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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순자의 사상과 맹자, 고자와의 비교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13.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멋진 밤이다.

오늘 저녁엔

난생 처음으로 연등 행렬에 다녀왔다.

신기한 경험?

집에 돌아오자마자

낮에 보류한

순자에 대한 자료 찾기 돌입,

이제 마치고 나니

뿌듯한 심정?

오늘 하루도

꽉 찬 날이었다.

나에게 순자와 맹자는 늘

성악설과 성선설로 대비되었는데

전국시대의 그들 이외에도

성선악혼설(性善惡混說)을 주장한 철학가들도 있었고.

고자처럼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했던 학자들도 있었다니,

공동체가 무너진 혼란의 시대에

인성론을 주창했던

이들의 심정을 읽게 된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의

정체성 중의 하나는

늘 '변화'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절대적인 것이 아닌,

혹은 보편성을 떠난

절대 객관화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더불어

"살아 있는 것을 본성이라고 말한다(生之謂性)" 했던 고자의

어떤 외적인 규정보다는 '삶'이 가진 내재적 본성에 충실하자는 속삭임으로

하루를 마감하겠다.

꿈에서 누군가 만나길^^

고자든, 맹자든, 순자든!!!

 

 

 

 

 

순자의 사상과 맹자, 고자와의 비교

 

 

참고 문헌: 『중국 철학의 기원과 전개』 丁爲祥 지음, 예문서원

『철학VS철학』 강신주 지음, 오월의 봄

『중국 사상사』 森三樹三郞 지음, 온누리

 

순자의 탄생과 시대

유가의 순자(B.C. 298년?~B.C 238년?)는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의 철학자로 이름은 황(況), 경칭으로는 순경(荀卿) 또는 손경자(孫卿子)로도 불린다. 15세부터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공부하였고 훗날 그 좨주(祭酒벼슬의 이름)를 세 차례 역임하였다.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부름을 받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춘신군이 살해당하면서 파직된 이후로는 제자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순자는 유가 중에서도 특히 경전주의(經典主義), 예(禮), 정명론(正名論), 인위[僞] 등 현실 규범적, 정치적 요소를 중시했고, ‘열두 선생을 비판함(非十二子)’으로 대표되는 그 전방위적 비판론은 도가, 묵가, 명가 등은 물론이요, 자사와 맹자의 관념적 유가 계통을 비롯해 자하학파, 자유학파, 자장학파 등에도 미쳐 유가 내부의 자성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논변 탐구가 치밀해져 묵가, 명가(名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로 명실을 바로하려고 하는 명실론의 방향과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같이 궤변술을 연구하는 두 흐름이 혼재)와 함께 순자 학파는 춘추전국 3대 논리 학파를 형성했다.

내외부 비판을 가하며 스스로를 공자의 적통으로 인식했으나, 사실 순자의 예(禮)는 공자보다 법적인 부분이 강하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를 받아서 선진(先秦)사상의 집대성자라 칭하기도 한다.

 

이후 한-당나라 시대 때 정통 유학자로 인정받으며 일정한 영향을 미쳐 왔으나, 당나라 말 대유학자 한유가 순자의 학설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 이후, 남송 이래의 성리학(주자학) 계통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이단시되었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다시 재조명 받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뼈대로 하였기에 인(仁)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면서도, '예(禮)'에 따라 사회적 직분을 구분하여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 그가 주장한 예치(禮治)에 따르면, 왕(군자)은 어진 마음(仁)으로써 백성들을 살피고 '예(禮)라는 사회질서'를 통해 귀천을 나누어 능력있는 자를 등용한다면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순자의 왕도정치) 하지만, 그의 제자인 한비자와 이사(전국시대) 등은 왕이 굳이 어진(仁) 행동을 하지 않아도, 능력있는 신하를 등용해 엄격히 법을 집행하면 백성들이 따라와 부국강병해진다는 패도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왕도정치는 가식적이며 여유있는 시대에서나 사용가능한 방법이라고 비판하게 되므로, 따로 법가를 만들게 된다.

