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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묵자의 생애와 사상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12.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나의 타블렛>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척 고단한 일이다.

때론 잠을 잃기도 한다.

 

겁 없이 신청한

황룡 튜터링,

심도 있는 공부를 하자가

목적이었는데

한없이 깊이, 깊이

빠져들고 있다.

 

공맹과 한국 철학사상사를

마치고도

내 몫이 아니지만

“묵자”의 자료를

주말 내내 살펴보았다.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내 자료에 쓸어 담았더니

 

어깨도, 손목도 뻐근한데

창밖 시선 속

5월의 풍경이

내 마음으로 밀고 들어온다.

 

“잘했어, 잘했어”

가만가만 속삭이며.

 

사실

온갖 억측과 구설수에

마음이 몹시 시끄러웠지만

공부를 붙들고 있었더니

부조리한 세상사가

티끌처럼 가라 앉는다.

 

그것은 언제든

다시 부유하며

나를 다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은 늘 진실을 가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허허, 웃자 다짐한다.

 

5월의 바람은

더불어

“믿는데로 되겠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공부한다는 것이

나의 타블렛이 되다니, ㅎㅎ

 

 

 

묵자의 생애와 사상

 

<묵자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어떻게 인륜 사회의 현실 고난을 정면으로 대응하고 어떻게 인륜 세계를 철저하게 고칠 수 있는가를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그의 이상인 겸애를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 철학자, 묵자(B.C.479?~B.C.381?)는 성이 ‘묵’이고 이름이 ‘적’인 묵가(墨家)의 창시자로 동주(東周)의 춘추(春秋)시대 말엽으로부터 전국(戰國)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B.C. 551~B.C. 381)보다 약간 뒤늦게 태어난 그 시대 여러 사상가인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상가였다.

그는 어지러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열심히 사랑, 평등, 평화의 개념을 바탕으로 낮은 지위의 사람들, 천한 신분의 사람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 중국 역사상 가장 독특한 사상가요, 활동가였으며 천한 계급 출신이며 평생 이렇다 할 벼슬도 해보지 못하였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묵자가 살았던 시대는 봉건주의 사회여서 노예, 서민, 사대부, 후왕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계급이 엄격히 구분되는 때였다. 그리고 이 사회계급은 모두 타고난 것이었다. 그리고 주 초기, 제정된 봉건적 계급제도가 급속히 무너지고, 중국이 작은 봉건 국가들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성장했다.

따라서 그는 BC 5세기의 중국 사상가들이 당면한 문제, 즉 어떻게 하면 혼란 속에서 정치·사회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던 많은 사상가 중 하나였다. 당시 공자보다 선배인지도 모를 노자(老子)에 의하여 도가(道家) 사상이 이룩되었고 정(鄭)나라 자산(子産)에 의하여 법가 사상이 이룩되었으며 제(霽)나라 손무(孫武)에 의하여 병가(兵家)가 이룩되었고 춘추 말기에는 묵자가 나와 묵가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그 뒤의 전국시대이다. 천자와 제후들의 지배력이 약해져서 세상은 어지러웠지만 지식인들은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분위기로 시대가 발전한 것이다.

 

<묵자의 사상적 배경>

첫째, 묵자가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더욱이 격변하는 사회에서 서민들 중에도 장상(將相장수와 재상)으로 입신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지주나 대상인으로 부자가 되어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도 나오는 한편, 많은 귀족들이 서민으로 전락하여 서민의 세력이 확장되던 시기였다. 이때 묵자는 자신도 미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봉건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뜻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兼愛)와 남의 나라를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비공(非攻)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히 쓰는 물자를 절약해야 한다는 근검절약(勤儉節約)과 의로움을 존중하고 실천을 중히 절약해야한다는 귀의중행(貴義重行)의 성격을 띤 모든 그의 사상은 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심지어 쓸데없는 꾸밈이 없고 질박한 그의 문장조차도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둘째, 묵자는 공자 이후 개인적인 강학(講學)이 성행한 시대에 태어나 유자의 학업을 공부하고 공자의 학술을 전수받았으며 “옛 성인들의 학술을 닦고 육예(六藝)의 이론에 통달하도록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뛰어난 그 자신의 학문체계를 이룩할 수 있었다.

 

셋째, 묵자는 유학을 공부했으나 육가가 통치 계급의 입장을 옹호하며 예악을 위주로 하여 서주 초기의 봉건사회를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데 대하여 서민의 입장에서 이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묵자는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비유(非儒)편을 써서 사람들의 가깝고 먼 관계와 신분이 높고 낮은 차이를 엄격히 따져 봉건계급제도를 확고히 하려는 유가의 태도와 예악이나 따지며 귀족이나 부자들에게 붙어살려는 유가의 비생산성 등을 공격하였다. 『묵자』의 겸애는 말할 것도 없고 쓰는 것을 아껴야만 한다는 절용과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야 한다는 절장(節葬)과 음악을 사치스러운 일로 규정하고 부정하는 비악(非樂)과 운명론을 부정하는 비명(非命) 같은 편들도 그의 유학에 대한 반발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묵자』라는 책 전체가 유가에 대응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넷째, 그는 옛날의 요, 순 임금과 특히 우(禹)임금을 숭앙하여 누구도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발전시켰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이전의 하늘(天)에 대한 신앙을 발전시키어 천지(天志), 명귀(明鬼)편에서 보여주는 종교적인 사상체계와 교단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묵가는 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고난을 극복하고 어려운 일을 실천할 수 있었다.

 

다섯째, 묵자는 그의 시대에 진행되었던 여러 나라 사이의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 전쟁의 비정함과 백성들이 겪는 고난을 직접 체험하고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더욱 겸애를 내세우고 비공을 주장하며 이를 실천에 옮기기에 전력을 쏟았다.

 

여섯째, 제후는 천자를 무시하고 자기보다 약하거나 작은 나라는 기회 있는 대로 쳐서 빼앗고, 또 대부들은 서로 싸우며 제후까지도 무너뜨리고, 사(士)는 또 그들대로 출세를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지러운 세태와 고약해진 인심을 묵자는 절감했을 것이다. 그가 의로움을 중히 여거 ‘귀의(貴義)를 주장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과 백성들의 뜻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상동(尙同)과 현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뜻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상현(尙賢)의 사상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세우려 노력한 것은 그런 사실들이 그에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일곱째, 그 시대에는 귀족들의 사치와 부자들의 호화로운 생활이 너무나 서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제(霽)나라만 보더라도 수도 임치(臨淄)는 많은 부자들이 모여 살며 음악과 놀이를 즐기는 화려한 생활을 하였고 경공(景公) 같은 이는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음악과 여색과 놀이를 즐기며 극도로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다. 그의 음악을 부정하는 사상과 쓰는 것을 아껴야만 한다는 이론은 여기에서도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여덟째, 서주의 봉건제도에 있어서 사회계급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천자, 제후, 대부들의 맏아들은 영원히 천자, 제후, 대부의 지위와 전통을 계승하고 그 나머지 형제들은 계속 지위가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종법 제도) 따라서 사람들의 신분이나 귀하고 천한 신분은 나면서부터 운명 지워져 있었다. 이런 모순을 타파해야겠다는 동기가 묵자로 하여금 운명을 부정하는 비명(非命) 이론을 내세우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아홉째, 그의 시대에는 유가와 함께 도가도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가 실천을 중시한 것은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론에 대한 반발도 작용한 때문일 것이며, 정치에 있어서 상동, 상현을 바탕으로 한 유위(有爲)의 다스림을 주장한 것도 도가의 무위이치(無爲而治)에 대한 반발이 적잖은 작용을 했을 것이다.

 

<『묵자』의 전래>

다른 대부분의 제자백가의 책이나 마찬가지로 『묵자』도 한(漢)나라 이전에는 어떤 모양의 것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서』 예문지에는 『묵자』 7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 대에 유향(劉向 B.C.77~A.D.23)이 조정에 모아져 있는 책들을 정리 교정할 때 교정해 놓은 것으로 그의 『별록』에 적어놓았던 것을 아들 유흠(劉歆 B.C.54~A.D.23)의 『칠략』과 반고(班固 32~92)의 『한서』 예문지(藝文志)가 그대로 옮겨 실은 것이다. 본시 옛 책에는 유향이 책을 교정하여 임금에게 올렸다는 주록(奏錄)이 붙어 있었을 것이나 송(宋) 무렵에 없어진 듯하다.

