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준 『자유인』을 읽고 난 후
<정용준 『자유인』과 죽음의 윤리>
요즈음, 비바람이 부는 날이면 유독 마음이 흔들린다. 은파 호숫가 비에 젖은 벚꽃잎들이 허공을 헤매다 쓸쓸히 땅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면, 나 또한 그 풍경 속 어딘가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삶이란 결국 지는 일의 연속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죽음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둘러싼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 지에 대해, 혹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제 나 또한 멀지 않은 미래에 그 벚꽃잎처럼 떨어지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나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그리고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이 몸과 이 마음을, 나는 어떤 방식으로 다 써내려 가야 하는가. 그러한 생각들 속에서, 나는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은 날들을 사유로 채우고, 시간의 결마다 나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 마지막 장면을 준비하는 일. 그런 마음으로 나는 정용준의 『자유인』을 읽었다.
정용준의 단편소설 『자유인』은 2023년 여름호 『창작과비평』에 발표되어 제32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인간다움에 대한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한 이 작품은, 독창적인 설정과 서사적 밀도, 균형감각을 갖춘 정직한 서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만 85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엄사를 강제하는 가상의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삶’이라는 감각과 그 마지막 존엄을 끈질기게 붙잡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한 편의 영화가 내게 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일본 영화 『플랜 75』였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이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 고령자의 자발적 죽음’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지원한다는 설정은, 인간이 사회의 짐으로 인식되는 순간 권력과 제도가 그 생명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섬뜩할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들었다. 아직 관람은 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고, 그와 유사한 설정을 담은 정용준의 『자유인』을 읽으면서 두 작품이 다루는 주제가 닿아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자유인』의 세계에서는 ‘ED(Eternal Dream)’라는 장치가 존재한다. 만 85세 이상 노인들은 이 시스템을 통해 인생을 회고하고 감동 속에서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하도록 ‘초대’받는다. ED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더 이상 참지 마세요. 당신의 존엄을 지키고 안락을 누리십시다.”
그러나 이 초대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설계한 ‘죽음의 프로토콜’이며, 개인의 존엄을 효율로 치환한 또 하나의 기술적 관리다. 센터는 ‘마지막 축제’와 ‘ED 관련 영상’을 통해 죽음을 감미롭게 포장하지만, 그 안에는 생을 유예하는 감시와 설득이 도사리고 있다.
화자는 그렇게 자신을 설명한다.
“내가 까다로운 환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움이 없으면 대부분의 일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대부분의 도움을 거부한다.”
그는 프로그램에 참석하지만 참여하지 않는, 센터의 미소와 친절 뒤에서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시선을 느끼는 존재다. 그는 그저 ‘살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이 이미 문제로 여겨지는 사회. 그래서 그는 묻는다.
“나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내게 의견이 없는지, 질문이 없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그는 입소한 아내를 반년 돌보다가, 이제는 입소자가 되어 센터에 거주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어느 날 딸은 간호사의 대화를 통해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마지막 축제 안내와 ED 관련 영상이래요.”
그가 맞이할 예정인 죽음은 이렇게 설명된다.
“자신이 선택한 풍경 속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가장 강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영원한 꿈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요양원에서 죽어간 아내는 재즈를 좋아한 적이 없고, 마지막 순간에 보고 싶은 풍경이 바다일 리 없다. 그녀는 쓰러지는 순간까지 산에 오르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그가 말한다.
“ED가 제공하는 경험은 내 경험이 아니라 남의 경험이다. 거기서 얻을 건 감동이 아닌 질 낮은 쓰레기 감성뿐이다.”
『플랜 75』와 『자유인』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나왔지만, 같은 질문을 공유한다. “인간은 언제 시스템의 대상이 되는가?”
두 작품은 “노인이 된 순간부터”라고 말한다. 고령화 사회, 복지 부담, 생산성의 감소—이러한 경제적 언어가 인간의 생존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에서 죽음은 초월이 아니라 행정이 된다.
“끔찍한 장례식을 축제라 속인다. 형을 선고하고 정해진 시간에 집행하는 것을 크나큰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포장한다.”
