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복수전공 수강 중인 ‘현대소설강독’ 수업에서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을 읽기 시작했다. 매년 이 시리즈를 접할 때마다, 문학이 지금 이 시대의 언어로 어떻게 말해지는지, 어떤 문장과 정서로 현재를 포착하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특히 젊은 작가들이 어떤 세계관을 품고 있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그 감각의 방향을 읽는 일은 마치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의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일처럼 느껴진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들이 쓰는 문장이 종종 낯설고, 감각의 결이 내 것과는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리듬과 단어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틈. 어쩌면 나는 그들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이미 이 시대의 언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붙들고 있다. 나에게 없을지도 모를, 혹은 아직 닿지 못한 현대적 감각을, 나의 오래된 문장 위에 덧대어보기 위함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단지 강의의 일환이 아니라, 나에게는 하나의 훈련이고 고백이며, 미처 쓰지 못했던 나의 감정과 사고를 다시 꺼내보는 시간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쓰는 이 감상문 한 줄 한 줄이, 그들을 배우려는 내 나름의 작고 조심스러운 몸짓이기도 하다.
백온유의 단편 소설 『반의반의 반』을 읽고
<가족이라는 말의 허상과, 끝끝내 남는 마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묘하게 저릿했다. 분명히 오천만 원이라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읽고 나면 남는 것은 돈도, 사건의 진실도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조용히 침잠하는 사람들의 감정들, 말없이 외면하거나 침묵 속에 가려져 있던 갈증과 고립, 그리고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졌던 욕망의 잔여가 서서히 떠오른다.
소설 속 할머니 영실은 이 이야기의 중심에서 매우 모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가족의 자랑’이자 중심축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허영과 독선으로 가족이라는 껍질을 지탱해온 존재. 하지만 나는 그 허영이야말로 그녀가 가진 마지막 자존감의 형태였다고 느꼈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신체는 느려지고, 가족은 더 이상 그녀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자신을 ‘존중해주는’ 듯 보이는 요양보호사 수경에게 끝끝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그녀가 가족이 아니라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던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한편, 딸 윤미와 손녀 현진의 시선에서 영실은 점점 ‘짐’이 되어간다. 모성은 원래 그렇게 헌신적인 것이었을까. 소설은 이 지점에서 무척 솔직하고 냉정하다. “어머니에게 모성이란 게 있었을까”라고 중얼대는 윤미의 속내는, 가부장적 사회가 부과해온 ‘모성의 표상’과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의 어머니 사이의 균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모성이란 언제나 따뜻하고 용서하는 감정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생존과 품위를 위해 선택하는 거리감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교무실에서 현진 앞에 단정한 투피스를 입고 등장한 영실의 모습이다. 그 장면은 마치 연극의 클라이맥스처럼, 그녀가 한때 가족에게 어떤 상징적 존재였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 장면이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을 환기시키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노년기 인물의 복잡한 내면이 아이러니하게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이라는 말의 무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때때로 가족은 서로를 지지하고 감싸는 울타리가 되지만, 때로는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주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장 가까워야 할 존재가 가장 멀게 느껴진다”는 이 소설의 아이러니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겪어보았거나, 겪게 될지도 모를 현실이다.
백온유는 이 소설에서 죄책감과 회복, 그리고 기대와 실재의 간극을 통해 가족의 진실한 의미를 묻는다. 명확한 해답을 주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족을 돌아보고, 우리가 진정으로 기대하는 사랑과 돌봄이 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반의반의 반』은 결국 ‘가족’이라는 단어를 다시 쓰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허상이든 실재이든, 우리 마음 한편엔 여전히 ‘믿고 싶은 마음’이라는 잔물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나는 문득, 왜 이 작품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작으로 선정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단지 사건의 흥미로움이나 사회적 메시지 때문일까? 아니면, 이 작품이 가진 어떤 미학적 성취 때문이었을까?
『반의반의 반』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오천만 원이 사라진 사건’이라는 플롯적 긴장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사건을 둘러싼 인물의 심리와 관계의 균열, 감정의 미세한 결까지 섬세하게 포착하는 문장의 감각에 있다. 백온유는 문장의 밀도를 통해 일상의 틈을 열고,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상처와 결핍을 드러낸다. 감정은 과장되지 않으나 그만큼 깊고, 묘사는 절제되어 있으나 오히려 그 속에 더 많은 여운이 스며 있다.
이 작품의 미학은 바로 그 ‘비워냄의 방식’에 있다. 작가는 명확한 정답이나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며,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입장을 하나하나 거쳐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판단이 흐려지고 경계가 무너지는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문학의 본질적인 미덕, 즉 낯익은 세계를 낯설게 만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트게 만드는 서사적 전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모성과 가족, 돌봄의 의미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균열을 내며, 독자에게 사회적 ‘표상’과 개인의 ‘실재’가 어디에서 충돌하고 어긋나는지를 묻는다. 이처럼 『반의반의 반』은 서사 구조의 완결성이나 사건의 개연성만이 아니라, 감정의 진폭과 인간 존재에 대한 윤리적 응시, 그리고 언어의 감각적 정제라는 측면에서 높은 미적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미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가? 나는 특히 말 없는 감정 묘사와 시점 구성의 전략에 주목하게 된다. 『반의반의 반』에서 인물들은 감정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영실은 딸에게 “수경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가족에게 말하지 못한 외로움과 애착이 응축되어 있다. 그 어떤 격정적 표현보다, 이 짧은 문장이 지닌 정서적 잔향은 훨씬 크다.
