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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1화) 오후 네 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2. 16.

 

 

"두부파는 소년" 이라는 단편 속 주인공이었던 소녀는 이제 "오후 네 시"라는 장편소설 속, 영숙이란 이름으로 이미 할머니가 되었고,  서용수라는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그러나 이미 사망한) 가 되어 등장합니다.  장편 " 오후 네 시"의 주인공은 남태평양, 키리바시로 부터 온 서용수씨와 관련된 여자의 딸인, 지원이라는 혼혈여아로 대학생이고 서용수를 사랑했던 영숙은 지원을 어린 시절부터 키워주는 역할로 등장해, 서용수와의 추억을 환기하며, 지원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배경이 됩니다. 소설 오후 네 시는 지원의 성장 소설입니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포스팅할 예정^^

 

 

 

 

(1)

오후 네 시

 

 

 

정말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여?”

지원은 영숙의 침대 옆에 바짝 다가앉아 물었다.

바보, 보이긴, 느끼지. 넌 젊은 것이 그렇게 건망증이 심할까?”

영숙은 지원을 향해 눈을 흘기듯 미소 지었다.

미안. 나는 자꾸 영숙씨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해. 사실, 이건 내가 영숙씨가 볼 수 없다는 걸 믿지 않아서 그런 거야. 가끔은 영숙씨가 내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럴 때마다 좀 떨려. 마치 영숙씨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이 느껴지거든. 맞지, 영숙씨? 그 기술, 나에게도 전수시켜줘, 할머니잉

지원은 영숙의 겨드랑이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영숙은 웃음 섞인 몸짓으로 잠시 몸을 비트더니, 곧 지원을 향해 몸을 돌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흠, 이 냄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냄새. 아무도 모를 거야. 이 냄새는 울 영숙씨에게서만 나는 특별한 향! 정말 신기하지, 그치? 내가 왜 이렇게 이 냄새를 좋아할까?”

지원의 얼굴에 복숭아 빛이 스며들었다.

뭣이 좋긴. 노인네 냄새라서 시큼하고 쓰디쓴데.”

아니야. 영숙씨, 이 냄새는 달라. 달콤하면서도 상큼하고, 또 한편으론 마른 은행잎 타는 냄새 같기도 해. , 그건 바로 늦가을 냄새야. 맞아, 맞아. 지금 할머니는 늦가을 같아.”

지원은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으로 눈빛이 흐려지고,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그 안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엉켜 있었다. 잃어버린 것 같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무엇을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내게서 늦가을 냄새가 난다고? 정말 시적이네. 어디, 시 한 수 읊어 보세요, 미래의 시인 아가씨.”

지원은 영숙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영숙씨, 나무 잎 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영숙씨,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

, 들켰당. 우리 영숙씨는 못 말려. 아직도 그걸 기억해? 에이, 귀신도 못 말리는 우리 할머니.”

지원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영숙의 볼을 꼬집었다.

이 아가씨 봐라. 할머니를 가지고 놀아요. 자작시를 읊어 보라니.”

영숙씨, 난 아직 멀었단 말이에요. 일부러 시 같은 건 안 쓰고 있어요. 영숙씨가 그랬잖아요. 내가 시집을 내면 죽는다며. 나중에 사십, 오십쯤 되면 그때 시집을 낼 거예요. 그때 내 시집을 내면 영숙씨 맘대로 용수씨를 뒤쫓아가든, 그때 알아서 하세요. 지금은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영숙은 지원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지원이 사십, 오십이 될 때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가슴 한 켠이 아렸다. 사실 그건 아직 20, 30년 뒤의 일이었지만, 영숙은 자기도 모르게 씁쓸한 숨을 내쉬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지원은 시내버스를 타고 영숙을 만나러 왔다. 삼 년이 넘은 시간 동안, 영숙은 푸른 솔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지원은 학교의 단체 활동을 제외하고는, 지난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오후 4시쯤 도착해 7시쯤 돌아갔다. 지원이 영숙과 보내는 시간은 잠깐의 애교와 수다, 그리고 책을 읽어주는 일이 전부였다.

영숙은 지원이 매번 그렇게 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아직 젊은 아이니까 몇 번 하다 말 거라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지원이 오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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