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금방이라도 한바탕 비를 뿌릴 것 같습니다. 또한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결과 짹짹거리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마치 새로운 아침이 가져다주는 선물처럼 생각되니, 오늘은 왠지 뻣뻣한 볕살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또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으로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시간, 불현듯 당신과 함께 맞이했던 그 새벽, 적막함을 파고 들어오던 아침의 뿌연 빛이 생각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새벽과 아침사이의 다름 속을 응시하던 그 순간이 세삼 그립습니다.
그 순간, 제 영혼의 떨림과 그 떨림이 삶의 새 지평을 열 것 같았던 어떤 예감, 지금 생각해 보니 덜도 더도 아닌 제 삶이 가야할 길 위의 한 장면이었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그건 죽음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삶의 의지가 수반되는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 지금, 더 이상 웅크리거나 울거나 고통스럽다고 소리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빙긋이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삶은 불현듯 다른 색깔을 띨 수 있구나, 그것이 다행이고 좋은 일이다, 생각하니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한 아침입니다.
어젯밤은 밤늦도록 박민정과 김금희의 단편들에 대한 고찰이 있었습니다. 박민정의 고해 마지막의식, 김금희의 개를 기다리는 일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죠. 두 편 다 신예작가들의 단편들이지만 깊이가 있고 뭔가 생각할 거리들을 제시해주는, 가령 내가 쓰고 싶은, 혹은 써야할 이야기들의 방향과 색깔을 드러내주는 그런 작품들이었다고나 할까요?
특히 김금희의 단편들은 저와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름 모델로 삼으면 좋겠다, 기쁘기만 하였답니다. 나이 차이를 불문하고 동반자를 한 명 곁에 두어도 좋을 든든함이 이 아침 뿌듯하기만 합니다.
두 단편 다, 분열적 인간이 아버지란 모습을 띠고 딸을 성폭행하고, 성폭행을 당하는 딸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이야기였답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뉴스에서 늘 접해보는 이야기이지만 실체감이 덜했는데 소설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들 들으니 좀 더 현실감도 생기고, 금수보다도 못한 인간의 실체를 연민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실체로 보아야할 것인지 혹은 둘 다의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어젯밤 잠자리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습니다.
이 작품들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궁금했던 사항은 작품의 흐름이 의도성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그 의도성이란 게 드러나게 되면 뭔가 읽는 독자가 팍팍해서 마치 밥을 먹을 때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소설을 읽을 때 뭔지는 모르겠으나 막연히 좀 팍팍하다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저는 박민정의 고해 마지막 의식을 읽을 때, 뭔가 자꾸 어긋나고, 팍팍하고, 결국은 좀 재미가 없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답니다. 사실 이 단편을 분열적 인간의 한 양상으로 보지도 못했고요. 즉 신부 K와 J의 아버지가 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음을 남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그 문제에 대해 수용할 수 없습니다만 문학적인 수련을 많이 하신분의 말씀이라서 또 그럴 것도 같구나,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김금희의 개를 기다리는 일속의 캐릭터는 확실하게 개와 아버지가 분열된 한 몸이었음을 적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술술 읽혔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감동이 더 짙었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나비잠 하우스라는 단편 또한 분열적 양상을 가진 아버지와 분열적 성향의 딸의 대비로 끌어가려고 계획했었는데 김금희의 작품을 보면서 조금 기가 죽었답니다. 물 흐르듯 슬슬 스며드는 문체에 정면 돌파하는 주제의식, 그녀의 스타일을 닮고도 싶고, 부럽기도 하고, 또 도달할 목표가 생기기도 하고. 이제 막 두 권의 단편집을 출시한 젊은 문학도의 미래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아침에 깨어 당신과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요. 내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이 내 삶의, 더 나아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자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차분히 듣고 있을 당신이 그지없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아마도 저를 사랑하는 어떤 분께서 저의 빈약한 인생에 당신이란 마지막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닌가, 수줍게 웃어봅니다. 몸도 마음도 편안한 하루 되시길 요!
<iframe width="42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gqfafRzyxN0"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파리데와 엘레나' 中 "오 감미로운 나의 사랑"
O del mio dolce ardor
bramato oggetto,
bramato oggetto.
L'aura chetu respiri
alfin respiro,
alfin, alfin respiro.
O vunque il guardo io giro,
Le tue vaghe sembianze
Amore in medipin ge:
Il mio pensier si finge
Le piu lie te speranze;
E nel, ardor che si maccen deil core
cerco te chiame te
gemo e sospiro Ah----
O del mio dolce ardor
bramato oggetto.
bramato oggetto.
L'aura che tu respiri,
alfin respiro,
alfin, alfin respiro.