백온유는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 시선의 회피, 사소한 행동 속에서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교무실에 불려간 손녀를 향해 단정한 옷차림으로 등장하는 영실의 모습은 “말하지 않고도 말해지는 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감정은 언어 바깥에서 드러나며, 독자는 그 여백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인물과 더 깊이 교감하게 된다. 이러한 미묘한 감정의 파형은 작품의 전반적 정서와 리듬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이 작품은 삼대 여성 화자의 시점을 교차하며 구성되는데, 이는 한 사건을 둘러싼 감정의 다층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영실, 윤미, 현진 각 인물의 시점은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간극을 드러내며,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품고 있는 내면의 틈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이 복수 시점 구조는 단일한 해석을 거부하며, 진실이란 결코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이처럼 『반의반의 반』의 미학은 말보다 침묵에, 명시보다 여백에, 설명보다 응시에 있다. 작가는 말해지지 않는 것을 끝까지 견디게 하며, 독자로 하여금 감정의 결을 더듬게 만든다. 이는 단지 서사의 완성도를 넘어서, 감정의 윤리학이자 언어의 미학으로까지 확장되는 지점이다.
『반의반의 반』이 보여주는 감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결코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자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얽혀 있다. 이 복잡하고 얽힌 감정의 층위는 단순히 '좋다'거나 '싫다'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감정의 다층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가능해진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태도이며 방식이다. 후설이나 메를로퐁티처럼, 감정은 나와 세계,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성을 구성하는 방식이며, 그것은 표면이 아니라 의식의 깊은 층위에서 경험되는 방식이다. 예컨대 윤미가 어머니 영실에게 품는 감정은 사랑과 원망, 책임과 회피가 얽힌 ‘혼합된 감정’이다. 이 감정은 상황에 따라 부침하며, 설명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언가로 독자의 내면을 울린다.
소설 속 현진이 학교에서 친구 '거머리'와 싸운 뒤 교무실에 앉아 있는 장면은 메를로퐁티의 감각적 철학을 잘 보여준다. 현진은 설명할 수 없는 수치와 억울함,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단정한 투피스를 입은 할머니 영실이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말 없이 위로받는다. 이 장면은 시선과 몸짓, 분위기 속에서 교환되는 감정의 장이다. 감정은 언어가 아니라 몸을 통해 세계와 맺는 관계성으로 존재한다는 메를로퐁티의 사유가, 말보다 먼저 도달하는 감정의 교류 안에 스며 있다.
또한 감정은 언어화되지 않은 윤리로 기능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처럼, 감정은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내가 느끼는 책임감, 즉 말 이전의 윤리적 감응이기도 하다. 영실이 끝까지 수경을 감싸는 장면은 정당화될 수 없는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감정적 진실의 층위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읽힌다. 이는 감정이 도덕적 명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를 받아들이는 고유한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터 벤야민의 ‘파편화된 기억’과 ‘지각의 구조’에 대한 사유는 영실의 인지 저하와 기억 파편화 과정에 밀접하게 대응된다. 벤야민은 기억이란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감각으로 다시 배열되는 잔상이라 보았다. 영실은 과거 남편의 유품을 떠올리고, 수경의 손길을 통해 어린 시절의 감정을 착각하며 경험한다. 그녀에게 기억은 선형적 서사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들, 이미지, 냄새, 온기 같은 잔상으로 남아 있다. 기억이란 사라지지 않지만, 결코 온전히 재현되지도 않는다는 비극성을 이 작품은 정직하게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 주의와 ‘타자의 목소리’ 개념은 이 소설의 삼대 여성 인물의 시점 교차 구조에서 뚜렷하게 작동한다. 영실, 윤미, 현진은 각자의 언어와 감정, 세계에 대한 해석이 충돌하거나 스쳐 지나간다. 서로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잔향’처럼 남는다. 이는 바흐친이 말한, 인간이 단일한 자아로 구성되지 않으며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구성된다는 철학과 정확히 호응한다.
『반의반의 반』은 감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취약성과 존엄, 욕망과 결핍,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질문한다. 이 작품이 가진 미학은 바로 그 감정의 층위들을 굳이 해명하거나 단일화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철학적 사유의 공간을 남긴다. 감정은 끝내 하나의 해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소설이 우리를 오래 붙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문득 이 이야기 속에서 오래도록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노년으로 접어들었고, 자식도, 보호자(물론 남편은 있지만)도 없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 선택은 지금도 나를 불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외면할 수 없는 내 삶의 윤리이기도 하다. 작품 속 영실은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가 깊이 기대고 연결되려 한 대상은 가족이 아닌 타인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영실에게 가족은 더 이상 ‘관계’의 주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돌봄은 있었지만 마음의 온기가 없었고, 일상은 공유되었지만 존중의 눈빛은 사라져 있었다. 반면, 수경은 낯설지만 영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녀가 가진 시간의 깊이를 이해하려 했다. 영실이 수경을 향해 마지막까지 믿음을 놓지 않는 순간은 단지 허약한 노인의 의존이 아니라, 타자에게로 열린 존엄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조차 외로웠던 영실에게, 진정한 관계란 혈연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이는 타인의 존재였던 것이다.
나 역시 언젠가 어떤 관계의 가장자리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족이라는 명목 안에 있으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기능적인 것으로만 축소될 때, 나는 어떤 연결을 꿈꾸게 될까. 내가 만든 ‘작은 세계’ 바깥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될까,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스스로를 끝까지 품으며 침묵의 시간을 견디게 될까.
『반의반의 반』은 그런 질문들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깊은 여운을 남기며 내 앞에 놓아두었다. 나는 아직도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관계를 꿈꾸며, 말해지지 않은 마음 하나를 천천히 되짚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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