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철학함이란>
이슬람 역사, 종교, 철학에 관한
발표 수업이 부끄럽게 진행되었다.
누군가 앞에 선다는 것 자체도
가슴 떨리는 일이지만
그것도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심히 두렵기도, 부끄럽기도 한 일이다.
더군다나
늘 나 자신의 어눌한 말솜씨에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데
선뜻 조별 과제 발표를
내가 하겠다고 나선 것은
나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발표 날은
가슴이 두근거렸고
발표하는 순간엔
어찌나 말이 빨라지는지,
죽! 됐다. ㅠ ㅠ
지루한 수업에
한, 두명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학우들이 신경 쓰여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
내내 낯이 뜨거웠고
마음이 무거웠던 까닭일까?
이슬람 철학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는 의지가
꿈에서조차 발현되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철학, 철학, 이슬람, 이슬람
꿈속을 헤매다
눈을 뜬, 이른 아침,
철학과 1학년 초기에
충격으로 다가왔던
이 말들이 언뜻 스친다.
교수님은 ‘철학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답이 없자
다음과 같이 명쾌한 해답을 주셨다.
“철학의 본질은 철학함에 있는데
이 철학함이란
지속된 비판적 사고에서 비롯된
우리가 당면하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반성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기르는 것”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교수님의 말씀이
내가 생각했던 철학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철학이란
‘지적 즐거움을 동반하는 자유’였고,
어쩌면 나의 무지에 대한 탐구,
그 탐구가 이루어진다면
내가 좀 더 자유롭게
나머지의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비판적 사고”를 운운하셨으니
그때의 떨림은
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나에게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언제쯤 나는
진정으로 ‘철학함’에 접근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오늘 아래의 문장들로
나의 이른 아침을 열었다.
아래의 문장들은
얼마간 오월의 봄에서 펴낸
강신주 선생의 『철학VS철학』의 내용들을
내 나름대로 편집한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흔희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소크라테스, 공자, 나가르주나 원효, 스피노자, 칸트,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들뢰즈의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칸트는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에서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그럼 ‘철학함’을 배운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 칸트는 다른 책 『논리학 강의』에서 “철학함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음을 배운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니, 위 나의 교수님의 “철학함이란 지속된 비판적 사고에서 비롯된 우리가 당면하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반성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기르는 것.”라는 말씀의 원전이 아니었을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철학함을 배우기 전 우리는 우선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즉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무지의 자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신주 선생은 말하며 플라톤의 『향연』 속 소크라테스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자기가 무언가를 결여하고 이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못하네, …… 그렇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자들이 남아 있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네.”
즉 훌륭한 자는 사태의 실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고 나쁜 자는 그것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인데 훌륭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으니 알려고 하지 않고, 나쁜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니 알려고 하지 않는데 훌륭한 자와 나쁜 자 사이에 있는 사람, 즉 모른 것을 모른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만이 알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비로소 철학함의 단계, 지혜를 사랑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강신주 선생은 설명한다.
또한 공자의 다음 예를 더한다.
공자가 말했다. “자로야! 너에게 앎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앎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결국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곧 무지의 자각에 있다는 말이다.
하여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서 무지의 심연을 채우며 나아가는 “철학함” 즉 비판적 사고(이성을 사용한)를 동반한 진정한 ‘철학함’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어지러운 꿈속을 헤매다 잠을 깬, 나에게 이 ‘철학함’의 동력은 ‘무지의 자각’을 통해서라는 두 철학자의 일갈이 이토록 다가오는 것은 ‘무지의 자각’에 눈을 뜬 내가 ‘철학함’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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