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의 사유: 이승우 『사해』에 나타난 결핍과 실존적 침묵」
Ⅰ. 서론
1. 연구 목적 및 문제 제기
이승우의 단편소설 『사해』는 외형적으로는 특별한 사건 없이 고요하게 전개되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자리한다. 말하지 못하는 자,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 유서를 끝내 쓰지 못하는 자—『사해』의 주인공은 사회적 소외, 내면적 고립, 실존적 침묵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그는 타자와 감정을 교환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죽음을 앞둔 순간조차 말하지 못하고, 아무런 감정의 기미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침묵과 무반응은 무감각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감당하는 하나의 윤리적 형식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특히 “유서 쓰기”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진술할 수 없는가, 그리고 그 쓰지 않음과 침묵이 어떻게 실존의 무게를 감당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탐색한다. 본 논문은 『사해』에 나타난 소외와 결핍의 서사를 바탕으로, 말해지지 않음과 쓰이지 않음이라는 부정의 형식이 오히려 인간 존재의 진실한 윤리적 가능성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조르조 아감벤의 ‘비작동(dis-activation)’ 개념과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응답’ 윤리를 비평적 도구로 삼아, 『사해』의 침묵이 단지 결여가 아닌 윤리적 태세임을 규명할 것이다.
2. 『사해』의 줄거리 (이승우, 『사해』, 『문학과사회』, 2013년 가을호)
주인공은 아내와 불간섭주의 속에서 무력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새로운 직장에서조차 유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신입 연수 기간 동안 ‘유서 쓰기’ 과제를 받지만, 그는 그 과제를 진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한다. 삶이 무겁고 진실에 이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 속에서, 그는 말의 공허와 자기 고백의 불가능성을 절감한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 황으로부터 사해 머드를 이용한 화장품 사업 제안을 받지만, 그것이 사기적이라는 사실을 직감하면서도 결국 30만 원을 송금한다. 그러고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뿐해지며 “유서 쓰기도 문제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는 흰 종이를 꺼내고,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래 주소로 연락을 해주세요…”라고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해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할 참을 품는 장면에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작품에서 ‘사해’는 실제 공간이 아니라 주인공의 의식 속에서 구성된 상징적 공간이며, 가라앉지 못하고 떠오르는 역설적 상태를 통해 존재의 불안정성과 부유함을 드러낸다.
3. 이승우 문학의 위치와 『사해』의 의의
이승우는 198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서 실존적 내면과 윤리적 물음을 천착해온 작가다. 신학과 철학, 문학과 윤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과 구원 가능성을 탐색해온 그의 작품들은 주로 침묵, 고독, 단절, 무기력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실존의 다양한 얼굴을 그려낸다.
『사해』는 2013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발표된 이후, 이승우의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은 극적인 사건 없이, 주인공의 내면적 고뇌와 정서적 결핍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말해지지 않는 것’과 ‘쓰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사유하게 만든다. 사해라는 공간은 죽음의 바다이지만 누구도 가라앉지 않는 곳으로, 이는 곧 삶과 죽음의 경계에 떠 있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태를 은유한다. 특히 어머니가 유서를 남기지 않은 채 돌연사하고, 다만 아들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를 쓴 삐뚤빼뚤한 쪽지가 발견되어 연락이 닿는 장면은, 쓰여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말보다 강하게 존재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해』는 말하지 않음, 쓰지 않음, 가라앉지 않음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가장 진실한 윤리적 태도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승우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결핍을 통해 오히려 ‘존재의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을 그려내며, 독자에게 말할 수 없음 자체를 감당하는 태도를 묻는다.
Ⅱ. 결핍과 소외의 내면 서사
1. 소외된 자아와 타자 단절
『사해』의 주인공은 관계의 단절과 정서적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아내와 불간섭이라는 이름의 침묵을 공유하며 살아가지만, 그 실상은 배려가 아닌 이기적 거리두기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아내와 나 사이는 불간섭이 원칙이 되어 있었다. 상대의 사적인 영역에 대한 배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이 근원인 불간섭주의였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단지 부부 관계의 변화가 아니라, 타자와 자아의 거리, 곧 존재 방식의 변화와도 연결된다.
그들의 일상은 “겉을 맴도는 최소한의 대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와 역할 그리고 무한한 침묵과 무관심”으로 유지된다. 이는 부재하는 타자를 사물화함으로써 감정과 관계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타자와의 실질적 소통 가능성이 사라진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다. 주인공은 말하길, “상대를 사물이나 사물에 가깝게 인식하게만 되면, 공간을 함께 쓰며 사는 일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게 된다”고 한다. 이는 타자의 부재를 감정적 무감각으로 환원하는 현대적 소외의 단면이다.
