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취향으로 문장이 유려해서 읽고 있노라면 질투가 일어날 정도의 미문들에 파문이 이는 소설들, 혹은 산문들 읽기를 좋아한다.
오늘의 책 마그누스는 이런 류의 책에 속한다.
또한 퍼즐의 조각들을 꿰어야 하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줄거리를 가진 책,
마그누스(Maguns/실비 제르맹 장편소설/문학동네)
책소개(알라딘 제공)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는 실비 제르맹의 장편소설. 제르맹은 독창적인 형식과 우아하고 섬세한 문장 그리고 신비주의에 기반을 둔 독특한 감성으로 프랑스 독자들에게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마그누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한 소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인 '악의 수수께끼'에 더불어 무력한 개인이 세계의 거대한 폭력과 악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독일에서 시작해 영국, 멕시코, 미국, 다시 독일로 이어지는 소년의 길고 긴 여정은 비극적이고 참혹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마그누스>는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이후 두 번째로 출간되는 실비 제르맹의 소설이다.
2005년에 '고등학생들이 선정하는 공쿠르상'을 수상하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이 상은 프랑스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문학상인 공쿠르상의 후보에 오른 작품들 중 15세 이상 18세 이하의 연령대로 이루어진 심사위원단이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책 속 인상적인 문구들...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아무도 모르게 가만가만 들려온다. 세상과 타인들과 나 자신에 관한 뜻밖의 정보를 전해주는 미심쩍은 목소리, 조금만 귀기울여도 들을 수 있는 목소리다.
글을 쓴다는 것은 프롬프터박스로 내려가, 단어들 사이 혹은 주위에서, 때로는 단어들 한복판에서, 언어가 침묵하며 쉼쉬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12 – 13쪽)
“I have a dream.” 꿈은 현실로 들어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여차하면 현실 안으로 난폭하게 들이 닥칠 수도 있다. 꿈은 현실이 비루함과 추함과 어리석음의 진창에 빠져들 때, 이 현실에 빛과 에너지와 참신한 무언가를 불어넣기 위해 존재한다, 사랑의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의 심장박동 소리가 메이 안에 지칠 줄 모르는 활기와 대담성은 물론 속박으로부터 완선히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촉발한 것이다.(135쪽)
메이 앞에서 마그누스는 하느님의 문제를 들먹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어서 부정이 전부였으며, 절대적인 無만이 존재했다. 그녀가 보기에 모든 종교는 이 공허를 미화하거나 장식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방식이 다소 거칠거나 세련되다는 차이는 있을망정 현기증이 날 만큼 엄청난 이 공허를 은폐하는 데 하나같이 몰두하고 있었다. 땅과 우주,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기이한 우연의 열매일 따름이다. 탐스럽지만 독이 든 열매들이다. 그녀가 인정하는 신성한 목소리는 오로지 살아 있는 자들의 심장에서 들리는 어렴풋한 박동 소리뿐이었다. 환희에 찬 삶의 시간, 어두운 고뇌의 시간, 기쁨으로 환히 빛나는 순간에 믿기지 않을 만큼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151쪽)
두 사람은 도버 절벽 위에서 일어난 비극을 그 후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마그누스 역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 저마다 자신이 짊어진 시간의 무게를 조심스레 감당한다. 그들은 그 무엇도 부인하거나 삭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전부 털어놓고 싶다는 소망은 헛된 것임을 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상대방 없이, 상대방과 관계없이 경험한 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이 사랑이든 증오든 간에.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현재이며, 각자의 과거 역시 이 현재의 눈부신 그늘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낼 따름이다.(208쪽)
마그누스는 다시 한번 제로에서 출발한다. 고모라 작전이 펼쳐지던 시간, 그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계 문자판에서 영원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그 시간처럼. 그런데 이 제로의 시간은 강렬한 추억으로 가득하고 喪의 슬픔으로 납빛이 된 시간일 뿐아니라, 회환과 무력감으로 바싹 마른 시간이다.
절대적인 無가 그의 안에 자리잡는다. 어떤 질서나 빛도 창조해내지 않는 이 무는 그의 영혼에 무질서와 먼지의 맛만 남겨 놓는다. 수치심과 회한을 단번에 떨쳐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243쪽)
마그누스의 동면은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도록 오래 지속되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거나 수동적인 상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감지되지 않는 느릿느릿한 작업으로 꽉 찬 동면이다. 그는 하루하루, 매 시각, 시간의 불순물이 가라앉도록 내버려둔다. 침식작용이나 동굴 속에 고드름이 형성되는 작용과도 흡사한 작업이다. 광기에 가까운 인내와 집중, 사고의 연마를 요구하는 작업, 자아를 벗어던지는 행위다.(249쪽)
이 모든 이름들이 느리게 원무를 추며 지나간다. 둘씩 혹은 하나씩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한 차례 속삭임이, 한숨이 새어나온다. 흐느낌이. 메이, 페기......
백색 혹은 회청색 목소리의 단어들이 행렬을 짓는다. 황톳빛 혹은 보랏빛 웃음소리와, 상아색과 등황색 숨결이 깃든 단어들이다. 각각의 이름이 고유의 혈색과 외양과 음색을 지닌 채 가볍게 떨린다. 간혹 불규칙한 진동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저마다 자신만의 광채와 독특한 울림을 지닌다. 때로 한 차례 서광처럼 번쩍인다.
행렬이 돌고 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이름은 부재한다.(262쪽)
실비 제르맹 (Sylvie Germain)
1954년 프랑스 샤토루에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81년부터 틈틈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1984년 장편소설 『밤들의 책』으로 여섯 개의 문학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역사에 뿌리를 둔 구체적이면서도 상상력 가득한 작품세계를 창조해왔다. 『마그누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숨겨진 삶』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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