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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이슬람의 역사와 종교, 철학에 대해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6.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철학 2024. 05.07 이슬람의 역사, 종교, 철학 - 복사.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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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계속되는 덕분에

과제 발표에 따른

이런저런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대견하다면

웃으시겠지만

PPT라는 단어조차 낯선 나였기에

PPT를 만들고

발표를 위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아마도

발표시, 더듬거리고

쿵쿵쾅쾅 마음이 떨리겠지만

하는데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이슬람의 역사와 종교와 철학에 대해>

 

1. 이슬람의 지역 : 세계 무슬림 분포 지역

 

 

 

 

이슬람 관련 문화를 보고 중동 문화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슬람 = 중동이라기 보다는 이슬람은 북아프리카 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일부 지역, 유럽의 발칸 반도 일부,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 중앙아시아, 중국의 북서부(신장 위구르 자치주)와 러시아의 북카프카스(체첸, 다게스탄, 잉구시 등)도 이슬람 문화권이다. 다만 근동과 중동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지역들은 각각 아랍, 페르시아, 튀르크, 이집트, 유대 민족 및 문화의 종주국이다. 이스라엘도 중동 지역 강소국이지만 우리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조사를 해왔기에 여기에서는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기로 한다.

 

2. 이슬람 지역의 지형, 날씨

대부분 사막 지역으로 위도가 25~35도이고 대륙 서안이기 때문에 건조해질 수 밖에 없지만 지중해 주변은 지중해성 기후(여름에는 구름이 적고 일사량이 많아 덥고 건조한 가뭄이 계속되나, 겨울에는 일기 변화가 심하고 강수량이 많은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는 맑은 날이 많고 비 오는 날이 적으며 겨울이 온화해 과일·꽃 및 겨울 채소가 풍부하다.)를 지니고 있고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주변엔 숲이 있다. 또한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유역은 늪지로, 이 지역의 주민들은 수상 생활을 한다. 이란도 카스피해 주변은 기후가 습윤하다.

 

 

3. 이슬람 문명의 유래와 토대

이슬람의 분포가 특히 많지만 더불어 기독교, 유대교, 바하이(19세기 중반, 바하 울라 (BahāUllāh아랍어로 '신의 영광'이라는 뜻)로 알려진 미르자 호세인 알리 누리가 창시 한 종교. 바하 울라가 예수·마호메트·조로아스터·석가모니 등을 포함하는 과거와 미래의 일 련의 현신(顯神) 가운데 가장 최근의 신이라고 믿는다. 바하 울라의 가르침은 현세대에 새 로운 섭리를 전수한다고 믿어지고 있다. 바하이 신앙의 핵심은 바브와 바하 울라가 본질상 불가지(不可知)한 신의 화현이라고 믿는 데 있다. 신앙을 포함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탄생지이고 예수의 탄생지이며 조로아스터교, 힌두교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슬람이 라는 종교권을 중심으로 펼쳐나가겠다.

 

1) 메소포타미아 문명

a)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최초로 살았다고 알려진 곳이 메소포타미아다. 구약성서타락한 인간에 대해 신이 분노하여 대홍수를 일으켜 노아 가족만이 방주를 만들어 홍 수를 피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대홍수의 흔적을 발견하여 그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b) 오늘날 인류문명이 최초로 발생한 문명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 부르고 있으며 지역적으 로는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의 땅을 말하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땅을 의 미한다. 현재 이라크, 시리아 북동부, 터키 남동부, 이란 남서부지역을 포함하는 메소포타 미아 지역이다.

c)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세계 최초의 설화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 시를 기록했던 수메르인을 비롯하여 아카드인, 바빌론인, 아시리아인들이 정착 생활을 하 며 왕국 이루며 살았는데 특히 수메르인들은 체계적인 관개농업과 특수한 농업기술을 이용 해 일 년 내내 농업생산이 가능한 풍요로운 정착 생활을 했고 기원전 3,000년경부터 청동 기를 이용하며 세계 최초로 위대한 인류문명을 일으키기 시작한 까닭에 이 지역을 오늘날 문명의 요람이라 칭하게 된다.

d) 수메르인들이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농경 생활이 발달하여 안정된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지형은 메마르고 건조한 지형으로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대홍수가 발생하여 애초에는 농업을 하기에는 자연환경이 좋지 못한 지역이었다. 강에서 가까운 땅은 비옥하고 농작물 생산에는 유리하였지만, 토지가 물로부터 먼 지역은 메마르고 사람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관개사업을 일으켜 물 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댐과 배수관도 만들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 발하게 되었다. 식량 생산이 증가하고 생활도 윤택하자 수메르인들은 문명 생활을 할 수 있 게 되었다. 문명 발달에 빼놓을 수 없는 물의 사용이 가능해지자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뿐만 아니라 그 지류를 따라 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관개사업과 하 수 시설도 필요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문화의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문 명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인의 주식인 보리나 밀, 사과, 포도, 무화과, 석류 같은 과일도 대 부분 이 지역에서 유래된 것이고, '술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맥주나 와인>도 이 문명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비옥한 땅에 정착했던 초기 정착민들은 나무쟁기를 사용하여 보 리, 양파, 포도, 채소, 사과와 같은 농작물을 경작하며 살았다. 관개사업으로 농업이 발달하 고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그들은 세계 최초로 맥주와 와인을 만들어 마시는 등 방탕한 생활 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포도주는 신들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필요한 신성한 것이었는데, 후 에 인간들이 만들어 마시며 신들의 쾌락에 빠져 들었다.

d) 메소포타미아의 지형은 정치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광활하 게 펼쳐진 사막이나 유목민들이 방랑하는 습지 지역에도 관개수로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거리가 먼 고립된 도시들 간에 통신은 매우 어려웠고 때때로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안정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수메르의 모든 도시들은 다른 지역 과는 독립적인 형태를 띠게 됐고 그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도시국가로 변모하게 되었 다.

e) 종종 한 도시가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통일하기 위해 전쟁도 벌였지만, 그런 노력은 항 상 이민족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고 수세기 동안 통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수메르가 통일되기도 했지만, 통일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아무튼 아 카드인들은 기원전 2331년 수메르를 정복하여 최초로 성공한 아카드 제국을 만들게 되 었다. 비로소 왕들 간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지만, 아카드 제국도 바빌론 인 들에게 점령당하여 바빌론 제국에 흡수당하고 말았다. 특히 우리가 바벨탑이라고 알고 있는 성경 속 이야기는 이 문명의 지구라트라고 알려진 신전을 말하는 것이라고 역사학 자들은 추론한다.

 

지구라트 사진(지구라트 (ziggurat) 수메르 우르의 지구라트

Hardnfast / wikipedia | 3.0 BY CC

BC 2200~500년의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주요도시의 특성을 나타내는 종교적 건축 구조물로, 내부를 진흙 벽돌로 채우고 외부를 구운 벽돌로 덮었다.

