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역사와 문화
역사의 3대 요소: 시간, 공간, 사람
역사의 특징: 운동성, 보편성, 특수성
이탈리아의 철학자, 역사가, 휴머니스트인 베네데토 크로체(이탈리아어: Benedetto Croce, 1866년 2월 25일 ~ 1952년 11월 20일)는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이다.”라고 했으며 영국 의 외교관, 역사학자 겸 정치학자인 E. H. Carr(1892년 6월 28일- 1982년 11월 3일)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한다.
고인들: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
거석의 종류는 선돌(하나의 돌), 열석(여러 개가 나열된 돌), 환상열석(원형;스토헨지), 석상, 고인돌, 암각화 등이 있다.
2. 고인돌의 명칭: Dolmen(탁자 + 돌)/고인돌(돌을 괴어 만든 돌)/지석묘(支石墓), 석붕(石棚)
3. 고인돌의 분포/시대적 상한선/분포규모
1) 분포:
전 세계적으로 유럽의 대서양을 끼고 스웨덴, 덴마크에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를 거쳐 지중해 일대까지 퍼져 분포되어 있고 우리나라 거의 한반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약 6 만개의 고인돌 중 우리나라에 4 만 여개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나 새마을 운동 당시에 많 이 파괴되었다.
2) 시대적 상한
유럽의 것은 신석기까지 올라가기도 하나 대체로 청동기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 하한은 초기 철기까지도 드물게 나타난다.)
3) 분포 규모
고창 일대를 비롯한 전라 지역에 2만여 개 기(남한 16,350 여기), 평안도에 1만~1만 5천 여기, 한반도에 2만 9천여 ~ 4만여 기 분포(전 세계의 40~60%)
특히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4. 우리나라의 고인돌의 형식
1) 탁자식(북방식) - 한강 이북
* 형태 및 특징
a) 북방식 고인돌은 4개의 판석을 세워 장방형의 돌방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 한 뚜껑돌을 올려 놓은 것(탁자식)
b) 무덤으로 사용된 경우는 시신이 매장되는 돌방. 지상에 노출(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 다)
* 분포: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에 집중 분포)
남방 쪽에도 북방식이 드물게 분포
2) 바둑판식(기반식基盤式): 남방식: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고인들은 전남에 19,000여 개 기가 있다.
* 형태 및 특징
a) 뚜겅돌과 돌방 사이에 3~4개 정도의 받침돌이 있는 형식, 바둑판식으로도 불림.
b) 판석, 할석, 냇돌 등으로 지하 돌방을 만들어 시신 안치,
* 분포 – 주로 한강 이남 지역에 분포
3) 개석식(無支石式) - 남방식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고인돌(전남 19,000여 기)
*형태와 특징
a) 받침돌 없이, 뚜껑돌이 직접 돌방을 덮는 형식,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
b) 주위 사면에 돌무지 시설이 있다.
* 분포: 한반도 전역에 분포. 특히 전남의 약 1만 9,000여 기의 고인돌 중 대부분이 개석 식, 개석식 고인돌은 분포상 숫자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표적인 형식 이다.
4) 위석식(圍石式): 판돌, 자연석 수 개(12~6)로 에워싸(圍) 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얹 는 형태. 둘러놓은 돌들은 무덤방처럼 형태를 갖춤.
5. 고인돌의 기능
1) 무덤
2) 제단
3) 랜드마크(회합의 장소)
4) 경계 표시
5) 묘표석(무덤 표지)
6. 고인돌 탄생 배경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는 구석기 때부터 있었고, 그 배경으로는 본능적 슬픔과 애도도 있겠 지만 영혼 불멸 사상의 영향이 있습니다.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은 이에 대한 애도에 정성을 들입니다. 단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할 때 다양한 생각이 듭니다. 애틋함과 사랑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공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영혼은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영혼의 영원성에 맞는 장례 방식도 고민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 돌이 가지는 특징에 대한 사고방식 등이 맞물리면서 아래와 같은 생각들이 구체화 되어 돌로 무덤 조성을 했으리라 추정합니다.
1)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죽은 자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2) 돌의 항존성(무기나 돌도끼는 계승될 가능성이 크다.
3) 돌에 대한 신앙심은 공포를 극복하게 한다.
4) 산사태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부터 보호
7. 고인돌에는 누가 묻혔나?
1) 특정 사회적 계층의 리더나 특권층의 무덤.
2) 공동묘지의 성격도 보입니다.
3) 지배층~평범한 구성원까지 다 매장 대상으로 추정됩니다.