존엄사는 처음엔 안도였고, 곧 권유였고, 마침내는 강제가 된다.
“모든 사람은 만 85세가 되면 국립요양센터에 입소해야 한다. 치료제는 없고 진정제만 있는 센터. 그곳에서 우리는 아이와 바보와 식물이 된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고대 로마법의 경계적 인물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 개념을 통해, 법의 안과 밖 사이, 즉 예외 상태에 놓인 생명이야말로 현대 정치의 본질임을 밝혀냈다. ‘호모 사케르’란 누구든 죽일 수 있으나 신에게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존재다. 그는 법의 처벌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사회적‧정치적 질서의 경계 밖에 놓인 ‘벌거벗은 생명(nuda vita)’으로 전락한 존재다.
『자유인』의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호모 사케르적 위치에 서 있다. 그는 ‘ED’를 거부함으로써 제도의 관리로부터 벗어났지만, 그와 동시에 법과 복지로부터도 철저히 추방된다. 국가는 “그를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연금도 의료도 제공하지 않는다. 보호도 처벌도 받지 않는 존재, 그것이 바로 아감벤이 말한 ‘예외의 인간’, 즉 존재하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생명의 형상이다. 『자유인』은 이 극단적인 예외 상태를 정교하게 묘사하며, 오히려 그 배제된 자리에서 인간 존엄의 윤리적 가능성을 질문한다.
“ED를 거부했다는 건 86세가 됐다는 뜻이겠죠? 센터에서 퇴소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자유인이 되십니다……국가는 그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건강보험, 연금 혜택, 의료비와 간병비, 응급비와 생명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공공서비스조차 없습니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제도의 보호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마지막 남은 “나의 시간, 나의 육체, 나의 미래”를 지키려는 존재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죽기 싫다는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감각을 느끼고 되새기며 체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텅 빈 병을 던지고 싶다.”
간병인 우군은 말한다.
“어머니는 결국 마지막에 제 뜻을 따라줬습니다. ED를 거절하신 거죠. 하지만 병원이었다면 간단한 시술로 나을 수 있었던 병으로 길 위에 쓰러졌습니다. 센터에서 퇴소하고 정확히 두 달 뒤였죠.”
그는 이제 묻는다.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완전한 백지를 앞에 두고도 이야기를 잃어버린 작가처럼, 누구도 내일을 말하지 않는다. 나의 시간, 나의 육체, 나의 미래. 내가 겪을 경험. 그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되뇐다.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앞선 죽음은 아니다. 그것이 내게 존엄도 아니고 안락도 아니다. 이 마음을 갖는 것이 앞당겨 죽지 않은 것이 그렇게 나쁜가.”
『자유인』은 SF적 외피를 입었지만 결국은 철학적 에세이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문턱 앞에서 인간이 과연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묻는 사유의 장이다. 『플랜 75』와 나란히 놓았을 때, 이 소설은 더욱 빛난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 거부를 통해, 오직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실존의 존엄'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리고 소설은 끝에 묻는다.
“정말로,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 2024)』에서 말기 암 환자인 마사가 친구 잉그리드에게 “나의 마지막을 함께 해달라”고 요청하며 조용한 죽음을 준비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삶의 끝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마사의 의지는 『자유인』 속 ‘ED’를 거부한 노인의 선택과 닮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죽음을 택했다기보다,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선택한 것이다.
이때 죽음은 어떤 해방이나 도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남기 위한 마지막 고집이며 윤리적 실존의 자리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묻게 된다.
죽음은 유예 가능한가? 아니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가? 죽음의 형식을 고를 수 있다는 말은, 과연 진정한 자유를 뜻하는가? 나는 늙은 나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별을 말하고 싶은가?
그 물음의 끝에서 나는 깨닫는다.
죽음을 미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마지막 흔들림까지도 온전히 느끼고자 하는 마음, 바로 그 감각이야말로 인간다움의 마지막 자리라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죽음을 정돈된 풍경이나 부드러운 음악 속에서 연출된 감동으로 치환하고 싶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죽음의 품격’이 아니라, 끝까지 나로 남아 있으려는 의지다. 그 의지를 꺾지 않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나의 존엄이며, 나의 자유일 것이다. (끝)
아래는 이 소설 속에 나온 문장들이다.