 

 

f) 특히 함무라비 법전으로 알려진 함무라비(기원전 1696-1654) 왕은 아카드 제국의 영향력 에서 벗어나 강력한 메소포타미아 중남부에 바빌로니아제국을 건설했고, 당시 수도였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g) 메소포타미아문명이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는 문자를 고안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수 메르인들은 세계 최초로 상형문자를 발명했다. 갈대 가지로 만든 끝이 뾰족한 철필을 사 용하여 점토판에 기록한 것이 마치 쐐기 같은 모양이라 하여 쐐기문자라 불리기도 하 는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들간에 매우 친근한 문화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아카드어가 실용 언어로 광범위하게 사 용되었지만, 문자의 발명 후에는 수메르어가 성스러운 의식이나 문학작품, 수학, 과학 등 의 언어로 1세기까지 사용되었다.

h) 바빌론 제국 시대에는 도시와 사원에 많은 도서관들이 있었고 모든 남녀가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바빌론의 문학작품들이 수메르어로 번역되었고, 그 가운데 길가메시 서사시는 세계 최고의 설화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설화의 내용 은 히브리 성경에서도 발견되는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 이야기와 노아와 홍수에 관한 내용이 신들의 이야기들과 함께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I) 수메르인들은 일주일이 7일인 달력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셈법에서 60진법을 사용하였고, 60진법의 사용으로 1시간이 60, 하루가 24시간, 원은 360도라는 단위 측정의 기본공식 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곱셈법, 원주율 계산법, 거리 계산법, 25/8로서의 파이 (3.125) 등도 사용하였다.

j) 수학의 발달과 함께 천문학과 과학도 발달하여 태양의 주기도 계산하였다. 바빌론의 천문 학자들은 수학에 능숙하여 일식과 월식도 예측하였다. 천문학의 발달은 종교나 예언과 관 련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달의 주기를 기반으로 1년이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인 12개월 로 이뤄진 태음력달력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니 천문학과 점성학의 기원도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k) 기원전 7-8세기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특성을 다루는 철학분야까지도 연구했기에 일부 과학자들은 최초의 과학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l) 최초로 기록된 종교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지구가 크 고, 빈 공간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원반으로 생각했고, 그 위에 천국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물은 어느 곳에나 있으며, 우주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탄생되었다고 믿었다. 종교는 다신교 였으며 우주는 -라 불렀다. 남신인 과 여신인 사이의 아들인 엔릴이 공기의 신으로 가장 강력한 신으로 불려졌다. 그래서 엔릴은 '신들을 모신 신전인' - 판테온에서 - 우두머리 신으로 숭배되었다.

m)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왕과 여왕들이 신들의 도시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 집트인들과는 다르게 왕이 실제적인 신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왕들은 그들 자신 을 우주의 왕(king of the universe)” 또는 위대한 왕(great king)”으로 불렀고 왕은 그 의 백성들을 돌보아야 하기때문에 종종 양치는 사람(shepherd)”으로도 불렸다.

n) 그들은 철을 다루는 데도 능숙하였다. 최초의 청동기 시대를 살아간 그들은 구리, 청동, 금 에서 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금속들을 발명하여 사용했다. 그 이외에도 금속, 구리, 유리, 램프, 직조, 홍수조절, 물 부족과 관개 등과 관련된 많은 기술들을 발명하여 인류문명의 발 달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잠깐)

페르세폴리스

한편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더 왕은 바빌론의 상업적, 종교적인 특별한 위치를 인정하고 신전의 복구와 무역을 육성을 위한 부두를 건설하였다. 그는 바빌론을 위대한 제국의 수도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궁전에서 죽었다.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그의 부하 장군들의 내분으로 바빌론은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갔다. 기원전 275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새로운 수도인 셀레우키아가 티그리스 강에 건설되고 바빌론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자 바빌론의 지위는 많이 약화되어 갔다.

기원전 150년경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제국의 일원이었던 파르티아인들(Parthians) 통제하로 들어가고 메소포타미아는 로마인과 파르티아인들 간의 전쟁터로 변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서기 226년 페르시아의 사산조(Sassanid)의 지배를 거쳐 7세기 아랍 이슬람이 사산조를 정복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2)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문명

이집트는 나일강을 따라 상하 왕국으로 형성돼 있었는데, 기원전 3100년경 두 왕국이 메네스의 세력하에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나일 계곡에서 3000년 동안 파라오의 통치가 계속되었다. 이때까지 레반트지역은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토착세력으로는 아모리인과 가나안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으로 최전성기 BC 15세기에는 나일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 (Jebel Barkal)까지 세력을 뻗쳤다. 기원전 3000년 메네스(Menes)가 이집트를 통일하고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Macedonia) 왕국이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이집트는 31개 왕조, 3000년 가까이 존재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헬레니즘의 문명을 이어오던 이집트는 7세기 이슬람화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영혼 불멸설을 믿고 있었는데, 파라오는 죽은 다음에도 영혼으로 다스린다고 믿고 파라오가 영원히 사는 궁궐을 의미하는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집트에는 현재까지 약 80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기자의 피라미드이다. 역사상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손꼽히는 이 피라미드는 10만명의 인부가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피라미드 앞에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스핑크스가 그 앞을 지키고 있다.

기원전 3200년경 이집트인들은 500개의 부호로 된 상형문자를 고안하여 파피루스에 기록했고 기원전 1800년경에는 셈어를 기록하는 데도 사용하였다. 시나이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을 창조했다고 하는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22개의 자음자로 처음 개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셈족의 언어인 아랍어도 이 지역 언어인 아람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해지며 <알파벳의 원조>로 간주된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로제타 석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수메르인들과는 다르게 태양력을 쓰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2-3년에 한번씩 윤달을 끼어 넣어야 하는 불편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천문학자들은 큰 별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365.25일이 걸리므로 360일에 중요한 다섯 신의 생일 5일을 추가하여 1년을 365일로 결정하고 0.25일을 모아서 4년마다 하루를 더하는 태양력을 만들었다. 이집트의 태양력은 로마에 전파되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원조가 되었다.

2천 년 전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로 로마 제국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긴 했지만 이집트는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하면서 번성하다가 7세기에 이슬람의 정복으로 이슬람국가가 되었다.

 

 

 

3) 중세 이슬람

a) 이슬람(Islam)

이슬람은 기독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 '이슬람(Islam)'은 아랍어로 ' 평화'라는 뜻이다. 종교적 개념으로 이슬람교라 부를 때 '평화의 종교'라는 표현으로 쓰인 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무슬림(Muslim)'이라 하며, 이슬람 공동체는 '움마(Umma)'라 부른다. 이슬람의 경전은 '코란 혹은 꾸란'이라 부르며, 아랍어로 '낭송하라'는 의미이다. 이슬람의 종파는 크게 수니파(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와 시아파(이란이 대표) 2개 종파 로 나뉘며, 전체 무슬림 인구 가운데 80-90%는 수니파이다.

b) 지역적 배경

7세기에 이르자 아랍인들은 상상을 뒤엎고 당시 강대국이었던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 국을 향해 침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7세기 초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창시한 이 슬람의 영향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홀연히 발생한 이슬람, 알라(Allah) 이외에 신은 없 다는 유일신 사상으로 똘똘 뭉친 아랍인들은 '신의 계시'라는 미명 하에 대제국을 형성하 게 되는데 이를 이슬람 제국이라 한다.

당시 메카는 아라비아반도 중부와 홍해 연안에서 가까운 골짜기에 있었던 도시로, 인도양 에서 지중해 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충지로 카바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에는 옛 날부터 유대교와 기독교도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참아와 참배하 는 장소였다. 그런 이유로 메카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5세기 말 경 메카의 지배 계급은 꾸라이시 부족이었다.

 

c) 무함마드 알리와

 

 

570년경 무함마드라는 예언자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꾸라이쉬 부족 에서 태어났다. 유복자로 태어나 6살에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손에 자랐고 할아 버지가 죽자 다시 숙부의 손에 의해 양육된 무함마드는 카라반 대상들과 함께 무역업에 종사하던 숙부를 따라 시리아까지 가서 상업활동에 종사하였다. 무함마드는 25세가 되자 자신을 고용했던 돈 많은 과부 카디자와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의 아들은 사망하고 딸만 남았다. 40살이 되던 해에 무함마드는 자신이 기도하던 히 라(Hira) 산의 동굴 속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것이 이슬람의 탄생 배 경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무함마드에게, 너의 신의 사도(使徒)”, 그러니 암송하라!”는 계시를 받는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받은 계시는 훗날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 되었고, 코란이라는 말은 암송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신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친척과 친구들을 통해 설교를 시작했으나, 메카지역에는 다신교 사회였기에 이슬람을 전 파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박해를 피해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를 성스러운 천도’, 히즈라(hijra: 성천)’라고 하여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는다. 메 디나에서는 이슬람사상으로 뭉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움마(Umma)’라고 한다. 움마는 종교적 주체인 동시에 국가의 의무를 포함하기에 무함마드가 만든 움마는 나중에 국가의 모태가 되었다.

d) 이슬람의 역사를 만들다.