8. 고인돌 시대 읽기:
고인돌 시대는 선사시대의 초기 단계 중 하나로, 주로 청동기 전기(기원전 약 1500년부터 300년)에 해당 이 시기에는 돌기구와 도구들이 사용되던 시기로, 철기 시대 이전의 시기를 가리킨다. 철기 문화가 보급, 발달하면서 쇠퇴: 우리나라는 위만이 들어오면서 나무널을 사용하는 무덤 만드는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러한 무덤 양식의 변화는 그 사회가 사후 세계보다는 현실에 더 집중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무 자르듯 철기 보급이 되자마자 없어지진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철기시대가 진전되면서 소멸되는 건 맞기에 대체로 이렇게 인식합니다.)
9. 고인돌의 소멸: 아래 내용처럼 구체적으로 가르치진 않았지만 설득력이 있는 얘기입니다.
1) 종교적 변화
선사시대의 종교적, 신앙 체계가 변화하면서, 고인돌이 사용되는 의식이나 관습이 변화할 수 있다. 새로운 종교나 신앙 체계의 수용이나 확산으로 인해 고인돌이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게 되었을 수 있다.
2) 사회적 변화
사회적 구조의 변화나 권력의 이전 등이 고인돌의 사용을 변경시킬 수 있다. 새로운 사회질서가 성립되면서, 예전의 관습이나 전통적인 의식이 사라지거나 변형될 수 있다.
3) 환경 변화
환경 변화도 고인돌의 소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선사시대와 청동기 이후의 환경 변화, 농업의 발전, 도시화의 증가 등은 선사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며, 이러한 변화는 고인돌이 사용되는 환경이나 상황을 변화시켰을 수 있다.
4) 자연재해
자연재해나 기후 변화도 고인돌의 소멸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는 고인돌이 위치한 지역에 피해를 줄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고인돌이 파괴되거나 사용이 어려워질 수 있다.
신화는 왜 만들어졌을까?
1) 상하 수직적인 관계를 전제로 계급 질서가 형성되는 단계에 나온다.
2) 차별 짓는 내용이 들어있다.
3) 강제적인 힘이 깔려있다.
4)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다.
5) 가르침과 교훈을 제공한다.
6) 정체성과 아이덴티티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7) 사회적 기능(사회적 질서나 통제)을 수행한다.
8) 예술적 창작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있다.
신화와 역사의 관계
신화와 역사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종종 서로 교차하고 상호 작용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1) 역사적 사건과 신화의 연계:
일부 신화는 실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기반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옛날 전쟁의 영웅이나 중요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신화로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역사와 신화가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를 보충하고,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2) 문화적,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
신화는 종종 특정 문화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역사적 사건과는 별개로, 특정 이념이나 가치관을 강조하거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신화가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신화가 역사적인 사건보다는 특정 메시지를 강조하는데 더 중점을 둔다.
3) 기억과 기록:
역사적 사건은 기록을 통해 전달되지만, 신화는 주로 구두 전승이나 문학적 작품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특정 사건이나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달하는 데 사용되며, 종종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
4) 문화적 심벌:
신화는 종종 특정 문화나 집단의 정체성과 아이덴티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정 신화나 전설은 특정 문화나 집단의 가치관이나 역사적 경험을 상징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심벌은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특정 시대의 사건이나 상황을 나타내는데 사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기술한 책
삼국사기
내용 전체가 현대까지 전해지는 한국사의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사서이다. 현존하는 국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현존하는 삼국시대 관련 사료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더불어 삼국시대 연구를 위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사료이다.
고려 인종이 하명하여 국가적 지원 하에 1145년,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 보조를 맡은 참고(參考) 8명 및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마천이 처음 서술하여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으로 자리잡은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현대에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서 중 김부식이 편찬한 원본은 없다. 《삼국사기》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원서는 보물 722호 성암본으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성암본은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름은 《'삼국'사기》이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 즉 '삼국'이 있지 않았던 약 260여 년의 역사도 같이 다루었는데, 《삼국사기》는 신라가 아닌 고려에서 작성한 것으로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다시 나눠진 후삼국시대를 고려가 재통일한 것을 통일의 종결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 《삼국사기》는 고대도 고대지만 당시 고려왕조의 현실도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2) 삼국유사
고려 후기의 승려 보각국사 일연이 고려시대까지 전승되던 삼국시대의 여러 역사와 설화를 담아 1281~83년 무렵에 저술한 역사책이다.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받는다. 5권 2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와는 별개로 9개 편목으로 나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하면, 《삼국사기》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 아래 쓰인 책이다. 즉, 상식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기적 같은 기사는 거의 없고 역사기록에 충실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에서 곰이 마늘과 쑥만 먹고 버텨서 인간이 되었다는 대목은 현실적인 역사로서는 확실히 믿기 힘든 기록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받은 김부식은 이 신화를 《삼국사기》에 기록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고주몽이나 박혁거세, 석탈해 등 삼국 건국 시기 시조들의 신이한 기록들은 기록하긴 했지만 삼국 건국설화 부분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그 원칙을 지킨 편이다.