『묵자』는 한 대 이후로도 통치자들이 위험한 사상으로 여겼고 또 유학자들이 배척을 하여 세상에서 거의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후세로 오면서 다시 많은 부분이 없어지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하고 글자가 잘못 적혀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묵자』는 15권과 53편본이다. 이는 한(漢)대 이후 『묵자』의 없어진 편수는 도합 18편인데 목록(目錄) 1편과 8편은 그 없어진 편목을 알 수 있는 것들이고 뒤의 10편은 그 편의 제목까지도 알 수 없게 된 것들인데 현재의 『묵자』가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명대 『도장(道藏)』의 덕분이다. 『도장(道藏)』이란 도가의 경전을 모두 모아 놓은 것으로 모두 5천5백 책인데 주나라로부터 당나라 시대에 없어졌던 책들을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에 간행된 책에 의거하여 다시 간행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기에는 귀중한 책이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묵가는 전국시대를 통하여 유가와 함께 세상에 가장 성행했던 학파의 하나였고 진시황(秦始皇

B.C.246~B.C.210 재위) 초기까지도 성행했으나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 B.C 145~B.C.86?)의 시대에는 이미 자취를 거의 감추어 역사가인 그조차도 묵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갑자기 묵가가 쇠멸한 원인은 묵가 자신의 내부에는 묵자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킬 만한 훌륭한 후계자가 나오지 않고 묵자의 가르침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묵가 학설 자체에 여러 가지 의견 충돌이 생기어 그 종단에 분열이 생기어 약해졌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나 당시 서민의 입장을 대표한 묵자는 통치자들의 이익과 어긋나므로 통치자들이나 사대부들이 이를 꺼리고 핍박하게 되었다는 외부적인 여건이 더욱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묵학은 한 대로부터 청(淸)나라 초엽에 이르기까지 근 1800년 동안 묵학을 공부한 학자가 거의 없어 묵학이 끊길 지경에 이르렀고 진(晋)나라 노승(魯勝)이나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 명대에 이지(李贄)등에 의해 읽혀지다 청대의 필원(畢沅)등에 의해 비로소 본격적인 묵학 연구가 시작되어 청말 이후로는 묵자를 전공하는 학자들도 많아졌고 무수한 업적도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묵자』는 53편만 전해지는데 그 53편도 일부 빠지고 앞뒤가 뒤바뀌기도 했다.

 

<『묵자』의 문장상의 특징

1. 간결함과 명료함:

묵자는 매우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을 사용한다. 많은 경우, 간단한 단어와 짧은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복잡한 사상을 전달한다.

 

2. 비유와 은유의 활용:

묵자는 비유와 은유를 자주 사용하여 사상을 전달한다. 자연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여 인간의 행동과 사회적 관계를 설명한다.

 

3. 고찰과 철학적 사유:

묵자의 문장은 종종 인간의 삶, 도덕, 정치, 사회에 관한 고찰과 철학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4. 무자비하고 강렬한 표현:

묵자의 문장은 가끔 무자비하고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를 비판하며 강연체의 글이 많다.

 

5. 무속성과 중립성:

묵자의 문장은 종종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의 철학적 사고와 더불어 묵자의 문장이 오랫동안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이유 중 하나이다.

 

6. 문체의 질박함:

묵자는 말보다 행동을 중시했기 때문에 문장의 수식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7. 문체의 단조로움:

묵자는 천민 출신으로 서민들의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에 천한 백성들까지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꾸밈없고 속된 말을 되풀이 해서 논리도 엉성했고 아름답지도 않았고 단조로웠다.

 

<묵자의 사상>

* 묵자』의 10가지 주제

『묵자』는 묵자를 포함한 묵가들 전체의 사유와 논쟁의 기록이다. 묵가들의 철학적 주장들은 흔히 10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이 10가지 주제들은 각각 『묵자』를 구성하는 편명이기도 하다.

 

1. 상현(尙賢) : 현명한 사람을 숭상해야 한다.

2. 상동(尙同) :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

3. 겸애(兼愛) :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4. 비공(非攻) :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

5. 절용(節用) :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한다.

6. 절장(節葬) :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

7. 천지(天志) :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8. 명귀(明鬼) :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 비악(非樂) : 사치의 상징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

10. 비명(非命) : 주체적 노력에 반하는 숙명론을 거부해야 한다.

 

이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묵자의 사상을 알아본다.

 

묵자의 종교관

묵자의 종교관은 다른 중국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것이다. 그는 선조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가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를 인격 신에 대한 신앙의 종교적 정통성을 옹호하는 신앙 부흥 운동가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하늘이 있고 하늘에는 뜻(天意)이 있으며, 인간은 이 하늘의 뜻에 복종해야 하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는 통일된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묵자는 생각했다. "우리가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하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은 '정의를 원하고 불의를 싫어할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상이나 벌을 준다.

 

2. 묵자의 하늘에 대한 개념

묵자에게 하늘은 만물의 창조자이며 주재자였는데 하늘은 해와 달과 별을 있게 하고 산천초목을 마련했을 뿐만이 아니라 사철이 있게 하고 비, 이슬, 눈, 서리를 내리게 하며 심지어 세상을 지배하는 임금과 관리들까지 있게 한 존재이므로 하늘은 고귀하고 지혜로은 것이라는 표현을 하며 천자도 자기 멋대로 정치를 해서는 안되고 하늘의 다스림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명(無所不明)한 존재로 하늘은 인간 생활의 모든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늘 인간 윤리의 기준을 ’의로움‘으로 내세운다. 더불어 묵자는 하늘의 뜻이 있음으로써 위로는 천하의 임금과 귀족들이 법과 정치를 펴는 법도가 되게 하고, 아래로는 천하의 만 백성들이 공부를 하고 말을 하는 기준이 되게 하며 사람의 행동을 보아 하늘의 뜻에 따르고 있다면 그것을 훌륭한 뜻을 지닌 행동이라 말하고 하늘의 뜻에 반하고 있다면 그것은 훌륭하지 않은 뜻을 지닌 행동이라 말한다. 천하의 임금과 귀족과 관리들이 진실로 도를 따라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자 한다면 근본적으로 어짊과 의로움의 근본을 살펴야 하며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의로움의 법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늘이 바라는 것을 행하지 않고 하늘이 바라지 않는 것을 행하면 곧 하늘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해주지 않고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것을 해주게 된다.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것이란 바로 질병과 재난이 찾아와 환난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하늘은 사람들의 규범이 되어 모든 사람이 법도로 삼고 그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며 또 하늘은 그의 뜻에 따르고 따르지 않는 데 따라서 상과 벌을 내리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니 하늘을 공경히 받들며 정성껏 제사를 지내야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3. 묵자에게 귀(鬼)의 성격

『묵자』 천지 하편에서는 하늘의 뜻에 맞는 ‘하늘의 덕(天德)’과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하늘의 도적(天戝)을 논한다. 곧 하늘의 뜻에도 맞고 귀신의 뜻에도 맞고 사람들 뜻에도 맞는 것은 ’하늘의 덕‘이고 하늘과 귀신과 사람 모두의 뜻에 어긋나고 해로운 것은 ’하늘의 도적‘이라는 것이다. 묵자는 ‘하늘’이외에 또 ‘귀신’의 존재도 믿고 있었다. 묵자의 귀신에 대한 견해는 『묵자』 명귀편에 있는데 하늘의 귀신이란 하늘의 보조자로서 신(신)을 말하고 산수의 귀신이란 자연의 산천 속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여러 가지 신을 뜻하며 또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귀신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이는 천신(天神), 지기(地祇), 인귀(人鬼)의 세가지를 가르키는 중국 고래의 귀신관을 그대로 계승한다.

또한 묵자는 무엇보다도 천하가 어지러워진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사람들의 ‘귀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데 있다고 믿었다. 더불어 귀신을 내세우면서 한편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썼는데 옛날 성왕들이 귀신을 존중했다는 사실을 중요한 근거로 삼았고 이러한 귀신의 존재를 하늘에 대한 신앙과 묶어서 사람들을 올바로 이끌고 이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기반으로 삼았다.