성천(聖遷)이후 2년이 지나자 성지 회복의 필요성을 느낀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은 624년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과 벌인 첫 전투인 바드르 전투를 치룬다. 바드르전투에서 승리한 무슬림들은 유대인 부족들과도 전쟁을 치렀고 630년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메카를 점령 한 무슬림들은 당시 다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메카에 카바신전을 세우고 이슬람의 성전으로 만들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최초의 유일 신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추앙하며 그들을 아랍인의 조상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슬람군의 정복 사업은 메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리아와 이라크에도 계속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라크에서 페르시아의 사산조의 패망으로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시리아 (639)와 이집트(642)를 정복한 이슬람군은 656년에 서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호라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영토를 넓혀 나갔다. 이슬람이 출현하고 나서 아주 짧은 20년의 기간 동안에 이슬람 세력이 넓은 지역까지 확대된 것은 아랍 부족들이 유일신 사상과 그에 따른 공동체, 즉 움마의 역할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무함마드가 거대한 정복 사업의 결과를 보지 못한 채 632년 사망하게 되자, 공동체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초대 지도자로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를 지도자로 뽑고 신의 대리자라는 의미로 칼리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이슬람은 대제국을 형성하여 지중해에서 북서 아프리카, 이란, 인도 및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고 오스만제국의 통치기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이슬람은 기독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4) 이슬람 연표

- 570: 메카(Mecca)의 꾸라이시 부족에서 무함마드 탄생

- 595: 무함마드 25세 때 카지자(50)와 결혼(6명의 자녀 2명 죽고 딸만 4): 히라 (Hira) 산에서 묵상

- 610: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코란 계시 (40) 이슬람의 출현

- 613: 이슬르마 포교 시작, 3년후 알라(Allah)의 음성 들음

- 622: 메카 메디나(Medina) 성천(Hijra)

- 630: 이슬람군 메카정복

- 632: 무함마드 사망

- 632 634: 아부 바크르(Alb-Bakr) 초대 칼리파 코란 편찬

- 634 644: 우마르(Umar) 2대 칼리파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지역으로 세력확장

- 644 656: 오스만(Othman) 3대 칼리파 북아프리카, 키프러스, 페르시아 정복, 중앙 아시아, 인도지역까지 세력 확장

- 656 661: 알리(Ali) 4대 칼리파 칼리파 계승권을 놓고 조카와 사이들 분쟁 시 아(Shiites)파 분열

- 661 750: 움마이야 왕조(Ummayad: 다마스쿠스) 스페인 정복(711)후 중부 프랑스 까지 세력 확장

- 732 프랑스와의 뚜르(Tours) 전쟁에서 패배, 759년까지 세력 확장 제약

- 750 1258 압바스 왕조(Abbasid: 바그다드) 알콜(Alcohol) 발견

- 850 실리적 확장사업(개종보다는 세금) 전개, 중국과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 확대

- 873 12번째 이맘(Imam) 5살 때 갑자기 사라짐 새로운 심판 예견

- 975 최초의 이슬람대학, 아즈하르(Azhar: 이집트 카이로) 건립

- 970 1080: 셀죽(Seljuk)이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 이라크를 통치하면서 기독교도 박해 성지순례가 어려워짐

- 1058 1111: 알가잘리(Al Ghazzali) 이슬람 철학 체계화

- 1096 1099: 팔레스타인 탈환을 위해 십자군 파견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점령

- 1171 1187: 살라딘(Saladin) 이슬람 왕국 재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탈환

- 1220 몽골의 칭기스칸의 공격

- 1300 칼리프의 아들이 스페인으로 피신 1031년까지 스페인 통치(그라나다는 1492년까지 통치)

- 1280 1480 : 몽골이 이슬람을 받아 들인 후, 인도네시아에까지 무역확대(수피주의 (Sufism) 벵갈, 카자흐스탄까지 전파)

- 1453 오스만제국 재정복(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로 개명)

- 1517 오스만제국이 1914년까지 시리아와 이집트 지배

- 1789 나폴레옹 이집트 정복

- 1817 1892: 바하이즘(Ba'haism) 출현바하울라( Baha'ullah)

- 1914 1918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망함으로써 중동에서 종족 및 부족간 분쟁 발생 아랍의 독립운동 전개됨

- 1932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국

- 1948 이스라엘 건국

- 1948 1972: 4차례 중동전쟁(팔레스타인이스라엘)

- 1973 1979: 2차례의 석유위기

- 1979 이란에서 호메이니혁명

- 1980 1988: 이란이라크 전쟁

- 1991 2003: 걸프전쟁(The Gulf War)과 이라크전쟁

 

잠깐)
그러면 우리가 아랍인(The Arabs)이라 부르는 종족은?

아랍인은 중동지역에 거주하는 구별이 애매모호한 모호한 다양한 종족으로 강력한 종족적 연대를 갖는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문명권에서 살아온 셈족(Semitic)으로,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Islam) 종교의 영향으로 이슬람화된 종족이다.

아랍인들은 이슬람의 정복시대(632-661)를 거쳐 움마이야(661-750), 압바스 왕조(750-1513)를 거쳐 오스만제국(1513-1922) 지배를 받았다.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하여 현재는 22개국(1945년 아랍연맹(Arab League) 창설)의 독립 국가를 이루고 있으며 인구는 약 3억 명에 달한다.

따라서 아랍인은 셈족으로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랍인과 무슬림은 다른 개념이다.

아라비아라는 명칭은 고대 페르시아어, Arabâya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서부 및 남부에 있는 나라 이름을 말하며, 세 개의 주요 지역으로 구분된다.

a) 인도양 경계 지역의 도시들(오늘날 예멘과 오만),

b) 내륙의 유목지역(사우디아라비아)

c) 북서부지역(요르단).

아랍이라는 단어의 최초 사용은 BC 9세기 시리아의 앗시리아 정복의 기록, 아카드어로 쓰여 진 비석의 비문에서 나타난다. “아랍인들은 앗시리아에 반대하는 군사연합체의 일부를 형성했다” Qarqar의 전투에서 앗시리아의 Shalmaneser III 왕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 노획물 가운데는 아랍에 속하는 Gindibu (남자) 혹은 "Gi-in-di-bu'u the ar-ba-a-a" 1000마리 낙타가 있었다.

이 밖에도 Arab이라는 단어는 아랍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Yarab로 불렸던 eponymous father로부터 온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4. 이슬람 제국(Islamic Empire)

이슬람 제국(Islamic Empire)은 중세에 이슬람 국가들이 형성했던 제국이다. '사라센 제국'으로도 물려지며, 사라센 혹은 사라센족(Saracens)은 로마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7세기에 들어서자 이슬람세력의 확장으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제국과 비잔틴제국에 맞서 싸운 아랍인들의 사기는 충천했고 생활도 부유해졌다. 하지만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문제로 이슬람국가들은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무함마드가 갑자기 사망하자 지도자를 잃은 이슬람교도들은 한동안 혼란한 시기를 보냈는데,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의 칼리파가 이슬람을 이끌었으며 이 시기를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라 한다. 혼란한 시기에도 이슬람세력은 계속 확대되어 첫 번째 왕조인 움마이야 왕조 (661-750)를 거쳐 9-11세기는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연 압바스 왕조(750-1258)가 계속되었다.

