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이번 주
온라인 철학 공부 모임인
미래담론의 주인공은
미국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이다.
공부에 앞서
예습하는 분위기로
그녀의 사상들을
고찰해 보았다.
미국 출신의 철학자이자 사회 비판가, 페미니스트이며, 현재 뉴욕 뉴 스쿨에서 정치 및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년)는 학창 시절부터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며 사회 정의와 평등에 대한 관심을 키웠는데요. 그녀는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년), 미셸 푸코, 리처드 J. 번스타인 등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하버마스의 공공장 이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유명하죠.
공공장이란 개인들이 모여 공적인 사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하버마스는 이 공간을 '시민 사회의 핵심'으로 보고 민주적 의사소통과 합의 형성 장소라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며 ‘공공장 이론’이란 개념을 세우죠. 이러한 공공장 개념은 18세기 유럽의 카페, 살롱, 출판사 등에서 발견된 공적 담론의 공간에서 확장된 것으로 공공장이 진정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공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 참여의 개방성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거에 기반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지배가 없는 모든 참여자의 평등한 발언권을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죠. 하버마스는 이러한 공공장을 통해 형성된 공론(public opinion)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고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고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가 강화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에 진입하면서 공공장이 상업화와 대중 매체의 영향으로 인해 약화되고 상업적 이해관계와 미디어의 집중화가 공적 담론의 질을 저하시킨다는 비판을 하며 공공장의 회복이 필요함을 주장하는데 디지털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이 새로운 형태의 공공장을 형성할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므로 온라인 플랫폼은 더 많은 사람들이 공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에 주목하지만 일부 철학자들은 이성적 논의와 평등한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공공장의 재구성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공공장 이론은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틀을 제공하며, 공적 담론의 질과 민주적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완벽하게 실현되기는 어렵겠지요.
낸시 프레이저는 바로 이러한 하버마스의 공공장 이론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제시해요. 그녀의 비판은 주로 하버마스의 이론이 특정 가정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는데요.
공공장에서 참여자들이 사회적 평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가정, 여러 공공장의 존재보다는 하나의 포괄적인 공공장이 더 선호된다는 가정, 공공장은 국가와 사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는 가정, 공공장의 참여자들은 한정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가정 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가정들이 여성과 같은 역사적으로 소외된 집단들에게 공공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해요.
그녀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하위 대중’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주류 공공장에서 소외된 집단들이 자신들만의 공공장을 형성하고, 그 공간에서 자신들의 이슈를 논의하고 대중적인 의제를 설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같은 프레이저의 비판은 하버마스의 공공장 이론이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한 참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그녀의 대안은 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공공장의 형성을 통해 더욱 민주적인 사회를 구현하려는 시도이고 계급과 젠더의 관점에서 공공장 형성 과정의 불평등성을 지적하고, 소외된 목소리의 참여를 위한 새로운 공공장 모델의 새로운 제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프레이저의 이러한 날카로운 비판과 독창적인 사고는 페미니즘 철학과 비판 이론 분야의 국제 학계에 큰 울림을 주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데요. 특히 그녀는 분배 정의(distributive justice)와 인정 정의(recognition justice)라는 두 가지 정의 개념을 통해 현대의 정체성 정치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해로운 영향과 많은 사회를 특징짓는 증가하는 부의 불평등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한다고 경고하면서 정체성 정치가 사회 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프레이저의 이러한 이론은 정체성 정치와 경제적 정의를 통합하려는 시도로, 사회적, 정치적 논의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정의를 단순히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존중을 포함하는 다차원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녀의 분배 정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삶에 필요한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인정 정의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고유한 가치와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죠.