 

4. 종교 집단의 영도자: 거자(巨子)

묵자의 철학 체계는 그가 자신의 삶에서 모범을 보였듯이 보편적 사랑과 금욕을 신조로 삼았으며, 그가 죽은 후 거자(鉅子:묵가 집단의 총우두머리)들의 지도하에 상당히 많은 신자를 거느린 체계적인 종교로 구현되었다. 묵가라는 종교 집단의 영도자를 거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거자를 중심으로 집단 생활을 하며 묵가는 자기 신념이나 집단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기도 했다. 거자는 그 집단의 절대적인 지배자여서 묵가들은 또한 거자를 위하여 모두 죽음을 불사하며 따르기도 했다. 그 첫 번째 거자는 바로 묵자였다. 묵가 사람들은 거자에게 절대 복종해야만 했고 거자도 역시 그들 집단의 규율에는 절대 복종해야만 했다. 이렇듯 종교적인 색채를 띤 공동체는 여러 세대에 걸쳐 번창하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묵자의 가르침은 수백 년 동안 계속 많은 존경을 받았다. BC 2세기 초까지 학자들은 유교와 묵가를 2개의 주요한 사상 학파로 함께 언급했다. 그러나 BC 2세기초부터 묵가는 지식인의 무대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그의 고귀한 인격은 존경하면서도, 그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엄격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묵자가 재발견되고 그의 가르침이 재평가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거자의 예)

묵가의 거자인 맹승은 초나라의 양성군과 사이가 좋았다. 양성군이 맹승을 자기 나라에 와서 땅을 지켜주는 방위 책임자로 임명하고, 패옥을 갈라서 계약의 부절로 삼았는데, 그 계약의 내용은 “부절이 서로 맞으면 명령을 듣고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때 초나라 임금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몰려들어 오기를 공격하여 임금의 빈소에서 죽인 난동 사건이 일어났는데, 양성군도 이에 가담하였으므로 초나라에서는 그의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양성군이 달아나버리니, 초나라는 그의 나라를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맹승이 말하기를 “나는 남의 나라를 떠맡았고, 그와 더불어 계약의 부절도 나누어 가졌다. 이제 부절이 보이지는 않지만 힘으로써는 이를 막을 수가 없으니, 죽을 수 없다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때 그의 제자인 서약이 맹승에게 간하며 “죽어서 양성군에게 유익하다면 죽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익하다면 오히려 묵가의 지도자를 세상에서 끊어지게 하는 것이 되니, 이는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맹승은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양성군과 갖는 관계는 스승이 아니면 벗이고, 벗이 아니면 신하이다. 죽지 않는다면, 지금 이후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엄한 스승을 구할 때에는 결코 묵가의 문인에게서 구하지 않을 것이고, 현명한 벗을 구할 때에는 결코 묵가의 문인에게서 구하지 않을 것이며, 훌륭한 신하를 구할 때에는 결코 묵가의 문인에게서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은 묵가의 가법을 실천하고 그 과업을 이어나가는 방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장차 거자의 직책을 송나라의 전양자에게 맡길 것이다. 전양자는 현자이니, 어찌 묵가의 지도자가 세상에서 끊어질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서약은 “선생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면, 제가 먼저 죽음으로써 길을 열어놓겠나이다”라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맹승의 앞에서 자신의 목을 베었다. 맹승이 두 사람을 시켜서 거자의 직책을 전양자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맹승이 죽자, 제자들 중에 그를 따라서 죽은 자가 백팔십 명이나 되었다. 두 사람은 명령을 전양자에게 전달하고는 돌아가 초나라에서 맹승을 따라 죽고자 하니, 전양자가 그들을 말리며 “맹승은 이미 거자의 직책을 나에게 전달하였으니, 마땅히 듣고 따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고 끝내 돌아가 그를 따라 죽고 말았다. 묵가의 문인들은 거자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을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엄한 형벌과 후한 상금으로는 이러한 것을 이룩하기에 부족하다. 오늘날 세상에서 다스림을 말할 때에는 대부분이 형벌을 엄격히 시행하고 상금을 후하게 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것이 상고 시대에서는 세상에 괴로움과 해로움을 끼치는 것이었다.-『여씨춘추呂氏春秋』「이속람離俗覽·상덕上德」

 

거자의 예)

묵가 중에 거자인 복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진나라에 살 때에 그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진 혜왕은 “선생님의 나이가 연로하신데다 다른 아들도 없으므로, 과인이 이미 옥리에게 처형하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이 사건의 처리에 대해 제 뜻을 따라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복돈은 이야기했다. “묵가의 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도록 금지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임금님께서 비록 제 아들에게 사면을 내려 옥리로 하여금 처형하지 않게 하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묵가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돈은 혜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죽여 버렸다. 아들이란 사람이면 누구나가 사사로이 여기는 바이지만, 이 사사로이 여기는 것을 죽여서 대의를 행하였으니, 거자는 진실로 공정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다.-『여씨춘추』「맹춘기孟春紀·거사去私」

 

5. 묵가의 삼표론

묵가에서는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이유나 근거들을 세 가지로 유형화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삼표(三表)'다.

말에 표준이 없는 경우, 이것은 비유하자면 움직이는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을 확립하려는 것과 같아서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의 구분에 대해 분명히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곧 역사적 표본과 경험적 근거, 현실적 유용성이다. 무엇에서 역사적 표본을 찾는가? 옛날 성왕들의 사적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는가? 백성들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사실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현실적 유용성을 찾는가? 형벌과 정책을 시행하여 그것이 국가, 백성 그리고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알 수 있다.

위의 세 가지로 분류된 근거가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묵자』의 열 가지 주제들이 모두 이런 근거들로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6. 묵자의 비명론(非命論)

당시의 가장 두드러진 학파였던 유가와 도가 모두 숙명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운명론 또는 숙명론에 대해 묵자는 유가의 천명(天命)에 내재된 운명론이 그가 살았던 시대의 혼란을 크게 부추긴다고 판단해 운명론을 단호하게 배격했다. 그들은 “가난하고 부유함, 장수와 요절은 정확히 하늘에 달려있어서 빼거나 보탤 수가 없다”[빈부수요(貧富壽夭), 착연재천(?然在天), 불가손익(不可損益)]고 말하거나 “부자가 될 운명이면 부자가 되고, 가난할 운명이면 가난해지고, (인구가) 늘어날 운명이면 늘어나고, 줄어들 운명이면 줄어들고, 잘 다스려질 운명이면 잘 다스려지고, 혼란할 운명이면 혼란해지고, 오래 살 운명이면 오래 살고, 요절할 운명이면 일찍 죽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묵자는 삼표(三表) 또는 삼법(三法)으로 불리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운명론의 오류를 증명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은 성왕들의 업적[본(本)], 백성들이 보고 듣는 실정[원(原)], 나라와 백성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실용[용(用)]인데, 어느 기준으로 봐도 운명론은 설득력이 없으며 오히려 백성을 스스로 절망에 빠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성왕들의 업적을 보면 어떠한가? 옛날 우(禹)·탕(湯)·문(文)·무(武)왕이 천하를 다스릴 때 “반드시 굶주린 사람을 먹여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입혀주고, 일하는 사람을 쉬게 하고, 어지러운 사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에서 빛나는 칭찬과 아름다운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며 그는 사람이나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이라고 한다. 곧 힘써 실천하는 ‘역행(力行)에 의하여 사람이나 세상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운명의 부정은 묵자의 하늘과 귀신에 대한 신앙에 결부되어 모두가 부지런히 일하고 겸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발전시키며 나아가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비악(非樂), 비유(非儒)등의 이론을 발전시킨다.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실천 위주의 사상가였다.

 

7. 묵자의 교리

1) 법의(法儀)

묵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일의 법도와 기준이 되는 법의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부모나, 스승, 임금도 우리의 법도가 되어 줄 수 없으며 오직 ’하늘‘만이 법의가 될 수 있는데 이는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의 뜻만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묵자의 모든 사상은 모두 하늘에 대한 신앙을 근거로 발전했고 하늘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어울려 사랑하고 이롭게 해주므로 여기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위해주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발전되는 이러한 평등 의식은 옛 봉건주의 시대의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묵자는 또한 하늘을 바탕으로 한 법의를 따르라는 자신의 교리의 덕성을 의로움인 의(義)라는 말로 표현하며 의로움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 설명한다.