이러한 소외는 단지 관계의 부재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라진 상태—곧 인간 존재의 사유 방식 자체가 변질된 상태를 의미한다. 타자는 타자가 아닌 객체로, 관계는 감정 없는 동거로 전락한다. 『사해』의 주인공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상태’를 살아가며, 그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에서 실존의 비극이 발생한다. 그는 말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며,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관계를 이어가고, 침묵 속에서 존재한다.
2. 관계 부재에서의 실존적 공허
『사해』의 주인공은 인간관계 속에서 감정적 유대를 맺지 못한 채 살아가며, 그로 인해 깊은 내면적 공허를 체험한다. 그는 타자와의 정서적 접속을 시도하지 않으며,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무관심과 불간섭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고립시킨다. 이러한 관계 부재는 단순한 정서적 거리두기를 넘어, 실존의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무중력 상태로 작용한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한다.
그는 특히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공허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머니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고, 다만 “이 늙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래 주소로 연락을 해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입니다……”라는 쪽지를 남겼다. 삐뚤빼뚤하고 큰 글씨로 쓰인 그 문장은 유서보다 더 깊은 감정을 함축한 듯 보이지만, 주인공은 그 쪽지를 직접 읽는 장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은 그의 내면을 침묵 속에 남겨둔 채, 독자에게 해석의 공백을 남긴다. 이 무응답의 상태, 심리적 해명의 부재는 단순한 묘사의 생략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음 속에서 존재를 감당하는 이승우 소설 특유의 윤리적 구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공허는 자아와 육체 사이의 단절로도 확장된다. 그는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순간 불륜의 모텔에 있었고,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쓸쓸한 것은 쓸쓸한 것이고 흥분한 것은 흥분한 것이다. 마음은 마음이고 몸은 몸이었다. 마음이 몸에 작용하는 정도는 몸이 마음에 작용하는 정도를 넘지 못했다.”
이처럼 감정과 육체가 분리된 인식은 실존적 분열의 전형이며, 감정이 작동되지 않는 자기 내면의 공허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마치 그것이, 오로지 그것만이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여자에게 달려든다”고 기술되며 주인공은 오히려 감정을 증명하려는 듯한 충동적 행동을 보인다. 이는 자기 감정에 대한 확신조차 갖지 못하는 존재가 벌이는 실존의 자기 검증이자, 감정의 실재를 확인받고자 하는 초조한 몸짓이다.
『사해』에서 이러한 공허는 단순한 상실감이 아니라, 인간이 타자와 맺는 관계의 뿌리가 사라진 시대적 정서를 반영한다. 주인공은 관계 속에 머무르되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며, 말하려 하되 말하지 못하고, 존재하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표류한다. 이 공허의 정체는 곧 ‘실존’이며, 그것을 감당하려는 태도야말로 이 소설이 질문하는 윤리적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Ⅲ. 결핍의 윤리: 말하지 않음과 유서의 실패
1. 유서의 불가능성과 언어적 침묵
『사해』의 중심에는 ‘유서 쓰기’라는 과제가 있다. 이는 단순히 죽음을 상상하고 정리하는 글쓰기 훈련이 아니라, 주인공에게는 자기 존재를 진실하게 진술하라는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는 새로운 직장의 연수 회장에서 이 과제를 받지만,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말한다.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경우도 있고, 삶이 너무 무거우면 어떤 죽음의 사유도 상대적으로 가볍기 마련이어서 도무지 삶을 업을 수가 없다는 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은 단지 과제 수행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무게가 죽음을 사유하는 가능성조차 소거시킨다는 고백이다. 그는 유서를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유서를 쓰기 위해 진실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 채 쓰기를 유예한다.
그는 잠자리에서도 유서가 쫓아다니며 잠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아직 유서를 쓰라는 목소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해질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거나, 그 순간의 진실을 견딜 마음의 태세를 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고백은 쓰지 않음이 단순한 나태나 무관심이 아니라, 진실을 감당하는 마음의 준비 부족, 곧 존재의 윤리적 결핍을 드러낸다. 『사해』의 유서란 죽음을 준비하는 문서가 아니라, 말하지 못한 자가 말하려 할 때 겪는 심연의 상징이다.
