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트라쉬마코스(Thrasymachus, 459-400 BCE)는 칼게돈 출신의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철학가로 플라톤의 저서 《국가론 (The Republic)》에 등장하는 소피스트로서,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친 인물이다. 그는 "정의는 더 강한 이의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를 주장한다.
1) 정의에 대한 관점
트라쉬마코스가 인식하는 정의는, 강자 혹은 권력자의 이익이나 그가 설립한 기준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정의를 객관적인 인류를 위한 선행의 관점으로 바라보던, "처벌 등을 통해 집행되는 정의는 '인류의 미덕'에 부합하지 않기에 정의가 아니다."라는 시각을 지닌 소크라테스와 상당한 논쟁을 벌인다.
소크라테스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데 반해 그는 도덕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고 오직 법만이 실증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관점이 오류라고 말한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회의주의자인 셈이다. 또한 그의 관점에 따르면 법은 도덕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법을 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법은 곧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증명할 수 없는 도덕이라는 개념을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의(definition)를 따르면, 어떠한 집단의 시점에서 정의(justice)란 결국 권력의 요구에 부합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은 봉건주의사회 등지의 일인 절대권력 사회에선 오로지 왕 내지는 총통 등의 권력자가 믿는 정의(definition)가 곧 그 사회의 정의(justice)가 되나, 현대 대한민국 등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국가 등지에선 국민의 과반수(majority)가 합의하는 방향성이 곧 그 사회의 정의(justice)가 된다. 현대 민주사회를 기준으로 정리하자면, '개개인이 지향하는 주관적인 정의가 모여 다수의 의견이 형성되면, 투표 등을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곧 법의 형태로 해당 사회에 객관적인 도덕의 기준을 제시한다.'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위헌으로 인해 규탄받는 법 등의 존재 및 근본적으로 시대, 정부의 지향점, 민중의 여론 등으로 인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법을 설명할 수 있으며,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집단은 고유의 기준으로 이에 속한 개개인을 조율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관계에 부합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엔, 당장 <국가론>에서도 다뤄지듯 이미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공산주의의 개념마저도 존재했으므로 그가 의도했던 "정의에 대한 정의" 역시도 이와 같거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직접 양치기의 예시를 들며 소크라테스에게 열변을 토해내는데,
"정말로 양치기와 목동들이 그들의 양과 소들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노예의 소유자들과 그들 자신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위해 가축들을 살찌우고 돌봐준다고 생각하는가. 도시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그들이 국민을 보는 시각이 우리가 양떼를 보는 시각과 다르며, 그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가는 일들만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낮과 밤을 지새운다고 생각하는가."
반어법이다. 즉 아무리 양치기들이 일을 하더라도 이는 결국 동물들이 아닌 그들의 주인을 위한 일이므로, 결국 개인이 규범을 지키고 행동하는 행위는 권력의 이익에 기여하는 일이란 뜻이다. 또한 이 뒷부분을 통해 그가 지닌 정부에 대한 불신 역시도 엿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정의를 상술하였듯 "권력에 요구에 부합하는 일"로 정의내렸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봉건주의적인 사회 내에서 한 명 내지는 소수의 지도자에게 이끌려 정의내려지는 도덕이 아닌, 민주주의 내지는 공화주의 체제 하에서 대중이 직접 이끌어 그들 고유의 정의를 만드는 방법을 지향하는 게 아닌가 유추해 낼 수 있다.
플라톤 문서의 "사상" 단락에 서술되어 있듯이, 소크라테스의 첫 반박인 "지도자의 규범을 따르는 경우가 그의 이익이 아닌 개인의 이익이 되는 경우"는 이와 같은 민주/공화주의 사회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우다. 기초적으로 시민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을 지키는 일은 당연히 시민에게 이익을 끼칠 수밖에 없다. 또한 이후 각주에 서술된 "어차피 자신도 이익을 얻는 경우"는, 트라쉬마코스의 논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경우다. 양치기 혹은 목동이 양과 소를 돌봄으로 인하여 주인을 위하는 동시에 자신도 이익을 얻는 일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 있어선 역시나 지극히 당연한 동기부여이다. 그 대가가 하루치 품삯이던, 잠잘 곳이던, 먹을 것이던 간에, 행동에 따른 보답이 전혀 없다면 애초에 양치기는 동물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노예의 경우에도 '행동에 따른 안전의 보장'이라는 동기부여가 있으며,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나 이득이 없다면 애초에 상황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는 범주적 오류가 아닌 명백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볼 수 있다. 또한 언제까지나 트라쉬마코스의 비유가 가지는 핵심은 "무슨 일이든지 간에 합법이란 결국 권력의 안전 및 이익에 일조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이므로 양치기가 이득을 얻느냐 마느냐 하는 말은 논지에서 한참 벗어난 헛손질에 불과하다. 결국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논리의 헛점을 발견하고 부끄러워 물러난 게 아닌, 그저 낼 화 다 내고 할 말 다 하고 쿨하게 퇴장하는 게 된다.
2) 루소의 반박
루소는 『사회계약론』 1권 3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변형시키지 않는다면, 가장 강한 자도 언제까지나 지배자일 수 없다. 그 정도로 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자의 권리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이 권리를 겉으로는 빈정대지만, 실제로는 원리로 확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에 대한 해명은 언제쯤이나 듣게 될까? 힘은 물리적 역량이다. 힘의 결과로 어떤 도덕성이 도출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힘에 굴복하는 것은 필연적인 행위이지, 의지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신중한 행위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의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힘이 권리를 만든다면, 결과가 원인과 자리를 바꾸게 되어 어떤 힘이라도 첫 번째 힘을 이기면 권리를 계승하게 된다. 처벌을 피해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즉시 정당하게 그럴 수 있으며, 강자는 항상 옳기에 오직 강자가 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힘이 멈추면 함께 소멸하는 권리란 무엇인가? 힘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면 의무 때문에 복종할 필요는 없으며, 복종이 강제되지 않을 땐 복종할 의무도 사라진다. 따라서 권리라는 말이 힘에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을 보게 된다. 이 경우 권리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힘이 정의'라면, 언제든지 강자를 쓰러뜨릴 수 있을 때 그 즉시 복종의 의무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강자가 되는 것만이 중요해질 뿐, 법(의무)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힘으로 정당화된다면, 그 약자는 강자가 자고 있을 때 그를 언제든지 죽이고 더 이상 복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쎈 힘을 가진 강자라 할지라도, '힘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또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죽일 명분만 만들어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소는 현실적으로 '강자의 힘에 굴복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힘이 곧 정의'라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 “정의란 다름 아닌 더 강한 자의 이로움(이익, 편익)일 뿐”(국가 336b)이다.
① 거의 노골적, 도전적 표현들은 당대 전통 윤리 규범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대변 하였고 전통적이고 상식적 도덕관을 뒤흔들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다.
② 모든 도시국가에서 강자는 지배층이고, 지배층은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법을 제 정하기 마련이었으므로 -> 정의란 지배층에게 이로운 것, 피지배층에게는 해로운 것이라고 판단했다.
③ 부정의야말로 피지배층에게 이롭고, 지배층에게 해로운 것. “정의는 남 좋은 일이고, 자신 에게는 해가 되는 일이며, 부정의는 피지배자에게 이롭고 지배자에게 해가 되는
일이다.”(343c)”
④ 통속적 정의를 거부하고 통속적 부정의를 옹호하는데, 후자가 바로 사실상 자연에 따르는 정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 대한 비판과 극복으로서의 자연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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