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사그라질 듯, 힘 잃은 늦가을 햇살이 정원에 뻗쳐 있었다. 팽팽하게 부푼 석류는 곧 속살을 보일 것 같았고 노랗게 익은 모과는 떨어질 시간만을 기다렸다. 키 높은 칸나의 붉은 빛은 키 낮은 샐비어의 붉은 빛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노란 국화꽃위의 벌들은 꿀을 모으고 말겠다고 필사적으로 윙윙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달래에게 묘한 슬픔을 자아내게 했다.
“오, 그대를 가슴과, 열렬한 불길을 가라앉히고 오, 그대들 열망과, 반발을 삼가라. 그러면 지상의 평화는 다시 돌아오리라.”
정결한 여신을 노래하는 여가수의 간절함이 나른하게 햇살을 타고 있었다. 바람마저도 멈춰 소리를 양보했다.
만희의 흉내를 내며 달래는 두 눈을 감았다. 어느 새 달래의 눈가에 눈물이 아른 거렸다. 처음엔 그저 흉내였다. 만희가 상태를 본뜨 듯. 그래야 할 것 같은 어떤 의무감에서 시작된 모양새였다. 그렇게 하노라면 어느새 달래도 진심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두 눈을 감고 아리아를 듣노라면 스멀스멀 온몸으로 스며드는 무엇이 있었다. 공간 가득 오페라의 아리아가 품어내는 그 비극적 서정들이 달래를 매혹시켰다. 달래를 만희 가까이로 끌어들였던 첫 번째 이유는 슬픔과 고독이 자아내는 어떤 환상의 세계였다.
달래에게는 만희의 집은 현실이 아니었다. 황홀한 꿈의 세계였다. 아득히 먼 어딘가에 달래를 위해 만들어질. 그것은 사실 달래에게서 나오는 울림이었다. 달래의 심연 깊숙한 곳에서 반사되어 오는 기묘한 어떤 것이었다. 단지 달래는 모를 뿐이다. 자신의 심연에 어떤 것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지를.
음악 뿐 아니었다. 커피와 뒤섞인 유화물감의 냄새. 곳곳에 비치된 그림도구들. 특히 달래의 눈길을 끈 것은 이젤들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물감의 흔적을 쓰고 아무렇게나 세워진 이젤들에게서 달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왜 그런지 몰랐다. 그저 온갖 색깔의 물감들로 뒤범벅이 되어 서있는 풍경. 그것은 달래의 고독과 닮아 있었다. 어쩌면 이젤 위의 그리다 만 그림들처럼 미완성인 자신의 존재를 떠올렸을지도.
“먹고 하렴.”
만희의 엄마이자 상태의 고모는 여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살금살금 걸어왔다. 고양이처럼. 어른이 고양이처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달래는 만희의 엄마를 통해 처음으로 깨달았다. 갓 구운 쿠키에서 번져오는 버터냄새가 온 몸에 파고들었다. 달래는 쿠키에서 풍기는 냄새가 버터라는 것을 만희의 엄마를 통해 처음으로 알았다. 어디 그뿐인가, 만희의 사촌오빠인 상태가 즐겨 마시는 음료가 커피라는 것이고 상태가 듣는 노래들이 오페라의 아리아란 것. 아리아의 대부분은 사랑의 배신에 대한 아픔을 노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만희의 엄마였다.
만희에게 묻기에는 달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만희도 달래가 묻기만 하면 자신의 엄마와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래는 아무 것도 만희에게 묻지 않았다. 묻는 것은 만희여야 했다.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달래가 만희네집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만희는 달래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만희의 엄마와 아빠가 달래의 엄마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확연히 다른 만희의 세계에 대한 달래의 동경은 은밀한 것이었다. 달래에게 만희의 세계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꿈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달래에게 만희는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무엇이었다. 꿈과 같은 것이었을까? 영원한 부재의 속성을 지닌. 꿈은 꿈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만희는 마을 아이들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만희 탓은 아니었다. 만희의 엄마, 아빠가 마을 아이들의 엄마, 아빠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던 까닭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결과물인 파랗고 빨간 슬레이트 지붕을 인 유치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얀 양옥집에 널따란 정원을 가진 만희의 집 탓이기도 했다.
중정이 있었고 중정을 둘러싸고 배치된 여섯 개가 넘는 방들을 가진 하얀 양옥집은 특별했다. 만희의 집과 가족이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다는 증거였다. 이러한 사실은 달래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에게 만희와의 거리감을 부추겼다. 만희는 얼굴마저 하얬다. 한 눈에 보기에도 썩 괜찮은 그림들을 그려댔고 피아노의 건반들을 두드릴 줄 알았다. 그러니까 만희네가 이 바닷가 한적한 마을에 집을 짓고 이사 온 것은 순전히 만희의 큰집인 방앗간 집 할아버지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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