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여우굴을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 반 년을 나를 잃고 살았다. 아니 무엇인가에 홀딱 나 자신을 내던지고 싶었고, 다행이도 그것은 재즈라는 음악이었다. 그것에 빠져들수록 더 깊숙이 미끄러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 저변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그것뿐 아니었다. 내면에 숨어있었던 것들, 그건 글쓰기라는 것이 최 우선이겠지만, 재즈 이외에도 잊고 살았던 아리아와 클래식 음악들이었다.
주말,
신샘의 도움을 받아 오디오를 다시 설치하고 오랜만에 듣는 샤티의 사라방드와 짐노페디를 듣는데 눈물이 날 지경, 내친김에 글렌 굴드까지.
이젠 균형잡힌 나의 음악생활을 위해,
아리아와, 클래식 곡들을 블로그에 포스팅하자.
내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더 다양한 나를 색칠하기 위해!
짐노페디
요약 세 곡으로 구성된 〈짐노페디〉는 사티의 대표적인 초기작품으로, 1888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전체적으로 애조를 띠고 있으나 지나치게 어두운 음향은 아닌 것이 특징이다. 단음으로 이루어진 선율은 느리고 단순하지만, 선법적인 요소, 그리고 베이스와 만들어내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특징적이다.
몽마르트의 짐노페디스트
군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느낀 사티는 일부러 스스로 기관지염에 걸리게 하여 전역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887년 몽마르트로 이사했는데, 사티는 이곳에서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파트리스 콩떼미뉘와 알게 되었고, 몽마르트의 카페 겸 카바레였던 르 샤 느와르의 단골이 되었다. 사티는 여기서 클로드 드뷔시와도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몽마르트의 이러한 환경에서 비로소, 그는 19세기 ‘살롱 음악’과 단절한 첫 작품인 짐노페디를 출판한다.
이 곡은 콩떼미뉘(J. P. Contamine de Latour, 1867~1926)의 다음 시를 기초로 작곡되었다:
비스듬히 그림자를 자르고 명멸하는 회오리
밝게 빛나는 판석 위에 금빛으로 흘러넘치네
호박색 원자들이 서로를 불 속에 비추면서
짐노페디아와 사라방드를 뒤섞어 춤추네
- 콩떼미뉘, 고대인
Oblique et coupant l'ombre un torrent éclatant
Ruisselait en flots d'or sur la dalle polie
Où les atomes d'ambre au feu se miroitant
Mêlaient leur sarabande à la gymnopédie
- J. P. Contamine de Latour, Les Antiques(The Ancients)
사티의 말에 따르면, 이 시와 곡은 플로베르의 ‘살람보’라는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콩떼미뉘가 이름붙인 ‘짐노페디’라는 제목의 의미는 명확치 않다. 그리스어로 gymnastique는 체조를, paed는 아이를 뜻하는데, 18세기 장 자크 루소는 ‘음악사전Dictionnaire de Musique (Paris: Duchesne, 1775)’에서 이 단어를 ‘고대 스파르타에서 젊은이들이 나체로 춤을 추는 의식’으로 소개한 바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당시 무명이었던 콩떼미뉘와 사티는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 이국적인 인상을 주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있다. 1887년 12월 사티는 르 샤 느와르의 감독에게 스스로를 소개해야 했는데, 당시 직업적으로 유명하지 않았던 사티가 자신을 ‘짐노페디스트’(gymnopédiste)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작곡과 편곡
짐노페디는 사티가 스스로를 짐노페디스트로 소개한 후 2개월 후인 1888년 2월 작곡을 시작해 4월 완성되었다. 1888년 8월 콩떼미뉘의 시와 함께 첫 짐노페디가 출판되었다. 사티의 곡에 콩떼미뉘가 시를 붙인 것인지, 콩떼미뉘의 시를 바탕으로 사티가 곡을 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같은 해 세 번째 짐노페디가 출판되었는데, 정작 두 번째 짐노페디는 몇 번의 출판 임박 공고에도 불구하고 7년이 지나서야 발표되었다. 1897년, 사티의 인기가 식어 사정이 어려워지자, 당시 한창 인기가 있었던 클로드 드뷔시는 친구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되살리기 위해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짐노페디를 관현악으로 편곡한다. 원곡의 첫 번째 짐노페디가 관현악으로는 세 번째 짐노페디로, 세 번째 원곡이 첫 번째 짐노페디로 변경되었는데, 이때에도 두 번째 짐노페디는 관현악에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로 빠진 후 수십년이 지나서야 다른 작곡가에 의해 관현악으로 편곡된다.