반면 일연은 《장자》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스스로 불자였던 자신의 메시지를 설화에 적극적으로 담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배제한 한국 신화와 관련된 내용을 대폭 수록했다. 일연은 당시 널리 알려진 설화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품을 매개체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신화적, 설화적 기사를 넣다보니 현실적인 역사로 생각하기 어려운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다. 만파식적 설화도 《삼국사기》에서는 역사 부분엔 안 쓰고 악기로서 소개할 때만 간단히 언급하며 '이런 말이 있지만 괴이해 믿을 수 없다'고 써 놓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전문을 수록해 놓았다.
1. 고조선의 성립
① 신화에서 개인은 집단을 표상,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
일반적으로 종족의 이동 반영.
② 고조선의 탄생 : 선진 이주세력(천신)과 후진 토착세력(지신)의연맹
단군 탄생
2. 고조선 탄생
* 통치명분
①‘천강(天降)’을 내세워 권위 신성시.
② 홍익인간(弘益人間) -
자신들의 지배가 궁극적으로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가져다준다고 주장.
3. 고조선 사회의 특징(단군 신화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것)
교화를 위한 통치 지향적이었다.
① 제정일치사회 –단군왕검
② 고조선은 관료조직을 갖춘 국가 = 공권력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계급 구조로 된 중층적인 구조를 가졌다.
③ 통치담당자의 성격(농경, 기후관련 神格)➝ 농경사회
④ 계급사회
* 범금 8조 (犯禁八條 - 『한서』 지리지)
- 현도·낙랑은 무제(武帝)때 설치하였는데, 모두 조선(朝鮮)·예맥(濊貉)·구려(句驪) 의 이민족이다. 은(殷)나라 도가 쇠퇴하자,기자(箕子)가 나라를 떠나 조선(朝鮮) 으로가서, 예의로 백성을 가르치고 농업와 잠업을 가르쳐 농사짓고 베를 짰다.
- 낙랑(樂浪)의 조선(朝鮮) 백성에게는 범해서는 안되는 8개 조문 이 있었다.
- 1남을 죽이면 즉시 죽음으로 갚고, 2남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배상하며, 3남의 물 건을 훔친 자가 남자이면 그 집의 노(奴)로 삼으며 여자이면 비(婢)로 삼는데,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자는 1인에 50만(전)이었다. 그러나 비록 죄를 사면 받아 민(民)이 된다 할지라도 풍속에서는 오히려 이를 꺼려 결혼하려고 할 때 짝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민들은 끝내 도둑질하지 않아 집의 문을 닫아 놓지 않았으며,부인은 정절을 지키며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4. 고조선의 역사
(1) 초기 고조선
성읍국가에서 출발 ➞ 연맹국가 단계.
(2) B.C. 4세기
철기문화 ]왕국 자처하는 단계. 전국 7웅의 하나인 연(燕)과 자웅을 겨룰 정도 로 성장
* BC 3C초반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서쪽 2천리를 빼앗음
*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는 어디?
(3) 위만조선(B.C. 194~108)
① 위만조선의 성립: 위만은 중국 진.한 통일기에 연나라로부터투항.
BC194년준왕(準王)을 치고 왕위 등극
→ 준왕은 한강 이남 ‘한땅(韓地)’로 내려가 정착,
한왕(韓王)을 칭함.
* 위만은 어떤 사람인가?
② 위만조선 성격 계통추정 불가. 단,정권탈취 후에도 조선 정통성 유지, 토착민이 높은 지위 유지
* 옛 조선계? 위만조선은 중국 망명객들과 기존의 고조선 계통이 결집하여 성립 연합정권
5. 동이(東夷)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가? ‘동이’에 대한 인식의 흐름
우리나라 학계 초기 인식>- 산동지역 동이족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1979년 국정 국사교과서→2009년까지)
>>산동반도 – 토광묘 / 요동반도 – 돌무덤(석관묘, 적석총) ==> 대표적 문화지표 異
>>[이(夷)= 중국 중심, 자국 중심의 천하관, 화이관(華夷觀)에서 나온 비하적 표현.
>> 동이족은 시기마다, 인식 주체에 따라 다르게 파악. 즉, 유동적 개념.