이 지점에서 조르조 아감벤의 사유는 중요한 해석적 틀을 제공한다. 아감벤은 『남은 시간』에서 “기능을 멈춘 행위만이 진정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능동적 행위보다 작동을 멈춘 상태, 즉 비작동(dis-activation)의 윤리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유서를 쓰지 않는 주인공의 상태는 바로 이 비작동의 윤리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중단함으로써, 말하지 않음의 상태에서조차 자기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가능성의 장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결국 소설의 말미에서 유서 한 문장을 쓴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래 주소로 연락을 해주세요.”
그러나 이 문장은 실질적인 고백도, 감정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독자는 이 문장에서, 과거 어머니가 남긴 쪽지인 “이 늙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래 주소로 연락을 해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입니다……”를 연상하게 된다. 그는 마침내 유서를 썼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말하지 못한 언어를 되새김질하는 한 문장의 반복일 뿐이다. 말했으되, 말한 것은 없고, 쓰였으되, 드러난 진실은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에 가까운 언어의 상태에서, 『사해』의 윤리적 질문은 깊어지고, 그 공백의 여운 속에 실존적 진실이 떠오른다.
2. 존재 인식의 공백으로서의 결핍
『사해』에서 주인공의 결핍은 단순한 감정적 결손이나 서사적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로 규정하지 못하는 상태—존재 인식의 공백으로 작동한다. 그는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고도 고통받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침묵하고,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진심 어린 응답을 보이지 않는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있지만, 말이 도달하는 진실은 끝내 형상화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유서를 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진실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선 일종의 존재 태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는 그 태세를 준비하지 못한 채, 언어 밖에 머문다. 이처럼 『사해』에서 결핍은 욕망의 좌절이나 외부 환경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즉, 실존 자체의 조건에서 비롯된다.
이 지점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는 중요한 반향을 준다. 그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는 침묵 속에서도 나를 부른다”고 말한다. 이 말은 타자와의 관계가 말이나 행위를 통해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응답 불가능성의 자각, 말하지 않음 속에서도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윤리를 강조하는 말이다. 『사해』의 주인공은 말하지 않지만, 결코 비윤리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말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 즉 윤리적 불충분성에 머무르는 존재다.
주인공은 끝내 “사해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하려는 결심을 품는다. 이 말은 언뜻 보기에 감상적인 화해의 제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는 침묵과 단절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말할 ‘참’을 품은 자의 무거운 언어다. 그는 여전히 고백하지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말하려는 의지를 내밀었을 뿐이다. 이것은 말해지지 않은 진실의 복원이라기보다, 결핍 자체를 견디고 감당하려는 윤리적 행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사해』는 인간이 자기 존재를 말하지 못하는 조건 속에서도, 그 침묵 자체가 말을 준비하는 형식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말하지 않음은 부재가 아니라, 존재 인식이 이루어지는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 공백이야말로, 이승우가 이 작품을 통해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했던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윤리적 지층이라 할 수 있다.
Ⅳ. 사해라는 공간의 상징성과 실존의 양가성
1. 죽은 바다와 ‘떠오름’의 역설
『사해』라는 제목이자 공간적 배경은 작품 전체의 실존적 구조를 응축하는 상징이다. 사해는 지리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 바다이며, 높은 염도 탓에 생명이 존재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죽은 바다(Dead Sea)’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죽은 바다에서는 어떤 육체도 가라앉을 수 없다. 모든 생명을 거부하는 바다는, 누구든 떠오르게 만든다. 이 가라앉을 수 없음의 상태는 이승우가 그리고자 하는 인간 실존의 양가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사해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 이미지는 여러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호출된다. 주인공은 친구 황으로부터 ‘사해 머드’를 원료로 한 사업 제안을 받는다. 그는 그 제안의 사기성을 직감하면서도, 30만 원을 송금하고 나서 이상하게도 “정신이 가뿐했다”고 말한다. 이 반응은 삶의 무게에 눌려 한 문장도 쓰지 못하던 그가 처음으로 “유서 쓰기도 문제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변화로 이어진다. 사해는 이처럼 죽음의 상징인 동시에 어떤 결단의 순간을 예비하는 의식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해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할 ‘참’을 품는다. 이 말은 단순한 여행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끝내 가라앉지 못하고 표면 위에 부유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자가, 이제 그 떠오름 자체를 감당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가라앉지 못함은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니며, 떠오름 역시 구원이 되지 않는다. 사해는 그 모순된 공간성 속에서 주인공의 실존을 반영한다.