정통 칼리파시대 이슬람세력은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이란 고원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내전을 종식시킨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661년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움마이야 왕조를 건국하였다. 움마이야 왕조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무슬림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이슬람 문명의 탄생을 도왔다.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정복한 이슬람군의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711년에는 스페인을 점령하였다. 프랑스까지 진격한 이슬람군은 732년 푸아티에서 패하긴 했지만, 인도를 점령한 후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대파함으로써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도 장악하게 되었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이 서역에 알려진 것도 이때로 알려지고 있다.

750년 움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킬 때까지 이어진 왕조가 압바스 왕조이다. 수도를 페르시아 영역이었던 바그다드로 옮긴 압바스 왕조의 팽창은 정복과 평화적인 개종에 의해 계속되었다. 당시 이슬람권의 교역은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볼가 강 불가리아 및 말레이 군도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후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와 가즈나비드 왕조는 아프간-페르샤 지역을 정복하였고, 11세기에는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시대는 이슬람의 황금기라 불려진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철학자, 과학자 및 기술자들은 과거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들 자신의 발명과 혁신을 통해서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압바스 왕조는 아랍인만의 특권을 폐지하고 이슬람법 체계를 완성하여 비로소 아랍왕조의 성격을 벗어나 이슬람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피정복민들에 대한 평등한 대우는 과학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오게 중요한 계기가 된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지리학과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 메카는 아라비아에서 무역의 중심지였고 무함마드 자신도 상인이었다. 메카 순례의 전통은 아이디어와 상품의 교환을 위한 센터가 되었다. 이슬람 상인에 의한 영향력은 아프리카-아라비아 및 아라비아-아시아 교역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 문명은 농업의 토지 소유 계층으로부터 사회를 건설한 기독교이나 인도인, 중국인과는 대조적으로 상업경제의 기반으로 성장하고 확대되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상품을 교역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중국, 인도, 서남아시아 및 서구세계로 전파하고 새로운 발명품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슬람의 황금기에는 먼 거리의 여행이 가능해졌으며, 8세기에는 종이의 사용도 중국으로부터 무슬림 세계로 확산되었고 스페인을 거쳐 10세기에는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거리가 멀어지자 화폐의 부족과 송금의 위험을 고려하여 수표나 어음의 사용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수표라는 어원이 아랍어에서 왔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해주며, 알콜, 커피, 알지브라(대수학), 설탕, 소다, 파자마 등 오늘날 우리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말들이 아랍어에서 왔다는 사실은 당시 이슬람세계의 과학과 상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였고,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광범위하게 팽창한 이슬람제국은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에 의한 반란을 시작으로 여러 분파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시아파인 이스마일파는 930년 압바스 왕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에 고무된 셀주크 터키는 1055년 무력으로 압바스 왕조를 제거하고 칼리파의 권위는 형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마침내 1258년 몽골제국이 바그다드 전투에서 마지막 칼리파를 죽임으로써 압바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오스만제국은 1453년 이슬람제국을 다시 정복하고 과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개명하여 수도로 삼았다. 178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이 있긴 했지만, 이슬람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잠깐)

아라비아 지방의 민화를 중심으로, 페르시아, 인도, 이란, 이집트 등지의 설화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작자 미상의 설화집인 천일 야화 [千一夜話]는 부정(不貞)을 저지른 왕비를 처단하고 매일 새로운 신부(新婦)를 맞아들인 후 다음 날 죽이는 아라비아 왕에게 셰에라자드라는 현명한 신부가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다가 날이 새면 나머지를 다음날 밤으로 미루는 방법으로 천 하루밤을 지속하여 처형을 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5. 오스만제국(Othman Empire)의 등장

오스만제국(Othman Empire; 1299 1922)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이다.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출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동로마 제국과 남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 등의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세계의 절반을 차지하여 오스만제국으로 군림하였다. 18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1923년 터키공화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오스만제국은 14세기 비잔틴제국의 쇠퇴로부터 1922년 터키공화국이 설립될 때까지 아나톨리아 지방의 투르크족이 세운 국가이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오스만제국은 투르크-몽골제국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국가이다. 혼란스러웠던 몽골의 후기 집권기 때 비잔틴제국의 동부 아나톨리아 국경지대에서 첫 선을 보였다.

오스만가()에 속했던 투르크족은 14세기 초만 하더라도 그들은 소아시아 반도 북동쪽 부르사 주변의 약탈자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만인들은 원래 몽골제국의 종속민이었거나 신하였지만 14세기 초에 몽골이 아나톨리아에서 지배력을 잃자 오스만인들이 비잔틴제국의 마을과 도시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셀주크 투르크군이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한 사건을 계기로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및 투르크화가 시작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에 패한 비잔틴제국이 시작한 전쟁이 십자군 전쟁이다. 1차 십자군 원정은 셀주크 투르크족이 보스푸러스 해협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 시작되어 13세기 말까지 2세기 동안 계속 된 이슬람제국과 비잔틴제국과의 전쟁이다.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에서는 기독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 , Expeditio Sacra)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간헐적으로 발생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 원정을 가리킨다.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크루치아테(Cruciatae)'로도 불렸으며, 이를 현대 영어로는 '크루세이드(Crusades)'라고 한다. 이는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자신들의 의복과 장식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었던 데에서 유래했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과 동기

1071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근동 일대에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오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여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북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약해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군비가 팽창하는 1040년대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오던 지원 요청을 보다 다급하게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의 일환으로 10953월 피아첸차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첸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 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렇게 1095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된다.

 

중요한 배경

로마 제국 시기인 3세기경부터 레반트 일대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다수가 기독교도였다. 하지만 7세기 중반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슬람 팽창으로 637년에 예루살렘도 이슬람 령이 되었고 기독교를 믿는 지역은 11세기까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잃는 등 그 영역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다. 거기에 남부 유럽은 이슬람이 발아한 7세기부터, 미국의 바르바리 전쟁에 이어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 지배하는 19세기까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에게 약탈을 당한 기록이 있으며, 1200년 동안 납치된 사람의 숫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이슬람의 세력권은 유목민(베르베르인 등)의 약탈이 일상화된 지역이라 약탈당한 순례자들은 굉장히 많았으며,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순례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소문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동로마 제국이 서방의 원군을 얻기 위한 지원 요청에 명분으로 써먹었고, 정치적 이유로 교황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과장한 부분도 있다. 정확히 따지자면 1009년에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 알 하킴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대놓고 탄압하며 예루살렘 성묘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했으나, 1040년대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머니건 외교로 파티마 왕조와 타협, 기독교 신자들을 보호하며 성묘 교회를 복구한다. 어쨌거나 아랍인 왕조들은 성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돈을 반겨서 순례자들을 대체로 보호해주었다. 문제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존 동로마-파티마의 레반트 세계 질서를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셀주크 제국은 순례자들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감각이 아직 없어서 초반에 순례자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성지 순례자들은 분쟁지역을 지나면서 겪은 일과 튀르크인들에게 당한 불편들을 서유럽으로 돌아와 말해주었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위해 이를 적절히 과장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광신적이고, 현지 사정을 모르는 서유럽인들은 분노로 끓어오르게 된다.

