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소크라테스에 대한 오해들>
저는 지난 1학년 2학기,
이번 2학년 1학기에 걸쳐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대해 배웠어요.
2학기 걸친 소크라테스에 대한 공부가운데
그동안 일반 상식으로만 알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항들이
상당히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죠.
소크라테스하면 떠오르는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들은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라고
짜깁기 되었다는 것인데요.
실지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맨 처음 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내부 기둥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고
이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그의 사형 판결 원인 제공자 중 하나인
폭정 참주 크리티아스가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이 말의 참뜻 운운하며
소크라테스를
역으로 가르치려 들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플라톤의 대화편 『카르미데스』에서
묘사되어 있다고 해요.
또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는 거죠.
그는 악법도 법이어서
사형집행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영혼만 남는 사건이며
인간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며
이 영혼이 본질적인 부분이고
몸은 우연에 불과하며
이 우연적인 부분들의 소멸이
인간의 소멸을 의미하지도 않는데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으므로
죽음은 감옥에 갇혀있던 자가 풀려나듯
몸으로부터 영혼이 풀려나서
깨끗해지는 사건이므로
죽음은 좋은 것이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인식에서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의미인데요.
그러면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를 향한 고발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린 것은
서기전 399년이었고
그의 나이 70세였어요.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후
약 한 달간 감옥에 갇혀있다
독미나리의 추출물인
주로 코닌과 같은
알칼로이드로 성분이 들어있는
독약을 마시고
근육 마비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사망해요.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관해서는
플라톤과 크세노폰 모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작품을 통해 상세히 접해 볼 수 있는데
이를 근거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재판의 원인에 대해 알아볼까요?
<소크라테스의 기소 항목들>
1)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았다.
2)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도입했다.
3)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기소 항목들에 대한 분석>
1)의 항목을 부연하자면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멜레토스는 그가 결코 신을 믿지 않았다고 단언하죠. (플라톤의 『변론』 26e)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고발항목처럼 그가 아테네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는 주장은 두 번째 고발 항목 2) 즉 새로운 영적인 것을 도입했다는 항목과 상충 되어다. 이는 영적인 것들 역시 신들에 다름 아니기에 고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그가 새로운 신들을 믿는다고 비난한 셈이 되는데요. 사실 소크라테스는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신들에 대한 전통적인 이야기를 비판했던 것은 사실이랍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반성이나 비판없이 전승되어진 신들의 권위에 대하여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러한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신화의 전파자인 시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것은 아테네 사회의 전통 도덕과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을 뜻하기도 해서 아테네의 정치, 문화, 교육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는데요. 그가 생각했던 신들은 일체의 악과 흠결에서 벗어난 선 하고 순수한 신들이었다고 합니다. (플라톤 『에우튀프론』 6a ~ c)
2) 번째 항목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도입하였다는 죄목은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영적인 신호와 연관된 것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어떤 잘못된 행위를 하려 들 때마다 이 영적인 신호가 개입하여 제지한다고 고백해요. 이 영적인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혹자는 이것을 신과 조우하는 개인적인 체험으로 보기도, 혹자는 이성의 규제적인 힘이 의인화된 것을 이해하는데 분명한 것은 이 신호가 적극적인 행위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즉 특정 행위에 대한 금지 명령으로서만 작동한다는 것으로 고발자들의 비난은 소크라테스가 이 신호를 가지고서 종교적인 혁신을 꾀하려 든다고 주장하기도 해요. 이에 크세노픈은 소크라테스의 영적인 목소리가 예언자들이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나 천둥 소리를 가지고서 미래를 내다보듯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영적 체험일 뿐, 종교와 관련된 혁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항변한답니다. (크세노폰 『변명』 4,12~13) 또한 플라톤은 이 영적인 신호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일종의 금지 기제로서 가능한 것처럼 묘사할 뿐(플라톤 『변론』 40a~c) 이것을 종교적 혁신의 대안으로 언급한 적은 결코 없다고 주장해요.