20세기 이후, 이 곡들은 퓨전 재즈 등으로 편곡되어 다양하게 연주되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12 첼로 주자를 위한 곡으로도 편곡되는 등 널리 사랑받고 있다.
단순하지만 독특하게
짐노페디는 전3곡의 연주시간이 약 7~8분 정도로 짧은 편이다. 전곡 모두 3/4박자로 쓰였으며, 각각의 작품이 공통의 주제와 구조를 공유한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들리나 고전적인 전통과는 다소 상이하게 작곡되었다. 예를 들어, 1번의 도입부에서는 고전주의 화성에서 협화음으로 분류되지 않는 두 개의 장7도 화음이 연속해서 이어진다. 선율은 신중하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며 각 곡의 연주 지시인 ‘비통하게’, ‘슬프게’, ‘장중하게’에 걸맞게, 독특하면서도 멜랑콜리한 효과를 자아낸다.
1번 ‘느리고 비통하게’
왼손에서 G음과 D음을 으뜸음과 버금딸림음으로 반복하는 4마디를 도입부로 곡이 시작된다. 오른손의 선율은 매우 단순하게 흐르며, 30마디로 구성되는 악절이 부분부분 반복된다. 78마디의 소품이지만, 이들을 형성하는 짧은 악구의 길이가 각각 다르고, 비기능적인 화성이 불안감을 형성해 결코 진부하게 들리지 않는다.
2번 ‘느리고 슬프게’
2번 역시 다소 우울한 4마디의 G-D 반복 페달음을 통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이 곡의 단순한 선율 역시 1번곡과 유사하다. 다만 총 네 번 악구 사이에 삽입되는 낮은 G-D의 2마디는 그 기능이 앞을 연결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 별도로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은 이물감을 주며 이를 통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3번 ‘느리고 장중하게’
3번은 낮은 A-D 반복 페달음에 의한 도입으로 시작한다. 역시 단순한 선율로 구성되며 전부 60마디로 이루어진다. 전통적으로 화성이 해결되지 않고 악구의 길이가 불균등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데, 이같이 전통적인 화성을 벗어남에도 불구하고 청자에게 수용 가능한 선율에 성공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Erik Satie
에릭 사티는 1866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옹플뢰르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며, 13살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교수로부터 '형편없음. 앞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학교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1882년에 퇴학을 당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다시 학교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886년, 마지못해 군에 입대한 사티는 몇 달 후 일부러 기관지염에 걸려 제대했다. 그 후 아버지 집에서 나와 집시들이 많이 사는 몽마르트르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생계를 위해 〈검은 고양이〉라는 이름의 카바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1888년에 대표작 〈세 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를 발표했으며, 1890년에는 드뷔시를 만나 음악의 혁명가로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1891년, 사티는 장미십자교단 운동의 개척자 조세핀 펠라당에 감명을 받아 이 교단의 신자가 되었다. 한때 이를 위해 〈별의 아들들(Le fils des étoiles)〉, 〈장미십자교단의 3개의 종소리(Sonneries de la Rose+Croix)〉, 〈천국의 영웅적인 문의 전주곡(Prélude de La Porte héroïque du ciel)〉을 작곡할 정도로 열성이었으나 나중에 교단 사람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교단에서 탈퇴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예수예술의 수도교회라는 교단을 창설해 이 교단의 유일한 신자가 되었으며, 직접 교구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1898년, 경제적으로 더 궁핍해진 사티는 방값이 싼 파리 남부 아르퀴유로 이사했다. 스스로 '미천한 우리의 여인'이라고 이름 붙인 초라한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이 무렵 그는 작곡가로서 기법적인 한계를 느꼈다. 보다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1905년 댕디가 운영하는 스콜라 칸토룸에 들어갔다. 파리 음악원 때와는 달리 열심히 공부한 결과, 1908년에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1912년, 작곡가 라벨이 사티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사티의 새로운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젊은 작곡가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프랑스 6인조로 발전했다. 이들의 정신적 지원으로 사티는 음악적 신념을 고수할 수 있었다.