 

그의 제자는 위 이사로 대표되는 법가, 정치가 계열이 유명하지만, 부구백 등 유가, 학자 계열로 남아 문헌 정리와 보전, 후학 양성에 힘쓴 이들도 있었다. 『예기』 등 보전된 고대 유가 문헌에는 순자학파의 공과 학색이 적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 맹자순경열전에서는 순자는 수 만 자에 달하는 글을 지어 남겼다 전한다. 전한 시대 유향은 322편에 달하는 순자학파 문서를 32편으로 정리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라 하였다. 당나라 양경이 다시 32편을 20권으로 정리해 현행 『순자』가 되었다. 청 말에는 왕선겸이 『순자집해』를 지어 순자를 재평가하고 주석을 모았다. 현행 『순자』는 과연 어디까지가 순자 본인의 글인지, 그의 학파의 글인지, 아니면 가탁된 글인지가 의문시되기도 한다.

 

오늘날 순자는 공자, 맹자 등으로 대표되는 이상주의 유가 계열에 비해 현실주의 계열로 알려지고 있고, 송대 주자학파에 의해 지나치게 이단시되었다는 점이 감안되어, 학계와 민간에서는 유교의 현대화를 이끌 새 지주로까지 드문드문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현실주의라는 것은 개방성과 유연성보다는 결국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귀결되는 규범주의의 일종이었으며, 유가의 독존과 지나친 경전주의, 허례허식을 양산한 한대 유교에서부터 이미 그 영향력의 단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혹자는 주자학이야말로 순자를 비판하였다지만 순자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였다며 양자를 나란히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때문에 반주자학 경향이 강했던 청 말이나 일본 근세의 유학자들조차 오히려 일반적으로는 맹자를 주자학적 해석을 배격하고 재평가하거나, 혹은 맹자와 순자를 나란히 비판했고, 순자를 맹자 위로 올리려는 시도는 드물었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순자는 미묘하고 복잡한 위상에 처해 있다.

 

2. 사상

1) 예치주의: 유가의 한계선 상에 선 순자

순자의 정치설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예를 중시하는 것이었고, 예치주의를 제창한 jt에 있다. 공자는 도덕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여 덕치주의를 제창했지만 그러나 도덕만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예의 존중을 역설했다 예는 사회적인 ‘습속’이고 도덕과 달라서 인간을 외부에서 구속하는 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자의 입장은 덕과 예를 두줄기 요체로 삼은 것이다. 순자도 유가이므로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 두 가지를 기보으로 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공자나 맹자와 다른 점은 두줄기 요체라 해도 실은 덕보다도 예에 중점을 두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순자는 예치주의의 입장에 있었다. 그러면 왜 덕에서 예로 중점을 바꿨을까? 아마도 순전 시대가 공자의 시대보다도 난세의 양상이 한층 격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난세에는 이미 사람들의 자발적인 도덕심에 호소하여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강제력을 가진 정치의 원리가 필요한 시대였으므로 예를 적용시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순자의 신념이었고 예치주의를 제창한 이유였다. 그러나 본디 강제력이라고 하는 점에서 예는 법에 미칠 수 없다. 버의 위반에는 형벌이 가해지지만 예의 위반에는 기껏해야 사회적인 비난을 수반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순자는 법치주의를 제창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순자가 이미 유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공자가 가장 미워한 것은 이 법치주의였고 만약 이것을 시인하면 유가의 적이 되는 것이다. 순자는 유가의 한계선 상에 서 있었고 조금 벗어나면 법가도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법가의 대표자였던 한비자와 그의 친구로 시황제의 제상이 되어 법가 정치를 실행했던 이사, 이 둘은 모두 순자에게서 배웠다 한다.

 

2) 예는 선왕이 만든 것: 자연에 대한 인위의 우위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예는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일까? 공자는 예의 기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맹자는 성성설에 관해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추고 있는 사양이라는 감정을 그대로 기르면 예로 된다고 역설했다. 말하자면 예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천성에서 생겼다고 하여 자연발생 설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데 순자는 이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예는 군주의 자각적인 판단이라는 인위에서 생겼다고 한다.