① 선진(先秦)시대 - 동쪽 이민족을 가리키는 포괄적 가변적 개념. 황하 중원입장에서, 산동지역의 ‘동이’
② 진(秦) 통일(BC221~BC206) ~ 한나라 때: 산동이 아닌, 요동(遼東) 이민족의 범칭
BC 221년 진시황 중국통일후, 산동 [동이] 지역은 중국 郡縣 民戶로 편입.
⇒ 진나라 가장 동쪽에 위치한 군현인 요동군 동쪽을 東夷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
③ 3C 『삼국지』 이후 : 요동 동이(遼東 東夷)를 하나의 단위로 파악하기 시작 「동이전」
* 동이전 : 중국, 왜 이외의 6개 세력[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읍루, 韓(백제·신라·가야)] 3국으로 통합
<중국의 동북공정과 동이족>
동이족(東夷族)개념은 ....
- 최근 일부 중국학자들 사이 동북공정 논리 적용 대상
- 산동지역의 동이족이 요동과 한반도로 이주해 고조선, 고구려 등의 선조가 되었 다고 주장.
- 한나라 때, 기자 동래설과 매우 흡사.
단군과 고조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단군신화(檀君神話): 삼국유사의 고조선편
단군 신화(檀君神話)는 고조선의 국조(國祖)이자 한민족의 시조(始祖)로 여겨지는 단군에 대한 신화로, 천손강림형 건국신화(건국 서사)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단군 신화의 내용은 1281년 일연이 쓴 《삼국유사》를 출처로 한다. 문헌마다 신화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당장 삼국 유사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은 1287년에 쓰인 제왕운기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아서, 당시까지도 신화의 내용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 《위서》(魏書)에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逹)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요 임금과 같은 때였다."라고 하였다.
2) 《고기》(古記)에는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어서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구하기를 탐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고 가서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웅은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伯山頂)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그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부른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운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니 무릇 인간의 360여 일들을 주관하여 세상에 있으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3) 이때 한 범과 한 곰이 있어서 같은 굴에 살았는데, 항상 신웅(神雄)에게 기도하기를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때 신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20매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이 받아서 이를 먹고 삼칠일(三七日: 21일) 동안 삼갔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지만 범은 삼가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을 맺지 못하므로 매양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바라며 빌었다. 웅이 이에 가화(假化)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배니 아들을 낳으므로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4) 왕검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주(周)나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
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5) 당나라 『배구전(裵矩傳)』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었는데, 주
나라에서 기자를 봉하면서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나라가 이곳을 세 곳으로 나누어 다스렸
는데, 이것이 현도, 낙랑, 대방이라 불렀다.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런 말과 같다.
신화의 역사적 해석
1) 건국 시기: 요(堯)와 같은 때(청동기:기원 전 15세기 경), 건국주체 도음지, 국가 이름 제시
2) 단군 이전의 혈통적 계보: 환인(桓因) - 환웅(桓雄 = 神雄)
환인 – 천신/서자(庶子) 환웅 – 천계 자처, 천부인(天符印)을 받 은 선민(選民)
a) 건국 주체 임재 방식: 천강(天康) *신단수 –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신시(神市) - 제 정일치 사회적 특징
b) 건국 주체 신격화 – 환웅천왕
c) 통치 지향성 – 홍익인간(弘益人間), 통치 명분: 天降(천강: 천부적 권위), 홍익인간
d) 통치 조직: 풍백, 우사, 운사(관료조직을 갖춘 국가로 공권력 유효)
e) 사회 특징: 계급사회 – 무리 3천, 풍백, 우사, 운사의 명칭에서 농경사회였음을 앎
3) 환웅 천강 이전의 모습: 같은 굴에 사는 곰과 호랑이(지신 족속, 유사한 2개 토템 공존, 유 사 종족 연맹체)
a) 환웅 천강 이후 위상변화
- 곰과 호랑이의 간청과 환웅의 일방적 조건 제시(쑥과 마늘/백일과 삼칠일), 불평등 조약 에 의한 수용
- 곰이 여자가 된 것- 불완전성, 비주료로 편입
b) 단군의 탄생:
웅녀: 단수 아래에서의 기원. 天神 환웅천왕(신웅) + 地神(웅녀)의 결합을 통해
c) 단군왕검의 성격: 제사장 + 통치자 겸대) *단군: 壇君(삼국유사), 檀君(제왕운기)
* 고조선의 성립: 天降(종족 이동, 독자성)/선진이주세력 + 후진토착세력의 연맹체
4)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하여)
- 고조선의 역사적 등장, 시기 믿을 수 있나?