1915년에 시인 장 콕토를 만났다. 본래 은둔형 외톨이었던 사티는 장 콕토를 만나면서 다른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1917년, 사티는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피카소가 무대 장치를 맡은 〈퍼레이드〉라는 발레극에 음악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평면적인 오케스트레이션과 기계적인 리듬, 기본적인 테마의 반복, 타이프라이터와 사이렌 소리 같은 잡음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를 참지 못한 사티는 평론가에게 욕설이 든 편지를 보냈으며, 이 때문에 고소를 당해 8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평론가들의 반감에도 젊은 예술가들은 사티를 음악적인 스승으로 받들었다. 사티 역시 이들에게 자신의 정신을 물려받은 새로운 음악의 탄생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그 후 젊은이들의 관심은 당시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트라빈스키로 옮겨 갔다. 사티는 체념한 듯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
이렇게 좌절을 맛보며 사티는 누추하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누구의 방문도 허용하지 않고 혼자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경화로 1925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티의 음악은 과거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대를 풍미하던 낭만주의 음악은 물론, 바그너, 드뷔시, 인상주의에도 반기를 들었다. 그는 복잡하고 현학적인 음악, 아카데믹한 음악, 웅변적인 음악, 감정 과잉의 음악, 감각만을 앞세운 음악을 싫어했다. 그러면서 그가 추구한 단 하나의 이상은 바로 '단순함'이었다. 그는 음악 속에서 일체의 군더더기를 몰아내고 간결하고 명쾌함을 추구했다.
흔히 사티의 음악을 가구음악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흘려버리듯 듣는 음악을 의미한다. 카바레의 손님이 자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연주를 멈추고 "제 음악은 집중해서 듣는 음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에서 그의 음악관을 알 수 있다.
사티의 음악은 짧고 간결하다. 전곡의 연주 시간이 3분 남짓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대표작인 〈세 개의 짐노페디〉도 길이가 짧다. 이 곡은 사티가 1888년 플로베르의 소설 《살랑보》를 읽고 작곡한 것이다.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졌던 의식 중 하나인데, 이 의식에서는 젊은이들이 나체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제1곡과 제3곡은 드뷔시에 의해, 제2곡은 리처드 존스에 의해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어 널리 연주된다. 사티는 각각의 곡에 템포와 분위기를 지정해 놓았는데, 제1곡은 느리고 비통하게, 제2곡은 느리고 슬프게, 제3곡은 느리고 장중하게 연주하도록 했다. 세 곡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음악적으로 볼 때 세 곡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리듬, 박자, 선율 진행, 형식, 분위기에서 서로 차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왼손의 반주는 미묘한 화음을 느린 템포로 계속 반복하고, 오른손의 멜로디는 단선율을 느리게 연주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리듬과 단순한 멜로디가 단조로운 인상을 주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곡이다.
사티는 '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와 '클루'라는 선술집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여기서 연주할 수 있는 가벼운 살롱음악이나 샹송을 많이 작곡했다. 오늘날 널리 불리고 있는 샹송 〈당신을 원해요(Je tu veux)〉도 이런 곡 중 하나이다.
당신을 원해요.
금빛 천사여, 도취된 열매여, 마력의 눈동자여,
나에게 그대 몸을 맡겨요.
당신을 원해요.
당신은 반드시 내 것이 될 거예요.
나의 여인이여, 어서 와서 내 고독을 봐 주세요.
우리는 최고의 행복을 맞을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을 기다리기가 힘들군요.
멜로디 어디에서도 클래식 음악의 고상함이나 고급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으며, 누구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가벼운 샹송이다.
사티의 작품 중에는 기발한 발상으로 주목받는 곡이 있다. 1893년에 발표한 〈짜증(Vexation)〉이라는 피아노곡이다. 이 곡의 악보는 한 페이지밖에 안 된다. 하지만 사티는 이것을 840번이나 반복하라고 악보에 써 놓았다. 이 지시에 따라 연주하면 전곡을 연주하는 데 대략 13시간 40분이 걸린다. 그래서인지 사티가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전곡이 연주된 적이 없다.
사티는 음악을 통해 풍자와 해학을 즐기기도 했다. 그는 〈관료적인 소나티네〉, 〈차가운 소곡집〉, 〈엉성한 진짜 변주곡―개(犬)를 위하여〉, 〈배(梨) 모양을 한 세 개의 곡〉, 〈끝에서 두 번째 사상〉 등 작품에 기발한 제목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1913년에 작곡한 피아노곡 〈바싹 말라버린 태아(Embryons desseches)〉도 특이한 제목을 갖고 있다. 제1곡 〈해삼〉은 돌멩이나 바위 위에 붙어 고양이처럼 그르렁대는 해삼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사티는 생 말로에서 해삼의 모습을 관찰했는데, 이것을 암시하기 위해 생 말로의 노래 선율로 곡을 시작한다. 제2곡 〈갑각류〉는 쇼팽의 〈장송 행진곡〉을 패러디한 것이다. 하지만 사티는 악보에 이 곡을 슈베르트의 마주르카라고 써 놓았다. 빤한 사실을 살짝 왜곡함으로써 뜻밖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려는 것이다. 제3곡 〈게〉는 개펄 위를 빠르게 걸으며 능숙하게 사냥하는 게의 모습을 빠른 템포의 경쾌한 터치로 그렸다. 뒤로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다가 나중에 단호한 코다로 끝난다.
