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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한강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현대소설론 과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4. 15.

 

 

한강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양심의 심연에서 피어난 연대의 윤리>

 

 

알 깠다. 센타 수비 멋져부러.”

고즈넉한 교정의 가을 하늘 아래, 족구 시합이 한창이었다. 나는 센터 수비를 맡고 있었고, 한 공이 내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는 순간, 2루 수비를 보던 남학생의 맑은 웃음이 내 눈에 걸려들었다. 진초록 점퍼, 청바지,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그 순간, 모든 소음이 멎고,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나는 그를 짝사랑했다. 하얀 달밤에 피기 시작한 박꽃처럼,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나는 철학서를 읽었고 서정주를 외웠으며 테니스 라켓을 들고 그와 비슷해지기 위해 젊음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나의 무지와 나약함을 감추려는 장식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시위대 맨 끝 대열에 앉아 목소리만 높이던 나, 겁에 질려 떨고 있던 나를 이제야 직면하게 되었다. “나는 몰랐다.”라는 변명도, 이제는 늙어가는 내게조차 통하지 않는다. 진짜 부끄러움은 무지가 아니라, 몰랐던 사실을 알아채고도 외면하는 데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나는 그런 시간의 끝자락에서 읽었다.

소설은 19805월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고통, 기억, 침묵을 다룬다. 주인공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하다 결국 도청에 남아 죽는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은숙, 진수, 선주, 동호의 어머니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끄러움과 책임, 죄의식과 슬픔을 짊어진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자주 책장을 덮었다.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잠자코 앉아 시선을 창밖에 두고 생각마저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는 생각이란 것을 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룸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

작가가 던지는 질문 앞에서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단지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윤리적 응답을 요구하는 실존의 물음이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나를 깊은 사색으로 이끌었고, 나는 그 속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을 회피할 수 없었다. 인간의 잔인함과 존엄성 사이의 모순은 우리 존재의 근본을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역사의 수많은 비극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때로는 잔인하지만, 동시에 사랑과 연민, 희생과 용기를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모순된 인간성은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깊은 해석의 틀을 얻는다. 그는 말한다.

타자의 얼굴은 죽이지 말라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의 인물들이 겪는 윤리적 각성은 바로 이 타자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에서 비롯된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117)

총을 들고 있었지만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들은 타자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는 순간, 곧 레비나스가 말한 윤리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의 윤리는 타자의 고통을 감지하고도 무시하지 못할 때, 그 응답 불가능성 속에서도 어떻게든 응답하려는 고통스러운 시도에서 시작된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114)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양심은 단지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에 대한 감각이자, 윤리의 원초적 진원이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법이나 사회 계약보다 앞선, 타자 앞에 선 나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책임을 지닐 수밖에 없는 상태로 보았다. 소년이 온다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 망설임, 그 침묵, 그 고통은 바로 그런 윤리의 표현이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116)

이 장면은 인간이 완전하게 선해질 수 있는 순간, 존재의 본질이 윤리로 환원되는 찰나의 광휘를 묘사한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맨살 앞에 선 나로서의 실존이다. 껍질 없는 존재, 연약하고 취약한 상태에서 타자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이 소설 속 인물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윤리적 고도다.

그러나 이 광휘 뒤에는 생존자들이 짊어진 내적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그와 내가 가까웠다 한들 얼마나 가까웠겠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습니다.” (132)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확인한다. 그들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와 싸운다. 바로 이 응답할 수 없음의 고통, 레비나스가 말한 항상 늦은 책임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 싸움은 나에게도 이어진다. 나 또한 과거를 외면했던 자이며, 한때의 무지를 방조로 꾸며온 자였다. 나는 더는 방관자가 아니다. 나는 응답하기 위해 읽는다. 그리고 쓰기 위해 기억한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진정한 윤리는 거창한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앞에서 멈추고, 주저하고, 책임을 느끼는 침묵 속의 떨림이라는 것을. 나의 글쓰기는 바로 그 떨림의 기록이며, 이제 나는 그 책임 속에서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소년이 온다의 페이지들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타자의 피와 숨결로 물든 윤리의 거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거울 앞에서, 내가 어떤 인간이고 싶은지를 다시 묻는다.

나는 책장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작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이든 간에 나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그것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임을 믿었다.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한강의 글은 마치 오래된 상처를 다시 열어보는 듯한 아픔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 아픔을 통해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간극을 조금씩 메워가고 있었다. 80년대의 혼란과 현재의 비극 사이에서, 나는 더 이상 단순한 방관자가 아닌, 역사의 증인이자 미래를 향한 변화의 주체로 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글쓰기가 될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페이지들은 나에게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마주하는 용기,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부끄러움에 갇혀 있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진정한 변화는 거대한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권의 책을 읽고, 그로 인해 변화된 내 안의 작은 생각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작은 변화들이 모여 언젠가는 큰 물결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 과거의 부끄러움과 현재의 아픔을 안고,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나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행동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작고 소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일임을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된 듯하다.

나는 계속 읽을 것이다.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나는 계속 응답할 것이다.

비록 작고 사소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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