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5] <알랭 바디우의 철학 개관: 진리를 따르는 삶에 대한 고민 >
[원 문장]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중 다시, 알랭 바디우의 진리 철학, 서용순 씀
“현재 영미권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안고 있는 그의 철학은 무척 난해합니다. 바디우는 신을 부정하고 무한을 세속화하는 결정적 계기였던 현대 집합론에서 출발하고 있고, 20세기 후반에 철학을 빈사지경에 빠뜨렸던 근대철학 비판의 문제의식 일부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칸트, 헤겔, 라이프니츠 등의 철학자들과의 논쟁점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고 있지요.”
나의 문장)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아주 어려운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먼저, 그는 신(God)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무한(∞)이라는 개념을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싶어 했다. 바디우는 집합론(Set Theory)이라는 수학 분야에서 출발했는데 집합론은 ‘어떤 것들의 모임(집합)’을 연구하는 수학이다. 예를 들어, 사과, 배, 오렌지가 있으면, 이것들을 모아 ‘과일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런 집합론을 철학적으로 사용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생각을 만들고, 진리를 발견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이에 대한 것을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특히 칸토어(Georg Cantor)의 집합론을 사용했는데 바디우는 기존 철학에서 진리를 설명하는 방식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수학을 통해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만들고자 했다. 즉 집합론은 수학에서 ‘어떤 것들의 모임(집합)’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예를 들어, {사과, 배, 오렌지}처럼 과일들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을 수 있다. 바디우는 이런 집합론을 사용하여, ‘존재하는 것’과 ‘진리’를 새롭게 정의하려 했다.
바디우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풀고자 했다. 그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집합론을 사용했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존재란 무엇인가?"를 논의할 때, 대개 언어나 논리로 설명하려고 했지만, 바디우는 언어가 아니라 수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존재란 곧 집합이다”라고 보았다. 집합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공집합(Ø, 아무것도 없는 집합)이다. 바디우는 이를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보았는데, 공집합이야말로 철학이 말하는 ‘순수한 존재’(pure being)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공집합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수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철학자들은 무한을 신적인 것이나 신비로운 것으로 생각했지만, 바디우는 무한을 세속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나오는 ‘무한 집합’ 개념이다. 칸토어는 무한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자연수(1,2,3,4…)의 집합도 무한하지만, 실수(소수점까지 포함하는 숫자)의 집합은 더 큰 무한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수학적 무한 개념을 철학적으로 적용하여, 진리는 기존의 유한한 사고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으며, 항상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즉, 바디우에게 진리는 하나의 완성된 지식이 아니라, 무한한 집합처럼 계속 열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등장하고, 기존 세계의 틀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바디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사건(Événement, Event)이다. 그는 새로운 진리는 ‘사건’을 통해 갑자기 등장한다고 보았다. 기존의 철학(특히 헤겔의 변증법)은 진리를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바디우는 진리는 논리적 발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갑자기 나타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 현대 수학의 발전, 예술에서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는 순간 등이 바로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바디우는 집합론을 이용해서 사건을 설명했다. 기존 세계(사회)는 이미 정해진 법칙과 규칙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건’은 이 기존 집합에 속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요소로 나타난다. 즉, 기존 세계의 집합에서는 정의할 수 없고, 기존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건이다. 예를 들어,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이용해 천문학을 새롭게 발견한 순간을 생각해 보자. 중세 사회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지만, 갈릴레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주를 관찰하면서 이 법칙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의 발견은 기존의 과학 체계(집합) 안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그에게 사건은 기존 질서(집합)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진리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처럼 바디우 철학의 핵심은 집합론을 통해 진리를 설명한다는 것이고 바디우는 집합론을 철학의 언어로 변환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존재란 곧 집합이고, 공집합(Ø)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존재이며, 무한이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철학에서 ‘진리의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사건(Event)은 기존 집합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진리의 출현이다라는, 다소 어렵지만,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진리는 기존 세계의 틀을 벗어나 수학적 무한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바디우는 철학이 한때 거의 사라질 뻔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철학자들은 “철학은 이제 필요 없다”라고 말했었는데. 특히 20세기 후반(1900년대 후반)에는 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바디우는 이런 비판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철학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칸트, 헤겔, 라이프니츠 같은 옛날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그들이 주장한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판하고 넘어서고자 했다.