1. 내가 까다로운 환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움이 없으면 대부분의 일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대부분의 도움을 거부한다. 센타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되 참여하지 않는다. 미소와 친절 뒤에 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시선을 느낀다. 불량하고 악독하고 고집스러운 노인 맞다. 하지만 나는 애쓰고 있다.
2. 센타에 거주한 지 일년이 다 돼간다. 입소한 아내를 보호자 자격으로 반년 돌봤고 지금은 내가 입소자로 산다.
3. “마지막 축제 안내와 'ED(Eternal Dream)'관련 영상이래요.”
4.“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고통없는 슬픔없는 세계에서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더 이상 참지 마세요. 자신을 의심하고 회의 하는 슬픔에서 벗어나세요. 당신의 존엄을 지키고 안락을 누리십시다.”
5. 그래 당신말이 맞다. 더는 아기처럼 지저귀를 차고 싶지 않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비참을 겪고 싶지 않다. 몸에서 냄새나는 것을 참고 싶지 않다. 끔찍한 통증. 내일은 더 나빠질까봐 두렵고, 죽을 때 아플까 두렵고.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두렵다. 나도 이 진창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정말로 너희가 말하는 영원하 꿈이란 게 있어?
5. 끔찍한 장례식을 축제라 속인다. 형을 선고하고 정해진 시간에 집행하는 것을 크나큰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포장한다. 안락사가 허용됐을 때 노인들은 안도했다. 고통의 저주와 치욕의 형벌에서 벗어나 존엄을 지키고 진정한 안락에 이를 수 있다 믿으며 박수쳤고 환영했다. 하지만 몰랐다. 허용이 곧 강제가 되리라는 것을. 모든 사람은 만 85세가 되면 마지막 6개월은 국립요양센테에 입소해야 한다. 센타에서는 삶의 끝을 목격할 수 있다. 광대한 밤이 시작되고 사막 같은 날들이 펼쳐진다. 낮엔 뜨겁고 밤엔 차가운 모래밭에 푹푹 발이 빠진다. 국가는 노인을 보호하고 건강을 책임진다. 쉴 곳을 마련하고 질 높은 의료서비를 제공한다. 교육하고 믿게 한다. 죽음 이후 영원한 꿈의 세계가 있고 그곳엔 나만을 위한 해변과 안락의자가 준비되어 있다고 늙어 겪게 될 몸의 통증과 마음의 슬픔을 경험해서는 안 될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고통으로 과장한다. 치료제는 없고 진정제만 있는 센터. 마음의 안정과 몸의 통증을 잠재우는 약은 노인을 아이와 바보와 식물로 변하게 한다. 센터의 일꾼들은 노인들의 손을 잡아끌고 어깨를 붙잡아 푸른 초장으로 이끈다. 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 그 밑으로 예쁜 꽃밭. 그 결에 흐르는 맑은 강. 바람이 볼 때마다 꽃가루가 휘날리는 아름다운 세계. 그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 한발을 더 내디뎌 낙하하는 것. 운이 좋다면 센터에 있다가 ED에 들어가기 전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꿈꿨고 간절히 갈망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살아 있고 일주일 뒤엔 죽어야 한다.
7. 어지럽다 현기증이 느껴진다. 눕는 것이 센터에서 주는 것을 군말 없이 받아먹고 잠드는 것이 최고의 약처럼 느껴진다.
8. 나는 그렇게 희미해지고 싶지 않다.
9.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선생님 다음주죠?” (나는 일주일 뒤 ED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10. 막 마흔이 된 의사는 예정대로 다 순조롭게 진행될 거라고 말한다.
11. “나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내게 의견이 없는지, 질문이 없는지, 할 말은 없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12. 나는 물었다. ED의 메커니즘에 관해. 고통 없는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고 죽음을 왜 Eternal Dream이라고 표현하는지. 그것은 단순히 수사인지 의학적 견해인지.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물었다. 의사는 보험설계사가 약관을 설명하듯 빠르게 말했다.