- 고조선 건국 연대 의의: 단군왕검에 얽힌 고조선의 건국신화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내세웠다. 단군신화를 통해 고조선은 제정일치 사회였고 농경생활을 하던 부족 연맹체였으며, 사유재산을 인정하던 계급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에 대한 최 초의 기록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이며, 그 이후에도 제왕운기(고려후기 문신 이승휴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서술한 역사서. 역사시), 세종실록지리지, 응 제시주,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상족(商族) 출신이자 상나라 왕실 혈통인 기자가 고조선 지역에 책봉받아 세웠다고 전해지 던 왕조. '후조선'(後朝鮮)으로도 칭했다. 고조선이 사라진 이후, 삼국시대부터 19세기까지 기자조선은 사실로 믿어졌지만 현대에 발달한 연구 방법이 도입된 이래로 기자조선은 고고 학적 발굴과 배치되어 국내 학계에서는 그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대 한국인 들도 단군은 알지만 기자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여기서 실존 불인정은 정확 히 말하자면 '기자 동래설 or 기자 피봉설'을 말하는 것이다. 위만 이전에 있었던 고조선 의 실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자조선이 아닌 토착계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 다. 같은 원리로 한국의 역사학계는 <단군 신화>를 실증적으로는 부정하지만 역시 위만 이 전에 있었던 토착 고조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군 신화가 가지는 몇 가지 의의
‘단군 이래’ - 민족의(정서적) 동질성, 역사적 유구성, 역사 계승, 지속성의 상징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에 있는 동안 다스려 깨우치게 함),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함)은 국가 성립기부터 지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제시됨.
단군 신화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
1) 농경사회
2) 계급사회
3) 교화를 위한 통치 지향
4) 계급 구조로 된 중층적인 구조
고조선은 기원전 2C, 부여는 기원전 3C까지 세워져 700년간 유지 후 위만조선(고조선이 한나라 침입으로 멸망하자 부여가 존재했다.
낭낭군(평양의 한사군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성립되면서 없어졌다.)
고구려의 성립과 영토 확장을 통해 본 국가 성장
삼국의 성립: 한사군을 비롯한 중국의 대외적 압력을 극복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산재하던 소국 연명체를 통폐합하면서 이루어진 것(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을 몰아낼 정도로 세력이 커짐)
고구려 건국 시기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시기는 B.C. 37년, 그러나 주 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에 고구려 일대에는 이미 철기 문명이 도입되어 있어 B.C. 3 ~ 2 세기에는 성장 추세였다. 또 중국의 진, 한(BC 200 – 100년대) 이전의 문헌 기록에도 고구려 명칭 등장했는데 이는 건국 신화보다 1 –2 세기 전에 이미 국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BC 75년에는 현도군을 몰아낼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3. 건국 설화와 환경적 여건으로 살펴본 고구려 건국 및 그 특징
1) 광개토왕비문(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20대 태왕인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 아버지 이자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다.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왕릉의 수묘인 규정 등이 상 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지린성 퉁거우에 위치한다.)
내용: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다.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 상에 강림하였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 혹은 기운이 있었다
2) 삼국사기: 부여왕 금와가 하백의 딸 유하를 만났을 때
a) 유화부인은 수신(水神) 하백의 딸로서 아우들과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웅신 산(熊神山) 아래 압록강가의 집 속으로 꾀어들여 사통(私通)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서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로 귀양보내었다. 여 기서 동부여왕인 금와왕(金蛙王)을 만났는데 금와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방 안에 가두었 다. 방 안에 갇힌 유화의 몸으로 햇빛이 비쳐와 몸을 피해도 계속 쫓아와 비추더니 태기 가 있어서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이 크기가 닷되들이만한 그 알을 버렸으나 동물들이 돌봐 주니 다시 그 알을 어미에게 돌려주고 포대기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다. 알을 깨고 한 아이가 나왔는데 그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인 해모수였는데, 성북 청하에서 놀고 있는 하백의 딸 유화와 인연 을 맺고 하늘로 돌아간다. 이 일로 하여 유화는 하백에게 쫓겨나 있다가 금와왕에게 구출 되고, 후에 해에 잉태되어 1개의 알을 낳는데 이것이 주몽이다. 알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 여 마구간과 깊은 산에 버려지지만 짐승들의 보호를 받고 태어나 어머니에게서 양육된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 불렸는데, 부여 왕의 태자들이 그의 능력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유화는 주몽에게 남쪽으로 가 뜻있는 일을 하라고 한다. 주몽은 계략을 써서 왕실의 준마를 얻고, 세 현우가 함께 길을 떠나 엄체에 이르렀을 때, 그를 도우러 나타난 물고기와 자라들이 만든 다리를 밟고 강을 건너 추격병을 피한다. 주몽은 유화가 보낸 보 리씨를 비둘기로부터 받고, 남쪽으로 내려와 경개가 좋은 곳에 왕도를 정하고 나라 이름 을 고구려라 정한다.