순자에 의하면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가진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방임하면 사람과 사람의 욕망은 상호 충돌하여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거기에서 고대의 군주, 즉 선왕은 이 혼란을 구하기 위해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욕망의 분한을 정하였다. 그 나눔의 기준이 바로 예이다. 예는 신분의 차별을 규정함과 동시에 그 신분에 따른 권리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 예가 지켜짐으로써 사회는 비로소 안정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예가 선왕의 인위에서 생겼다고 하는 순자의 주장으로 2개의 중요한 결과가 발생한다

우선 첫 번째는 자연보다도 인위를 중시하여 인위를 자연보다는 우위에 둔다고 하는 순자 특유의 사상이 생겨난 것이다. 이 인위 본위의 생각은 후에 서술할 그의 성악설이나 천론에 있어서 공통의 지반이 되고 있는 것으로서 순자의 사상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본디 중국 사상의 전통에서 보면 인간은 자연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논어』에 “오직 하늘(天)만이 크다, 단지 요(堯)만이 그것을 본받았다.”라고 하는 것처럼 天을 본받는 것, 즉 자연에 따른다고 하는 사상은 태고 이래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농경 생활을 계속하였던 중국 민족의 습성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순자는 이 오랜 전통을 뒤집고 인위를 존중하고 자연을 깍아내렸다. 그것은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 전도였다.

 

3) 군주 중심의 정치: 후왕의 설

선왕이 예를 비로소 만들었다고 하는 주장에서 생긴 두 번째 결과는 순자가 군주 중심의 정치를 역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선배에 해당하는 맹자는 민본주의를 제창해 “백성은 귀하고 사직은 백성에 다음가고, 군주는 가볍다.”라고 하여 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 군주는 이미 군주가 아니므로 군주를 추방해도 좋고 살해해도 관계없다고 하는 혁명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순자는 정치는 어디까지나 그 중심을 군주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예는 다름아닌 군주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디 예와 법은 다르고 예의 구속려근 약하다. 그것은 형벌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의 실행을 유효하게 하는 어떤 권위가 없다면 모처럼의 예도 공문(공문)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 그 권위는 다름아니라 군주이다. 군주가 있어야만 예도 비로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예에 의한 정치는 군주에 의한 정치여야 한다. 예를 만들어낸 선왕은 동시에 예를 유효한 것으로 하는 권위도 있었다. 그러나 선왕의 존재만으로 예의 유효성은 보증되는 것일가? 정말로 선왕은 성인이고 절대적인 권위의 지주이지만 그는 고대의 사람이고 지금은 이 세대에 없는 사람이다. 현재의 예에 권위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생존해 있는 현재의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기에 순자는 선왕과 함께 ‘후왕’ 즉 현재의 왕을 존중할 것을 역설한다. 이것은 유가로서는 혁신적인 설이고 맹자의 ‘선왕의 도’ 지상주의와 예리하게 대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군주 중심의 정치를 역설하는 것임과 동시에 한비자 류의 법가 사상으로 기우는 것이다. 순자가 유가의 이단자로 보이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4) 성악설

자연보다도 인위를 우위에 둔 순자의 사상에서 유명한 성악설이 탄생한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가진다. 만약 이 욕망을 방임해 두면 타인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되어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도 살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을 방임하면 반드시 악으로 향하는 것이다. 인간의 성은 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성이 악한 인간을 착하게 인도하기 위해서는 상식적인 작위, 인위에 의해 이것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선왕이 예를 창시해서 백성의 욕망을 조절한 것은 바로 인위에 의해서 자연을 억제한 것이다.