 

2) 지행합일(知行合一)

묵자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며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앎이란 ’진실한 앎‘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3) 겸애(兼愛)

『묵자』를 보면 천지, 명귀, 비명 같은 종교 사상과 관계되는 3편 이외에 상현(尙賢유가의 주장을 반박하여 관리의 임용에는 신분이나 직업에 구애하지 않고 문호를 넓게 개방하여 등용), 상동(尙同나라의 상하가 일치해야 하고 천자가 행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부합), 겸애, 비공, 절용, 절장, 비악의 일곱 편이 있는데 이것들은 묵자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사상들은 묵자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하늘의 윤리 규범인 의로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의로움이 인간 생활 속에 구체화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면이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어야 한다는 겸애여서 묵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을 이룬다. 묵자의 나머지 사상들은 바로 겸애에서 파생되어 하늘의 법도로 발전 삼았다. 묵자의 겸애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남을 사랑하기를 그 자신을 사랑하듯 하고 남의 아버지나 형 또는 아우나 아들 보기를 그 자신 보듯 하고, 임금이나 신하 보기를 그 자신 보듯하고, 남의 집이나 남의 몸 남의 나라보기를 자기의 집, 자기의 몸, 자기 나라 보듯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겸애의 사랑이란 자기와 남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나 구별을 반대한다. 이렇듯 묵자가 겸애를 내세웠던 것은 그것을 바탕으로 어지러웠던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겸애를 실천하는 방법으로는 하늘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다 같이 사랑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옛 성왕과 폭군의 예를 들며 겸애를 실천하면 하늘의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설교하며 겸애의 사회에서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해주기 때문에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일도 없고 남의 집안을 어지럽히는 이도 없으며 남을 해치거나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이도 없게 되고 약한 자의 것을 뺏는 일도 없고 가난한 자라고 업신여기는 일도 없으며 천한 사람에게 오만한 자도 없고 난폭한 자도 없으며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는 자도 없어지고 불효한 자식이나 충성스럽지 않은 신화도 없고 우애 없는 형제도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겸애 사상은 모든 인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근거로 그밖의 모든 묵자의 교리는 이 겸애를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고 그의 사상 모두가 겸애라는 것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묵자의 겸애는 공자의 인과 확실한 차별성이 있는데 공자가 주장하는 인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기초하면서도 가족으로부터 점차 사회로 확대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계적일 의무일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을 받는다. 바로 묵자가 유가 식의 사랑을 차별적 사랑이라며 비판하는데 묵자의 겸애는 유가의 배타적인 별애(別愛)는 서열과 위계에 갇힌 폐쇄적인 사랑에 불과 하다는 것으로 묵자는 공자 식의 사랑이 아닌, 혈연관계에 묶이지 않는 넓은 범위로 사회적 책임을 확대해야만 사회적 혼란이 종식될 것이라는 좀 비약을 하자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개념도 읽을 수 있는, 또는 공리주의적 성격을 지닌 사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4) 비공(非攻)

비공이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침략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국제 문제에 있어서의 겸애의 한 단면이 된다. 이렇듯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서로 우호를 다져 겸애를 바탕으로 서로 도우며 교역을 활발하게 함의로써 당시의 약육강식(弱肉强食)적인 혼란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묵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비공의 사상도 본질적으로 하늘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겸애에서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불의(不義)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묵자는 전쟁 중에서도 덕 있는 임금이 하늘의 듯을 대신하여 포악무도한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를 징벌하는 전쟁은 주벌(誅伐)이라 하여 공벌(攻伐)과 구분했는데 옛날 하나라 우임금이 묘족을 정벌했던 일이나 상나라 탕임금이 하나라 걸 임금을 정벌했던 일,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紂) 임금을 정벌했던 전쟁 같은 것은 모두 주벌이라 했으며 주벌은 하늘의 뜻에 의한 것이므로 귀신도 그 정벌을 돕고 모든 백성들도 정벌하는 사람을 따른다며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 때문에 남의 나라를 공격하고 침략하는 공벌과 구별지었다. 또한 비공의 방법으로는 무엇보다도 남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나라를 도와주고 다른 나라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서로 해결해 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을 묵자는 몸소 실천했는데 초(楚)나라가 공수반(公輸般)이 만든 구름 사다리(雲梯)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송(宋)나라를 공격하려 했을 때 멀리 제(齊)나라로부터 초(楚)나라까지 자신의 고난과 위험도 무릅쓰고 달려가 전쟁을 막았다고 한다.

 

5) 절용(節用)

묵자는 사치와 낭비가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평상시에도 근검하고 절약해 쓸모없는 재물의 낭비를 경계했다. 한 나라의 부를 두 배로 증가시키는 방법은 다른 나라의 영토를 점령해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낭비를 없앰으로써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재물을 사용함에 낭비가 없어지면 백성이 혹사되지 않아 이익이 많이 생긴다면서 국가의 이익을 백성의 이익으로 환원시킨다. 이와같이 근검절약은 말할 필요도 없이 상류사회를 이루는 지배층이 담당해야 한다. 『묵자』에 절용, 절장, 비악의 세편이 있는데 묵자는 이 세가지가 그 시대의 사회에 있어서 가장 다급한 문제로 여겼고 지금 임금들은 옛 임금들에 비하여 궁전, 의복, 음식, 배와 수레, 부리른 사람들의 다석 가지를 지나치게 사치하며 절검하지 않으며 나를 망치고 있다고 비평한다. 즉 지배층의 호화로운 생활을 보면서 묵자는 성왕들이 근검하고 절약하는 모습을 집과 음식과 옷, 장례의식, 배와 수레, 무기와 갑옷의 생산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백성을 위해 과도한 사치를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6) 절장(節葬)

묵자는 공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장례의 도를 “천하를 망치는 유가(儒家)의 네 가지 도(道)” 중 하나라며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는 절장(節葬), 즉 검소한 장례를 선호하고 시간도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묵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3년 상을 치르려면 살림을 탕진할 것이며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고 공인(工人)들은 “수레와 배를 수리하거나 그릇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천자(天子)나 제후들이 죽으면 수백 명 내지 수십 명, 장군이나 대부(大夫)가 죽으면 수십 명 내지 수 명”의 아랫사람들이 때로는 산 채로, 때로는 죽임을 당해 순장(殉葬)될 것이다. 아랫사람의 목숨도 윗사람의 것과 똑같은 사랑, 즉 겸애(兼愛)의 대상이거늘, 죽은 자를 위해 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묵자는 장례에서조차 권력자에게 휘둘려야 했던, 힘없는 약자들의 상처와 눈물을 먼저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공자가 강조한 과도한 장례는 효라기보다 ‘천하를 망치는’ 폭력에 가까웠을 것이다.

 

7) 비악(非樂)

묵자가 음악을 반대한 것은 그 음악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치와 낭비의 근원이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의 사치와 낭비 풍조에 있어 가장 문제되는 것은 가무라고 생각했기에 묵자는 음악을 반대했고 이것은 음악을 중시하던 유가의 입장과 반대가 된다. 묵자는 음악을 즐기는 일이 “천하의 이익이 되느냐 이익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관점에서 음악을 반대했다. 다라서 음악뿐만 아니라 실용을 넘어선 미술이나 요리, 궁전 같은 것도 모두 사치스럽다는 입장에서 반대하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음악이기에 묵자는 음악을 꼬집에 천하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민의 입장에서 볼 때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묵자의 눈에는 임금이나 대신들이 음악을 즐기게 되면 결국 백성들의 재물을 뺏음으로써 나라를 망치게 된다고 보았다.

 

8) 의정론(義政論)

묵자는 정치를 하는 방법에 의정(義政)과 역정(力政)을 나누었는데 이는 유가에서 말하던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王道) 및 힘이나 법으로 다스리는 패도(覇道)와 같은 개념이듯 보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묵자는 대체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겸애의 사상을 실천하는 정치 방법을 의정이라 하고 반대로 하늘의 뜻을 어기며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는 정치 방법을 역정이라 구분했다. 의정은 하늘의 뜻을 표준으로 한 ‘의’를 바탕으로 정치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고 ‘역정’이란 다스리는 사람이 권력으로 억지로 다스리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으며 온 천하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의정’은 특히 서민들의 이익에 부합되고 사람들의 신분이나 친하고 소원한 관계에 따라 차별을 두면서 권력으로 다스리는 ‘역정’에 대한 비판을 한다.

 

9) 상현(尙賢)

상현의 원뜻은 '현명한 이를 높임'이다. 묵자에게서 현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겸애를 하는 것이고 겸애는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다. 예컨대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피곤한 자에게 쉴 곳을 제공하는 것으로 현자란 바로 이런 물질적 이익을 백성에게 준다고 하며 이를 유가에서는 현자는 인격과 덕을 갖춘 자로 규정해서 인재의 등용에 있어 인격적 덕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는데 인격을 기준으로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는 반면 묵가에서 현자는 현실적 이익을 이루는 사람으로 동시에 현실적 이익을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게 주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 상현의 주장 속에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겸애’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개혁 및 계급타파의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유가나 다른 학파에서의 현명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10) 상동(尙同)

묵자는 모든 사람이 남들을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이롭게 해줄 것을 주장하면서도 엄연한 계급에 의한 통치 질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당시는 통치 질서의 문란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서민이었으므로 묵자는 통치질서를 강조했다. 그는 의정이란 통치상의 질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보며 통치 질서가 없는 사회를 금수의 세상이라고 하였다.

