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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지속되어야 할 ‘정의’에 관한 논의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7. 22.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지속되어야 할 ‘정의’에 관한 논의들

 

2학년 1학기 서양 고대 철학 과목에서 가장 충격적인 문구는 플라톤의 저서 『국가』의 서론 부분에 등장해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친 칼게돈 출신의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철학가였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기원전 459~400)의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관점을 가진 반면 트라시마코스는 도덕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고 오직 법만이 실증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관점이 오류라고 지적하며 직접 양치기의 예시를 들어 소크라테스에게 열변을 토한다.

 

"정말로 양치기와 목동들이 그들의 양과 소들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노예의 소유자들과 그 너머의 무언가를 위해 가축들을 살찌우고 돌봐준다고 생각하는가. 도시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정말로 양떼와 국민을 보는 그들의 시각이 다를까? 도시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가장 큰 이익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낮과 밤을 지새운다고 생각하는가."

 

반어법이다. 즉 양치기들의 일은 결국 동물들이 아닌 그들의 주인을 위한 일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규범을 지키고 행동하는 행위는 권력의 이익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확장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정의란 "권력에 요구에 부합하는 일"로 규정한다.

 

이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물론 시대의 산물이었기에 일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한 명의 정의론이 여전히 오늘날 우리 사회 일면을 지배하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즉 현시대의 정의란 더 많이 가진 자가 강한 자이며 정의는 강한 자의 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목격하며 실망하고 분노하며 어떡하든 정의에 대한 오류를 바꿔보려 애쓰는 이들이 있음을 그나마 위로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여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역사를 관통했던 이러저러한 정의관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한자로는 "정할 정(正), 옳을 의(義)"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어로는 "justice"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전적 다양한 의미의 정의는 편견이나 사사로운 감정 없이 사실에 기초해 공정하고 객관적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한 개인은 사회가 정한 법과 도덕의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법에 따라 사회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법치주의 체제하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기회와 혜택을 공평하게 누려야 하는 형평성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이렇듯 정의의 핵심적인 가치는 항상 공정성, 평등성, 책임감, 존중, 신뢰 등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정의(正義, Justice)는 철학,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지는데 법학에서는 법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도록 형평성, 공정성, 효율성 등 다양한 가치를 고려하여 실현되는 정의를 법의 목적과 연결하고, 사회학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적 정의를 주창한다.

 

한편 철학에서는 정의를 도덕적, 윤리적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플라톤(Plato)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그의 영혼 삼분법을 확장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의 상태를 정의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정의를 평등과 관련된 개념으로 보고 자원과 혜택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분배적 정의와 불공정한 상황을 바로잡는 것을 의미하는 교정적 정의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러한 정의론에 대해 논의한 대표적인 근대 철학자들로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등 많은 사상가들을 거론해야 하겠지만 특히 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의 물결에 큰 획을 그었던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경제학자, 정치가였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는 아버지 제임스 밀과 철학자 제레미 벤담의 영향을 받은 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utility)를 정의선 상에서 주장한다. 언젠가 이들의 정의에 관한 논의들을 더 자세히 공부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시간,

 

사실 나는 조금씩 시차를 두고 공부하고 있는 영미 현대 철학자들 중 낸시 프레이저에 도달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에 앞서 현시대의 정의론에 대해 살짝 살펴보기로 한다.

 

미국의 철학자로서 현대 정치 철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의 정치 철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의 정부학 교수로서 하버드 대학교 최초로 온라인과 텔레비전에서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던 강의 "Justice"로 알려진 마이클 샌델 (Michael Sandel 1953년)은 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을 하며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주장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재임하며 20세기 정치 철학과 인식론에 큰 영향을 미친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 1938~2002)은 개인이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빈곤, 불평등, 정의에 대한 연구로 아시아인 처음으로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며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로 불리는 인도 태생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년)은 주관적 행복이나 자원의 가용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존의 윤리적 평가 방법과는 다르게 개인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에 중점을 두며 빈곤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의 결핍’으로 이해하여 개발을 '능력의 확장’으로 정의하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독일의 사회 철학자로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3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현재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사회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액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년)는 인간이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인정의 결여로 인식하며 사회적 관계에서 인정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에 도달하기 위해 ‘정의’, 특히 사회적 정의에 대한 사상들을 살펴보았는데 곧 본격적으로 낸시 프레이저의 사상들을 고찰해 보겠다.

 

그런데 우리는 현시점에서 왜 정의에 관한 논의를 계속해야 할까? 물론 다양한 측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우선 우리 모두 공감하는 교육, 의료, 주거 등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현대 사회의 불평등으로 야기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즉 공정한 사회 실현을 위한 첫걸음으로써 더불어 극도의 정치적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공정한 정책과 법률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적 추구를 위해, 더 나아가 기후 변화, 난민 문제, 글로벌 경제 위기 등 전 세계적으로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은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이러한 문제들을 특정 국가나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인류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로써 거론하며 인공지능, 빅데이터, 유전자 편집 등 같은 기술의 발전함에 따라 인류에게 안긴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러한 기술들이 공정하게 사용되고,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한 지름길이 우리가 정의에 관한 논의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정의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중요한 주제이고 이를 통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방안 모색 중 하나 임을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 글을 마감하며 비폭력 저항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이끌며 전 세계 시민권 운동에 영향을 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1869년~1948년)의 “정의는 모든 다른 법정을 초월하는 양심의 법정이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4번째 부인이었고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으로 활약했던 엘리너 루즈벨트(1884년~1962년)의 “정의는 한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양쪽을 위한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평화와 정의의 사도로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억압받는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주교이자 반인종차별 운동가인 데스몬드 튜투(1931년~2021년 12월)의 “불의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억압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의 인용구들을 떠올리며 어쩌면 이러한 종류의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최종 목표는 나의 정의관에 도달해 보려는, 내가 분명한 색깔을 가질 수 있을 때, 너의 다름을 받아들이며 너와 내가 함께 빛날 수 있는 시간과 공동체에 대한 기대심 내지는 책임감일 것이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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