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나의 성공담 중 하나를 썼으니, 오늘은 나의 실패담 중 하나를 쓰고 싶어졌어요. 과제가 아니므로, 개요 쓰기 없이 그저 생각대로 쓰는 맛을 즐겨 볼까요?
처음 방콕에 도착했을 때 언어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죠. 현지 소식을 알아야 하는데 도무지 알 길도 없어 용감하게 Bangkok Post지를 샀어요. 헤드 라인도 읽지 못했죠. 국립 대학을 4년이나 다녔는데 신문의 헤드 라인 조차 읽지 못하는 제가 참 한심했어요. 그때 영어가 삶의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죠. 일하는 틈틈이 일본어와 태국어는 물론이고 현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영어 학원을 다녔어요. 패턴식 공부이기에 쉽게 실력이 늘지 않았어요.
귀국 후, 당시 전문 투어 에스코트였던 동창생에게 조언을 구했죠. 영어 공부를 해야겠는데, 영국, 미국 어느 쪽이 나을까 했더니, 영국은 인종 차별이 심하고 미국은 좀 위험하니 호주의 시드니를 추천하더군요. 종로의 한 유학원을 통해 학교를 결정했고 6개월분의 학비를 내고 시드니에 있는 랭귀지스쿨에 등록을 했어요. 입학날짜에 맞춰 항공권과 시드니에 도착하면 머물 2달 분의 쉐어하우스 경비도 미리 지불했죠.
제 주머니가 두둑할 때라 별걱정 없이 출국 날짜를 기다렸는데, 악마의 속삭임, 출국할 때까지 현금을 좀 융통해주면 어떻겠냐는 함께 근무했던 여행사 사장이 통사정을 하는 거예요. 어차피 시드니에서의 생활비라서 잠깐 쓴다 하니 의심 없이 2000여 만 원의 현금을 빌려 줬어요. 방콕 생활에 도움을 많이 주었던 분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나 출국 날짜가 되어도 감감무소식, 오히려 제가 통사정을 했겠지요. 방콕을 경유해서 시드니에 간다면 방콕 사무실에서 돈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방콕 경유 항공권으로 바꿨죠. 수중에 남아있던 돈 159달러만 가지고 방콕에 도착했어요. 입학날짜는 다가오는데, 피가 마른다는 말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어요. 줄 사람이 안 주는데 제가 무슨 수로 받아내겠어요. 남아있던 150여 달러의 현금만을 소지한 채 저는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어요. 불안했지만 또 어떻게든 되겠지, 한숨을 쉬면서도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죠. 뒤뚱거리면서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랭귀즈스쿨에서의 공부는 참으로 재미있었죠. 주로 대만, 일본, 한국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설 학원이었는데 담당 교수님은 야간엔 클럽에서 드럼을 연주했어요.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재즈라는 것을 접했고 재즈라는 음악은 지금도 제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답니다.
수업 방식은 가령 마이클 잭슨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 보시오, 라는 식으로 무조건 입으로 영어를 발설하는 훈련이었어요. 문법은 서서히 익혀갔죠. 초보 에세이 쓰기도 병행했는데 6개월 수업을 마칠 즈음엔 “Sudden Trip”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완성할 만큼 빠르게 실력이 늘었지요.
돈, 돈이 문제였어요. 결국 빌려주었던 돈은 받을 수 없었고, 전 도착 후 2달부터는 돈을 벌어야 했죠. 30대 초반, 그러나 예쁘거나 상냥하지도, 혹은 약삭빠르지도 못했던 저는 한인 가게의 면접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마셨죠. 영어도 서툴던 때라 현지인이 경영하는 가게의 면접은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수중에 남아있던 몇 푼이 바닥이 나던 날,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란 5불짜리 차이니즈 푸드를 테이크 아웃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죠. 며칠 배를 곯아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여요.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술집에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 못생긴 외모 덕분에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하튼 어느 날 한인 식당에서 주방 보조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식당에 찾아갔어요. 주방 보조라면 설거지나 야채를 다듬는 정도의 일을 하겠지 추측했지만 그곳에서 원하는 주방 보조는 일체의 음식을 조리하고 사장이었던 주방장은 요리의 간만 보는 거였어요. 설거지는 한국인들보다 임금이 저렴했던 중국 유학생들 몫이었는데 저는 살아남기 위해 요리를 한 경험이 많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한 푼이 아쉬웠던 처지였던지라, 그리고 일 주일 만에 쫓겨났어요.