정책적으로 순례자들이 탄압당한 적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거짓된 것이라는 수정주의가 한때 크게 유행했으나, 순례자가 피해를 입은 것과 예루살렘이 기독교 입장에서 모욕당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보니 수정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해석처럼 궁색한 주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시대의 성지는 순례하기에 위험한 분쟁지역이었다. 1070년대엔 말리크 샤가 통치하는 셀주크 제국의 에미르 아트시즈가 성지를 포함한 시리아 전체를 파티마 왕조에게서 빼앗았는데, 예루살렘의 저항을 모스크 안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며 진압해버린다. 1079년엔 말리크 샤의 동생 투투쉬가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를 통치하더니, 1086년엔 그 투투쉬가 형 말리크 샤에게 쫓겨난다. 말리크 샤가 1092년에 죽자 돌아온 투투쉬가 1094년에 시리아를 탈환하나 바로 다음 해에 전쟁에서 패하며 사망. 결국 1096년에 출발한 1차 십자군이 도달하기 직전인 1098년에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가 재정복한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 간에 성지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니, 전쟁에 휘말린 순례자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6] 다만 수정주의 논쟁을 겪은 이후 학계의 관점은 기존처럼 무슬림들이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박해한게 아니라, 서유럽인들을 알리가 없었던 현지의 세속적인 지정학적 분쟁을 겪으면서 피해가 순례자들에게 튀기 시작했고, 라틴 기독교인들은 이걸 종교적 박해로 받아들였다는게 관점의 차이이다.

2. 서유럽의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해결과 인구 감소 효과
당시 서유럽은 농업기술 자체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량 생산성이 형편없었으며, 지배자들은 인구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방법이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고로 전쟁을 통해 잉여인구를 처리하여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인데... 이에 대해서 토머스 매든 교수와 자크 르 고프 교수의 의견을 따르면, 서유럽은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원 운동에 힘입어 느리긴 하지만 식량 공급이 차츰 개선되고 있었으며, 전쟁 같은 대규모 학살을 통한 인구 감소 효과를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에 서유럽은 지방 영주들의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인구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인구 감소는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친 전쟁으로 서유럽의 피해가 누적되어 이를 막기 위한 "하느님의 평화" 운동과 "하느님의 휴전"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차라리 해외에 나가서 싸우라고 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 해외로 나가서 싸우라는 소리가 아니라 싸우지 말라는 소리지만 어쨌건 우르바노 2세가 성지 탈환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에 이용한 건 사실이다.

3. 교황청의 권력 확대,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황청의 위세 증진 겸 동방 교회 압박
흔히 동서 대분열로 말하는 기존 가톨릭-정교회간의 갈등이 해프닝에 가까웠던 1054년의 상호 파문으로 표면화, 쌍방의 총대주교(교황도 총대주교이므로)와 황제에게 파문을 날려대는 등 경쟁의식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카노사의 굴욕으로 상징되는 교황-신성 로마 황제간의 갈등은 한창 진행 중이어서, 교황입장에서는 황제로 대표되는 세속군주들의 권위를 누를 만한 위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정교회권의 상황이 곤란해져서 동로마 제국이 종교적 명분을 들며 지원을 요청해오자, 교황은 이 상황을 세속 군주 및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과 권위를 높일 기회로 판단했다. 이는 1095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있던 교황의 연설에서 잘 드러나는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전까지 잘 써먹지 않던 '순교', '대사령', '구원' 등의 자극적인 단어를 쓰며 적극적으로 십자군 여론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순례자들의 경험담과 동로마 황제의 지원 요청으로 불씨 자체는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동방 황제는 1차 십자군 외에는 청한적도 없는 대규모 십자군 문제를 걱정하게 됨은 물론, 그 십자군 운동의 주체에서 객체로 밀려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서방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도 십자군 문제를 중요시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교황의 권위 강화 시도는 대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재산의 위탁 관리에 따른 교황청의 재산 증대
당시 십자군 원정은 소요기간이 굉장히 길었으며, 어차피 돌아올 가능성도 낮을 거라고 예상한 교황과 사제들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산을 위탁받으면 그냥 자기네 것이 될 거라고 계산했었다. 실제로 교황청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지의 관리를 위탁받은 것은 사실이고, 당시 교황청은 서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관리 시스템이라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들은 영주들에 비해 효과적으로 땅을 관리하고 운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영주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떼어갈 지언정, 영지 자체를 먹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선 영주들은 원정 이전에 유사시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2, 3, 4 상속권자까지 설정해 두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교황청이 신속하게 상속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문서로서 약속해두었다. 또한 영주의 사망시 상속권자가 없을 경우에는 그냥 영주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위의 영주에게 그 영지가 몰수되었다. 애초에 위탁만 했지 양도하겠다고는 안했으니. 그러나 영지라는게 경영하는 사람이 영민들이 견디지 못해 들고일어날 정도로 도를 넘은 착취를 하거나 전염병이 돌지 않는 이상 세금 수입이 보장되는 물건이고 영지를 이용하여 돈 벌 방법은 많았으므로, 위탁하는 동안 교회는 짭잘한 세금 수입과 부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설사 위탁이 영주의 사망으로 해제된다 할지라도, 그동안 벌었던 돈이 어디가는건 아니었으므로 교황청의 재산은 증대되었다.

5. 힘의 외부 분출을 통한 내부적 평화 달성
2.에서 이어지는 목적이다. 하지만 당연히 권력공백을 노리고 빈집털이하려는 서유럽 안에서의 지방 영주 간의 다툼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는 영지관리하며 돈 좀 만지며 재미보려던 차에 관리 중인 영지에서의 전쟁운 거슬리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따로 전쟁을 하면 안 되는 날까지 만들어서 공표할 정도였다. 결국 권력공백은 오히려 실력자들의 부재로 인한 왕권찬탈 음모가 성행하는 원인이 되었고, 각 왕조 간의 대립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대립이다.

6. 무장 순례 기원설
말 그대로 십자군 원정이 '사악한 이교도들을 박멸하고 성지를 되찾는' 원정이 아니라 '성지 찍으러 가는데 가는 길 험난하니까 무장을 하고 성지순례를 했다'는 개념인데, 카롤링거 왕조의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11세기 후반까지는 이슬람 칼리프들도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1064~66년에는 7,000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1차 십자군 원정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대부분의 원정군이 유럽으로 돌아가버렸다"를 꼽는다. 교황과 교황의 의견에 찬성하는 군주들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고 아예 짱박고 눌러앉길 원했지만, 십자군의 대다수 원정군들은 교황의 뜻이 어찌되건 예루살렘 도착 후 "성지순례 왔습니다" 하고 집에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찍고 돌아가는 일이 잦아서 예루살렘 왕국이나 여러 십자군 국가의 군주들은 십자군들을 성지에 말뚝 박게 하려고 온갖 수를 써댔다.

 

잠깐)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의 원인은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팔레스타인 정착촌 가자 지구를 둘러싼 땅 소유권 전쟁이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유럽 / 미국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불신의 뿌리가 되는 것이 영국의 맥마흔 선언과 밸포어 선언이다

가자 지구에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이 함께 살고 있고, 이스라엘인들이 조금씩 조금씩 거주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이스라엘이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동맹 관계를 맺으려는 움직임이 하마스를 자극했다는 것도 유력한 원인 분석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왜 평화 협정이나 대화로는 해결이 안되고 계속 무력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일까?

거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아랍인들의 지지와 원조를 이끌어 내고자 했던 영국의 2중 플레이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유럽 / 미국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불신의 뿌리가 되는 것이 영국의 맥마흔 선언과 밸포어 선언이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A.H.맥마흔은 아랍인의 지지와 원조를 이끌어 내고자 전쟁이 종식되면 팔레스타인 인들이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는 선언을 하는데 이것을 맥마흔 선언이라고 한다.

