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 수업 ‘시론’ 과제였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패러디
내 안의 나타샤에게 보내는 시
거울 속에 나는
정수리가 환해지고
복부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닳아빠진 피부, 거칠어진 나의 손등은
오래된 수피처럼 갈라지고 거칠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카톡을 들여다보지만
새로운 흔적은 없고
카페 라떼는 왜 이리 비싼가
이런 게 어른이라면,
나는 그냥 늙은 아이겠다
나는 이 초라한 나를 미워하지만
나는 나타샤를 사랑한다
나타샤는 내 속에 산다
그 애는 아침이라는 무대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잠깐 실눈을 뜨고, 번개처럼 일어난다
아보카도와 샐러드를 먹고
귀에는 흰색 갤럭시 버즈,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며
거리 끝을 노래하듯 걷는다
레깅스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세상은 런웨이처럼 펼쳐진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도시는 흐릿하고, 세상은 잿빛이지만
그 애의 긴 머리칼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나는 그 장면을 매일같이 꿈꾼다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
내가 아니지만
내 안에 사는 그 애를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밤이면 라면을 끓이다가 말고
부스스한 얼굴을 씻지도 않은 채
그 애에게 편지를 쓴다
“나를 좀 데려가 줘”
그러면 거울 너머에서
나타샤가 내게 말한다
“나는 네가 버린 날들이야
나는 네가 피한 거울이고
너는 나 없이 늙어간 거야”
나는 얼굴에 감정도 없이 앉아 있다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그 애는 그 눈물을 조용히 읽더니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조용히 걸어와
내 앞에 서 있다
나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말한다
“언젠가는, 늙은 너로도
멋질 수 있을지 몰라”
언제 벌써 내 안에 고요히 와서 말한다
“세상에서 멀어지는 건,
도망이 아니라
너의 자리를 다시 짓는 일이야.”
나는 그녀를 기다리며,
아직도 나를 다시 살아낼 시간을 기다린다
이 시의 의도:
〈내 안의 나타샤에게 보내는 시〉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하여, 초라하고 지친 현실의 자아와 이상적이고 자유로운 내면의 자아(나타샤) 사이의 대화를 그린 시이다.
정수리가 환해지고 복부가 불룩해진 ‘나’는 무기력과 자기혐오 속에서 ‘아침에 번개처럼 일어나 흰색 갤럭시 버즈를 끼고, 레깅스를 입고 세상을 런웨이처럼 걷는’ 이상적 자아인 ‘나타샤’를 매일 꿈꾼다.
그녀는 어쩌면, 백석이 사랑이라 불렀을지도 모를 형상이자, 내가 잃어버렸거나 아직 살아내지 못한 나 자신이다. 내가 꿈꾸는 나타샤는, 단지 내 젊음의 잔상이 아니라, 삶의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조용한 이정표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이 시는 단순한 자기비하를 넘어서, 자기 존재를 다시 살아낼 시간을 기다리는 고백이자 선언이다. 백석 시의 리듬과 상징을 인용하면서도 현대인의 정서, 기술, 몸, 감정, 고립, 회복 등을 새롭게 구성했고, “언젠가는, 늙은 너로도 멋질 수 있을지 몰라”라는 대사는 단지 나이 든 자아에 대한 수용을 넘어, 삶에 닳고 어두워진 존재를 다시 품는 언어이자, 스스로를 향한 가장 늦은 위로이며 유일하게 남은 희망의 문장으로 기능한다.
“늙은 너”는 생의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작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 너머에, 이러한 나의 바람이 시에 다 닿았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시 창작 후기: 「내 안의 나타샤에게 보내는 시」를 쓰며
누군가는 늙어간다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내 눈앞의 현실은 너무도 뚜렷하다. 정수리가 환해지고, 복부는 점점 불룩해지고, 주름은 깊어지고 피부는 메말라간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나 또한 자연의 일부일 뿐이며, 언젠가는 이렇게 늙어가다 조용히 사라질 존재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 안다는 것이 위안이 되진 않는다.
아직은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다시 살아낼 수 있는 내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수십 번씩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한다. 어쩌면 이 시는 그런 나 자신에게 쓰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무기력과 자기혐오 속에서도, 누군가 나를 다시 살아보게 해주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의 변주일지도.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이 시는, 현실의 지친 나와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어떤 이상적 자아—나는 그것을 ‘나타샤’라 불렀다—사이의 대화로 구성된다.
흰 당나귀를 타고 사랑을 찾아 떠나는 백석의 목가적 세계는, 내게 와서는 흰색 갤럭시 버즈를 귀에 꽂고 레깅스를 입은 ‘나타샤’의 아침으로 바뀌었다. 도시와 소셜미디어 속을 걸어가는 그 아이는, 잃어버린 젊음의 잔상이자, 언젠가 내가 살고자 했던 ‘나다운 나’의 형상이다.
나타샤는 내가 만든 환영이지만, 동시에 내게 다시 살아보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존재다.
“나는 네가 버린 날들이야.”
“너는 나 없이 늙어간 거야.”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마치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움츠러든다. 그러나 그 거울 너머에서 다시 들려오는 말,
“언젠가는, 늙은 너로도 멋질 수 있을지 몰라.”
이 한 줄이, 내가 나를 향해 쥐고 있는 마지막 온기이자 기도다.
이처럼 나는 이 시를 통해 ‘늙어간다’는 사실을 슬프게 부정하거나 억지로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언젠가 잃어버린 나의 일부를 다시 불러내어, 나 자신을 어루만지는 언어를 조심스럽게 찾으려 했던 것이다. “늙은 너”는 끝이 아니라, 다시 길을 낼 수 있는 시작임을 스스로에게 가르쳐주기 위한 말. 나는 아직 그 길 위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쓰고 나니 부끄럽기도 하고, 어딘가 너무 솔직했던 건 아닐까 싶지만, 그 부끄러움이 내 시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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