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정은,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로 등단하여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제3회, 제4회 젊은작가상, 제5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집어보니 나는 그녀의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가장 최근의 ,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 까지를 읽어왔다.
황정은,
설렘으로 그녀의 소설을 만나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문체에 질투가 나고, 우릿하게 저며오는 감동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일상의 소소한 부분을 헤집어 인간 내면의 은밀한 부분들을 엿보게 만드는 그녀의 능력,
오늘의 책 <아무도 아닌>에서도 또 한 번 경험하게 한다. 어찌 그리,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의 루저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쓸 수 있을까? 그녀는 인생을, 인간을 누구보다 심도 있게 사유하며, 어쩌면 경험한 것이 아닐까?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황정은이라는 한 인간이 무척 궁금해진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는 예전부터 좋아했던 단편 ‘상류엔 맹금류’ 뿐만 아니라 ‘누가’라는 단편과 ‘웃는 남자’ ‘복경’등이 좋았다.
인상적인 구절들...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웃는 남자)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복경)
<책 소개/출판사 제공>
황정은의 세번째 소설집 『아무도 아닌』이 출간되었다. 『파씨의 입문』(창비, 2012) 이후 4년여 만에 펴내는 소설집으로, 2012년 봄부터 2015년 가을까지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이중 「上行」 「상류엔 맹금류」 「누가」 등은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이미 평단과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아온 작품들이며(차례로 2013년 젊은작가상, 2014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4년 이효석문학상 수상. * 「양의 미래」는 2014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나 차후 반려), 소설집 가장 마지막에 실린 「복경」은 한 신문의 칼럼을 통해 서비스직의 감정노동 문제를 다루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펼쳐지는 계급적 경험과 파토스를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으로 언급되며 주목받은 바 있다.(오혜진, 한겨레, 2015. 5. 24.)
요컨대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들이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 전부터 이미 활발하게 읽히고 회자되어왔다는 뜻이다. 이는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이 차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며 살아야 했던 시기에 쓰였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이 세계의 시민이자 작가로서 황정은이 그 시간을 정직하게 통과해오면서 놓지 않았던 고민의 흔적과 결과들이 특유의 낭비 없이 정확하고 새긴 듯 단정한 문장들로 남았다. 그러므로 여덟 편의 작품을 한데 모아 읽는 일은 단순히 훌륭한 예술작품을 경험하는 것을 초과하여, 지금 이 순간 바로 인간이라는 삶의 자리에 독자인 자신을 다시금 위치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전에 출간되었던 작가의 책이 그러하듯, 『아무도 아닌』 또한 가급적 작품으로만 남으려는 작가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는 만듦새를 하고 있다. 책날개에는 출생년도와 수상 이력, 이제까지 펴낸 책 등으로 요약되는 작가의 약력이 아니라 그저 이름 석 자만이 적혀 있으며, 작품들의 의미를 분석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해설 또한 실려 있지 않다. 표지 뒷면은 으레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작가나 작품에 대한 수식들이나 추천사 대신 본문 중에서 발췌된 문장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만듦새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책의 제목을 더욱 명징하게 만들면서 그 의미를 계속해서 헤아려보도록 이끈다. 틀림없이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는 말일 테지만, 어떤 의미로는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책의 앞쪽에는 작가의 말로도 혹은 제사로도 읽힐 수 있는 단 한 줄의 문장(“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5쪽))이 적혀 있는데 이는 어떤 특정한 의미로 이 말이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는 듯하다. 예컨대 흔히 사용되는 것처럼, 그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 보잘것없으니 무시해도 좋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뜻과는 닿지 않을 것이다. 이에 힘입어 “아무도 아닌”의 의미를 한정해보자면 말 그대로 무(無), 즉 존재의 확정을 부정하는 뜻에서 혹은 행위의 주체가 없다는 뜻에서 ‘아무도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희미해져야만 오히려 또렷해지는 듯이 보이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명실」을 살펴보자. 이 작품의 발표 당시 제목은 “아무도 아닌, 명실”로 소설집의 제목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명실’은 생전 단 한 권의 책도 낸 적 없는 작가인 ‘실리’를 추억하며 그녀가 남긴 수만 권의 책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펼쳐보지는 않은 채로 말이다.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결핵에 걸려 폐가 좋지 않았던 실리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떴다. 명실은 실리에 대해 듣고 읽어온 이야기들을 기록해보려고 하지만 그것들은 파편들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길을 걷다가 어디선가 할머니, 라고 부르는 상인의 음성에 깜짝 놀라며, 그것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정도로 늙어 있다. 또한 누군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다가 일어서 나간 것처럼 모로 살짝 틀어진 의자를 보며 거기에 앉아 있던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지만 이를 낯설게 느낄 정도로 늙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용한 지 오래되어 굳어버린 실리의 만년필을 찾아 펜촉을 따뜻한 물속에 담가두고 이제는 정말 쓸 준비를 한다. 잠시 내려놓아 섬뜩하도록 차가워진 만년필을 다시 손에 쥐고 체온과 같아져 이물감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며 무언가를 쓰고자 한다. 쓰려고 마음먹은 시간 사이로 언젠가 실리가 들려주었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이야기, 실리와 밤배 위에서 본 집어등의 불빛들, 실리의 죽음과 곧 명실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 등과 같은 상념들이 끼어들지만, 그녀는 마침내 쓴다.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노트에 만년필을 대고 잉크가 흐르기를 기다렸다. 제목을 적고 쉼표를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명실」, 110~111쪽)
아무도 아닌 존재, 그러한 명실이 쓰는 것. 그것은 아마도 황정은이 써왔고 또 쓰고자 하는 것일 테다.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 그리고 망할 듯 망하지 않는 압도적으로 폭력적인 이 세계. 결코 떨쳐낼 수 없는 그 절대적인 조건을 가지고서 황정은은 쓴다. ‘오제’와 함께 시골에 내려가 고추를 따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이야기 「上行」, 지하에 있는 서점에서 일하던 ‘나’가 실종된 소녀의 목격담을 고백하는 이야기 「양의 미래」, ‘나’가 한때 연인이었던 ‘제희’의 가족과 함께 수목원으로 나들이를 갔던 날에 대해 회상하는 이야기 「상류엔 맹금류」, 조용한 집을 원해 이사했으나 이상한 소음들에 시달리며 이웃들을 무서운 방식으로 체험하는 이야기 「누가」, 외환위기가 발생한 바로 그 시기에 바르샤바를 여행하는 부부의 이야기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로 시작하여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해왔다”로 끝맺고 있는, 작가 스스로 화자가 “인간과 짐승의 기로”(문지 이달의 소설 2014년 10월 인터뷰 중)에 서 있다고 했던 이야기 「웃는 남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적인 두 가지 조건 때문일까. 황정은의 소설세계가 가진 조도(照度)는 어쩐지 희망보다는 어둠 쪽에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어둠은 완전히 닫혀버린 문처럼 막막한 것이 아니라 그 틈새로 아주 간신히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처럼 어슴푸레하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작품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작가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두 가지 조건을 공유하는 독자가 이야기를 읽으며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바람 같은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아주 작은 불빛이라도 떠올리고 그것이 존재를, 또 세계를 약간만이라도 밝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지금, 『아무도 아닌』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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