 

11) 비유(非儒)

묵자는 본시 유학을 공부했는데 『묵자』 속에는 유가를 공격하는 특수한 내용이 비유편에 끼어 있다. 묵자의 중심 사상이 씌어져 있는 상현에서 비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들을 보면 거의 전편이 유가에서 받드는 요임금, 순임금, 및 하나라와 상나라 및 주나라의 성왕인 우임금, 탕임금, 문왕, 무왕의 사적을 들어 자기 사상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있다. 유가 사상의 공격이 중심을 이루는 절장이나 비명 같은 편에서조차도 이론의 합리화를 위하여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문왕, 무왕의 사적들을 인용하고 반대로 실폐의 보기로는 걸(桀)임금, 주(紂)임금과 유왕(幽王), 여왕(厲王)을 인용하고 있으니 역사의식적인 면에서는 묵자와 공자가 근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또한 그의 사회 개혁도 그 시대의 정치질서 곧 봉건제도까지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이룩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묵자는 유가에서 내세우던 정치적인 제도와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묵자는 서민의 입장에서 나면서 정해지던 사회적인 계급을 타파하고 능력본위의 사회를 만드는 한편,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 없이 모두가 부지런히 자기 맡은 일을 하고 검소히 지내면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여 한 뜻으로 함께하는 사회를 이룩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묵자와 유가는 그들의 학술적인 바탕이 같고 원칙적으로 윤리관이나 정치제도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다만 그들이 대변하던 사회 계급이 이들의 사상적 성격을 크게 갈라놓은 것이고 비슷한 근거 위에서 묵자는 서민들의 이익을 추구했고 유가는 지배계급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특히 묵자의 가장 독특한 사상인 겸애와 비공이 대표하는 윤리사상과 천지와 명귀가 대표하는 종교 사상인데 이 겸애와 비공이라는 것도 실은 공자의 어짊(仁)의 사상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것이고 하늘과 귀신에 대한 신앙도 공자가 믿던 하늘과 이미 죽은 사람이나 산천의 신같은 귀신의 개념을 좀더 발전 시킨 것이다. 공자의 어짐을 사회의 계급이나 친소(親疏)의 차별없이 적용시미키면 겸애나 비공이 될 것이고 공자가 믿던 하늘을 그의 사사의 기본 법칙으로 삼으면 묵자의 천지가 되고 공자가 제사 지내던 조상의 신이나 산천의 신에게 분명한 인간에 대한 역할을 부여하면 명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묵자』에 있어서 비유의 주장은 비유편 한편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곧 책 전체의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문제이다. 곧 묵자의 사상은 유가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다.

비유편은 본시 상, 하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상편은 없어지고 하편만이 전해지는데 첫째로 번거로운 유가의 상례(喪禮)를 반대하고 둘째로 번잡한 유가의 혼례를 공격한다. 이는 묵자는 번거롭고 사치스런 여러 가지 유가의 예절을 전부 반대함을 뜻한다. 섯째로는 유가의 숙명론을 반박하고 넷째로는 유가의 비생산적인 성격과 남의 상례(喪禮)를 챙겨주면서 자기가 먹고 사는 방법을 해결하는 그들의 생활방법을 신랄히 비난하며 다섯째로는 유가에서 옛날 옷과 옛날 말만을 숭상하는 습관을 공격하고 여섯째로는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서 공자가 “옛것을 전승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 (述而不作)고 한 태도를 공격하고 일곱 번째로는 ”군자는 이기면 도망치는 자를 추적하지 않는다. (君子勝不逐奔)는 유가의 전쟁방식을 반박하고 여덟째로는 “군자는 종과 같아서 그것을 치면 울리지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君子若鐘, 擊之則嗚, 弗擊不嗚)”고 한 유가의 관념을 공격하고 있다.

 

8. 주요 제자(諸子)들의 묵자평

1) 순자(荀子)

부국(富國)편

“묵자의 말은 뻔한 것이다. 그는 세상을 위하여 물자가 부족케될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것은 온 천하의 공적(公的)인 걱정이 아니다. 다만 묵자의 개인적인 걱정이요. 지나친 생각일 따름인 것이다.”

 

“천하의 공적인 걱정은 혼란과 위해(危害)이다. 어찌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가 누구인가 서로 함께 추구하여 보지 않는가? 나는 묵자가 음악을 부정하는 것은 곧 천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며, 물자의 사용을 절약하자는 것은 천하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따져보면 그러함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묵자가 크게는 천하를 작게는 한 나라를 차지한다면 근심스러운 듯 거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으면서 걱정하고 슬퍼하며 음악을 내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물자가 메마르게 되고, 메마르게 되면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적에는 상이 제대로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옛날 성인들은 임금이 된 사람은 아름답지 않고 장식하지 않고서는 백성들을 통일할 수 없으며 부유하지 않고 인후하지 않고서는 아랫사람들을 거느릴 수가 없으며 위엄이 없고 강하지 않고서는 포악한 자들을 금하고 흉악한 자들을 이겨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론(樂論)편

“음악이란 즐기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음악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즐거우면 곧 그것이 목소리에 나타나고 동작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람의 기능인 목소리와 동작 및 본성의 작용 변화가 모두 여기서 발휘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즐김이 없을 수가 없고 즐기면 곧 겉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겉으로 표현되어 올바른 도리에 맞지 않으면 곧 혼란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옛 임금님께서는 그러면 혼란을 싫어하셨다. 그러므로 우아한 아(雅), 송(頌)의 음악을 제정하여 이끌어 줌으로써 그 음악을 충분히 지키면서도 어지러움으로 흐르지 않게 하고, 그 형식은 충분히 분별되면서도 없어지지 않게 하고, 그 소리의 가락과 번거롭고 간단함과 뾰족하고 둥그스름한 것과 장단은 충분히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킴으로써 저 사악하고 더러운 기운이 가까이할 길이 없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옛 임금님들께서 음악을 제정하신 이유이다. 그러나 묵자는 이를 부정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본시 음악은 종묘 가운데서 임금과 신하와 윗사람 아랫사람드이 함께 들으면 곧 화합하고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된다. 집안에서 부자와 형제들이 함께 들으면 곧 화합하고 친해지지 않는 이가 없게 된다. 마을의 집안 어른을 모신 가운데에서 어른과 젊은이들이 함께 들으면 화합하고 종순(從順)하게 되지 않는 이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음악이란 한 가지 표준을 잘 살피어 화합하도록 정한 것이며 여러 가지 사물에 견주어서 절도를 수식한 것이며 여러 악기들의 합주로써 아름다운 형식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것은 족히 한 가지 도를 따르게 할 수가 있으며 족히 만물의 변화를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옛 임금께서 음악을 제정하신 술법이다. 그러나 묵자는 이것을 부정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2)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성인다운 임금이 나오지 않게 되자 제후들은 방자해지고 민간의 선비들은 멋대로 논의를 전개하게 되어 양주(楊朱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묵자와 정반대로 이기주의를 주장)와 묵자의 이론 천하에 가득 차서 천하의 이론은 양주에게 귀착되지 않으면 묵자에게 귀착되었다. 양주는 나만을 위하는 것이니 이는 임금도 없는 셈이고 묵자는 모든 사람을 아울러 사랑하는 것이니 이는 아비도 없는 셈이다. 아비가 없고 임금도 없다면 그것은 바로 새나 짐승인 것이다.”

 

진심(盡心) 상편

“양자는 나만을 위하면 된다는 이론을 취하여 한 개의 털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지 않았다. 묵자는 모두를 아울러 사랑할 것을 주장하여 머리 꼭대기부터 발꿈치까지 털이 다 닿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하였다. 자막(子莫 노나라의 현인)은 그 중간 방법을 주장하였는데 중간 방법이 올바른 도리에 가까운 것이다. 중간 방법을 지킨다 하더라도 앞뒤를 잘 헤아리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한 편을 고집한 것이 된다. 한 편을 고집하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올바른 도리를 헤치고 한 가지만을 내세우며 백 가지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3) 『장자』

『장자(莊子)』에서는, 묵가의 무리가 "대부분 짐승가죽옷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은 굶어야 한다.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면 자신은 춥게 지내야만 한다. 삶에 지친 사람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면 그 자신이 피로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들이 묵가의 무리였던 것이다.