성선설을 제창한 맹자는 ‘인간이 학문수양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그 성이 착한 증거이다.’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성’과 ‘위’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온 잘못이었다. 성은 천이 자연에게 준 것이고 배움이라고 하는 의식적인 작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반해 위라고 하는 것은 인위이고 학문이나 수양 등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위에 속한다. 만약 인간의 성이 선하다면 학문이나 수양 등의 위는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학문수양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또 맹자는 ‘사람의 성은 선하지만, 외부의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서 그 본성을 잃고 그 결과로써 악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또 잘못이다. 일체 자연의 성은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잃는 일은 없다. 예컨대 눈이나 귀와 가은 자연의 움직임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상실되는 일이 없다. 환경대로 나븐 일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그 잠재적인 악이 표면에 나온 것이다. 이상이 순자의 책 『성악편』에 나오는 성악설의 윤곽이다. 이것만을 보면 순자의 『성악편』은 맹자의 성선설과의 대립을 강하게 의식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성을 악으로서 결론지은 것이지만 순자의 본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순자의 『예론편』이나 『정명편(正名篇)』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론편』에 의하면 자연의 성은 가공되기 이전의 소재같은 것이고 여기에 대해 위 즉 인위는 이 소재를 가공해서 아름답게 사물을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윈위의 가공이 없다면 자연의 성은 아름다운 물건으로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소재가 될 성이 없다면 인위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성과 인위가 합해지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설에 의하면 성은 악이 아니고 가치중립적인 것이고, 더욱 인위 (예)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소재가 된다. 또 『정명편』에는 다음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욕이나 과욕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노자가 있다. 그러나 욕망은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없거나 적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도리어 다욕(多欲)에 빠질 위험이 있다. 대개 욕망의 다소는 개인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국가의 치란(治亂)과는 관계가 없다.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욕망을 없앤다거나 적게하는 것이 아니고 욕망을 조절하는 것, 요컨대 절욕에 있다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자연의 욕망은 악한 것이 아니고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자의 성악설은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그 진의는 자연의 성이 선한 것이 아니고 가치중립적인 것이고 이것을 조절하고 수식하는 인위의 예에 높은 가치를 인정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 천(天)은 인(人)을 다스릴 수 없다: 天에 대한 인의 우위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성선설이 아니었던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맹자의 성선설이 그 범신론적 세계, 요컨대 천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여 천성으로 된다는 견해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데 이 범신론적인 천에 의하는 성은 인간 내부에 있는 천이고 선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자가 성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천에 대한 견해가 전통적 견해와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도대체 순자는 천을 어떠한 것으로서 보았던 것일까. 한마디로 그는 천은 자연이고 인위를 본질로 하는 인간과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순자도 전통적인 천의 견해에 따라서 ‘천이 만물을 낳는다.’라는 사실은 승인한다. 그러나 천의 작용은 그때까지만이다. 태어난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작용이고 예라 하는 인위이다. “천은 능히 만물을 낳지만 그 만물을 분별하는 것은 아니다. 땅은 능히 사람을 떠받치지만, 사람을 다스릴 수는 없다.”(禮運篇) ” “천지는 생명의 기원이고 예의는 다스림의 시작이다. 때문에 천지는 군자를 낳고, 군자는 천지를 다스린다.” (王制篇) “천지는 생명의 근본이고 군자는 다스림의 근본이다. 천지가 없으면 악이 발생할 수 없고 군사가 없으면 악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천지가 합쳐져 만물이 생기고, 성위(性僞)가 합하여져 천하가 다스려진다.(禮論篇)

즉 천과 인, 자연과 인위의 사이에는 확연한 분업이 있고 천은 인을 낳는 것에 대해서 인은 천을 기원으로 하는 만물에 질서를 부여한다고 하는 역할을 가진다. 이 분업이라고 하는 점만 보면, 천과 인은 대등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자연보다 윈위를 존중한 순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천보다도 인이 높은 위치를 점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저농적인 중국인의 천에 대한 견해를 뿌리에서부터 뒤엎는 것이었다.

 

6) 무신론: 天을 존중하기보다도 이용함

전통적인 중국의 범신론적인 세계관에서 말하면 天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天과 人과는 연속의 관계에 있는 천인합일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순자는 이 천과 인을 명확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한다. 천은 단순한 자연물이고 의식이나 행동을 가진 인간 존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천은 자연 현상으로서의 일정한 법칙, 예컨대 주야나 사계절의 교차 등에 보여지는 운행 버빅을 가지지만 그것은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 법칙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치가 타락하면 일식이나 월식등의 천재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때문에 天人의 分에 밝으면 至人이라고 해야 한다.”(天論篇)

이처럼 자연물인 天은 그 자체의 법칙에 의해서 운행하는 것이므로 천을 제사해서 행복을 얻고자 한다든가,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 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다. 물론 비가 오지 않을 때 제사를 지내고서 비가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고 제사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가 천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제사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고 폐기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순로서는 실은 곤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순자가 가장 존중하여 어쩔 수 없는 예 가운데서 제례가 있고 제례의 의식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도 천을 제사하는 의식도 이미 습속화되어 있었고 이것을 한꺼번에 중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거나 큰일을 결정할 때에 복서(卜筮)로써 신의(神意)를 묻는 것을 그만두면 민중의 불안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이점에 대해 순자가 말하기를 “일식이나 월식을 없애는 의식을 행한다거나 가뭄에 기우제를 드린다거나, 복서를 통해서 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에 의해 소원이 이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장식적인 의식으로서 행하여질 뿐이다. 그러므로 ”위정자인 군자는 그것을 장식적인 의식으로서 행하는 것이지만 민중은 그것을 신에게 제사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이것을 장식적인 의식이라고 깨달으면 폐해는 없지만 실제로 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폐해가 일어날 것이다.“ (天論篇)