인정 정의라는 측면에서는 지난 번 ‘정의에 관한 논의들’에서 살펴보았던 액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 이론(recognition theory)과 비교해 볼 수 있는데 호네트는 사회적 인정이 개인의 자아 실현과 사회적 통합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가족과 친밀한 관계에서의 인정, 법적 권리와 의무를 통한 인정과 사회적 기여와 성취를 통한 인정이라는 세 가지 주요 인정의 형태를 제안하는 반면 프레이저는 인정과 분배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 인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요. 또한 호네트가 인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적 갈등을 설명하는데 반해 프레이저는 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인정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인정론자인 호네트 역시 프레이저가 말한대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세계 상황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 인정만을 통한 정의로운 사회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호네트는 그녀는 인정문제를 너무 협소하게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 인정 문제로 국한해서 다루고 인정 투쟁의 다른 중요한 자원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해요. 호네트는 ‘정체성의 정치학’에 의해 촉발된 오늘날의 운동이 단순히 문화투쟁으로 환원되지 않듯이,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사회 운동도 단순한 물질적 이해관계나 법적 이해관계의 투쟁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강조하며 분배를 둘러싼 투쟁은 그 자체가 인정 투쟁의 한 부분임을 주장해요. 한 사회집단이 그들의 지위나 사회적 평판에 근거하여 어느 만큼의 물질적 재화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갖느냐를 규제하는 게 제도화된 가치 위계인데 바로 이 가치 위계를 둘러싼 투쟁이 인정투정이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의 인정 투쟁 , 그리고 그 의의는 점차 중대하는 것이 호네트의 기본 입장이에요.
이와 같은 프레이저와 호네트의 이론은 사회 정의와 인정을 다루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두 학자의 이론을 보완하여 보다 높은 사회 정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겠지요.
또한 젠더가 본질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사회적 행위를 통해 구성되며 젠더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는 행동과 말, 제스처 등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재생산된다는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이론으로 유명한 젠더 이론가, 페미니즘, 퀴어 이론, 정치 철학 분야에 중요한 인물인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년)와 프레이저 모두 정체성의 사회적 구성에 주목하지만, 프레이저는 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인정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반면, 버틀러는 주로 젠더와 성 정체성의 수행성과 그에 따른 권력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데요.
또 한 명의 철학자와 프레이저를 비교해 보면 빈곤, 불평등, 정의에 대한 연구로 아시아인 처음으로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며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로 불리며 주관적 행복이나 자원의 가용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존의 윤리적 평가 방법과는 다르게 개인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에 중점을 두며 빈곤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의 결핍’으로 이해하여 개발을 '능력의 확장’으로 정의하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도 태생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년)인데요. 둘은 모두 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인정의 문제를 다루지만 프레이저는 주로 분배적 정의와 인정의 정의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반면, 센은 개인의 역량을 중심으로 정의를 설명하죠,
이와 같이, 프레이저의 정의 이론은 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인정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점에서 독특한데 위와 같은 정의 이론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프레이저의 이론이 어떻게 사회 정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 몇몇 사상가들을 비교해 보았어요.
현재는 낸시 프레이저가 사회 정의, 페미니즘, 정치 이론 등에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그녀의 사상들에 대한 비판 또한 존재해요. 예를 들면 그녀는 사회 정의를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이 사회적 현실의 복잡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을 하는데 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억압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을 분리해서 다루는 것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며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프레이저가 성적 차별과 억압에 대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며 프레이저의 접근이 제도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구조적 변화와 더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요구하기도 하고 프레이저가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비판하며, 이는 종종 분열적이고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정체성 정치가 억압받는 그룹들의 목소리를 강화하고, 그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며 이들은 프레이저의 접근이 이러한 중요한 측면을 간과한다고 비판하죠. 또한 프레이저의 사상이 문화적 인정과 경제적 재분배에 초점을 맞추지만, 일부 비판자들은 이러한 접근이 환경 문제나 글로벌 불평등과 같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며 특히, 글로벌 자본주의와 환경 파괴의 문제는 프레이저의 틀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고 일부 비판자들은 프레이저의 이론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실제 사회적 운동이나 정책적 변화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이론과 실천 간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하기도 하고, 프레이저의 이론은 주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비서구 사회의 현실과 문제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비서구 사회의 맥락에서 프레이저의 이론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있답니다.
낸시 프레이저의 사상은 현대 사회 이론과 정치 철학에 큰 기여를 했지만, 이러한 비판들은 그녀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제시합니다.
낸시 프레이저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그녀의 철학적 연구와 사회 정의에 대한 그녀의 통찰력이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연구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녀의 이론은 여전히 사회 정의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그녀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제시하는데요. 프레이저의 연구는 더 깊은 통찰력을 통해 계속해서 사회, 정치, 경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해줄 것이고 그녀의 작업은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낳는데요. 더불어 그녀의 작업은 새로운 사회 정의 이론의 개발을 이끌 수 있으며, 이미 그녀의 사상이 많은 사회적 변화를 촉진했지만 계속해서 사회 정의를 위한 현대 사회 이론과 정치 철학에 더욱더 진보 발전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녀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는군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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