히 짧은 집권은 일률적인 법의 잣대만이 국가통치의 능사가 아님을 현대인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비자를 통해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또한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한비자, 법가사상의 현대적 의의: 출처) 리군(작성일2020.4.7.)
인문학의 다양한 장르를 두루 내포하고 있는 《한비자》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유구한 세월을 거쳐 살아남은 고전은 급변하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통용되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비자》는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불변의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로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에 대한 통찰이다. 한비는 인간을 긍정하고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견해는 도가사상과 비슷한데, 《노자》에서 이를 은유적이고 완곡하게 표현했다면 《한비자》는 직설적으로 폭로하듯 내뱉었다. 한비는 인간관계의 핵심을 이익으로 규정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위라도 할 수 있기에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서 군주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직록과 작위를 신하에게 내려서 신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신하는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군주의 욕망(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군신, 양자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충성이나 인의 따위의 이타적인 부분이 개입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시민들은 생계를 위하여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근로활동을 이어간다. 기업들 역시 소득창출을 최고의 목표로 내세우고 활동하며 국가 간의 관계 역시도 명분보다는 실용을 최우선적으로 앞세운다. 그렇기에 이익에 입각한 한비자의 관계론은 오늘날 사회 풍조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현실성이다. 제자백가의 사상 전쟁에서 법가는 다른 사상들을 물치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난세 중의 난세인 춘추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나라는 진시황제의 진나라인데 그는 나라 내부를 법가의 사상으로 정비하였다. 즉 군주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필두로 내세운 진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중원의 제국시대를 알린다. 즉 중국의 통일은 법가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여타 다른 사상보다 법가가 현실적으로 탁월하다는 반증이다. 한비는 책에서 유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은 과거의 통치술을 현세에 구현하려고 한다며 그들의 복고적인 성격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변하는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런 한비의 현실적인 주장은 급변하는 시세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제도적으로 공정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법가에서의 법은 국가 통치의 기준임과 동시에 신민들 간의 공정을 의미한다. 법 앞에서 제국의 만민은 평등하게 포상과 처벌을 받는데 이는 고위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진행된다. 유가나 묵가에서는 강제적인 법보다는 인의와 같은 도덕, 겸애와 같은 박애를 내세워 처벌조차도 최소화하자는 입장인데, 법가의 주장과는 대조적이다. 법가의 입장에서는 인의와 겸애로 국사를 볼 경우 국정 농단과 신민들의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기에 예외 없는 강력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한비가 주장한 법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법이라는 것이 공평하게 집행되는가? 여전히 우리는 금수저, 흙수저를 거론하며 법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렇기에 공정성, 투명성을 상실한 오늘날, 《한비자》에서 주장한 공정의 가치는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한비자》의 비판
《한비자》는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왔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커다란 교훈과 의의를 주는 고전이다. 이번에는 교훈적인 측면이 아닌 책에서 비판하고 싶은 부분을 독자의 입장에서 크게 세 가지로 꼽아보려 한다.
첫 번째로 《한비자》의 내용은 결국 군주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리더들이 《한비자》에 열광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역시 처음 《한비자》를 접했을 때 강력한 리더십에 매료되어 무비판적으로 《한비자》를 좋아했었다. 다른 제자백가에 비해 《한비자》의 내용은 매우 명료하며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강력한 군주의, 군주에 의한, 군주를 위한 철학이 《한비자》의 전부니까 말이다. 그런 한비가 꿈꾸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절대 권력의 강력한 군주가 휘두르는 강력한 법제 시스템 앞에 백성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피지배층은 최고 지배층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도구로 전락하며, 모든 만민은 군주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극단적인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마치 여왕벌과 여왕개미 아래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일벌과 일개미의 모습처럼 부국강병이라는 구호 앞에 개인의 자율이 침해받는 제국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비가 추구한 제국의 모습은 이런 극단적인 사회였다.
강한 리더십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비가 주장하는 리더십을 따르게 될 시 필연적으로 한 사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로 이어진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결국 독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절대 권력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개개인의 자유가 공리에 의해 침해받는 사회, 너무도 강력하여 도저히 견제할 수 없는 리더... 한비가 활동하던 전국시대에는 인권이 없는 시대였으며, 정치 제도 역시 군주정이 유일하였으므로 이런 극단적인 정치사상이 통용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권력은 최고지도자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대다수의 시민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존립해야 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국가 권력의 존재 이유는 다수의 시민들의 자유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다. 바람직한 공리주의 역시 개인의 자율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두 번째로 과연 나라의 부패는 제도 개선만으로 개선될 수 있느냐이다. 국가 문제를 접근하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인간에 대한 접근, 두 번째가 제도에 대한 접근이다. 한비는 철저하게 인간을 불신했기에 법과 술, 세로 대표되는 제도적 입장으로 치국에 접근한다. 반면 유가는 성선설을 주장했기에 바람직한 정치는 제도보다 지도자의 품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두 입장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바람직한 국가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올바른 제도가 고루 갖춰져야 한다. 구성원의 의식은 높아도 이를 보장할 수 없는 제도가 없다면 한계가 있으며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가졌더라도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 악하다면 나쁘게 활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법가 사상의 가장 큰 맹점은 인간을 신용하지 않는 부분인데, 한비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한비가 추종하는 군주 역시 인간이라는 데에 있다. 법가는 군주의 권한을 극도로 높이는 입장인데 이런 무소불위의 군주를 어떻게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유가의 경우 전제왕권의 견제 역할로 지식인들을 설정하고 있으며 바람직한 군주는 바른 신하의 직간을 구분하고 수용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법가는 이런 행위를 군주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한다. 결국 무소불위의 권력을 규제하는 것은 군주 스스로에 몫인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한비의 철학에 따르자면 법가철학은 필연적으로 지도자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리해 보자면 한비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군주 중심의 절대권력을 구축하게 되면 나라가 올바르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군주 역시 탐욕을 추구하는 인간이므로 결국 국가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비의 정치철학은 《한비자》에서 우화로 예를 든 '모순'으로 표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람직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부분과 의식적인 부분 두 영역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하며, 특히 지도층의 경우 권력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욱 철저하게 내면을 수양해야 한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점은 법가가 주장하는 성악설이 과연 옳은 것일까? 유가와 법가는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너무나도 극단적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복잡하고 미묘하기에 선악 양면을 동전처럼 가지고 있다. 대다수의 국가와 공동체에서는 선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익이 가장 최우선이 된 사회 풍조에서 마냥 선하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인간 사회에서는 선과 악을 골고루 볼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한비자처럼 인간성을 부정한다면 공동체의 삶은 어떻게 될까,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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