사해의 ‘떠오름’은 역설적으로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상태, 즉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그는 황의 기만에도 완전히 분노하지 못하고, 아내와도 회복을 시도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명확한 애도를 실행하지 못한다. 모든 정동은 무뎌져 있고, 모든 감정은 침묵으로 봉합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사해에 가겠다고 말할 ‘참’을 품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부유 상태를 인식하고, 그것을 마침내 언어화하려는 시도이자, 말하지 않음의 윤리에서 말하려는 윤리로 이행하고자 하는 태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사해는 죽음과 삶, 침묵과 언어, 가라앉음과 떠오름 사이의 경계이자 교차점이다. 그리고 이 교차점에 머무르는 인간이야말로, 『사해』가 그려내고자 하는 존재의 형상이다.
2. 삶과 죽음의 경계로서의 상징 공간
『사해』에서 사해는 단순한 자연 지형이 아니라, 삶과 죽음, 말과 침묵, 감정과 무감각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승우는 이 작품에서 사해를 배경으로 실제 사건을 전개하지 않으면서도, 그 상징을 인물의 심리와 내면적 체험의 공간으로 치환한다. 그 결과 사해는 물리적 장소라기보다 의식의 장(場), 존재의 실존적 조건을 드러내는 은유의 공간이 된다.
사해는 죽음을 상징하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 안에서는 누구도 죽을 수 없다. 이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사유하고자 하지만, 끝내 죽음마저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인간 실존의 상태를 반영한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쓰지 못하고”, “말하지 않고”, “결단하지 못한 채” 부유하지만, 바로 그 떠오른 상태에서 삶과 죽음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계성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 경계는 그의 언어 상태에서도 반복된다. 유서를 쓰지 못한 그는 결국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쪽지의 문장을 반복하면서 한 줄을 쓴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래 주소로 연락을 해주세요.”
이 문장은 그가 끝내 말하지 못했던 감정, 관계, 고백, 삶의 무게 등을 회피한 문장이자, 동시에 그 모든 것의 문 앞에 선 문장이다.
그가 아내에게 “사해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할 ‘참’을 품는 순간, 우리는 그가 여전히 사해에 있음을 알게 된다. 사해는 이미 갔다 오거나 도달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그가 늘 살아왔던 실존의 장소이자 말의 전 경계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말은 완결되지 않으며, 감정은 표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미완성과 유예의 상태는 결핍의 실존이 감당되는 방식, 말해지지 않음이 윤리화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사해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죽음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죽을 수 없음의 장소이며, 침묵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음의 깊이를 상징한다. 『사해』의 주인공은 바로 그 이중적 경계 위에서 존재하고, 독자는 그 떠오름과 침묵의 상태를 통해 자신의 실존을 마주보게 된다.
Ⅴ. 실존적 윤리와 비작동의 가능성
1. 아감벤과 레비나스를 통한 해석
『사해』의 인물들은 말하지 않고, 쓰지 않으며, 감정을 외면하거나 분리된 채 살아간다. 이승우는 이러한 무기력과 침묵의 상태를 비윤리적 결여로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윤리의 기원으로 되돌아간다. 인간이 응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비로소 ‘책임’이라는 물음은 시작된다. 이는 곧 말하고 쓰고 행하는 능력 이전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윤리를 묻는 일이 된다.
조르조 아감벤은 『남은 시간』과 『호모 사케르』에서, 현대 인간의 조건을 “기능을 멈춘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정의한다. 그는 “진정한 가능성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 힘(dis-activation)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사해』의 주인공은 바로 이 비작동의 상태에 있다. 그는 유서를 쓰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아내에게 감정적으로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안에 머무는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 이것은 무능함이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이다.
또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국가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존재, 즉 ‘호모 사케르’의 상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실존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사해』의 주인공 역시 어떤 제도적 언어도, 공동체적 소속도, 감정적 연대도 갖지 못한 채 ‘가라앉지 않는 자’로 존재한다. 그는 완전히 삶에 속하지 않으며, 죽음도 끝내 감당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바로 이 경계 위의 실존, 말해지지 않음 속에 존재하는 자가 『사해』의 윤리적 핵심에 자리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는 침묵 속에서도 나를 부른다”고 말하며, 타자 앞에서 느끼는 무한한 책임의 윤리를 강조한다. 그는 응답하지 못하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 역시 타자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본다. 『사해』의 주인공은 침묵하지만, 그 침묵은 타자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오히려 응답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자의 고통스러운 책임감으로 읽을 수 있다. 아내에게 “사해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할 ‘참’을 품는 순간, 그는 비로소 침묵을 벗어나 말하려는 자의 위치에 선다. 이 말은 언어적 화해나 낭만적 재회의 제안이 아니라, 침묵을 감당해온 자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윤리적 응답의 시작이다.