 

영국은 요르단 왕 압둘라와의 약속대로 1946년 아랍지역에서 물러나고 압둘라 왕의 이복형제 파이잘 왕자는 이라크의 왕이 되고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의 대부분 국가들도 이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은 2000년 세월 긴 유랑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의 시온 동산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의 기치 하에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매진하고 있었다.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19세기 말 시작된 민족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결실을 맺어 1948년 현대의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 건국이 되기에 이른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하자 폭정을 못 이긴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핍박받으며 살아오면서도 국가건설에 대한 꿈은 버리지 않았고 그 인내와 끈기가 눈물의 결실을 거둔 것이다. 기원전 63년부터 팔레스타인 땅에서 추방되어 흩어져 살아오긴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오면서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 유대인의 인내와 노력이 국가건설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1947년 국제연합은 제181호 결의를 통해 영국령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할안을 제시하지만 아랍측은 이를 거부한다. 그러던 차에 1948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신탁통치가 종료되고 이스라엘은 곧바로 514일 독립국가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은 이에 즉각 반발하여 다음날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사건이 1차 중동전쟁이고 아랍인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8%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고 그 다음해 휴전을 한다. 이 과정에 약75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하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 이웃 주변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면서 대이스라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후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3차례에 걸친 전쟁이 더 치러지지만 아랍국가들은 4차례에 걸친 전쟁에 모두 패하고 아랍-이스라엘간 중동전쟁은 1973년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게릴라전을 통하여 대이스라엘 투쟁을 계속해 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1964년 아랍정상회담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하여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위해 대이스라엘 투쟁을 나섰다. 1988년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민족협의회에서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선포하고 야세르 아라파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이집트는 높은 물가고와 실업난에 시달리게 되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집트는 1978캠프데이비드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화해를 하고 중동전쟁에서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고 그 대신 이스라엘은 건국이후 최초로 아랍국가로부터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93오슬로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가 실현되는 듯했으나, 2004년 아라파트의 사망과 이스라엘의 극우파의 저지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지속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아직도 팔레스타인 자치국가 수립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2005년 팔레스타인 국가창설을 목표로 미국, 유엔, 러시아, 유럽연합(EU)평화로드맵을 마련하였지만, 이들이 마련한 중동평화계획도 이스라엘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동 평화는 그 불씨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갈등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달성될 것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2011아랍의 봄여파 또한 중동평화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 중동평화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2) 석유 시대의 개막과 아랍의 부흥

1950년대 들어오면서 대부분 아랍국가들이 정치적으로는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석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활력은 가져다주었다. 아랍인들은 석유를 알라의 선물이라 여겼고, 다시 이슬람의 깃발아래 다시 모였다. 막대한 석유자원과 그로 인한 엄청난 부의 축적은 아랍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인류가 최초로 석유를 사용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수메르인들이 조각상에 접착제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로 그 땅에서 펑펑 솟아난 석유는 석유시대의 개막을 알리면서 다시금 그들을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시켰다.

중동에서 석유산업은 영국인 윌리암 K. 다아시가 1901년 이란에서 최초로 채굴권을 획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08년 이란에서 대규모 상업적 유전이 발견됨으로서 중동에서 본격적인 석유산업이 시작되었다. 서구 열강들도 앞 다투어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막대한 석유 매장지역으로 각광받게 됨에 따라 이권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30년대 들어오면서 바레인을 시작으로 아라비아반도에서도 석유가 개발되기 시작하여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석유발견의 흥분도 잠시 유정은 고갈되고 다아시는 자금난으로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를 기사회생시켜 준 것은 영국해군이었어. 1911년 윈스턴 처칠이 해군 장관에 취임하면서 영국 해군의 안정된 석유 공급선을 이란으로 정하고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나중에 세계 에너지사용에 있어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계 에너지원의 대부분은 석탄이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해군에서 석탄 대신 석유로 에너지원을 대체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열효율이 높고 비용이 저렴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에너지사용은 석탄에서 석유로 혁명적인 변화를 하게 되었다.

아랍 국가들에게 결정적으로 알라의 선물을 안겨준 사건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야. 전쟁에서 계속 패배한 아랍국가들은 석유 자원을 무기화할 것을 결의하고 석유 금수조치를 전쟁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아랍에 비우호적인 국가들에 대해서는 석유를 팔지 않겠다며, 갑자기 4배에 달하는 유가 인상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1차 석유 위기가 발생했고 전 세계는 에너지자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석유 위기는 곧바로 금융위기로 이어졌어. 석유 대금으로 지불된 전 세계의 달러는 중동 산유국으로 모여들었고, 이때까지 막대한 자금을 관리해 본 경험이 없었던 중동 산유국들은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그저 국고에 차곡차곡 쌓아 두기만 할 뿐이었다. 그 바람에 전 세계는 수출대금으로 지불할 달러가 부족하게 되었고 국제금융시장은 달러의 회수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이때 나온 말이 오일달러.

석유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호메이니가 이란에서 혁명을 일으킨 19782차 석유위기가 다시 나타났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 위기는 아랍 산유국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그들은 이를 계기로 활기찬 경제개발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한국의 중동 붐도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중동 산유국들은 단순히 경제개발에만 만족하지 않고 이슬람의 부활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슬람 은행이고, 현재 이슬람금융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동의 석유는 이제 단순한 자원의 차원을 넘어 국제적인 자본 혹은 금융자산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970년대 초 탄생한 이슬람 은행의 자산은 전 세계 금융자산의 약1% 정도이며 매년 15% 정도 성장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 은행은 이슬람국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로 확대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현세대에만 만족하지 않고 미래세대를 위한 기반도 마련하고 있다. 석유 자원을 현세대에서 모두 써버리면 미래세대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지기에, 1970년대부터 매년 일정액의 오일머니를 후세대를 위해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금도 미래세대를 위한 안정적 분야에만 투자를 하지. 해마다 모아온 석유자금이 쌓여 새로운 기금이 되었고, 그것이 요즈음 말하는 국부펀드가 된 것이다. 중동산유국들이 담수화, 풍력이나 태양열 발전, 우주항공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미래세대를 위한 배려라 볼 수 있다.

 

아무튼 아랍국가들은 석유의 혜택으로 다시 세계무대에 등장했으며,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가치로 다시 뭉치고 있다. 두바이의 급속한 발전은 사막에 신기루처럼 나타난 아랍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현세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세대를 위해 막대한 오일머니를 하늘에 투자하고 있다. 그것이 우주항공산업이고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인 것이다.

 

7. 현대: 21세기 중동의 신세계 질서

이슬람 = 아랍등식 역시 이슬람 문화를 둘러싼 대표적 오해다. 이슬람과 아랍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일부다처, 여성할례, 명예살인, 폭력성, 여성 차별 등은 사실 이슬람 종교의 문제라기보다는 오아시스 사회의 남성 중심 가부장적 유목 구조가 갖는 아랍 전통의 문제다. 아랍 사회가 이슬람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유목적 토착 전통과 종교적 가치가 뒤섞이며 혼란을 빚었고, 이 과정에서 이슬람과 아랍을 혼동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 규모나 지역 분포를 기준으로 할 때 전체의 25%가량이다. 나머지 이슬람 인구의 대부분은 아시아 지역에 집중돼 있다. 실제로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는 인도네시아다.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전역도 이슬람권으로 분류된다. 심지어 중국에 분포한 무슬림 인구도 5000만 명 이상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슬람은 아랍과 뚜렷이 구분되는 아시아의 대표 종교 중의 하나로 정의되는 게 옳다.