칸트(Kant)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과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나누었는데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단순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이성,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시간과 공간도 인간의 사고방식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바디우는 진리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인간이 미리 정해놓은 틀(칸트가 말한 사고방식)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진리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틀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헤겔(Hegel)과의 논쟁에서는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진리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했고. 세상의 모든 것은 ‘논리적인 대립과 충돌’을 통해 점점 더 나은 상태로 변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생각(A)이 있으면, 그 반대(B)가 나오고, 결국 A와 B가 합쳐져서 더 높은 수준의 생각(C)이 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진리가 이런 식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진리는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등장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혁명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이 한순간에 등장하는 방식으로 진리가 나온다고 본 것이다. 헤겔처럼 논리적인 발전 과정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뚝!’ 하고 나타나는 사건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으며,
라이프니츠(Leibniz)와의 논쟁을 비교해보면,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이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세계’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이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았지만, 바디우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는 항상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지금 있는 현실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바디우는 수학(집합론)을 이용해서,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으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가 알던 세상의 규칙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바디우는 칸트, 헤겔,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분석하면서도, 그들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했고 진리는 기존의 철학적 틀 안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원리를 통해 갑자기 등장하고,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을 폈다. 바디우의 철학은 단순히 과거 철학자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진리를 설명하려는 도전인 셈이다.
바디우의 철학을 현대인의 삶에 적용하려면, 그의 핵심 개념인 진리, 사건,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의 실존적 고민과 연결해볼 필요가 있다. 바디우는 진리를 단순한 정보나 이미 완성된 지식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넘어서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흔히 사회가 정해준 ‘정답’을 따르려 하지만, 바디우의 철학에 따르면 그것은 기존 집합에 속하는 것일 뿐 진리가 아니다. 따라서 나만의 진리를 찾으려면 기존 질서를 벗어나는 모험이 필요하며, 단순히 주어진 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예술가, 과학자, 혁명가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방식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에서 기존 세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경험해야 하며, 이를 위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단순한 사회적 합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면 어떤 틀을 깨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바디우는 또한 ‘사건’을 기존 질서 안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의 출현으로 보았는데, 삶이 반복된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뜻밖의 만남, 우연한 발견, 기존 가치관을 흔드는 철학적 사유를 접했을 때 그것을 흘려보낼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통해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으며, 이를 위해 내 삶에서 간과했던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계기가 나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내가 그것을 외면한 적은 없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바디우는 현실이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 항상 열려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집합이라고 보았으며, 우리는 흔히 삶이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유한한 사고에 갇힌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가능성에 열려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자신도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삶에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바디우의 사유는 우리가 진정한 순간을 경험하고도 그것을 쉽게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사랑, 예술, 혁명적인 깨달음처럼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를 가졌던 사건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과 타협하며 기존 질서로 되돌아가기 쉽다. 그러나 바디우는 진정한 사건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끝까지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며, 진리를 따르는 삶이란 자신의 깨달음을 단순한 순간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결국 바디우의 철학을 적용한다는 것은 기존 질서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사건을 받아들이며,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디우의 철학을 삶에 적용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니, 나 스스로가 얼마나 기존 질서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진리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면, 나는 과연 그 사건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살아오면서 여러 번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끝까지 추구하기보다는 일상의 관성 속에서 흘려보낸 적이 많았다. 바디우의 사유를 따르자면, 진리는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철학을 단순한 사고의 체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결단과 행위를 통해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나에게 도전이 된다.
또한 바디우가 말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개념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제한들이 얼마나 자의적인 것이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삶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흘러가야 한다는 믿음,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무의식적인 신념들이 나를 유한한 세계에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디우의 철학에 따르면, 나는 특정한 집합의 일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새로운 사건을 통해 그 집합을 넘어서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하나의 관습적 구조에 불과했다면,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가?
바디우의 철학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한 지적 탐구가 아니라, 내가 처한 현실을 능동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행위이며, 기존의 질서 속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한 사건을 받아들이려는 용기이기도 하다. 그의 철학을 통해, 나는 다시금 철학이 단순한 사유의 체계를 넘어 하나의 실천적 태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이러한 사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인가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어떤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때때로 사유할 일이다. (끝)
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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