『사해』는 이처럼 말하지 않음과 하지 않음의 상태를 단순한 결핍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깊은 사유와 윤리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가를 탐색한다. 이는 이승우 문학이 감정의 폭발이나 드라마틱한 서사 없이도, 존재의 본질과 책임의 문제를 섬세하게 제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구원의 부재와 침묵의 책임성
『사해』의 주인공은 소설 전반에 걸쳐 어떤 구원도 요청하지 않고, 또한 어떤 구원도 주어지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아내와의 단절된 관계 속에서도, 친구 황의 사기성 있는 제안 앞에서도 결정적인 선택이나 해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무반응과 침묵은 외면이나 회피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승우는 그 침묵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윤리적 깊이를 되묻는다. 『사해』는 구원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구원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윤리적 감당 가능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사해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을 아내에게 건네려는 결심을 품는다. 이 말은 관계의 회복이나 정서의 고백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자가 말을 시도해보는 윤리적 태세다. 그것은 구원의 요청이 아니라, 응답의 시작이다. 이때 응답은 감정의 전달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으로 타자와 맺어졌던 관계의 윤리성”을 다시 정초하려는 몸짓이 된다.
아감벤의 사유에 따르면, 구원은 어떤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동을 멈춘 상태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잠재성이다. 『사해』의 주인공은 그런 의미에서 구원받지 못했기에, 구원을 언어화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존재의 가장 진실한 국면에 도달한다. 그는 유서를 쓰지 않았고, 삶을 정리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삶의 무게 자체를 감당하는 방식으로 살아낸다.
레비나스가 강조한 “말하지 않음 속의 윤리”는 여기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지만, 소설은 그가 실제로 그 말을 건넸는지, 아내가 전화를 받았는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품은 ‘참’—말하려는 마음가짐 자체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열린 결말은 말하지 않음의 여운 속에서 책임이 발생하는 윤리적 장면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는 시도로 갱신된다.
『사해』는 결말에서조차 어떤 구원도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미완성의 상태인 가라앉지 않는 바다, 쓰이지 않은 유서, 건네지 않은 말, 그 자체를 통해, 인간이 윤리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란 결단이 아닌 감당의 태도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감당은 바로, 말하지 않음이라는 가장 깊고 조용한 책임으로부터 시작된다.
Ⅵ. 결론
1. 실존적 고독과 결핍의 윤리성
이승우의 『사해』는 말하지 않음, 쓰지 않음, 관계 맺지 않음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핵심을 파고든다. 주인공은 세상의 사건들과 사람들로부터 물러서 있고, 감정과 언어 앞에서도 무력하며, 자기 자신조차 분명하게 규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력함과 결핍의 상태 속에서 이 작품은 윤리적 질문을 시작한다. 윤리란 강한 의지나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조차 책임을 자각하고 감당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유서를 쓰지 못하지만, 그 실패는 단순한 무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말하는 언어가 진실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말하기를 유예하는 존재의 고뇌다. 그는 친구 황의 사기성 있는 제안에 흔들리고, 어머니의 죽음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며,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침묵을 유지한다. 하지만 그 무수한 결핍과 비응답의 상태는, 단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인식, 곧 실존적 고독의 윤리로 전환된다.
『사해』는 가라앉지 않는 죽은 바다, 쓰이지 않은 유서, 건네지지 않은 말들을 통해, 말해지지 않은 상태 그 자체가 진실할 수 있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 속에서 주인공은 아내에게 “사해에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참’을 품는다. 그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말할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에서 윤리는 시작된다. 침묵이 결핍의 증거이기보다, 윤리적 준비의 징후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결코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원의 부재 속에서 오히려, 인간이 끝까지 버티고 머무는 침묵의 자리를 통해 말해지지 않은 윤리를 묻는다. 『사해』는 완결된 고백이나 실현된 감정보다도, 말하지 않음 속에서 타자를 감당하려는 존재의 태도, 그 조용한 자세 속에 인간의 존엄을 찾아낸다.