13. “아시겠지만 ED는 질소중독 사고가 고통이 없는 죽음이라는 것에 착안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조약돌 모약의 케이스에 들어가서 스스로 문을 닫으면 액화질소가 흘러나옵니다. 1분 30초쯤 음악을 들으면 술을 한잔 마신 것처럼 정신이 희미해집니다. 그리고 의식을 잃고 고통 없이 영원한 잠에 빠져듭니다. 질소는 무색무취로 우리 몸은 어떤 것도 느끼질 못합니다. 폐와 심장이 이상 신호를 보내지 않기에 몽롱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게 되는 거죠. 영원한 잠은 죽음을 일컫는 인류의 영원한 수사이지만 의학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ED는 최종 샐행 직전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쾌락과 기쁨을 선사합니다. 측좌핵을 자극해 도파민 분비를 유도하는 거죠. 그러니까 생의 마지막 순간, 일생에서 가장 강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영원한 꿈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다른 세계에 가는 것처럼”
14. “ED가 제공하는 쾌락을 온몸에 느껴질 만큼 인간 신경계가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쾌락을 인지하는 과정과는 다른 메커니즘입니다. 센타에서는 ED에 들어가기 일주일 전부터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소중한 이들과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나간 사진들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하죠.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지나온 삶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도록 돕습니다. 그 결과 ED에 들어갈 때는 훌륭한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자신이 선택한 풍경 속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영원한 잠에 빠져들게 되는 거죠.”
15. “ED는 국가가 시민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하나 선물을 원치 않는 분이 있다면 강제로 줄 수는 없죠. ED를 거부했다는 건 86세가 됐다는 뜻이겠죠? 센터에서 퇴소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자유인이 되십니다. 사회의 모든 법과 제도와 규율에서 벗어난 진정한 나나키스트. 선 바깥의 사람이자 울타리를 넘은 영혼입니다. 국가는 그를 존중합니다. 더는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법으로 보호하지도 않고 어떤 지원도 하지 않습니다. 건강보험. 연금 혜택. 없습니다. 의료비와 간병비, 응급비와 생명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공공서비스조차 모두 개인 책임입니다.”
16. 나는 새롭게 처방된 초록색 알약만큼은 먹지 않았다. 청년들은 이 약을 얻으려고 날리라지 살아있는 게 따분한 이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하고, 죽는 게 두려운 자들에게는 하루치의 평온한 삶을 주는 게 같은 약이라니. 젊은 애들에게는 악하고 늙은이들에게는 선한 한 알의 유혹. 웃음이 나온다.
17. 숲 여기저기 크기와 모양이 같은 요양센터가 서 있다. 이 살아 있는 공통묘지들은 이제 초등학교보다 그 수가 많다. 중심에서 벗어난 곳,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과 들과 황무지에 아파트처럼 들어서는 요양센터들. 한때는 존엄사 허용을 놓고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던 시절이 있었다.
18. 존엄사는 허용됐다. 그리고 권요됐고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존엄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기적이고 눈치없는 사람이 된다. 삶이 선물이라면 버릴 권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존업사의 주요 논리였다. 버릴 수 없으면 선물이 아닌 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선물이 낡고 헤졌더라도 움켜쥐고 그 냄새를 맡으며 잠들고 싶은 사람도 있다. 권리라고? 서둘러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을 권리도 있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압박을 받는다. 영원한 꿈을 강요받고 장례를 대신하는 마지막 축제를 열고 멍청이처럼 앉아 박수를 받아야 한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게 아니다. 죽기 싫다는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감각을 느끼고 생각하고 되새기며 의지로 혹은 체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 이전의 모든 인간들이 죽었던 방식으로. 나도 그런 시간을 누리고 싶다. 기억이 마를 시간. 감각과 감정에 피와 살이 빠질 시간. 주어진 시간을 모두 다 쓰고 싶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텅 빈 병을 던지고 싶다. 육체의 한계를 모두 소진한 뒤 그렇게 죽고 싶다. 이게 그렇게 나쁜가?