제사를 단순한 장식적인 의식, 소위 일종의 연출로서 행하는 것은 지금의 근대 건축의 기공식 등에도 볼 수 있는 것인데 2천년 전 순자의 무신론적 입장은 이미 공자에게도 그 싹이 보였던 것이고 다만 순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그는 한 발 전진해서 말한다. ”천을 크다고 해서 그것을 사모하기 보다는 만물을 부양해서 그것을 制함이 낫다. 천을 따르고 그것을 기리기보다는 天命을 制해서 그것을 이용함이 더욱 낫다.“(天論篇)

이 순자의 자연관의 방향은 근대적인 자연 과학의 기본적인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고 중국 사상으로서는 극히 이질적인 것이다. 천 즉 자연을 인간에게서 분리해 천과 인을 분리한다고 하는 태도는 후의 후한의 왕충(王充)에 의해서 계승되지만 천을 하나의 자연물로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이용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순자 특유의 사상이고 공전절후의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아마도 노장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한 인간존중의 사상이 궁극에 달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순자의 사상은 모든 점에서 유가로서의 이단적 요소가 많았다. 따라서 유가의 내부에서는 순자의 사상을 계승한 자는 드물었다. 순자의 禮사상은 법가에 의해서 발전되어 법으로 변질되었다.

 

강신주 선생의 오월의 봄에서 펴낸 『철학VS철학』에서>을 기반으로

 

순자, 맹자, 고자의 사상을 비교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인성론을 넘어서>

중국 철학의 한 가지 특징은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 즉 인성론이 매우 발달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논의되었던 인성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간의 본성이 항상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와 관련되어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맹자하면 성선설, 순자하면 성악설을 단번에 떠올릴 정도이다. 그러나 중국의 사유 전통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이 두가지 경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은 단지 다양한 인성론의 양 극단을 차지하고 있던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맹자나 순자 외에 중국에서 논의 되었던 인성론의 다양한 양상으로 과연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인성론의 다양한 양상이 중국 후한(後漢) 시대에 왕충(王充 27~100)이란 철학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전해졌다는 점이다.

 

주나라 사람 세석(世碩)은 사람의 본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의 선한 본성을 기르면 그 선함이 자라고, 반면 악한 본성을 기르면 악함이 자란다. ......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모두 선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경우는 외물이 선한 본성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맹자와 동시대 사람인 고자(告子)는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 비유로 '소용돌이치는 물(湍水)'을 들었다. 소용돌이치는 물을 동쪽으로 흘러가도록 터주면 이 물은 동쪽으로 흘러간다. 또한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가도록 터주면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간다. 물 자체에는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방향의 구분이 원래 없었다. 이것은 마치 사람에게는 선과 악이라는 구분이 원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맹자의 인성론에 반대했던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사람이 선해진다면 그것은 인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모두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순자의 인위란 인간이 성장해서 선을 실천하기를 힘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육가(陸賈 기원전 240년 ~ 기원전 170년 한나라 초기의 정치가이며, 문학가이며, 사상가로서, 초기 유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는 이 세상이 인간을 낳을 때 예의의 본성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받은 명령, 즉 예의의 본성을 살펴서 이에 순종하면 된다고 했다. 받은 명렁, 즉 예의의 본성을 살펴서 이에 순종하면 된다고 했다. 동중서(董仲舒)는 순자와 맹자의 이론을 살피고서,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자정(劉子政)은 인간의 본성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論衡』 本性

 

자신의 주저인 『論衡』에서 왕충(王充, 27년 ~ ? 중국 후한 초기의 사상가)은 그가 살고 있던 동시대까지 유행한 인성론을 자그만치 일곱 가지나 열거해 놓았다. 그러나 그가 열거한 논의를 본성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세 종류의 범주로 분류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우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이고 두 번째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이며 세 번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도 하고 동시에 악하기도 해서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성선악혼설(性善惡混說)이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본성에는 애초에 선과 악이라는 구분이 전혀 없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이다. 흥미로운 점은 성무선악설을 주장했던 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이라는 범주들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맹자와 순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인간 본성을 선악이라는 개념 쌍을 사용하여 설명했음에됴 고자는 왜 인간의 본성을 선악 개념으로 정의하기를 거부했던 것일까?

