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원스 어폰 어 타임 – 한 소년을 추억하며
담임은 소녀에게 학교 도서관 대여 업무를 맡겼다. 6학년 몫이었지만 그해부터 5학년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도서관이라야 교실 한 칸에 고작 몇백 권의, 그것도 아주 오래되고 낡은 책들이 전부였다. 책을 빌리러 오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 늘 소녀는 혼자였다.
"마침 읽을거리가 없어서 고민 중이었는디. 와! 이 책을 다 읽어버리면 나도 도시애들 마냥 멋진 아이가 될 수 있겄다야."
두부 파는 소년이 거침없이 도서관에 들어서며 눈을 번뜩였다.
"도시 아이들 마냥, 멋진 아이가?"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소녀는 툴툴거리는 버스를 타고 멀미를 애써 참아가며 한두 번 엄마 손잡고 가본 적밖에 없었던 작은 도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좀체 '도시 아이가 멋지다.'는 의미를 그릴 수 없었다.
"도시 아이는 멋지다야? 오빠는 도시아이들이 어떻게 멋진가 알 수 있나벼?"
"그랴야, 우리 누님들이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잖혀. 요번 겨울에 누님들 만나러 엄니랑 서울에 한 번 안 갔냐? 내가 촌놈인 게 참말로 창피하더라. 도시 아이들은 삐까뻔쩍한 옷들을 입고 삐까뻔쩍한 가방들을 들고 다니더구먼.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어야."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어서."
"언젠가 니도 서울에 한 번 가보면 놀라 자빠질거구먼. 애들 얼굴이 모두 희뿌연하고 통통혀. 우리 누님들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모다 공부도 열심히 혀고 책도 무지 많이 읽는 다더라. 그랴면 그렇게 멋진 애들이 될 수 있디야."
"그렇구나. 책을 많이 읽으면 시골에 살아도 멋진 아이가 될 수 있을 거 아녀?"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책 좀 많이 보려고."
소년은 멋진 아이가 되기를 작정했는지 일주일에 서너 권씩 책을 빌려 가고 반납했다. 때론 읽은 책 이야기를 장황하게 소녀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단둘 만의 공간에서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의 기쁨과 설렘은 점점 강도가 세졌을뿐만 아니라 깊이를 내렸다. 소녀도 때때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소년에게 당당히 말했다. 소녀의 시간은 고무줄처럼 당겨지기도 늘어나기도 했다. 소년과 함께하는 시간은 화살처럼 빨랐고 다음날 아침을 기다려야 하는 저녁과 밤은 지루하고 길었다. 기다림은 소녀의 일상에 무지개로 섰다 내리곤 했다.
봄 학기가 끝이 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도서관에 홀로 앉아 기다리던 소년은 일주일, 이주일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두부를 파는 것도 소년 엄마의 목소리로 대체되었다. 소년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소녀는 물을 수 없었다.
#추억팔이 #원스어폰어타임 #한소년을추억하며 #두부파는소년 #모나미볼펜 #갈매기의꿈 #옛날옛적에 #에세이 #소년의꿈 #소녀의꿈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
'나의 창작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화) 원스 어폰 어 타임 – 한 소년을 추억하며 (0) | 2025.02.15 |
---|---|
(8화) 원스 어폰 어 타임 – 한 소년을 추억하며 (0) | 2025.02.13 |
(7화) 원스 어폰 어 타임 – 한 소년을 추억하며 (0) | 2025.02.12 |
(6화) 원스 어폰 어 타임 – 한 소년을 추억하며 (0) | 2025.02.11 |
(5화) 원스 어폰 어 타임 – 한 소년을 추억하며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