다행히 일본인과 결혼했던 한국 유학생 중 하나가 제 딱한 처지를 알고 자기 가게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어요. 6개월의 랭귀지스쿨을 마치고 학생 비자 연장을 위해서 돈도 없는 제가 비즈니스 칼리지에 입학했어요. 학비를 어떻게 마련했냐고요. 출국 당시 친구의 남편이 막 시작한 LG카드사에 근무했는데 당시 카드사 직원들은 직원들 몫으로 몇 장의 카드 개설 실적을 내야 했어요. 제가 출국한다니 혹시 모르니 카드 개설을 하라 해서 비상용으로 만들었거든요. 바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칼리지 입학을 할 수 있었고 저는 그대로 신용불량자가 되었어요.
칼리지에 다니며 시드니 번화가 중 하나인 킹스 크로스 한인 선물 가게를 찾아갔죠. 방콕에서 3년 동안 여행사를 다녔는데 혹시라도 여행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으면 제 경험으로 모든 걸 도와줄 수 있으니 저에게 소개해 달라고 했죠. 참 대담한 시도였고 방콕에서 안면이 있었던, 좀 더 솔직 하자면 제가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었던 사람에게 연락을 했어요. 나를 매개체로 시드니엔 현지 여행사, 서울엔 여행사를 상대로 현지 여행사의 상품을 홍보 판매하는 중계업자, 일명 랜드사를 꾸리게 했어요. 그 시도는 얼마간 성공적이었고 저는 공부하는 틈틈이 또 돈을 벌 수 있었죠.
1년 후 저는 독립을 해서 그 남자의 서울 랜드사를 믿고 제 이름 하에 현지 여행사를 설립했어요. 물론 학교 공부는 건성건성. 공부보단 돈을 먼저 벌고 싶었으니까요. 이때 서울 랜드사, 앞으로는 Mr. Lee라고 표기할 그 남자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어요. 그것도 하필 친하게 지내던 서울 랜드사의 직원이라니, 무려 4년을 짝사랑했던, 그러나 한 번도 티를 내지 못했던 남자의 결혼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캔터베리의 장터라는 술집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 화장실에 가는 척 집으로 돌아오려다 그만 술집 2층 철제 계단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졌죠. 워낙 취해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까닭으로 큰 부상은 아니었고 이튿날 깨어보니 몇 군데 멍이 들었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해요. 제가 어떻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왔는지 도무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술자리에 동석했던 동료들은 저를 찾느라 우왕좌왕 거리를 헤맸다는 후문도……
계획대로 돈은 벌렸고 렌트 하우스의 격이 달라졌죠. 시티에 수영장 딸린 빌라에 살 정도로 나름 성공했으니 이참에 아예 시드니 대학에 다닐까, 풍선처럼 부푸는 꿈은 하늘을 날기 시작했어요. 회사 또한 막대한 자금, 한 달 매출이 억, 억 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고 현금 유동성이 활발하니 은행에서 크레딧을 줄 만큼 번창했어요. 바로 그 지점에서 사고가 터지고 말았으니 인생이란 늘 복병을 사방에 감추고 시시때때로 공격할 틈을 엿보는 것 같아요. 겸허하게 살지 않으면 그 복병이란 놈에게 사정없이 휘돌릴 수도 있어요.