2. 『사해』가 제시하는 현대적 존재론의 가능성
이승우의 『사해』는 극적인 서사 없이, 일상의 침묵과 내면의 정지 상태를 통해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말하지 못함, 쓰지 못함,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는 무기력의 징후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 인간이 감당하고 있는 존재의 한계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 소설은 그러한 결핍을 단순한 상실이 아닌, 존재가 윤리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 즉 “말할 수 없음에 대한 자각”의 형태로 제시한다.
주인공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며, 타자 앞에서 응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무응답의 상태 속에 머무르며, 말해지지 않은 감정과 쓰이지 않은 유서를 통해 실존의 진실을 은밀하게 부각시킨다. 이승우는 이와 같은 존재를 비극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오히려 침묵의 윤리, 결핍의 가능성이라는 긍정적 사유로 확장한다.
말하지 않음은 파탄이 아니라, 감정의 정직함을 위한 유예이며, 타자와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해』는 단지 한 인간의 고독한 실패담이 아니라, 현대의 존재론을 재구성하는 문학적 성찰로 기능한다.
특히 조르조 아감벤의 ‘비작동(dis-activation)’ 개념은 『사해』의 사유 구조를 뒷받침한다. 쓰지 않음, 말하지 않음, 결단하지 않음은 무(無)가 아니라 아직 작동하지 않은 가능성의 자리이며, 주인공이 “사해에 꼭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할 ‘참’을 품는 순간, 말의 가능성은 열린다. 그것은 회복의 약속이 아니라, 침묵의 윤리를 견딘 자만이 시도할 수 있는 응답의 예비다.
『사해』는 독자에게 한 인간의 윤리적 무능력이나 정서적 마비를 보여주기보다는, 말할 수 없음 자체를 감당하는 새로운 윤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완결되지 않는 말, 쓰이지 않은 문장,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는, 바로 우리 시대가 마주하는 인간의 실존적 형상이다. 『사해』는 이러한 존재를 통해, 감정의 불확실성, 관계의 침묵, 언어의 한계 속에서도 인간이 존재론적 정직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가능성을 끝내 놓치지 않는다.
Ⅶ. 나의 소감
이승우의 『사해』를 읽고 분석하는 시간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 이상이었다. 그것은 말해지지 않은 언어 앞에 오래 머무는 일이었고, 응답하지 못하는 존재의 고요한 호흡을 따라 걷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는 듯했지만, 끝내 나는 그 침묵의 여백 속에서 인간 존재의 심연과 마주하게 되었다. 말하지 않음, 쓰지 않음, 고백하지 않음인 그 부정의 형식들이야말로, 가장 조심스럽고 진실한 응답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내게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주인공은 유서를 쓰지 못했다. 그는 펜을 들었지만, 쓸 말이 없었고, 진실한 문장을 시작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멈춰 서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실패한 채 머물렀다. 그 침묵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앞에 둔 존재의 정직한 자세였다. 나는 그가 유서를 쓰지 못하는 방 안에서 오래 앉아 있는 모습이야말로, 이 소설이 말하는 윤리의 풍경이라 느꼈다.
그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가 남긴 쪽지의 문장, “이 늙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래 주소로 연락을 해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입니다……”라는 말이 되살아나는 순간, 그는 그것을 반복하며 자신의 유서 한 문장을 써내려간다. 말은 새롭지 않지만, 그 되풀이의 행위는 오히려 더 간절하다. 침묵의 윤리 속에서, 그는 마침내 말할 ‘참’을 품는다. 그것은 회복이나 화해의 약속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을 견디며 끝내 말하려는 존재의 움직임, 말하지 않음에서 말로 이행해 가려는 미세한 진동이다.
『사해』는 나에게 말보다 더 깊은 무언의 울림을 남긴 작품이다. 인간은 언제나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침묵 속에 오래 머무는 일,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존재를 감당하는 일이, 가장 윤리적인 응답이 된다. 조르조 아감벤의 말처럼, 진정한 가능성은 작동을 멈춘 상태에서 비롯되며,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하듯, 침묵은 타자 앞에서의 가장 정직한 책임이 될 수 있다.
한 남자가 유서를 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삶의 언어에 도달하지 못한 채, 말해지지 않은 시간 속에 머물고 있다. 『사해』는 그런 남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나는 그가 끝내 쓰지 못한 문장의 끝에서, 오히려 가장 진실한 응답을 들었다. 그것은 아무 말도 없는 말, 그럼에도 가장 간절한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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