그 밖의 작품으로 〈그노시엔느〉, 〈가난한 자를 위한 미사〉, 〈까다로운 귀부인을 위한 세 개의 왈츠〉, 교향적 극음악 〈소크라테스〉 등이 있다.
뉴에이지 음악-그리고 크로스오버 이야기
사티의 환상
현대음악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근대음악의 흐름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근대음악 시대에 이루어진 변화의 폭이 워낙 현저한 것이었기 때문에 명확한 대답을 하기란 어렵다. 낭만주의 후기 바그너를 거론해야 할까? 전통음악의 귀족주의를 못마땅히 여기고 음악이 곧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나, 민족의식을 고양한다는 그의 뜻은, 음악이 종래 소수의 힘 있는 한량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니, 바로 여기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을 법하다.
한편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편향된 흐름이 한때를 풍미했을 때, 이에 반기를 든 것이 인상주의를 표방하는 일련의 근대음악가들이었는데, 드뷔시와 라벨 그리고 사티 등 프랑스계 음악가들이 그 부류에 속한다. 그중 에릭 사티(Erik Satie)의 음악 색채는 유별나다. 유별난 만큼 그의 음악들은 일반적인 음악 애호가들의 귀에 그다지 친숙한 것이 되지 못했다. 주로 '이야기되어지는 음악'이라는 표현이 꽤 그럴듯하다. 그러나 현대음악의 흐름을 이야기할 땐 그를 조금 더 가깝게 들여다보는 게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콧등에 걸친 안경과 구레나룻에서부터 흘러내려 온 염소수염, 신경질적인 그의 인상을 보면 좀처럼 호감이 가는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상한 옷을 입고 몽마르트르 거리의 선술집에서 반쯤 취한 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사티의 이미지를 연상해 보면, 그의 음악 제목들과 더불어 이러저러한 선입견이 잔뜩 보태진다. 그러나 장 꼭도(Jean Cocteau)가 스케치한 그림 속 사티의 이미지는 그래도 친구로서의 호의가 넘친다. 잘 봐준 그림이었다는 생각이다.
몽마르트르에서 그는 생계를 위한 궁색한 음악활동을 이어가야 했지만, 그동안에도 이 외모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의 음악가 곁에 많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드뷔시나 라벨과 친숙한 교분을 유지했고, 장 꼭도와도 마찬가지였다. 피카소와 디아길레프와도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정작 사티 자신은 항상 주체하기 힘든 외로움을 등에 지고 다녔다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음악 의지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 사안을 한 번 더 뒤집어 보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별난 성깔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념을 신봉하던 젊은 사티는 모든 옛 구조에 대해서 늘 냉소적인 시선을 두었을 것이고, 그것은 때로는 투쟁의 대상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입견과는 다르게 그의 태도는 대단히 탐구적이었고 순수했다고 한다. 새로운 색채감으로 번뜩이는 사티의 음악에 대하여 시종 과대망상이라는 비난을 쏟아 붓던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늘 그의 행동거지를 곁눈질로 지켜보고 있었고, 때론 그의 기발한 발상을 이용하려 들기도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드뷔시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데,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드뷔시는 인상주의보다는 당시 문학의 한 조류를 이루고 있던 상징주의를 의도하였을 것이다. 그의 음악 이미지가 아주 몽환적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사티는 드뷔시의 모호한 표현양식에 동조하지 않았고 보다 선명한 색채의 음향에 착안했다고 한다.