억, 억 매출을 기록하니 Mr. Lee는 저에게 보내야만 하는 현금을 손수 가지고 서울에서 브리스 베인을 거쳐 오다가 그만 골드코스트의 카지노에 들락거리게 되었고, 저는 그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비록 남의 남자가 된 그였지만 그를 향한 저의 마음은 여전히 그의 잘못된 선택의 고리에 엮일 수밖에 없었던 운명! 현금 유통이 안 되고 은행의 크레딧도 막히고 시드니 타워 옆 가장 높은 건물 21층의 스튜디오에 살았던 저는 보증금과 살림 도구를 팔아 귀국행 비행기표를 겨우 구했답니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여행사 직원으로 취직은 했지만 서울 신촌의 옥탑방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겨우 마련한 정도였으니, 이 정도의 찬란한 실패담은 그 후 제 인생의 서곡에 불과했던 셈. 거듭된 실패들이 느리지만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으니, 그 후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이 글을 읽는 독자 누군가는 이것이 궁금하겠어요. 그 후 Mr. Lee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는 그의 아내와도 무척 친했거든요. 저를 언니처럼 따랐고 저 또한 여동생처럼 알뜰이 챙겼는데 결국 그의 도박벽으로 가정이 깨지고 이혼을 하게 되었어요. Mr. Lee와는 소식이 끊겼지만 그의 엑스와이프와는 귀국 후에도 종종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재혼한다는 연락을 받고 엑스와이프의 결혼식장에 가기도 했어요. 재혼 초에는 이런저런 소식을 보내오더니 어느 날부터 소식이 끊겼어요.
50대 초반, 골프 연습장에서 연습 샷을 날리고 있는데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짜증이 나는 찰나, 참으로 오랜만에 낯익은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쿵, 하고 뭔가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 재혼했던 Mr. Lee의 엑스와이프였어요.
“언니, 기영이 아빠가 방콕에서 죽었어.”
그들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고 그 아이의 이름이 기영이였거든요. Mr. Lee는 결국 끊임없는 도박으로 가세를 탕진하고 본가의 형제들에게 마저 손해를 끼치더니 방콕의 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 며칠은 무척 마음이 아팠어요. 그 사고 후, 그는 그가 가없이 좋아했던 푸켓의 어느 바다에 뿌려지고 아마도 파도에 이리저리 몰리며 나지막한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만 같아요.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그가 특히 좋아했던 노래였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기억 속의 그가 늘 부르는 노래이기도 해요. 그 후 Mr. Lee의 엑스와이프, 다른 남자와 재혼한 그녀가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갔어요. 저를 못 알아보더군요. 마음이 너무 아파 돌아왔는데 얼마 후 그녀마저도 이승의 소풍을 마감했단 비보를 접했어요. 저보다 7살이나 적었는데도.
이만큼 살아보니, 나쁜 기억도 아팠던 실패도 내 인생에 많은 영양소를 제공했던 비료와 같단 생각이 들어요. 절대 과거를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오히려 성공보다 연속된 실패들이 더 예쁘고 찬란하며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고요. 어떤 세상사라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다면 아니 좋은 것은 없다, 제가 실패들을 통해 경험한 것은 바로 이것이랍니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끊임없이 고민하고 개선하면서 경험하는 실패들은 늘 희망과 기대를 낳아요. 치열하게 실패했을 경우에야 비로소 보이는 희망, 그것이 인생의 신비가 아닐까요?
이순(耳順)에 이르러 이승의 소풍을 마감한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저조차도 자주 두려움과 불안에 몰릴 때가 있어요. 교수님에게 꼬투리 잡히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할 텐데, 어린 학우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일은 없어야지, 나름 심혈을 기울여 제출한 과제가 혹여 핀트가 안 맞는 것은 아닌지, 바빠 미쳐 연락에 소홀한 친구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는데, 어떤 일로 묶인 동반자들에게 보인 단호한 내 태도에 오해라도 생길까, 가끔 남편에게 모자란 내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부담감 등등. 아주 아주 소소한 것들이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을 잘 해내지 못하는 현실 속의 미흡한 나에 대한 자각은 가끔 혼자 눈물짓게도 해요.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말이죠. 아직도 배우고 깨달아야만 하는 많은 것들, 잘 해낼 수 있을까, 끊임없이 물으면서, 하루하루가 아름답기도 또 버겁기도, 그러나 나를, 더 나아가 너를 믿는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 아직도 성장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구나, 라는 생각이 위안이 되는 아침, 그대들은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지내는지요?
오늘은 목요일 수업이 없는 날이기도 해요. 오전에 동화 쓰기 모임에 참석했다 오랜 친구를 만나 점심을 하고 산책을 하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설레요. 우리의 수다의 장이 될 아주 아주 예쁜 카페도 기대되고요.
아침상을 준비하는 남편의 달그락거리는 소음조차 감미로운 시간, 고마워요. 고마워요, 가만가만 속삭여요. 조물주에게, 그대에게, 나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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