고자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하나 있다. 그것은 맹자와 순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국 철학자들이 인간 본송을 순수하게 이론적 측면에서 탐구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은 항상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인성론을 구성하고 변형 시켜 왔다. 이점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도 충분히 확증될 수 있다. 즉 중국 역사에서 맹자의 성선설이 국가 공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호족들 및 지주들이 선한 본성을 갖춘 자신들을 간섭하지 말라는 이념적 논거로 사용되었다면, 순자나 법가의 성악설은 군주가 국가 공권력을 정당화할 때 그 논거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성선설에 따르면 개체가 외부의 강제적인 간섭 없이도 '정치적 질서(治)'를 낳고 유지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성악설에 따르면 외부의 간섭이 없을 경우 개체는 '정치적 무질서(亂)'를 초래할 뿐인 존재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중국 철학사 가운데 다양한 인성론이 전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고민은 부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인성론은 항상 정치철학이란 자장 속에서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고자의 인성론이 오히려 철학사적으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고자는 성무선악설을 제안했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선과 악이 개체에게 부여되는 공동체적 규범 혹은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부가하는 규범이란 걸 직감했던 것이다. 결국 고자의 성무선악설은 선악의 개념으로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려는 일체의 국가주의적 시도를 무화시키려는 인성론이었던 셈이다. 공동체의 규범이나 지배자의 질서를 넘어서야만 우리는 참된 인간 본성에 직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바로 이것이 고자의 속내였다.

 

<맹자 : "선한 본성이 있기에 인간은 자율적으로 선해질 수 있다.">

고자는 공동체의 지평이 아니라 개체의 지평에서 인성론을 사유했던 거의 최초의 중국 철학자였다. 그러기에 그는 인성에 부여된 선과 악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악을 부정하는 순간, 고자는 개체에 가해지는 일체의 외적 간섭에 저항하는 입장을 갖게 된다. 고자의 인성론이 지닌 이런 특징은 중국 철학사에서 논의된 다양한 인성론들이 모종의 사회적, 정치적 이념에 종속되어 있던 점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자의 인성론에는 아나키즘의 성격이 매우 강하게 배어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본성을 외적인 규제와는 무관한 역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명확해진다. 고자의 아나키즘적인 인성론의 위험성을 감지했던 철학자가 바로 다름 아닌 맹자였다. 그의 사유를 담고 있는 『맹자 』라는 책에 고자에 대한 맹자의 비판이 많이 실리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자가 말했다.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다. 의로움은 버드나무로 만든 나무 술잔과 같다. 인간의 본성은 어질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마치 버즈나무를 나무 술잔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맹자가 대답했다. "그대는 버드나무의 본성을 따라서 나무 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 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 술잔을 만든다고 본다면 또한 사람의 본성을 해쳐서 어질고 의롭게 된다고 보는 것인가? 천하 사람들이 이끌고서 어짊과 의로움을 해치는 것이 분명 그대의 말일 것이다."

- 『맹자』 고자 상편

 

고자에게 '버드나무/나무 술잔' 사이의 관계는 '삶/죽음' 사이의 관계로 사유된 것이다.

하지만 맹자에게 '버드나무/나무 술잔' 사이의 관계는 '재료/제품' 사이의 관계로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맹자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본성을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로 규정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지금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에 빠지는 상황을 보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고, 지역 사회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바라서도 아니며, 우물에 빠지는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관찰해보면, '측은해하는 마음(惻隱之心:인)'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의)'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예)'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지)'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맹자』, 공손추 상편

 

고통에 빠진 타인을 측은히 여기는 동정심, 즉 측은지심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있다고 설명하면서 맹자는 인간에게 선한 본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했다. 맹자는 의식과 감각 때문에 측은지심이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우선 위기에 빠진 아이의 부모로부터 얻을 이익을 생각하거나, 혹은 의로운 사람이란 칭찬을 기대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비명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이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의식적 사유나 분명한 감각 경험에서 측은지심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면 깊은 곳에 이러한 본성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인간이 자주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맹자의 답은 매우 단순하다. 인간은 자신이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본성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인의예지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다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지금 맹자는 생각하라고 이야기한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할 때 측은지심이 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이 공개되었을 때 수오지심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부지불식간에 항상 우리 마음에 실현되고 있으니 이것을 자각하라는 이야기다. 실현되고 있는 본성을 생각하기를 반복하면 언젠가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의식적이고 사사로운 동기에서가 아니라 모두 본성으로부터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맹자의 생각이었다.