이슬람교는 지구상에서 기독교와 가장 유사한 종교다. 두 종교 모두 유일신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섬기는 점이나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를 수용하는 모습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물론 이슬람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즉 신격(神格)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두 종교는 본질적 갈래를 달리하게 됐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둘 다 예수를 오류를 범하지 않는 최고의 인격체이자 최상의 예언자로 추앙한다. 실제로 쿠란(Quran, 이슬람교 경전)성녀 마리아의 몸에서 남자와의 접촉 없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예수가 탄생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3:47). 예수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행한 기적도 세세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돼 있다. 기독교와 관점은 다르지만 최후 심판일이 다가올 때 예수가 재림할 것이란 사실도 언급돼 있다(43:61, 4:159). 이 밖에도 쿠란 전체 6226절 가운데 93, 15장에 걸쳐 예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데도 일부에선 여전히 이슬람교를 기독교와 가장 적대적인 종교로 치부한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종교’ ‘기독교와는 도저히 한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는 종교로 대하기도 한다. 쿠란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인식이다.

이슬람교에선 무함마드를 아담과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 이은 마지막 예언자로 본다. 또한 유일신인 알라(하느님)’에 대한 절대 복종과 우상 숭배 금지를 강조한다. 이슬람교는 만인의 평등과 형제애를 가르침으로써 하층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무함마드는 메카의 지배층인 귀족들의 박해를 받아 622년 포교의 중심지를 북쪽 상업 도시인 메디나로 옮기게 됐다. ‘히즈라(Hijrah)’ 혹은 헤지라(Hegira)’로 불리는 이 이주 행위는 이슬람력() 원년 설정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잠깐)

이슬람교도들이 예배

두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팔을 뻗는 모습

이슬람에서 알라의 예언자들은 특별한 시대, 특별한 지역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계속해서 보내졌다. 모세와 예수 역시 시·공간적 제약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진 것이다. 이처럼 알라의 예언자들은 각 나라와 사회, 시간, 민족 등에 잇따라 출현했지만 하느님의 계시는 시대 흐름에 따라 인간 손에 의해 덧붙여지거나 삭제되며 점차 오역, 변질돼갔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예언자가 새로운 계시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무함마드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 ‘완전한 마지막 계시가 내려졌다. 종전의 모든 계시를 종합해 종교적 통일성을 갖추게 된 계시가 이슬람이고, 이 계시를 간직한 게 쿠란이며, 마지막 예언자가 무함마드다. 따라서 이슬람에선 아담을 비롯해 노아·아브라함·모세·예수에 이르는 모든 예언자를 추앙한다. 예수 역시 신이 보낸 훌륭한 예언자 중 한 명이다.

 

이슬람(Islam)의 언어학적 어원은 평화이고 신학적 의미는 복종이다. 역시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살롬(shalom)’과 어근도, 의미도 같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이슬람 사상의 요체는 알라(Allah·유일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내면의 평온과 지상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쿠란에 따르면 알라는 적어도 네 가지 기본 속성(“절대자이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유일하시고, 우주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다”)을 지닌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속성과 놀랍도록 완벽하게 일치한다. 지금도 절대 다수의 아랍 크리스천은 하느님을 알라라고 부른다. 하느님을 알라로 표기한 아랍어판 성경 번역본도 적지 않다.

이슬람은 기독교처럼 십자가 대속(代贖)이나 중재자를 두지 않으므로 인간과 신의 직접 교통을 통한 현세의 삶과 내세의 구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신()과의 직접적 관계를 통해 선행을 쌓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의 핵심을 이룬다.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살라트)

한 달간의 단식(라마단)

순수입의 2.5%를 가난한 이와 나누기(자카트)

평생에 한 번, 재정과 건강이 허락할 때 하느님의 집(바이트 알라, Bayt Allah)이 있는 성지(聖地)’ 메카를 순례하는 기본 의무(하즈) 등이 대표적 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 같은 생활을 통해 쿠란과 하디스(Hadith, 무함마드의 언행록), 이슬람법으로 정해놓은 하느님의 길을 위해 자신과의 투쟁을 이어간다. 현세에서의 모든 선행은 천사에 의해 낱낱이 기록돼 최후의 심판일, 즉 하느님 앞에 불려갔을 때 판단 자료가 된다. 살아 있을 때 베푼 선악의 경중에 따라 심판을 받은 후 선을 행한 자는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구원을 받고 악을 행한 자는 지옥에 떨어짐으로써 영원히 응징당한다는 게 이슬람의 기본적 구원관이다.

단순한 구원관은 무수한 이들을 이슬람으로 끌어들인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신과의 관계에 의한 개인적 구원관의 영향으로 이슬람 신앙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식이나 형식보다 철저한 자기 의무를 강조한다. 투철한 신앙과 엄격한 계율은 이 과정에서 생성됐다. 또한 무슬림은 유일신 알라에 대한 신앙뿐 아니라 이전 선지자들이 받았던 성서와 천사의 존재도 믿고 따른다. 나아가 삼라만상의 모든 움직임과 사건은 신의 의지대로 일어나지만 인간이 부여받은 이성과 자율 판단의지에 따라 일정 부분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정명론(定命論)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잠깐)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이란 말이 있다. 일찍이 서구인이 무슬림 정복 사업을 설명하며 사용했던 이 표현엔 이슬람의 호전성과 강압적 종교 전파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다.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이슬람 세력 확산에 대한 위기감이 빚어낸 구호인 셈이다.

이슬람을 전파하고 예언자의 본보기를 따르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쿠란의 정신과 배치된다. 오히려 쿠란엔 종교는 어떤 강요도 있을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도 전쟁을 용납한 건 메디나에서 외부 공격을 물리칠 필요성이 대두됐을 뿐 아니라 무슬림 사회를 위협하는 메카인에 맞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現代 Islam 思想動向 유럽인과의 접촉에 의하여 이슬람 세계는 사상적으로도 큰 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유럽 제국(諸國)의 식민지 시기에 그 정도가 현저하였다. 인도는 이슬람 문화와 유럽 문화가 우선 밀접하게 접촉한 곳인 만큼 반응도 가장 빨랐고, 사이이도 아하마드 한(18171898)과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이슬람과 근대과학의 합치(合致)를 확신하여 아리가루에 대학을 창립(1875)하고, 종교교육과 근대과학과의 종합을 기도하였는데, 이것은 이슬람에 있어서 최초의 근대주의적 조직이 되었다. 사상적으로 장구한 동안 침체했던 아랍 세계도 18세기가 되어서는 부흥의 징조를 보여, 이란인과 터키인으로부터 리드당했던 무력함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라비아의 중앙고원(中央高原)에 일어난 무하마드 브누아브달 와하브(1703870)의 와하브 운동이 그것이다. 본래의 순수하고 바른 이슬람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이란인과 터키인이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사상을 숙정(肅正)해야 할 것을 주창하였다. 와하브파는 이븐 사우드가()의 협력을 얻어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국교가 되었다. 또 이 운동은 인도·중앙아시아·아프리카 등에도 파급되어, 아프리카에서는 아브 아브둘라 알 사누시(17911859)의 사누시야 운동으로 되어 지금의 리비아 국가의 기초가 되었다. 이집트 등을 중심으로 사라피야 운동이 일어났는데, 인도의 아리가루파와 한가지로 어디까지나 이슬람의 진의(眞義)를 지키는 동시에 모든 민족, 모든 시대의 변화에도 적응해 가려고 하는 운동이다. 쟈말 딘 알 아프가니(183997)는 이란 사람으로 범 이슬람주의를 주창하여 깊은 감명을 이슬람 세계에 주었다. 이것은 종교상의 근대화와 정치적인 단결을 가지고 유럽 세력에 대항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받은 이집트의 무하마드 아부도(18491905)는 교의상(敎義上)으로부터 이슬람의 가르침을 근대화하려고 <코란>의 주석서(註釋書)를 통하여 그 사상을 표현하였고, 또 카이로의 알 아즈하루 대학의 근대화에도 노력하였다. 기타 19세기에 이란에 나타난 시라즈의 알리 무하마드의 바부교나, 그의 제자 바하우루라(181792)에 의한 바하이교() 등은 이슬람을 모태(母胎)로 한 제교 종합운동의 예이다. 인도의 미르자 구람 아하마드(1908 사망) 아하마데이야 운동도 이것들과 궤도(軌道)를 같이 하는 것이다. 터키 공화국인이 취한 이슬람 국가의 세속화운동 또한 근대화 노력의 한 방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8. 이슬람이라는 종교

