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sa Lava: 용암의 집
“Casa Lava가 정착할 골목을 찾는 중입니다. 당신의 동네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이름은 지독한 팬심이 부른 유쾌한 사고였다. 이탈리아 재즈 트럼펫터 엔리코 라바(Enrico Rava)의 몽환적인 선율을 사랑해 ‘라바의 집(Casa Rava)’을 꿈꿨으나, 세상은 자꾸만 이를 뜨거운 ‘용암(Lava)’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15년 동안 하드디스크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나의 문장들을 생각하니, 어쩌면 이곳은 처음부터 ‘용암의 집(Casa Lava)’이 될 운명이었다.
공간의 컨셉은 거친 화산석의 질감과 정적인 고요함이 공존하는 ‘동굴 같은 안식처’다. 가공되지 않은 검은 돌벽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흐르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가죽 소파와 하나가 된 그림자 같은 내가 앉아 있다. 낡은 중절모와 헐렁한 셔츠를 입은 나는 묵직한 공기 속에서 엔리코 라바의 “The Pilgrim and the Stars”나 “Nature Boy”를 고르며 말없이 자리를 지킨다.
나는 좀처럼 말이 없고 표정 또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 마주하는 이들에게는 자칫 불친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거부가 아니라, 오랜 시간 문장과 고독 속에 머물며 생겨난 인간관계의 서투름일 뿐이다. 그 무뚝뚝한 침묵은 사실 손님의 고독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주인장 나름의 배려다. 원두가 흩어지거나 책값을 물을 때 잠시 고개를 들어 선글라스 너머로 던지는 시선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진심을 담아 당신을 응시한다.
이제는 15년 동안 가둬두었던 나의 문장들을 석방하려 한다. 세상의 인정보다 나의 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올해 3권의 책을 내기 위해 직접 독립출판사를 차린다. 어느덧 이승으로의 소풍이 끝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기에, 평생 곁을 지킨 서적과 음악 CD, 영화 DVD들이 누군가의 소중한 품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이곳은 나의 분신들이 주인을 찾아가는 정거장이자, 지인들의 책들도 함께 머무는 위탁의 공간이 될 것이다.
이 집의 규칙은 엄격하고도 기묘하다. 2000년 이후에 나온 책은 원래 가격의 40%이며, 그 이전의 책은 주인장이 기억하는 가격의 40%에 판매된다. 가격표 대신 독자들의 ‘덧붙임’ 메모만이 허용되는 이곳에서, 책과 음반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쌓인 지층이 된다. 재즈 선율 사이, 당신이 숨겨둔 온기를 발견하는 서점이라는 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낮에는 커피와 함께 고독을 즐기고, 밤 7시가 지나 보랏빛 어스름이 내려앉으면 비로소 낮에는 커피로 깨우고 밤에는 와인으로 기록하는 집이 된다. 누구도 술을 두 잔 이상 마실 수 없다. 한 잔은 마주할 용기를 주기에 충분하며, 그 이상의 취기는 기억을 흐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장이 오랜 세월 검증한 단골들, 술주정을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외가 있다. 그들에게는 무한대의 알콜이 허용된다. 그 무한대는 단순한 술잔의 개수가 아니라, 서로의 고독을 존중하는 무한한 신뢰의 표시다.
사라진 40%는 당신이 이곳에 남겨둔 기억의 무게이며, 동시에 당신이 가져갈 결심의 크기다. 아직 도시의 어느 골목이 우리를 선택할지 알 수 없지만, 가장 뜨거운 8월, 엔리코 라바의 트럼펫이 울려 퍼지는 이 용암의 집은 반드시 당신의 길 끝에 나타날 것이다. 식지 않는 이야기들의 안식처, Casa Lava에서 기다리겠다.
당신도 8월을 기다리시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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