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오는 오월의 첫날 — 고흐를 만난 하루
5월의 첫날, 나는 대전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잿빛 하늘 아래 드디어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들고 느릿하게 미술관 쪽으로 걸어갔다. 푸릇한 나뭇잎들 사이로 맺히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고요하고도 깊었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계절, 모든 것들이 촉촉이 젖은 채로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고흐전은 이미 몇 번 다녀온 전시였지만, 원본이 온다는 소식에 다시 마음이 설렜다.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손에 든 채 입구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고흐를 만나고 싶었던 걸까. 고흐가 스쳐간 밤하늘, 노란 들판, 해바라기 한 송이. 우리 모두 그에게서 어떤 감정의 빛깔을 기대하며 온 것이리라.
전시장 안은 은은한 조명 아래, 차분하고 조용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스쳐가는 그림들 중에서도 특히 연필로 그린 초상화들이 눈길을 끌었다. 날카롭고도 신비로운 선들이, ‘원본’이라는 무게를 더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유독 익숙한 “감자 먹는 사람들”은 실물로 마주하니 더욱 깊은 울림을 전했다.
많은 관람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고흐를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보고 싶었던, 밀레의 그림을 복제했다는 작품은 만나지 못했지만, 고흐의 그림 속엔 여전히 그의 욕망과 체념이 병치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 너무 아름다워서, 동시에 너무 고통스러웠던 세계. 나는 그 안에서 잠시 큰 숨을 들이켰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 고흐를 보는 일은, 어쩌면 가장 적절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그림은 건조한 틀 안에 갇히기보다, 이런 축축한 날, 누군가의 심장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전시장을 나서자, 빗물을 머금은 나무들이 젖어 있었고, 초록은 더욱 짙고 푸르게 반짝였다. 그 풍경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흐는 어쩌면 그림으로 남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싶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언어가 모자라 붓을 들었던 사람. 그리움이 넘쳐 물감을 쏟아부었던 사람. 누군가의 그림 앞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는 일, 그리고 누군가의 작품 안에서 조용히 젖는 하루.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미술관 앞뜰을 천천히 걷다가, 나는 대전시립미술관 수장고에 들렀다. 거기엔 오래된 흑백 사진들, 특히 백남준을 찍은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고, 그 이미지들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마치 사진 속 인물들이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존재처럼, 천재들의 아우라는 프레임 너머로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빛이었다. 그 모든 이미지들이 언젠가 내 마음 어딘가에서 나름의 색으로 번지고, 조용히 붓질을 시작하리라.
충분했고, 아름다웠으며, 오래도록 기억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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