 

천하(天下) 편

“후세 사람들을 사치하지 않게 하고 만물을 멋지게 꾸미지 않게 하고 법도에 눈이 흐려지지 않게 하고 오직 올바른 규범으로 스스로를 닦달하며 세상의 다급한 일에 대비한다. 옛날의 도술을 닦은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경향을 띤 사람들이 있었다. 묵적과 금골희(금골희)는 그런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게 너무나 지나쳤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신중하였다. 그는 음악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고 또 물자를 아껴 서야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살아서는 노래도 하지 않고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아니하였다. 묵자는 널리 사람들이 똑같이 서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이롭게 해주어야 하며, 싸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엿다. 그의 도는 노여워하지 않고 또 널리 배우기를 좋아하며 남과의 구별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옛 임금들의 법도와 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옛날의 예의와 음악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옛날의 장사지내는 예법은 귀하고 천한 신분에 따른 의식이 달리 있었고 위아래 신분에 따른 등급이 있었다. 천자는 관과 덧관을 일곱겹으로 하였고 제후는 더섯 겹, 대부는 세 겹, 사는 두 겹이었다. 지금 묵자만이 홀로 살아서도 노래하지 않고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겠다고 한다. 그들은 세 치 두게의 오동나무 관에 겉 관도 쓰지 않는 것을 법도로 삼는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보면 아마도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행동하다 보면 틀림없이 자기 자신 조차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4)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 편

“세상에 잘 알려진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다. 유가의 시조는 공자이며 묵가의 시조는 묵적이다. 공자가 죽은 뒤로는 자장(子張)파의 유가, 자사(子思)파의 유가, 안회(顔回)파의 유가, 칠조(漆雕)파의 유가, 중량씨(仲良氏)파의 유가, 순자(荀子)파의 유가, 악정씨(樂正氏)파의 유가가 있다. 묵자가 죽은 뒤로는 상리씨(相里氏)파의 묵가, 상부씨(相夫氏)파의 묵가, 등릉씨((鄧陵氏)파의 묵가가 있다. 그러나 공자와 묵자 뒤로 유가는 여덟 파로 나누어졌고 묵가는 세 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주의 주장은 서로 반대되어 같지 않으면서도 모두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진짜 공자나 묵자의 학문이라 한다. 공자와 묵자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이상 이 후세의 학파들 중 어느 것이 정통인가를 누구로 하여금 가늠하게 하겠는가? 공자와 묵자는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을 본받고 있으나 그들의 주의주장은 같지 않다. 모두들 스스로 진짜 요임금과 순임금의 학문이라 말하나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 누구로 하여금 유가와 묵가 어느 편이 진짜인가 가늠하게 하겠는가? 은나라와 주나라는 7백여 년, 우나라와 하나라는 2천 여년이 지났는데 유가와 묵가 어느 편이 진짜인지 결정도 할 수 없으면서 지금은 또한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밝히려 하고 있다. 생각건대 그것은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사실 검토도 없이 꼭 그렇다고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꼭 그러할 수가 없는데도 그것을 근거로 삼는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옛 임금을 근거로 삼고서 요임금과 순임금에 대하여 꼭 그렇다고 단정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사기꾼이다. 어리석은 자와 사기꾼의 학문은 잡되고 모순된 행동은 명철한 임금이라면 받아들이 않을 것이다.

 

9. 묵학(墨學)의 소멸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초기에서부터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가장 유력한 사상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 중기의 맹자, 말기의 순자(荀子)나 한비자(韓非子)가 당시의 유력한 사상으로 묵가의 철학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묵가는 춘추시대 말기에 인문 정신을 드러낸 공자와 그를 수장으로 하는 유가(儒家)에 맞서 싸웠고 이런 싸움은 전국시대 내내 지속된다.

유가와 묵가 사이의 논쟁은 너무나 강렬하고 지속적이어서 장자(莊子)가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논쟁을 '유가와 묵가의 시비논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묵가가 이렇게 격렬하게 유가를 공격했던 이유는, 유가에서는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그 사랑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묵가에게는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 의식 혹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 활동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유가의 무리가 위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개 유가는 오만하고 자신만을 따르는 자들이어서 아랫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음악을 좋아하며 사람들을 어지럽히기에 직접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운명이 있다는 주장을 세워 할 일에 태만하므로 직책을 맡겨서도 안 되고, 상례를 중시하고 슬픔을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을 자애하도록 해서도 안 되며, 옷을 기이하게 입고 용모를 치장하는 데 힘쓰기에 백성들을 이끌도록 해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가에 대한 묵가의 치열하고 지속적인 공격이 묵가 사상을 역사 속에 묻히게 만든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단명한 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모든 제자백가들을 물리치고 유학만을 숭상한다"고 선언한 뒤 중국의 역사는 유학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묵가의 사상과 실천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망각되어 버렸던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묵가 사유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차별적인 사랑을 강조했던 유가들과는 달리 인간 사이의 차별 없는 사랑을 역설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중요한 그들의 공헌은 동양 철학에 대해 해묵은 편견을 수정해 준다는 데 있다. 우리는 논리와 이유를 강조했던 서양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이 예술적이고 직관적이며 나아가 신비주의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유나 근거에 기초를 두지 않는 철학은 가능할까? 그렇다면 동양 철학은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가까운 것이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유와 근거를 강조했던 묵가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동양의 정신을 다시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묵자』를 진지하게 읽게 되면, 우리는 동양에 합리주의적이며, 따라서 논증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이 철학일 수 있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삶에 대한 건전한 주장과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대기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10. 묵자와 홉스(출처: 월간조선 임건순 동양철학자)

“인간은 利己的… 계산하는 존재”

⊙ 묵자, 인간은 利를 추구한다는 점 인정… 홉스, 인간은 情念과 理性의 존재

⊙ 홉스, 인간이 싸우는 원인으로 경쟁심, 자기 확신의 결핍, 헛된 영광에 대한 욕망(권력에 대한 욕망) 꼽아

⊙ 묵자와 홉스 모두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평등’의 논리 이끌어내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생존의 기술, 승리의 조건, 변화의 전술》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등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년 4월 5일 ~ 1679년 12월 4일)는 잉글랜드 왕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최초의 민주적 사회계약론자이다. 서구 근대 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책 《리바이어던》(1651)의 저자로 유명하다.

 

홉스는 자연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상정하고, 그로부터 자연권 확보를 위하여 사회 계약에 의해서 리바이어던과 같은 강력한 국가권력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홉스의 국가론: 사회계약

홉스는 사회 계약에 대해 명확하고 자세하게 말한 최초의 근대 정치철학자이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이기적 본성을 지닌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한없이 추구하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한다. 그는 서로 다투던 자연상태 속의 인민이 그들 개인이 가지던 개인의 권리를 양도하여 주권을 창조했다고 보았다. 국가에 의해 개인의 권리는 억류되었고, 그의 방어와 좀 더 기능적인 사회를 위해 그의 권리가 돌아왔으므로 사회계약은 실용주의적 자기 이익 추구의 바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홉스는 국가의 이름을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국가가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리바이어던은 당시 영국 왕당파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신념)였다. 이 책은 유럽에서 망명 중이던 찰스 2세에게 헌정되었으나, 거절 당했다. 찰스 2세와 그 주변 참모들은 사회 계약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절대왕권을 옹호한 홉스의 추론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보존을 위해 맺은 계약으로 왕이 권력을 얻는다면, 왕의 권력은 아래로부터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홉스는 왕이 교회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집중된 권력을 가져야한다고 했었지만, 왕은 권력이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홉스의 논리 대신에 왕권은 신이 부여한다는 왕권신수설을 그들의 논리로 채택하였다. 왕권신수설은 위로부터의 권력형성을 의미하며, 권력 형성 과정에서 시민은 어떠한 관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홉스의 책에서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추론 방식에서 나타난 사회 계약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홉스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던, 존 로크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묵자와 홉스는 인간을 이기적이고 ‘계산하는 존재’

모든 사상은 인간관(人間觀)이다. 맹자(孟子)가 되었든 순자(荀子)가 되었든 장자(莊子)가 되었든 서양의 플라톤이 되었든 애덤 스미스가 되었든, 모든 사상가는 자신만의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 각자의 인간관은 자기 사상의 핵심과 직결된다. 묵자(墨子)와 홉스도 마찬가지다. 홉스가 말했다.

“인간의 지혜는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Leviathan)》 서문(序文)에서 한 말이다. 현실 정치를 논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인간이란 존재, 인간의 조건을 명확히 인식해야 고담준론(高談峻論),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담론(談論)이 아니라 현실에서 통하고 힘을 쓰는 정치철학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홉스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을 중시했다. 묵자도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가 중에서 처음으로 인성론(人性論)을 말한 사람이고 리얼리즘에 입각한 인간 이야기가 돋보이는 인물이다. 여러 가지로 닮은 그들은 인간관마저 흡사하다. 욕망, 이성, 평등, 원자화(原子化)된 개인, 인간을 말할 때 과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 등이 매우 유사하다.

