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비라도 내렸던 것일까요? 도로 한 쪽이 젖어있는 것을 보니. 어제는 뭔가 부산해서 사실은 창밖 땡볕에 하루 종일 서 있었을 발렌타인 나무에 물을 주는 것조차 잊었구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고, 부스스 깨어서 창밖을 보고 다행이다 싶은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제 이기심의 극단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저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특별한 나’를 만들고자 하는 몸부림, 이런 자신을 분열시켜 바라보며 비판하는 또 하나의 나는, 가끔 연민의 감정에 빠지곤 합니다. 무엇이 너로 하여금, 일상적인 것이 하찮은 것이며, 그 하찮은 것을 벗어나 다른 무엇인가 ‘특별한 나’ ‘다른 이와 구별되는 나’를 만들려하는가? 어쩌면 말이죠, 그건 어떤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 같은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왠지 서글퍼지기도 한답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시골 작은 도시의 허름한 밥집 아줌마, 그것도 반백의 나이를 넘어선 뚱뚱하고 못생긴, 사회적 루저로 보이는 나가 있습니다.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이리 날마다 뒤척이며 가슴앓이를 하고 뭔가에 취해 일상을 하찮은 것이라 치부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어떤 것의 극단까지 가보겠다는 의지도, 어떤 것들에 대한, 심지어는 영원히 내 것일 수 없는 당신에 대한 마음마저도, 내 것으로 가지겠다는 열망도 없습니다. 그저 사는 일이 헛헛해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기웃대며 허전한 인생을 위로하고자 발버둥치는 일, 그저 그런 행위를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헐, 이렇게 쓰고 보니 진정 내 인생엔 중심이라는 것이 없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심이란 것은 일종의 신념과 같은 것이 있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인데, 그 신념이란 것을 확실하게 구분해서 말할 수 있는가, 내 자신에게 마땅히 물어야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산책길에 팟캐스트를 듣는데 어제 아침엔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 대한 썰을 들었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꽂이에서 릴케의 책을 펴들고 한 번 복습해보자 단숨에 몇 구절을 들춰보았답니다. 1987년의 서명이 되어있는 아주 오래된 책이지만 무척 귀중한 것이라서 아직 제 서가를 벗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몇 페이지를 펼치자 눈에 띄는, 적확히 말하면 산책길에 들으며 내 마음을 움직였던 몇 구절을 옮겨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자기 자신을 열어서 내주고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정화되지 않은 자, 미완성의 사람, 아직 불충분한 인간과 하나가 된들 무엇이 생기겠습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스스로가 성숙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부에서 무엇인가 이룩되는 일이며,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일이며, 상대방을 위해서 또 다른 세계가 되어주는 숭고한 계기인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하는 저마다의 사람에 대한 엄청나게 큰 요구입니다. 그를 선택하여 광대한 것으로 이끄는 그 어떤 힘인 것입니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내 인생에 쓰나미처럼 몰려왔던 혼돈의 시간이 저 만치 멀어지고 있습니다. 밤마다 잠을 설치며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던 시간도 벗어난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들을 지나니 비로소 나의 실체와 내가 나아가야할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 마치 나는 저 지리산 천왕봉의 산마루에 서서 운무에 휩싸인 수많은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느 새벽의 나를 상상하게 됩니다.
“무엇이 너를 잠 못 들게 하고, 무엇이 너를 눈물짓게 하였는가?”
그것은 아직 정화되지 않은 나, 미완성인 나, 불충분한 인간인 나를 확인해야만 했던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나를 가지고 어떻게 상대를 광대한 것으로 이끌 수 있을 까요? 묻지 않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때마침 어젯밤에 공감 회원들과 ‘프라하의 봄’이란 영화를 함께 감상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지만 소설에 못 미친다는 평을 듣습니다. 어찌됐든 책과 대비를 하며 줄리엣 비노쉬의 분홍빛 오른 볼에 매료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남주인 토마스의 정말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행동들에 반해 그의 정치적 신념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시대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죄의식 없는 바람기 밑에서 어떻게 저런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까, 참 모를 인간이네, 비웃다가도 경도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시골뜨기, 여급에 불과했지만 인생 자체가 한없이 무거운 여자 테레사가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 또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토마스와 테레사와 사비나와 프란츠, 네 명이 이끄는 사랑과 인생의 변주곡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 여전히 깨닫고 성장하고 그리고 각자의 운명으로 접어드는 과정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극복하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틀에 매몰되어 가는 인간들의 모습, 그들 속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겠구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미완성이며 불충분한 ‘나’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이지만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 조금은 성장해가는, 하여 서로의 인생에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며 상대를 이끄는 광대한 힘을 키울 수 있는 ‘나’가 되어가기 위해 횡설수설 수다를 피우는 아침, 발렌타인 잎을 흔드는 미세한 바람에게 조차 한 마디를 하게 됩니다.
“그래 그 나마 너라도 있어 얼마나 다행이니, 너를 느낄 수 있는 걸로도 충분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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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s Janacek-The Holy Virgin Of Frydek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soundtr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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