* 단군: 청동기 시대(계급사회)
주몽: 철기 시대(싸움 치열)
주몽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 지역적 출처: 북부여
2) 혈통적, 상징적 출처: 천손(어머니 유하는 농신 혹은 지신, 아버지는 천신)
3) 성장 과정은 물질문명이 훨씬 발달하다 보니 철기 시대의 특징상 경쟁이 훨씬 치열했다.
고구려의 환경적 여건 – 『삼국지』 위서 동이전
1)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과 연못이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해 살면서 산골짜기 물을 식수로 하였다. (게릴라 전에 능통했다)
2) 좋은 밭이 없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우기가 부족했다.
3) 사람들의 성정이 흉악하고 약탈과 침략을 좋아했다. (처음 고구려의 주산업은 수렵이었다.)
4) 길을 걸을 때 모두 달음박질을 했다.
5)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이름하여 ‘부경’이라 했다.
국가 성립 단계의 고구려 발상지와 고구려인의 특징:
압록강 중류 일대
1) 환경적 특징: 높은 산지에 흐르는 하천 유역에 평야가 발달하지 않았다.
방어에 유익, 동서 연결의 교통의 중간적 존재였다. (온열성)
2) 토지 생산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제 상황
3) 생존을 위한 침략을 빈번히 했던 국가의 특징을 가진다.
4) 분지에서 출발해서 농경 국가로 거듭나는데 정복 활동 결과 각별한 영토 의식을 가진 영토 확장을 의한 이념에 충실
당시의 이상적인 지도자 유형: 지도자의 칭호에서 보여주는 영토 의식이 있다
1) 주몽 신화에서 보여주는 무장(전사)
2)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
3) 어떠한 위기에도 극복하는 무장적, 영웅적인 인물
4) 대무신왕은 고구려 3대 임금(재위 18~44)으로,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추모왕(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의 업적을 이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紹承基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왕 호는 '큰 전쟁의 신'이라는 의미다. (국토 개척에 공원하는 군주를 이상으로 했다)
고구려의 성장
1) 고구려의 개국: 4세기 초 국가 성장의 토대 구축
a) 1대 동명왕(주몽): 건국 주역, 압록강 유역 여러지류 일대의 집단을 통합 정벌하며 발전
b) 2대 유리왕: - 외부 침입을 막아내며 국력 신장.
- 천도(졸본(환인)에서 국내성(집안 길림 일대): 적극적인 전투 활동
c) 3대 대무신왕: 부여 왕 참수해 죽임, 정복 활동 활발히 해 진정한 창업주로 여김
d) 6대 태조왕: (AD 1~2세기) 고구려 초기의 획기적인 인물
생몰 47~165/재위 53∼146 향년 119세 재위 93년 추정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는 등 영토를 넓혔으며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 비하여 실질적인 국가의 면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왕위의 독점 세습체제 구축: 계루부 중심의 독점적 왕위 세습체제를 마련해 정 착 시킴,
이로 인해 왕의 위상이 달라지고 고대 국가 면모를 갖춰 太祖 시호가 붙여졌을 가능성이 큼
e) 미천왕대(4C): 서안평 점령(중국 – 낙랑간 연결 차단/고구려의 한반도 진출 교두보 마련)
313년, 314년 각각 낙랑과 대방 축출
중국 漢군현 완전 축출, 황해 일대 접수 – 평양 일대를 비롯한 풍부한 남쪽 농경지 확보
대내적: 천도(졸본 – 국내성/계루부계(해 씨에서 高 씨) 세습체제 구축)
대외적: 인근 사방 지역에 대한 활발한 정복 전쟁 펼침
2) 고구려의 위기의 봉착과 극복
a) 위기의 봉착: 북방이민족(鮮卑 침략해 미천왕의 무덤 훼손하고 5만 노획해 끌고 간 후 백 제 근초고왕 3만 부대가 공격해 와 미천왕의 아들이었던 고국원왕을 살해하 고 평양성을 함락해 위기에 봉착한다.
b) 체제 정비를 통한 국난 극복: 4세기 말 소수림왕 때 체제 정비 주력
사상적으로 불교 공인(소수림왕 때는 국왕 중심 체제 2:372년)
정치적으로 율령 반포(세수 증가, 인구 증대)
태학 설립 후
c) 전체적으로 재위 14년간 국가 위기를 수습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주력해
– 영토 확장 기반 마련
3) 정복 활동을 통한 영토 확장(광개토 – 장수왕): 4세기 말부터 재팽창 정책 추진(수도 천도 해 고구려 최고 전성기를 꿈꾼다.)