 

<순자 : "성선설은 공권력과 규범의 존재 이유를 무력화시킨다.">

버드나무가 나무 술잔이 되기 위해서는 외적인 강제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맹자의 말처럼 버드나무에는 나무 술잔이 될 수 있는 본성이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맹자는 인간만큼은 오히려 예외를 두려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 즉 타인의 힘이 아닌 자력에 의해 수양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측은지심이 발생한 것을 알고 있다면 인간은 위험에 빠진 모든 사람을 만났을 때 즉각적으로 측은지심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측은지심을 가지려고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맹자 수양론의 기본 전제이다. 그런데 맹자의 논리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만약 인간이 수양을 하지 않고 계속 악행을 저지른다면, 우리는 이 사태를 스스로 개선할 때까지 방관한 채 그냥 두어야만 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맹자를 비판했던 인물이 바로 순자였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무릇 예로부터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이 선이라고 말한 것은 올바르고, 질서 있고, 공평하고, 다스려진 것이었고, 악이라고 말한 것은 치우치고, 음험하고, 어긋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이 선함과 악함의 구분이다. 지금 진실로 사람의 본성을 올바르고 질서 있고 공평하고 다스려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성왕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의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성왕과 예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올바르고 질서있고 공평하고 다스려진 것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순자』, 性惡

 

맹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이 선한 본성의 실현은 주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맹자의 생각은 현실 사회에서 국가 공권력과 사회규범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논거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국가 질서, 학문, 관습 등과 같은 외적인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자가 보았을 때 맹자의 성선설은 사변적이고 낙관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주장에 불과한 것이엇다. 인간이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는 맹자의 주장은 일체의 외적 간섭을 부정하는 논리로 기능할 수 있다. 성선설에 따르면 모든 교육제도, 모든 권위자들, 심지어 국가 권력마저도 그 정당성을 의심받게 된다.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 권력과 훈육 체계를 부정하는 논의는 순자에게 있어 비현실적인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맹자의 이상주의와 대조되는 순자의 현실주의적 사유 방식이다. 그렇지만 순자의 견해처럼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전제할 때 그것을 교정하고 순치할 수 있는 외적 강제력, 즉 국가 권력이나 전통적인 예의전장제도(禮義典章制度)들이 의미심장하게 부각될 수 있다. 결국 성악설로 순자는 국가질서와 사회규범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걸로 부족했던지 순자는 일종의 사회계약론으로 질서와 규범을 공고히 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또한 순자는 욕망이 무한하지만 그것을 충족시켜 줄 재화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에 의해 禮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순자의 입장이다. 이런 순자의 생각에 따라 반대로 인간에게 외적인 공권력과 사회규범이 없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인간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재화를 놓고 일종의 전쟁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사회는 걷잡을 수 업슨ㄴ 무질서 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자가 개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순자가 가장 강조한 개념인 인위를 뜻하는 위(僞)는 개개인의 주체적 노력과 능동적 행위를 의미한다.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공격했던 논거 중 하나도 맹자는 본성과 인위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자 이후 유학을 양분했던 맹자와 순자가 달라지는 지점은 양자가 생각했던 인간 본성이 상이하다는 데서 확인된다. 맹자의 본성이 개인에게 미리 주어진 사회성이었다면 순자의 본성은 개체의 자연스런 감성이자 욕망이엇다. 맹자는 그래서 본성만 실현하면 우리는 사회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순자에게 사회성은 치열한 인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순자의 인위는 치열한 노력이자 학습을 의미한다. 물론 그 학습의 대상은 성인과 그가 사회적 규범으로 제정한 예의다. 그래서 순자의 인위는 사실 자발적 복종에 가가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습이란 측면에서 자발성과 능동성의 여지가 있지만 학습의 대상이 외적인 권위이니 결국 복종의 계기도 함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맹자와 순자의 차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지도 모른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맹자가 그이 내면에 본성으로 존재하는 인의예지에 주목한다면 순자는 그의 외면에 제도나 책으로 존재하ᅟᅳᆫㄴ 의의예지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뱅자는 생각을 강조하고 순자는 인위를 강조했던 것이다. 내면의 본성을 생각하든, 아니면 외면의 예의를 학습하든 이제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스런 감상과 욕망을 극복해야한 한다. 경로는 다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맹자보다 순자가 우월해지는 대목이 있다. 그것이 성인이든 군주든, 순자는 우얼한 자의 외적인 권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당시 군주들이 맹자를 멀리하고 순자를 존경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순자의 논의에서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혼란한 때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맹자와 같은 이상주의적인 사유보다는 탁월한 현실감각을 갖춘 순자의 현실적인 사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적 권위를 부정하는 맹자를 어느 군주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군주 권력이 강해질 때 순자의 사유는 항상 각광을 받았다.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황제나 군주가 아니라 지방 호족들이 득세할 때, 그들은 맹자의 사유로 자신들의 자율성을 옹호했다. 이런 점으로 맹자를 자주 인용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황제 권력에 맞서 호족이나 지식인계급의 자율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인성론자, 고자>

