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놓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시론 수업 시간에 ‘융의 원형’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면서 교수님은 교재 속 윤동주 「또 다른 고향」이란 시의 예시를 들며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이셨는데, 물론 나의 해석도 약간 추가해 정리해 보았다.
윤동주 「또 다른 고향」
― 융의 원형 이론을 통한 해석: 그림자와 자아 해체의 고요한 여정
윤동주의 시 「또 다른 고향」은 고향으로 돌아온 밤, 자신과 함께 누운 '백골'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내면의 혼란과 슬픔, 자기 해체, 그리고 끝내 향하게 되는 ‘또 다른 고향’을 통해 자기(Self)로 향하는 융적 개성화(individuation)의 여정을 그려낸다.
그 여정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 탐색을 넘어,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어둠 속에서 민족과 존재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슬픈 고투이자,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고 통합하려는 시인의 깊은 영혼의 진동을 담고 있다.
1. 백골의 등장 ― '그림자(Shadow)'의 현현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시의 첫 구절에서 ‘백골’은 단순한 죽음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억압된 자아, 혹은 융이 말한 무의식 속의 ‘그림자(Shadow)’이다. 융에게 그림자는 자아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열등하고 어두운 측면이다.
시인은 그 그림자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한 방에 누웠다’는 표현은 의식과 무의식이 대면하고 있다는 뜻이며, 존재 내부의 분열과 통합의 긴장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곧 개성화의 문턱, 즉 무의식의 실체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정신적 통과의례의 시작을 알린다.
2. 어둠과 풍화작용 ― 시대의 억압과 자아의 침묵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 백골을 들여다보며”
‘어둠’은 단지 밤의 정적이 아니다. 시인이 돌아온 ‘고향’은 조국이 식민 지배 아래 있던 일제 강점기의 조선, 즉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어둠’이다. 그 어둠 속에서 ‘백골’은 ‘곱게 풍화작용한다.’ 이는 단순한 부패나 소멸이 아니라, 시대의 바람—억압, 침묵, 권력의 감시—에 의한 조용한 마모와 정화의 과정이다.
‘곱게’라는 수식은 고통의 파괴가 아닌 내면적 순결과 저항의 품위를 담고 있다. 융의 이론으로 보면 이 장면은 무의식의 압력에 짓눌리며 정체성을 해체당하는 주체의 이미지이자, 자기(Self)로 이끌리는 정화의 고통이다. 그림자는 여기서 역사의 산물이며, 동시에 내면의 진실이다.
3. 눈물짓는 존재 ― 자아(Ego), 그림자, 자기(Self)의 경계 해체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 백골이 우는 것이냐 /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이 구절은 자아(Ego)와 무의식의 그림자(Shadow), 그리고 초월적 자기(Self)의 경계가 붕괴되는 순간이다. 슬픔의 주체가 ‘나’인지, ‘백골’인지, ‘혼’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은 심리적 동일시와 해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상태이며, 융이 말한 개성화 과정 중 가장 고통스러운 통합 직전의 혼란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시인은 자신의 모든 정체성으로부터 흩어지고, 그 흩어짐 속에서 무언가 더 근원적인 존재—자기(Self)—와 접속하려는 몸짓을 취한다.
4. 짖는 개 ― 외부의 투사이자 내면 윤리의 고발자
“지조 놓은 개는 /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 나를 쫓는 것일게다”
여기서 ‘개’는 외부 세계의 감시적 시선, 혹은 윤리적 내면의 비판적 자아로 읽힌다. ‘지조 놓은’이라는 표현은 그가 시대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다짐과, 동시에 자신이 그것에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을 동시에 내포한다.
이 개는 ‘어둠’을 짖고, ‘나’를 쫓는다. 이는 무의식과 그림자의 힘을 외부로 투사하며 감시받는 느낌, 혹은 내면의 불완전한 통합에서 오는 불안과 죄책감의 현현이다. 개는 윤동주 시 전체에서 반복되는 ‘양심의 그림자’이자, 자아의 해체를 지켜보는 문지기 역할을 한다.
5. “또 다른 고향” ― 자기(Self)를 향한 여정의 환유
“가자 가자 /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시의 마지막, ‘또 다른 고향’은 더 이상 지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넘은 자기(Self)의 근원, 다시 말해 존재의 본질, 혹은 죽음 이후에도 보존되기를 바라는 순정한 혼의 귀의처이다.
‘백골 몰래’라는 표현은 여전히 그림자와의 완전한 화해에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향한 내면적 항해를 멈추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읽힌다. 이 고향은 죽음의 평화일 수도 있고, 정신적 구원, 혹은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 이후 도달하는 자기의 정좌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윤동주에게 그것은 역사 속의 조선이 도달하지 못했던 윤리적 조국, ‘말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고향이었는지도 모른다.
6. 결론 ― 자기(Self)를 향한 조용한 통과의례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융의 원형 이론으로 보았을 때, 그림자와의 대면, 자아의 붕괴, 영혼의 통합, 외부의 감시와 내면 윤리의 투쟁,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를 향한 여정이라는 개성화의 전체 단계를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이 시는 개인의 무의식 탐색을 넘어, 역사적 억압 아래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시인의 고결한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을 통해 더 깊고 진실한 ‘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투명한 정신성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시는 단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진정한 나’와 ‘말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영혼의 결의문이며, 역사 속에서 가장 내밀한 방식으로 저항한 윤리적 기록이다.
이러한 해석을 들으며, 나는 문학이 단지 해석되고 소비되는 텍스트가 아니라, 나 자신의 사유를 촉발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윤동주의 시는 단지 윤동주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떤 백골을 불러오고, 그 어둠 속에서 나 또한 조용히 풍화되고 있음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읽는 자이기를 넘어서 쓰는 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계절, 여름이 문턱에서 머무는 이 흐릿한 날들 속에서, 윤동주의 시는 마치 바람처럼 내게 속삭인다.
“너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너의 그림자는 어디에 남겨두었는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나의 글쓰기란, 어쩌면 그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침묵과 어둠, 백골과 바람, 그 모든 경계 위에 존재하는 것들을 이름 없는 고향들로 데려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윤동주가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어떤 언어 이전의 진실, 말해지지 않던 슬픔, 그리고 ‘또 다른 고향’이라는 상징의 윤리를 나의 글쓰기 또한 끝까지 탐색하고자 한다.
시대를 꿰뚫는 언어,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위한 침묵, 그리고 무의식 속에 감춰진 그림자들을 마주보는 문장들. 내 글쓰기의 미래는, 그런 고요하고도 단단한 윤동주의 어둠처럼, 곱게 풍화되는 한밤의 기도로 남을 수 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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