3) 번째 항목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은 앞의 항목들이 신과 관련 된 죄인 불경죄에 해당된다면 이 기소 내용은 사회적, 교육적 측면에서 제기된 것으로 크세노폰에 따르면 고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충동질하여 그들의 부모보다도 자기에게 복종하게끔 만듦으로써 그들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인데요. 크세노폰은 이들의 비난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면에서도 결코 젊은이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교육에 관한한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것은 그가 가장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강조해요. (크세노폰 『변명』 19~21)
그러나 플라톤은 세 번째 기소 내용을 앞의 두 가지 항목인 불경죄의 하위 항목으로 설명하는데요. 즉 소크라테스가 도시의 신들을 믿지 말고 그 대신 자신의 영적인 것들을 믿으라고 젊은이들을 충동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이 의미 있는 비난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며, “첫째 교육이란 전통적인 가치의 전승과 재생산이다. 둘째는 전통적인 가치는 전통적인 신들에 관한 이야기 속에 확립되어 있다.” 이 경우 소크라테스는 도시가 믿는 전통적인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젊은이들에 주입함으로써 그들이 전통적인 가치를 멀리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것이 되는데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오래된 비난인 동 시에 방어하기가 더 어려운 고발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플라톤 『변론』 18a~c)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고발에 앞서 더 오래된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악의적인 소문과 비난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어려서부터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지혜로운 자로서 대기 중에 있는 것들과 지하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탐구하는 사상가이며 더 약한 주장을 더 강하게 만드는 자(플라톤 『변론』 18b)” 라는 소문을 듣고 자라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반증이며 소크라테스를 향한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요.
우리가 ’“대기 중에 있는 것들과 지하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탐구하는 사상가”라는 소문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연철학자들 한 명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인데 당시 탈레스를 비롯한 자연 철학자들은 세계의 원리를 신들의 조화가 아니라 자연에서 찾음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신들의 권위를 파기했다는 혁신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비춰지고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작품 『구름』에서 또한 소크라테스가 바구니에 들어앉아 천체 현상을 탐구하는데 골몰하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를 희화화하며 그를 자연 철학자의 일원으로 간주하게끔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곳곳에서 자신이 자연 탐구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이 주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임을 거듭 강조(플라톤 『변론』 19c~d)하지만 동시대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자연철학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함으로써 반(反) 전통적 세계 설명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답니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를 “더 약한 주장을 더 강하게 만드는 자”라는 묘사는 대중들에게 소크라테스를 당시의 민주 정체 아래서의 소피스트들의 폐해를 그대로 지닌 한 명의 소피스트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소피스트들의 지식과 말솜씨는 경탄할 만한 것이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되는냐에 따라서 그것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변론』의 고발자들은 판관들에게 소크라테스가 말이 능수능란, 무시무시한 자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에는 수없이 많은 소피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 중 몇몇은 소크라테스 보다 더 유명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제자로 거느렸는데 유독 소크라테스에게 돌아온 치명적인 비난과 고발의 원인에 대해 우리는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크세노폰은 『회상』에서 지금까지의 고발들과는 또 다른 일련의 비난들을 열거하며 반박하기도 해요. 그 비난들은 소크라테스는 추첨으로 대표자들을 선출하던 당시의 방식이 비정상적이라고 청중들을 선동함으로써 법을 무시했고 아테네 정치사에서 가장 큰 과오를 저질렀던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스승이었으며 젊은이들에게 부모를 무시하라고 가르쳤는가 하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같은 시인들의 작품들 중에서 비도덕적인 부분들만을 뽑아 가르침으로써 젊은이들을 범죄자로 더 나아가 참주가 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죠.
이는 서기 전 404년 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27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고 굴욕적인 종전 협상에 의해 아테네 인들은 스파르타에 대한 증오와 동경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데 크리티아스를 위시한 일군의 젊은 정치인들은 스파르타의 승리가 엘리트주의적 귀족 정체에 있다고 보고 이것을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여기며 스파르타의 비호 아래 아테네의 권력을 장악하는 이른바 30인 참주정을 체제를 만들어 아테네 시민들의 선거권과 지위권 등의 권리들을 제한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민주정의 지도자들을 숙청함으로써 불과 8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수백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처형되고 수천여 명이 도시에서 추방됨으로써 아테네 정치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저질렀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이 열린 것은 이 사건이 끝나고 4년 뒤인 399년인데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익명의 고발자는 소크라테스를 30인의 참주정과 연결했다고 해요. 이는 참주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크리티아스와 그 추종자들이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그들이 참주가 되도록 사주한 인물이 소크라테스라는 지적이었던 것이죠. 또한 이 참주들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의 가족이 섞여 있었다는 것으로도 30인 참주정이 소크라테스와 연결되었을 것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더불어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죽음에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적 대화인 산파술에 의해 당시의 권력자들을 난처하게 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과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치사하고 또한 극적인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었죠.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바로 그의 대화술인 산파술의 영향이 지대했음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다음에 이 산파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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