19. 의사의 말은 틀렸다. 자신의 삶을 한 편의 영화처럼 느끼고 마지막엔 감동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 ED라고 했지. 아내는 재즈를 좋아한 적이 없다. 들으면 게을러지고 자꾸 처진다고 했다. 마지막 순간에 보고픈 풍경이 정말 있다면 그곳은 절대 바다는 아니다.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산에 오르려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바다는 지루하다 했다. 멍하게 서서 바라보고 추억하는 것 따분하다 했다. 그러니까 ED가 제공하는 경험은 내 경험이 아니라 남의 경험이다. 거기에서 얻을 건 감동이 아닌 질 낮은 쓰레기 감성뿐이다.
20. 그동안 잘 죽기 위한 의학은 발전했지만 오래 살기 위한 의학은 걸음을 멈췄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지만 심장과 신장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직도 없었다. 여전히 암은 발생하고 암이 생기는 걸 예방할 수도 없다. 하필 지랄 맞은 곳에 암이 생기면 항암 수술도 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비웃었던, 비겁하다 조롱했던, 순순히 ED에 들어간 노인들. 그들도 나처럼 발버둥쳤겠지. 그러다 체념하고 약을 삼키고 멍한 눈으로 순한 몸으로 ED의 문을 열었겠지.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어도 제 발로 센터를 벗어날 수도 없을 테니까.
21. 나는 막내딸에게 발버둥치는 삶이 진짜 삶이라고 말하는데 딸은 “아빠는 알았어. 내가 아
빠를 거절할 수 없는 딸이라는 걸.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했고 평생 이용했지. 나도 바빴어 사느라 힘들었고, 내게도 지원이 필요했어. 때론 아빠가 지지해주길 원했고. 하지만 아빠는 내가 하는 일이 제대로 된 일도 아니고 지지할 만한 행동도 아니라는 생각에 돈도 마음도 주지 않았지. 옳은 일이 아니라면 도와주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거다. 이게 아빠의 철학이잖아. 아빠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틀릴 수도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지. 지금 이순간도.”
22.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염증과 고름으로 가득 찬 끔찍한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도 에필로그를 기록할 몇 장의 페이지가 있다. 완전한 백지를 앞에 두고도 이야기를 잃어버린 작가. 잉크가 번져 사용할 수 없는 까만 페이지가 바람에 날려 저 깜깜한 밤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이제 누구도 내일을 말하지 않는다. 다음을 예상하고 상상하는 이가 없다. 나의 시간. 나의 육체. 나의 미래. 내가 겪을 경험. 거기서 느끼게 될 감각과 깨달음. 그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 정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육체는 매장당해야 하니까. 그동안 여러 일을 당하며 여기까지 왔다. 고열, 낙상, 골절, 감염, 크고 작은 교통사고, 불행과 비극을 통과하는 동안 절망한 적 있고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몇 번의 어두운 밤도 떠오른다. 그러나 매번 지나갔다. 이겨냈고 극복했다. 어리석음과 실수로 점철된 날들, 뒤돌아보면 내 죄가 새겨진 까만 돌들이 묘비처럼 서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했으며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했다. 후회한다. 잘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앞선 죽음은 아니다. 그것이 내게 존엄도 아니고 안락도 아니다. 이 마음을 갖는 것이 앞당겨 죽지 않은 것이 그렇게 나쁜가.
25. 나의 간병인 우군은 자신의 어머니와의 경험을 말한다. “제 어머니도 선생님 같으셨습니다, 아니 선생님 같길 바란 거죠. 제가 어머니의 운명을 받아들이셨고 영원한 꿈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그렇게 보낼 수 없었죠. 어머니는 결국 마지막에 제 뜻을 따라줬습니다. ED를 거절하신거죠.(중략) 어머니를 들고 안고 업고 뛸 수 있는 힘은 있었지만 병을 낫게 할 지식은 없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노인 금지’ 어디든 거절당했고 누구도 환영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이었다면, 요양센터에 있었다면 간단한 시술로 며칠 약 먹는 것으로 금방 나을 수 있는 염증과 종양 때문에 어머니는 길 위에 쓰러졌습니다. 센터에서 퇴소하고 정확히 두달 뒤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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