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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소는 왜 내 앞에 나타났을까?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9. 20.

  처마 끝 낙숫물, 콩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풀벌레들의 화음, 비마저 개의치 않고 나들이를 나온 참새들, 비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는 뒤란의 댓잎들, 쿵쿵, 폐창고의 문이 이리저리 휩쓸리는, 이 모든 소리들이 새벽을 깨운다. 가뭄 끝, 농작물들은 얼마나 이 비를 기다렸을까? 콩이 더 이상 크지도 않고 씨알조차 안 여문다고 걱정하던 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를 미소가 생각나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가만 이불을 젖히며 창문을 연다. 물기를 머금은 찬 공기가 창문턱을 넘어 몰려든다. 흠, 한껏 공기를 들이키며 폐를 확장시키면, 어느 덧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 앞에 잠시 마음도 경건해진다. 나지막한 산등성이 위로 우뚝 솟은 나무들의 자태가 우아하다. 몇 해나 그 자리에 있었을까? 오늘따라 궁금한 것은 나날이 늘어가는 몸의 통증들이 내 나이듦의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는 즈음이기 때문이다.

   헐, 이건 뭔가? 콩밭 한 가운데 소라니! 제법 세상 풍파를 견뎠을 법한 자태가 느껴진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 비를 맞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소의 눈과 마주친다. 등치가 산만한 소의 눈은 깊어 몹시 어두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다시 눈을 비벼본다. 여전한 모습으로 나를 뚫어질 듯 응시한다. 가만 나도 그를 주시한다. 다시 한 번 치떴던 눈을 감고 한참을 서 있다. 그러다가 눈을 다시 뜬다. 소는 아직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다. 나도 눈에 힘을 준다. 마치 기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듯 둘 사이의 시선이 팽팽하다.

 

    尋牛(심우), 드디어 소의 양미간 사이에서 글자를 읽어낸다.

 

   아득히 펼쳐진 수풀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서니

   물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마음 피로해 찾을 길 없는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단풍나무 매미 소리뿐

   茫茫撥草去追尋 水 山遙路更深 力盡神疲無處覓 但聞楓樹晩蟬吟

   망망발초거추심 수활산요로갱심 역진신피무처멱 단문풍수만선음

 

  지명의 고개를 넘어 이순이 지척인 나, 소는 왜 내 앞에 나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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