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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2. 인연생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4. 30.

인연생기(因緣生起)

 

  그가 왔다, 불현듯.

   엄마네 화단에서 옥잠화 포기를 한 아름 업고 온 날,  화분을 실내로 들여 놓으며 가게 문을 닫으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 닫으시려고요?”

  느닷없이, 성큼 왠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네에?”

   “왜 화분을 들여놓는 것이어요?”

   “그러게요. 귀요미 할머니들이 가끔씩 화분을 업어 가네요.”

   “그냥 업어가게 나두시지.”

   살짝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매번 그럴 수는 없잖아요.’ 입안을 맴도는 소리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그의 표정이 표표히 실내를 훑는다. 순간 내 시선조차 표표하다. 그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선뜻 오디오 전원을 켠다.

   “막걸리가 있다기에.”

   막무가내로 손님이 되겠다는 것인가?

   “혹시 술 드시려거든 옆집에.”

   미안한 감도 있어 채 말끝을 맺지 못한다.

   “여기서 마시고 싶은데요.”

   웃음이 나온다.

   “뭐 그러시겠다면.”

   볼륨을 한껏 높인 스피커에서 울리는 Chet의 목소리에 벌써 가슴이 우릿해 온다.

   “하필, 하필, 하필, 쳍이라니.”

   그에 대한 내 경계심이 호의로 바뀌는 순간이다.

   “영화 감독이세요?”

   도발적인 내 질문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뭐야,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설마, 이준익, 아니면?”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에 나열 될 이름들은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 사실은 전혀 이준익스럽지 않다. 다만 영화감독 누군가의 이름을 나열해야 할 순간이었음을 무의식이 알아차렸을 뿐. 사실 다이어트를 성공시킨 해리포터의 스네이프교수라면 모를까.

   화두는 ‘소외’다. 뭐냐면 ‘소외’는 내 과니까. ‘소외’라는 단어만 들어도 저 밑바닥 어디선가 찌르르 올라오는 무엇이 있는데.

   어쩔건가?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영화의 제목들은 전부 낯설다.

   Chet이 스크래치에 물려 버벅거린다. Jobim을 읽지도 못하는 오디오는 Sosa에 이르러 비로소 제 소리를 낸다. 한 때 Sosa는 내 노래의 여신이었지만 오랫동안 소원했다.

   “Sosa라니.”

   Sosa를 함께 들을 수 있다면 어떤 놈팽이라도 상대할 가치가 충분하다. 더구나 알모도바르와 빔 벤더스, 지아장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최고의 정점은 파리 텍사스의 라이쿠더였다. 그의 기타 연주를 몇 번이고 함께 들을 수 있다니. 헐헐헐이다. 거기에 레오페레와 한대수까지...

   "Deep purple은 없습니까“

   “유감이네요. LP는 있지만 턴테이블이 고장이라서.”

   “Rock을 좋아해요.”

   “헐, Rock이라니, Rock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데.”

   ‘이런 남자와 한 번 쯤 연애를 해보면 어떨까?’

   처음이었다. 음악과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내 지식들이 봇물처럼 터져 결국 소설이라는 숲까지 이르게 되다니. 음악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여하간 한 번 중독되면 헤어날 길 없는 늪에 이르게 하는 그 어떤 욕망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니...

   “소외되고 고달픈 인생이야기를 쓰겠지만 결국 ‘인생예찬’을 노래하고 싶어요.”

   ‘소외라는 화두는 내 과 거든요. 무지무지 할 말이 많아요. 하지만 처음이잖아요. 처음. 난 당신을 몰라요. 당신도 나를 모르겠죠.’ 맴도는 말들, 말들

   참 불가사의하다.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그렇게 통했다. 그리고 나는 꼬박 날을 샌다.

   왜?

   내 소설, 벚꽃은 벌써 내 머리 속에서 한 컷 한 컷 영화화 되고 있으니...ㅎㅎㅎ

   그렇게 그는 왔고 연 이틀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며 횡설수설, 모처럼 만에 내 수다의 용량은 차고 넘쳤다.

   그리고 또 일주일,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읽고 있었다. 며칠을 뒤척이며 내 습작품들에서 건져 올린 코드들...

   인연, 지고지순, 성폭행, 남자 없는 여자들의 질주, 동성애, 혼혈아, 관계의 단절, 소외, 테메노스... 그야말로 허접한(?) 인생들의 총체, 그게 나였다. 다행일까?   내 무의식 저편에서 아우성치던 소리들은 이제 각각 제자리를 찾아가며 나름 꽃을 피우려하고 있다.

   사람이든 글이든 여하간 새삼 인연생기, 이 모든 것들이 인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는 아침 산책길은 덧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조차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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