중국 고대철학에서 가장 활발했던 논쟁은 바로 인성론과 관련되어 벌어졌다. 성선을 주장했던 맹자가 인성과 관련된 논쟁에서 한쪽 측면을 맡고 있다면 성악을 주장했던 순자는 그 반대쪽 측면에서 서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전개된 다양한 인성론들은 순수한 철학 논재이 결코 아니라 매우 강한 정치철학적 합의를 지닌 것이었다.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은 국가의 공권력이나 교육제고가 없어도 자기 스스로 선해질 수 있을 것이다. 후에 맹자의 인성론이 왕권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의 정당성 논리로 채택되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반면 본성이 악한 것이 사실이라면 국가는 공권력이나 교육제도를 통해서 인간을 선하게 훈육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순자의 성악설에서 그의 제자 한비자가 도출했던 것도 이 점에서 볼 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선과 악 개념이 항상 사회적 차원의 치(治)와 난(亂)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맹자나 순자의 인성론은 기본적으로 개체의 고유성에 대한 성찰과는 거리가 먼 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인성론은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체성에 대한 성찰을 전제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고자야말로 인성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논리를 피력했던 유일한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개체의 본성은 사회적 훈육과는 무관하게 삶의 고유한 의지로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을 '무선무악'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는 인간의 개체성에 대한 일체의 사회적 논의를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전국 시대 고자의 인성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당시 이미 죽은 개 취급을 받았던 유학을 살리려고 좌충우돌 주류 사상들을 물어뜯었던 맹자에게서도 그렇게 커다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맹자』 고자 상편에는 사람의 본성에 관련된 고자의 테제가 세 가지 등장한다. 첫째는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다. 의로움은 버드나무로 만든 나무 술잔과 같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 테제는 인간의 본성을 역동성으로 보는 주장이다. 고자는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소용돌이 치는 물‘과 같다. 이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기에 동쪽으로 길을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길을 터주면 서쪽으로 흐른다. 사람의 본성에 선과 불선의 구분이 업슨ㄴ 것은 물이 동쪽과 서쪽에서 구분이 없는 선과 같다.“ 소용돌이치는 물처럼 역동적인 인간의 본성에서 중요한 것은 역동성이지 선이나 불선이란 외적인 규정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고자의 속내였다. 결국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을 초월한다ᅟᅳᆫㄴ 것이다. 그래서 고자에게 선에만 머물러 있거나 혹은 불선에만 머물러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이미 역동적 본성을 잃어버린 사람, 이미 죽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을 파릇파릇 살아가는 버드나무에 비유하거나, 혹은 어디라도 흘러갈 수 있는 소용돌이치는 물에 비유했을 때, 고자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바로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외적인 규정보다는 '삶'이 가진 내재적 본성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이다. '생생함' '활기' '유동성' '역동성' 등등. 이런 삶의 내재적 역동성을 해친다면, 고자는 공동체가 가하는 도덕마저도 과감히 버려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고자는 맹자가 따르던 공자의 유학 이념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었던 철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공자는 말한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생명에 연연하여 인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이념이다.

그러나 고자의 눈에는 공자의 이념은 자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스스로 죽어 인간이 사용하는 그릇이 되면서 뿌듯해하는 버드나무란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가? 고자는 공자가 삶이 최상의 가치라는 걸 망각하고 있는 전도된 사상가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性)이란 개념을 구성하는 생(生)이란 글자를 거듭 강조하게 된다.

"살아 있는 것을 본성이라고 말한다(生之謂性)"

삶을 긍정했던 삶의 철학자, 바로 그가 고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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