a) 광개토왕: 18살에 즉위
정복방향은 북정남벌(北征南伐)
북방 공략: 서북 – 네이멍구 시리무렌강 거란 정벌/서 –대륭하 중류(조양일대)
- 북경 경락, 후연 멸망 초래
동북 – 숙신, 동부여/북부여(길림 일대)
남방 공략 = 백제 공략: 관미성(강화일대)을 포함한 10성 탈취 - 백제 공략 교 두보인 한강 하류 확보
396년 수군을 이끌고 백제 한성 공략 – 아차산 일대 58성 700촌
* 광개토왕 대 정복 활동 특징: 고구려 성장판 마련
거점 연결은 통한 면적 확대
균형 어린 경제 구조 구비 후 동북아 패권 확립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좌우하는 4강의 하나로 부상(남조, 북조 유연)
b) 장수왕 - 남방 진출의 적극화(나라의 차원을 달리 만든 광개토왕의 적장자)
- 427년 – 평양 천도/469년 – 백제 한성 함락, 개로왕 전사
- 영역 – 요동~한강 이북 – 5세기 후반 (북 – 송화강), 말갈, 거란 일부 복속
장수왕의 남하 정책 평가:
* 긍정적인 면: 직권적 국가/고구려의 제 2 전성기
장기 집권으로 체제 안정화를 통한 왕권 강화
등거리 외교의 귀재(남북조와):외교의 성과로 전쟁의 위협으로 해방
평양 일대를 접수한 것은 그 이전이지만 장수왕의 평양 천도 후 농경 문화의 중심을 경험(비옥한 남방 지역의 진출했고 북경까지 갔다 왔지만 치고 빠졌으며 강물을 통해 곡식을 나르기 쉬워졌다.)
특히 평양을 수도로 정한 후 경제적 풍요 확보해 문화적으로 농경문화 중심됨
고구려의 문화가 세련되어짐(문화, 제례 발달)
영토 확장 등으로 백성들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해줌.
* 부정적인 면:
신라를 자극해 백제와 동맹을 맺게 한다. (나제 동맹 433년)
이 동맹을 통해 신라가 한강을 수복해 결국 고구려 멸망을 앞당기게 한다.
북방 경계 의식이 약화 되어 수당 침략의 계기가 된다.
장수왕의 피의 숙청이 있었다.
고구려의 멸망 요인
외부적 요인
1) 다양한 여러 나라와 전방위적 전쟁 노선이 구축되어 항상 전쟁 위기에 노출
장기간 다양한 전쟁에 노출, 특히 북방의 한족, 이민족과의 전쟁
2)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연개소문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적인 외교 노선이 강경 노 선으로 선택됨: 이러한 외교적 탄력성을 상실
예)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에게 원조를 신청하지만 고구려가 거절 하자 신라는 당에게 원조를 구함.
백제와 신라 관계에도 강경 노선 선택
2. 내부적 요인
1) 연합 정권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2) 호국 불교가 약화되고 도교가 강화되면서 점차 왕권이 약화됨
3) 연개소문 사후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기면서 고구려 내부의 지배 세력이 분열되어 당나 라에 투항하는 임금이 나타난다. (충 자 돌림의 국왕들)
백제의 멸망 원인
외부적 요인
1) 한강 상실 이후에 이성 상실한 전투를 치르다 백성의 민심을 잃게 된다.
2) 매번 동맹 관계를 활용하는데 실패했다.
3) 대중국 정책의 실패(외교 실패)
2. 내부적 요인
1)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 후 천도할 때마다 지배 세력이 바뀌면서 왕실 중심 정치 구도를
추구하기 위해 왕실 식구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며 지배 세력의 신임을 잃는다.
2) 또한 한강을 상실한 후 왕권이 취약해져 권력이 지나친 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하려는 움직 임 때문에 내부 통합에 실패한다.
신라는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었나?
신라가 한강을 복속한 5세기 중반 이후부터 7세기 까지 신라가 부흥해 전성기를 맞는다.
신라의 성장기에 용감하고 젊은 화랑을 내세워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신라는 화랑의 죽음을 이용해 백성들을 선동했고 화랑의 에너지를 이용해 백제를 치려했는데 화랑은 집단 싸움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신라는 토착 신앙이 강해, 6세기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불교를 받아들이며 도심 한가운데 목탑을 세워 각층마다 “예와 맥”을 써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한다. 신라는 호국불교를 민심을 모으고 왕권을 강화해 체재를 정비하는 호국불교를 재활용했다.
