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루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의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1976년 근역서재(槿域書齋)에서 발간된 박인환((朴仁煥)의 20주기 기념시집. A5판. 194면. 박인환의 2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아들인 세형(世馨)이 묶어낸 이 시집에는 시인 생존시의 첫 시집인 《박인환선시집(朴仁煥選詩集)》(1955)에 수록된 시 56편 중 54편과 유작 등 미수록시 7편 등 모두 61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집 표제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목마와 숙녀>로 하였다. 시집 구성은 지은이 사진, 약력, 목차, 본시, 후기의 순서로 짜여져 있다.
그 내용은 다시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목마와 숙녀' 장에 <최후의 회화(會話)> 등 26편, '아메리카 시초(詩抄)'에 <태평양에서> 등 12편, '영원한 서장' 에 <어린딸에게> 등 12편, 그리고 '사랑의 Parabola'장에 <세월이가면> 등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신이 "나는 십여년 동안 시를 써왔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박인환선시집 후기)라고 술회한 것처럼 해방공간으로부터 6 · 25 동란 및 전후의 혼돈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좌절과 허무의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청년의 비극적 현실인식 및 모더니즘풍의 감각과 시어로서 형상화된 특징을 지닌다. "아무 잡음도 없이 도망하는/도시의 그림자/무수한 인상과/전환하는 연대(年代)의 그늘에서/아, 영원히 흘러가는 것/신문지의 경사(傾斜)에 얽혀진/그러한 불안한 격투"(최후의 회화에서) 라는 한 시에서 보듯이, 도시문명과 그 그늘에 대한 감각적 인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박인환의 도시와 문명에 대한 모더니즘적인 추구는 시대상황적인 회의와 절망으로 밝은 면보다는 우울과 감상 등 어두운 면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 전원적인 서정이 주조를 이루던 청록파와는 달리 도시적 서정을 다룬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조식 (0) | 2023.02.22 |
---|---|
남자보다 무거운 잠/ 김해자 (0) | 2016.01.26 |
愚話 (우화)의 江 / 마종기 (0) | 2012.04.03 |
[스크랩] 바다를 닮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 최복현 (0) | 2012.02.29 |
하재봉의 안개와 불 (0) | 2011.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