인간관에서 도출해내는 국가관까지 비슷한데, 묵자의 인간관부터 다루어보자. 우선 그는 성악론자(性惡論者)임을 말해두고 싶다. 홉스와 비슷한 인간 이야기를 한 묵자의 인간관은 《묵자》 소염(所染)편과 상동(尙同)편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인간은 왜 싸우는가

〈옛날에 백성이 처음 생김에 아직 형벌과 정치가 있지 아니할 때에, 대개 ‘사람이 의로움을 달리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한 사람이면 곧 하나의 의로움이 있고, 두 사람이면 두 개의 의로움이 있고, 열 사람이면 열 개의 의로움이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그 의로움을 옳다 하고, 남의 의로움은 그르다고 한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비난한다. 이로써 안으로는 아버지와 자식, 형과 아우가 원망과 미워함을 짓고, 흩어져서 서로 화합할 수 없었다. 천하의 백성이 모두 물과 불, 독과 약으로써 서로 헐뜯고 해쳤다.〉 -상동 상(上)

〈옛날 백성이 처음 살아서 아직 정치의 우두머리가 있지 아니할 때로 돌아가보자. 천하의 사람들이 의로움을 달리했다. 이로써 한 사람이면 하나의 의로움, 열 사람이면 열 의로움, 백 사람이면 백 의로움이 있었다. 그 사람 수가 더욱 많아지면, 그 의롭다고 이르는 바의 것이 또한 더욱 많아진다. 이로써 사람들은 자기 의로움을 옳다 하고, 남의 의로움을 그르다 한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그르다 한다. 안으로 가서, 어버이와 자식, 형과 아우가 원한을 맺고, 모두 떨어져 흩어질 마음을 가져서 서로 조화롭게 합해질 수 없었다. 짐승이 그러함 같음에 이르러서,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 어른과 어린애의 마디도 없고, 아비와 자식, 형과 아우의 예도 없었다. 이로써 천하가 혼란했다.〉 -상동 중(中)

정치 권력, 국가 공권력(公權力)이 없는 상황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사유(思惟) 실험을 가장한 채 하는 말이지만, 사실상 묵자가 살던 시대에 대한 묘사이고 묵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다. 대체 왜 저렇게 싸우는 것일까?

 

의(義)는 이(利)다

묵자는 의(義)로움 때문에 싸운다고 한다. 그 ‘의’를 각자 주장하다 보니 싸운다고 한다. 왜 의라는 것 때문에 저렇게까지 싸울까? 의를 당위(當爲)나 이념(理念)으로 본다면 어쩌면 저렇게 살벌하게 싸우는 게 당연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념 때문에 벌이는 극단적 투쟁은 우리 역사에서 보던 것이고 지금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의는 이념과 주장, 대의(大義), 구호(口號) 그런 게 아니다. 이익, 이익 주장, 자기 이익에 대한 권리 주장이다.

안 그래도 묵자가 말했다.

“의는 이(利)로움이다(義利也).” -경상(經上)편

의를 말한다는 것은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것이고, 사람 수에 비례해 의로움이 늘어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물러서지 않은 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이익 주장이 서로 다르기에, 즉 충돌되기에 서로 싸우는 게 세상이다. 그것이 묵자가 보는 세상이고 묵자가 보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은 왜 이익을 내세우고 주장하며 싸울까. 한비자(韓非子), 순자, 상앙(商鞅), 노자(老子), 장자 등 다른 성악론자들처럼 묵자는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공맹(孔孟)처럼 ‘욕망을 자제하자’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욕망은 절대 현실에서 없앨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조화롭게 충돌 없이 욕망을 추구하게끔 해볼까 고민해봐야 한다. 묵자의 생각이 그러했다. 일단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 그로 인해 쟁투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 묵자가 바라보는 인간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7환(七患)과 3환(三患). 묵자는 당시 국가에는 7가지 환란(患亂)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3가지 환란이 있다고 진단했다. 국가가 가진 7환은 국방과 국정 부문의 난맥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백성들에게 있는 3가지 재앙이란 무엇인가.

“배고픈 자 먹지 못하고, 추운 자 입지 못하고, 힘든 자 쉬지 못한다. 3가지가 백성들의 커다란 재앙이라 할 수 있다.(民有三患, 飢者不得食, 寒者不得衣,勞者不得息, 三者民之巨患也)” -비악(非樂)

묵자는 3환을 말하면서 의식주(衣食住)로 대변되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말한 것이다. 그 욕망을 어떻게든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그 기본적 욕망이 충족되어야 백성들 삶이 보호받는다는 것이다. 그게 겸애(兼愛)다.

겸애란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관념적인 것도 아니고. 최대 다수에게 의식주로 대변되는 기본적 욕망을 보장해주자는 것이다. 일단 겸애로써 기본적 욕망이 충족되면서 각자의 삶이 보호받는다면, 극단적 쟁투(爭鬪) 상황은 벌어지지 않고 충돌과 균열 없는 세상으로 가는 큰길을 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저울질하는 인간

인간은 욕망 때문에 싸운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욕망 그 자체는 절대 불온시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묵자다. 그런데 묵자는 욕망만이 아니라 다른 창(窓)으로 인간을 보기도 했다. ‘이성(理性)’이란 것이다. ‘서구적 이성’ ‘근대적 이성’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는데, 정확히 말하면 ‘계산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나 할까.

“잠시 두 가지 예, 두 명의 선비를 놓고 설명해보자.”

“잠시 두 가지 예, 두 왕을 설정해놓고 설명해보자.”

《묵자》 텍스트를 보면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상황이 있다 가정(假定)하자고 해놓고 선택지(選擇肢)를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묵자는 사람이 자신에게 득(得)이 되는 선택지를 고를 것이라고 낙관한다.

욕망하는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묵자가 보는 인간은 ‘계산하는 존재’다. 계산하면서 고른다. 무엇이 내게 더 이로울지 득이 될지, 내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인지 저울질한다.

묵자는 인간을 ‘계산하는 이성’, 더 나아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묵자는 공자나 맹자처럼 ‘이것이 옳으니까 따르려무나’ ’이것이 옳으니까 지켜야 한다’ 식의 레토릭을 구사하지 않는다.

자식 된 사람이니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 된 사람이니 부모된 도리로서, 신하인 사람이니 신하 된 도리로서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따지지 말고 따라야 할 길이 있다? 그건 유가(儒家)의 논리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당위나 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타이르거나 가르치려는 유가와 달리 묵자는 이것이 옳기도 하지만 장단기적(長短期的)으로 네게 득이 되고 네 삶을 보호해주고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선택하라고 말한다. 조건을 달지 않는 유가와 다르다.

묵가는 ‘삼표법(三表法)’도 말했다. ‘더 나은 조건의 선택지 고르는 법’을 제시한 것이다. 묵자는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동양철학에서는 예외적으로 계약론적(契約論的) 사고(思考)를 한다. 모든 것은 거래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나의 의무는 상대의 권리, 상대의 의무는 나의 권리다.

묵자가 요구하는 겸애는 국가 권력이 행해야 할 것이고 국가 백성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지만, 백성들이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국가에 주어야 할 것도 있다. 백성은 겸애를 받는 조건으로 국가의 통치에 순응해야 한다. 겸애도 그렇게 거래와 교환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겸애란 것은 국가와 백성 쌍방(雙方) 간에 거래를 약속한 계약에 기초해 있고, 그 계약이란 것은 철저히 인간의 계산하는 능력과 자유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묵자가 생각하는 인간, 계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해두고 홉스로 가보자.

 

만인(萬人)의 萬人에 대한 투쟁

홉스도 ‘자연상태(自然常態)’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인간 모습을 말하고 있다. 묵자나 홉스나 통치 권력이 없는 자연상태를 말하면서 인간의 본성(本姓)을 논하는 게 똑같다. 홉스의 생각은 이러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으며, 때때로 공격적이고 파과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 반(反)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bellum omnium contra omnes)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기에 쟁투하는데, 이기적이라는 것은 자기 욕망만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홉스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말하면서 단순히 욕망, 욕구라고 뭉뚱그려서 말하지는 않았다. 허영심, 비교 감정, 자기 확신의 결핍, 동일한 사물에 대한 소유욕, 영광 즉 명예의 추구, 여러 가지로 욕망을 나누어서 설명하면서, 결국 이런 욕망 때문에 극단적으로 경쟁한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인간의 경쟁심을 심하게 부추기는데, 첫째 그 경쟁심 때문에 서로 싸운다고 한다.

 

자기 확신의 결핍

홉스는 두 번째로 자기 확신의 결핍(diffidence)이란 문제 때문에 싸운다고 한다. 늘 인간은 불안하다는 것이다. 늘 불안감에 휩싸인 채 사는 존재가 인간인데, 불안한 나머지 스스로 자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자기도 못 믿겠고 타인(他人)도 못 믿는다. 양쪽 모두에 가진 불신 때문에 늘 불안한데, 타인의 공격이 무섭고 스스로 방어할 확신이 없으니 과잉방어하면서 남을 해치고 때론 선수 치자는 식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자신이 없는 사람이 더 폭력적인 경우는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 자기 자신부터 믿지 못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확신이 없을 때 불신하게 되고, 불신은 언제라도 타자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하자는 명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이런 불안을 안고 사는 존재가 홉스가 보는 인간인데, 역시나 싸우는 존재다.