신라가 가야의 철기문화를 수렴한 후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을 치를 때마다 화랑도, 불교를 적절히 활용해 승리함으로써 경제적, 정치적으로 안정기를 맞는다.
적절한 외교술을 발휘한다. (백제와의 나제 동맹), (당나라와의 나당 동맹)
신라는 삼국통일 후 당나라와 7년 정도 전쟁을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설득해 당나라를 몰아 내는데 참여시키며 결국 평화를 성취한다.
삼국통일의 한계
1) 백제나 고구려의 일부 지배층을 수용하나 가장 영토가 큰 나라인 발해지역인 만주 지역을 우리 영토화하는 데 실패했다.
2)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철저히 중국 쪽으로 기울어져 한 민족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1) 전쟁이 종식되어 평화가 도래한다.
2) 고구려, 백제 유민이 참가하는 대당 전선을 형성해 “하나”라는 초보적 한민족 의식이 형성 된다.
3) 지배층이 감소하고 영토가 늘고 인구수가 늘어 세금을 많이 거둬 들이며 제정적 여유가 생 겨 문화적 부흥기를 이끌어 낸다.
4) 엄청난 인재풀(인적 인프라)이 신라에 모여들며 국가 성장의 동력이 된다.
신라말 정치 사회 변동과 후삼국 성립/ 고려 건국
신라말 정치사회 변동 – 신라의 붕괴 배경(상대 신라, 중대 신라, 하대 신라 중 하대 신라때부터 신라는 약화되기 시작한다.)
1) 정치적
a) 지배 계급의 분열과 타락: 중앙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 정치 혼란 지속되 었으며 혜공왕 시해 이후 150여년이 넘게 귀족들 간에 지속된 왕위 다툼이 있었다.
* 혼란의 원인: 골품제의 한계가 지배층의 혼란을 이끌었다.
b) 통치 방식의 문제: 왕경(王京경주) 중심의 국가 운영
c)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d)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을 자국민으로 끌어안지 못했다.
e) 통일 후 인프라를 국가 동력으로 삼지 않았다.
2) 경제적
a) 귀족에게 유리한 토지 제도(녹읍제) 부활
b) 대토지 소유 확산(개간으로 면세 특권을 누린다.) – 부(富)의 편중
3) 사회적
a) 유민 발생: 불법적 토지 점탈, 약탈, 고리대를 통한 백성 점유
b) 대민 착취 심화로 인한 농민의 저항: 농민 봉기의 촉발 계기가 된다.
진성 여왕 3년(889) 공부(貢賦: 세금) 독촉
4) 새로운 세력 등장 – 호족 세력/육두품 세력/선종(禪宗:불교) 세력
a) 호족 세력이란: 자신들의 거점을 중심으로 무장력과 경제력을 갖춘 세력
1) 왕위 쟁탈전에서 탈락해서 지방으로 낙향한 사람들
2) 촌주로서 실력을 쌓아 특정성을 차지한 사람(상주의 애노의 반란 등)
3) 무장 계층이 특정 지역 점거
4) 해상 활동을 통해 부를 축척(예: 왕건의 아버지)
b) 호족들이 이합집산하는 차에 후삼국이 성립: 백제나 고구려의 유민들을 관리하지 못한 까닭에 이들이 호족 세려과 합세해 후삼국이 된다.
2. 궁예, 견훤, 왕건의 성패 요인과 고려 건국
1) 궁예(弓裔)의 성패 요인: 궁예는 왕족 출신으로 정치적 희생양이자 천륜으로부터 버림을 받 았으며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a) 성공 요인: 1) 무장 능력으로 성과물을 냈을 경우 사졸들과 침식을 같이 하며 전리품을 공유함으로써 민심을 샀다.
2) 승려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3) 신라에 대한 반 신라적 감정을 이용해 세력을 형성했다.
4) 옛고구려의 유민에게 반 신라적 감정을 가지게 유도했다.
5) 난세에 메시아를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을 이용해 궁예는 “나는 미륵이 야.”라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백성을 위로하는 능력이 있었다.
6) 타고난 군사적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b) 실패 요인:
1) 전제적 급진적 정책 추진-성급한 중앙 집권화 정책 추진해 독자 세력권을 가진 호족 들의 저항에 부딪힌다.(조급증, 불안증으로 성급하게 중앙 집권화를 추구했다.)
2) 세력 기반이 취약해진다.
3) 다양한 지식인층 포섭 실패
4) ‘미륵’ 자처 – 미륵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신정(신정) 정치의 한계.
5) 복잡 다양한 성격
6) 신라에 대한 극심한 적대 의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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