사티의 음악 중에 듣는 즐거움을 함께하고 쉽게 가까이할 만한 곡이 어떤 것이 있었을까 생각할라치면 난감한 생각이 앞선다. 사실 거의 없다. 있다 해도 『짐노페디스』와 『그노시엔』 중의 피아노곡 몇 개 외에는. 그나마 『짐노페디스』만 해도 드뷔시에 의해 관현악곡으로 편곡·연주된 것을 들었다. 우리는 사실 음악가에 대한 어떤 부담스러운 선입견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바싹 마른 태아' 혹은 '관료적인 소나티네'라는 표제에서부터, 그의 음악은 벌써 기괴한 인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의외로 그 내용은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차분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생각에 빠져들고 싶을 때에 잠깐 동안은 들을 만하다. 하지만 굳이 그 독특하고, 이따금 무거운 톤의 썩 편치만은 않은 선율들을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음반 회사에서 클래식 시리즈로 발간한 『Piano Works』라는 음반에는 사티의 음악 28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곡들의 이름이나 지시어에서부터 그의 조롱과 냉소가 가득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단순하고 완만한 선율이 드리우는 느낌은 꽤나 독특하다. 그러나 그 느리게 반복되는 피아노 음정 하나하나를 따라 듣고 있노라면 한없이 어두운 심연 속으로 나선형의 곡선을 그리며 빠져들어서는 헤어날 출구를 찾지 못할 만큼 가라앉아버린다는 게 개인적인 감상이다. 아마 현대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에서 아주 낮은 볼륨으로 흐르게 할 때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어느 순간 모르는 사이에 한 소절을 흘려들어야 할, 듣는다기보다 들려지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의 의식과 어떤 공간이나 이미지를 긴밀하게 이어주는 매개자와 같은 음악이란 점에서 소위 설치음악, 혹은 가구 음악(Furniture Music)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기능성 음향의 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종래 절대음악에 비하면 색다른 이념이다.
그의 음악에는 이상하리만큼 강한 마력 비슷한 것이 작용한다. 무슨 주술적인 힘이 있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들을 때마다 한없이 침잠하는 감정 말고도, 비어 있는 화폭에 비교적 어두운 색채의 물감을 아주 자유롭게 하나씩 찍어 넣고 있는 초현실주의 회화와 같은 시각적인 이미지가 항상 가깝게 있다. 음악가의 유머와 기지 그리고 냉소적인 의지가 그렇게 묻어나고 있다.
무슨 이야기일까? 사티의 음악을 우선은 '개념에 관한 음악'이라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그 개념을 언젠가는 꼭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또 사티의 음악에 대하여 단순히 수집을 위한 것이라거나, 혹은 사가들의 몫으로 두고 애호가들의 거실에 흐르게 할 그런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고 치부해버리기엔 조금 더 전향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근간에 들어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음악을 다시 해석하고 연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천재성은 다른 뜻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개의 곡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이것은 실로 한 세기 이상을 미리 내다보는 안목이 아니었을까? 아주 단순하고 제한된 구성으로 연주하는 1888년 작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짐노페디스」의 우울한 선율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구조를 예견한 것이었을까? 뿐만 아니라 이 음악은 '명상음악'의 형식을 디자인해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로 인체의 호흡 리듬과 매우 가깝게 이어진다.
어느 무성영화의 간주곡으로 사용했다는 1924년 작 「금일 휴연 Relache」이란 음악은 앞서 언급한 감상처럼 소위 가구 음악 또는 공간과 인간 정서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도모키 위한 '엠비언트(Ambient)' 장르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형식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는 현대음악의 기능성이나 실용성에 관한 가장 두드러진 얼굴 윤곽을 미리 암시해 놓았다는 뜻이다.
자연발생 음향이나 생활 소음을 직접 구성하고 무대 안무를 곁들인 1917년의 『파라드 Parade』에서는 초현실적인 색채의 콜라주 음악을 선보인 바 있는데, 그 그림 또한 유별나다. 이 음악은 후에 전위적인 음악가들의 표현주의와 구체음악 이념의 방법으로 발전한다. 여기에는 장 꼭도와 피카소 그리고 디아길레프가 참가하여 매우 진보적인 무대를 만들어냈으나 사람들은 이 역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장난 정도로 치부해버렸다고 한다. 사티 일행의 초현실주의 구상은 매우 진지한 것이었으나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족 하나가 덧붙여진다. 이 파라드 시절에 피카소는 디아길레프의 한 발레리나 올가 코를로바를 알게 되었고, 그녀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며 여성 편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 후로도 그와 가까이했던 여인들은 연이어 바뀌었고, 그때마다 그 여인들이 피카소의 모델이 되어 그려지거나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피카소처럼 여복이 많았던 예술가도 사실 그리 많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 한 시대를 앞서 내다보았던 외로운 천재의 반항과 기지와 유머정신에서부터 실로 근·현대음악의 의미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뜻에서, 사티의 '개념에 관한 음악'의 커다란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독창적인 색채에 전통 어법을 벗어나는 그의 때 이른 시도는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사뭇 진지하게 다시 이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근·현대음악의 맨 윗자리에 두어야 할 인물을 이제야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티의 개념들은 후대에 하나도 빠짐없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으니, 실로 대단한 안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티의 환상 (뉴에이지 음악, 2004. 1. 15.,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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