홉스는 경쟁심과 불안 다음으로 영광 또는 헛된 영광(vain-glory)에 대한 욕망 때문에 싸우기도 한다고 했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명예욕(名譽慾)이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다. 명예와 권력이라는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명성을 추구하는 욕망, 이름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과 벌이는 인정투쟁(認定鬪爭)이 인간을 싸우게 한다고 보는데, 이런 인정투쟁은 선의(善意)의 경쟁보다는 폭력적이고 불공정한 경쟁으로 흐르기 쉽다.

경쟁심, 자기 확신의 결핍, 그리고 헛된 영광에 대한 욕망으로 압축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폭력적 행위의 본성적·심리적 근원(根源)이다. 이러한 욕망이 통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앞서 말한 그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늑대인 상태인 전쟁상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홉스, “인간은 理性 더하기 情念”

홉스의 《리바이어던》.

나도 남을 해칠 수 있고 남도 나를 해칠 수 있고, 더 빼앗고 더 가지기 위해 때론 과잉 방어하다 보니 서로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특히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fear of violent death)를 지속적으로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다(homo homini lupus).’

홉스는 그 때문에 인간은 공포의 감정을 이고 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는 공포를 정념(情念)의 하나로서 말했다. 정념 이야기를 해보자. 홉스가 말했다. “인간은 이성 더하기 정념”이라고. 홉스는 인간 본성이 신체와 정신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봤다. 정신은 다시 경험·이성·정념(passion), 이렇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이 중 이성과 정념이 홉스의 인간론에서 강조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영원한 정신적 평정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는 다만 운동일 뿐이며, 감각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욕구나 공포 없이도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바이어던》 6장

정념이라는 말은 얼핏 잘 안 들어오는 말일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 특히 욕구나 공포 같은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는 강렬한 감정’을 뜻한다. 홉스는 정념 중에 특히 욕망과 공포가 인간을 지배하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묵자도 전쟁과 기아, 폭정, 폭력에 떠는 인간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 대안을 말하고 모색하는 경우가 많다. 공포까지도 묵자와 홉스가 공유(共有)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의 본성이다.

 

심사숙고하는 인간

법가 사상가 상앙.

홉스나 묵자나 둘 다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인간 모습을 말하면서 인간 본성을 이야기한다. 욕망 때문에 쟁투하는 모습을 들어 인간의 자연적 모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 다 공포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實存)도 말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홉스도 인간의 이성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이성을 봐도 역시나 둘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욕망이 있고 정념에 휩싸인 채 살지만 인간이 아무렇게 행동한다? 본능대로만 행동한다? 홉스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홉스는 인간의 자발적 행위는 심사숙고(深思熟考)의 과정을 거쳐 결정된다고 보았다. 따지고 또 따져본 다음에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리바이어던》 6장에서 심사숙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왜 따지고 심사숙고할까. 욕망, 욕구, 그리고 공포 때문이다. 행동을 통해, 결단을 통해 내 욕망·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내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어떤 결단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지 계산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택해야 내가 공포에 조금이라도 떨지 않을 상황이 오게 될지 절로 따져본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 무엇이 내 욕망을 더 충족시켜주고 내게 보호와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숙고하고 따져보는 게 인간이다. 홉스는 그 이성을 계산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묵자처럼 저울질한다는 거다.

묵자와 홉스는 ‘평등’을 키워드로 인간을 이해한 것도 비슷하다. 앞서 말한 대로 묵자는 한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의 의로움이,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의 의로움이 있다고 말하면서 각자가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존재라고 했다. 자기 이익을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그리고 겸애는 그 평등한 주체들이 공평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돕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묵자는 ‘천지(天志), 천지’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뜻을 말한다. 묵자는 유일신(唯一神)을 자주 언급한다. 자신의 뜻과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이자 바람이라고까지 한다. 그 신(神) 앞에서 묵자가 보는 인간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환원(還元)된다. 그래서 묵자는 ‘동(同)’을 굉장히 강조했다. 차별을 폐지하라고 했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이란 기준으로 신분은 늘 재배치되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에게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자의 동 노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이 바로 상앙이다. 통일제국 진(秦)의 아버지, 법가(法家) 사상가 상앙은 ‘일(壹)’의 노선을 추구했다. 일교(壹敎), 일상(壹賞), 일형(壹刑)으로서 즉 ‘모두에게 같은 정치를, 모두에게 똑같은 상벌을 내려야 한다’ ‘법 앞에 모두를 동등한 존재로 환원시켜 일원화된 행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자의 평등주의가 법가에 수용된 것인데 평등이란 측면에서 인간을 말한 것도 묵자와 홉스가 서로 비슷하다.

 

‘욕망 평등주의자’ 홉스

홉스는 자연상태의 논리에서 인간의 평등을 이끌어냈다. 자연이 인간을 신체와 정신의 능력에 있어 평등하게 창조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는 없고, 있다 해도 무의미하다고 했다.

“자연은 인간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평등하게 창조했다. 비록 때때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인하다거나 정신적으로 더 기민하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인간들 사이의 차이점은 그다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의 강인함이란 면에서 볼 때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사람과 연대(連帶)하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자를 죽이기에 충분한 힘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보기에 정신적 능력의 경우 육체의 힘보다 더 평등하다. 분별력이란 것은 경험과 다를 바 없고 경험은 모두 다 똑같이 집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 《리바이어던》 13장

약자(弱者)라도 강자(强者)를 공격하고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 나를 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똑같은데, 그 때문에 인간은 평등하다고 한다. 그리고 능력의 평등에서 홉스는 희망의 평등까지 말했다.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가 아니다. 동일한 욕망의 주체다’라는 것이다. 똑같은 욕망의 주체인지라 싸우는 것이지만 어쨌든 모두의 욕망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홉스는 ‘욕망 평등주의자’다.

 

“지혜는 인간을 읽으면서 얻어지는 것”

평등은 어디까지나 근대의 논리다. 특히 욕망에서의 평등이 근대 논리라 할 수 있다. 위계질서, 수직적 질서와 차별, 그런 질서에 차별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전(前)근대이고 특정 계급의 욕망만을 인정하는 것이 전근대라면, 그런 질서에 대한 도전과 균열이 바로 근대로 가는 길이다. 특히 폐쇄된 욕망이 개방되는 것이 근대로 가는 데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과정인데, 홉스는 그걸 선언한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욕망의 주체이고 그런 점에서 평등하다고 말이다. 인간 모두를 똑같은 이익의 주체로서 봐야 한다. 그런 식의 관점이 홉스에게서 보인다.

일단 이런 이야기를 해보면서 정리를 좀 해보고 싶다. 홉스는 말했다. “지혜는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읽으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그는 정치를 논하려면, 대안적 체제를 생각하려면 정치적 현실의 기초이자 기본적 상황인 인간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인간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탐구는 개별적 인간인 ‘너 자신’에 대한 직접적 관찰과 그로부터의 반추(反芻), 추론(推論)을 통해 가능하고 또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이다. 너 자신을 보면서 알아야 한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 정념은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그것을 지각하고 깨달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 생각, 정념 등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 정념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가장 쉽고 정확한 방법이다. 특히 이익 주체로서 내가 타인과 서로 맞서고 있을 때, 그때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정확히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인간 일반의 본성을 알 수 있다.

홉스는 그렇게 자신에 대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보편적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그렇게 나 자신을 알면서 ‘사람이란 게 다 똑같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거고, 또 그렇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나 남이나 똑같이 욕망으로 사는 존재구나, 정념에 휩싸인 채 사는 동물이구나’를 나를 관찰하면서 지각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군자(君子)와 小人

근대는 어떤 세상일까? 군자(君子) 따로 있고 소인(小人) 따로 있는 세상일까? 아니면 모두가 소인인 세상일까? 선한 사람 따로 있고 모리배(謀利輩) 따로 있는 세상일까, 아니면 모두가 모리배인 세상일까? 당신만 소인, 남만 모리배가 아니라 나도 소인이고 나도 모리배임을 인정하고 모두가 소인이자 모리배라고 선언하고 인식하는 게 근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야 사람이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홉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인 것 같다. 너 자신을 관찰하면서 인간 일반의 본성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자 쉬우면서도 정확한 길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것, 욕망을 추구하고 너절해지고 쉽고, 이익에 눈이 멀어 싸우고 쉽고, 그러면서 늘 공포와 불안을 안고 사는 작고 작은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해봐라.

묵자 역시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일까 묵자의 사상도 참 근대적인 구석이 있다. 그런 모습이 있기에 현대사회에 소환시켜 활용할 구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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