오 델 미오 돌체 아르도르
브라마 또젯또 브라마 또젯또
라우라께 뚜레 스피리 알핀레스피로 알핀레스피로
오분 꾸에일 과르 도이오지로 레뚜에바 게셈 비안체 아모레인메디삔제
일미오 뻰시에르 씨삔제 레삐우리에 떼 스페란쩨
에넬데 시오 께꾸시 멤삐에일 뻬또
체르코떼 끼아모떼 스페로 에 쏘스피로
아 오 델 미오 돌체 아르도르
비라마 또젯또 브라마 또젯또
라우라께 뚜레 스피리 알핀레스피로 알핀 알핀 레스피로
오 나의 사랑하는
사랑하는 그대
그리운 사랑
애절한 나의 사랑
사랑이여
아, 아 내 사랑이여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
귀여운 그대여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
나의 그리운 사랑,사랑
언제까지나 변치 마라
사랑, 사랑
사랑 아 그리운 나의 사랑 아----
그대여 내게 오라
나의 품으로
영원한 사랑
애절한 나의 사랑
내 사랑아
아,아 그리운 내사랑이여
글룩,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폰 (Christoph Willibald von Gluck,1714 ~ 1787 / 오스트리아) 글룩은 바그너 이전의 최대의 오페라 개혁자로, 독일 파르츠령 바이덴방 부근 에라스바흐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산지기 직업을 이어받게 하려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서 프라하로 가(1732~6) 교회의 가수가 되기도 했고 무도장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하며 고생 끝에 가까스로 일류 첼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제수이트 파 교회 합창단의 소년단원으로 음악교육을 받고, 1736년에 빈으로 나와 탁월한 재능을 로브코비츠 공으로부터 인정받은 뒤, 다시 메르치 공의 후원으로 이탈리아에 밀라노로 가서 4년간 유학하여 그곳에서 교향악의 선구자 중의 한사람인 산마르티니에게 4년간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1741년에 그의 최초의 가극 <아르타세>를 발표하여 크게 성공한 것에 힘입어 계속 이탈리아 가극을 발표했으며, 모두가 성공을 거두어 훌륭하고 탁월한 음악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746년에는 런던으로 갔다. 1754년부터 약 10년동안 빈의 궁정 악장으로 있었으며, 이 때 제자였던 앙투아네트(비)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여러 해 있게 되었을 때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1748년에 빈으로 돌아와서는 처녀작 <아르타세>를 비롯한 많은 가극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여왕의 기극장의 악장이 되어, 로마 법왕으로부터 황금박차기사의 칭호를 받아 빈 가극계와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18세기에 있어서 오페라의 개혁자로서 글룩의 이름은 불멸의 존재이다.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헨델의 오페라에서, 오랜 파리의 생활에서는 라모의 오페라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빈에서 일을 했던 것이 그와 같은 성과를 얻게 한 것이다. 그의 오페라<알체스테>의 서문에서 '모든 예술에 있어서 미의 근본은 단순하고 간결한 것,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음악에 대한 스스로 터득한 이상으로, 교향곡에 있어서도 이 원칙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이 당시에 그는 가극의 일대 개혁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작곡가가 작곡한 대로 노래되고 상연되는 가극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글룩의 시대까지는 인기가수의 마음에 들도록 작곡하지 않으면 가극의 상연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가극개혁의 또 하나의 목적은 극적으로 진실하고, 가사에 충실한 작곡을 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음악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수단이고 목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개혁은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대본을 제공한 이탈리아의 시인 칼차비지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협력에 의한 첫 번째 작품이 1762년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였고, 두 번째 작품은 <알체스테>였다. 이 개혁은 빈의 청중들의 맹렬한 반감을 샀기 때문에 글룩은 1764년에 빈을 떠나 파리로 왔는데, 여기서도 반감과 음모로 그의 열의가 방해되었다. 마침내 파리 청중들의 취미를 정복하고 작곡가로서 영광의 절정에 도달했다. 글룩의 파리 체재는 1779년까지 15년간이나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에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그리고 그가 결정적으로 일거에 명성을 회득한 <타이루스의 이피게니아>의 2대 걸작이 발표되었다.
모든 국민에게 알맞는 음악의 작곡을 목표로 한 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양식을, 그 다음에 는 프랑스의 양식을 익히고 여기에 독일풍의 중후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배합함으로써 국제적인 오페라를 만들수 있었다. '글룩'은 초기에는 오페라 세리아를 주로 작곡하였으나, 1750년대의 오페라 개혁에 강한 자극을 받게 되어 시인 칼차비지 (Calzabigi, 1714 ~ 1795)와 합동으로 비앤나에서 1762년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1767년에는 '알체스테'를 상연하게 된다. 알체스테의 헌사에서 '글룩'은 지금까지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망쳐왔던 폐패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아름다운 단순성 을 찾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리아 가수들이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려는 고질적인 병폐들을 도외시하고, 서곡을 별개의 것이 아닌 극의 내용과 연관있는 오페라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들었다. '글룩'은 또한 관현악을 극적 요구에 맞게 사용하며, 아리아와 레시타티브의 차이를 줄였다.
1780년에 빈으로 돌아가 악단의 거장으로서 평안한 만년을 보내다가 73세로 생애의 문을 닫았다.
대표작품으로 서곡<알체스터><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오페라<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