1) 이슬람이란?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 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도 수는 세계 인구의 20를 점하는 9억 정도이고, 국가 총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여 이슬람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만도 43개국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교(Islam) 또는 회교(回敎)로 불리며, 6·25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터키군에 의하여 1955년 소개되어 2009년 기준으로 약 35천여 명의 한국인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2) 이슬람의 연원 및 변천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25세에 부호의 미망인 하디자와 혼인하여 한때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 주민들은 종교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자연신과 신령을 믿는 복합적인 신앙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급속한 상업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부작용과 갈등적 요소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존의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사색과 명상을 계속하던 그는 40세 되던 610년 경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 마지막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띠고 포교에 나섰다. 이 때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 꾸란이다그러나 보수적 전통이 강한 메카 지도층 코레시아족의 탄압으로 포교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6229월 메카 북방 400지점의 메디나로 옮겨갔다. 이 메디나행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부르고 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이주한 무하자룬(교도)과 그 지역 협력자들을 모아 최초의 움마(교단)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를 강화하여 나중에 이슬람국가로 발전시켰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방대한 아라비아지역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한 그는 6326월 메디나에서 죽었다처음부터 하느님 앞에 완전평등을 주장한 이슬람교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을 연결함으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및 다른 인간과의 관계까지 강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 성격의 공동체는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성전(聖戰지하드)에 임하여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는데, 예언자가 죽은 뒤 한 세기도 안 되어 스페인에서 중앙아시아를 걸쳐 소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던 것이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자가 급속히 늘어갔는데, 이는 신도공동체인 움마내에서는 절대평등을 인정하나 타종교신봉자에게는 인두세 물리는 등 공적인 차별대우를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뒤 훨씬 더 대중적으로 이루어진 이슬람의 2차 확장은 12세기 이후 모슬렘신비주의자인 수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로 중앙아시아, 터키, 사하라 일대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그 밖에도 무슬림 상인들은 원거리무역으로 인도 동부연안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중국 사람들을 개종하는 데에 촉매역할을 해냈다. 이슬람교는 여러 인종과 다양한 문화로 이루어져 있던 거대한 지역에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내적 차이를 하나의 종교공동체로 포괄함으로써 일체감을 부여해주었다.

 

특히, 세계사에 있어서 동서대륙의 세계문화 교량역할을 담당하였고, 중세유럽 암흑기에는 그리이스·로마의 고전문명을 훌륭하게 보존하여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구제국주의 세력에 대처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점차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제도간에 갈등을 빚게 되었다특히, 20세기 후반 식민종주국으로부터 얻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일과 이슬람공동체를 현대화하는 일로 인하여 서구엘리트와 종교전통고수자 사이에 많은 마찰이 발생하였다.

 

현재 이슬람교는 여러 가지 해결할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의 신앙체계로서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이슬람국가를 결속하고자 범아랍주의라는 이념을 창출하여 현재도 국제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이슬람의 기본신앙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라는 신앙고백에서 출발한다. , 꾸란다만 믿는 것으로 그치고, 이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무슬림일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이렇듯 실천을 강조하는 이슬람신앙은 대체로 칠신(七信)과 오행(五行)으로 요약된다.

 

칠신은 알라·천사·경전·사도(使徒내세·정명(定命부활에 대한 믿음이며, 오행은 오주(五柱)라고도 하는데, 신앙고백·예배·쟈카드(救貧稅단식·순례의 실천을 말한다우선 믿음을 보면 유일신 알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근본을 이루며, 알라가 모든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라는 정명관신앙(定命觀信仰)과 신은 하나이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라는 신앙고백선언이 핵심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아담 이후의 노아·아브라함·모세·이삭·예수·무함마드는 모두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사도로서 여겨진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사도로 존경하나, 기독교에서와 같은 예수신성,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기독교에서의 원죄설도 부인한다. 무함마드는 최후심판의 날까지 인류사를 관장할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최후의 사도로서 종래의 모든 예언자의 활동을 보완,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믿음에 따른 다섯 가지 주요 의무가 있다.

   첫째,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느님의 종임을 확인한다.

   둘째, 예배는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드리고 금요일 정오에는 집단예배를 드린다.

   셋째, 자기수입의 2.5를 세금으로 헌납하는데, 국가재정의 기본일 뿐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하여 쓰인다.

   넷째, 단식으로 성년무슬림은 매년 이슬람력 아홉번째 달인 라마단기간 동안 해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   음식·음료수·담배·성행위와 같은 일체의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는 금욕생활을 행한다. 라마단월()이 끝나 새 달을 맞게 되면 화려한 의상을 입고 거리로 나와 성대한 축제를 가진다.

 

   다섯째, 성지순례로서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이슬람력 129일경을 전후하여 메카순례의 의무가 있다. 하느님 앞에서 완전평등이라는 이러한 생활실천은 세계의 방대한 지역과 다양한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또한 음주·간음·돼지고기·고리대금·거짓말 등은 무슬림의 계율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한편,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는 일부다처제는 이슬람지역의 빈번한 전쟁으로 과다하게 발생한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보인다. 이슬람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꾸란과 예언자의 언행록인 하디스이지만, 계속된 영토확장으로 그것만으로는 이슬람공동체를 이끌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공동체내에서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에는 전통적 규범인 순나(Sunnah)에 의해 보완된다. 순나를 지지, 이상시하는 자를 순나파라 하는데 대부분의 무슬림은 이 정통파에 속한다. 제국확장과 함께 이질적 종교와 사상이 유입됨에 따라 최초의 하라지리파를 비롯, 많은 분파가 생겼는데, 그 중 주요한 하나의 분파가 바로 시아파다.

 

이 파는 초기 칼리프시대 이후 칼리프 계승권에 대한 문제로 발생한 분파이다. 시아란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칼리프 계승권이 예언자혈통을 이어받은 알리의 후손에게 있다고 하면서 알리의 아들 하산과 후세인의 계승권을 주장한다이 시아파는 순나파에 비하면 소수파이지만, 한때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페르시아가 사라센 제국에 복속된 뒤에 정통 순나파를 선택하지 않고 시아파를 선택했던 역사적인 연원 때문에 현재의 이란 지역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체 무슬림의 10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은 자기들만이 성스러운 지식과 힘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힘의 소유자를 이맘(Imam)이라고 불러 존경하고 있다. 또 다른 주요한 유파는 12세기 이후 이슬람 신비주의라 일컬어지는 수피즘을 들 수 있다수피란 원래 원시이슬람 사회 내에서의 금욕수도자·고행자를 뜻하였으나, 뒤에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기독교·불교의 신비주의사상까지 수용되어 수피즘이라는 독특한 사상체계가 형성되었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결과만 보고 심판하는 이슬람법(샤리아)에 대해 반발하면서 신앙의 내면성을 더욱 강조한다.

 

9. 이슬람 철학

이슬람 철학은 철학 중에서도 이슬람 문화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철학이고 이를 아라비아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 기원

이슬람에서의 '철학'의 시작을 넓게 정의하면 이슬람교가 성립한 시점이라고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슬람의 가르침도 원래 '철학적'이고, 이슬람교의 성경이라 불리는 꾸란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칼리프의 후계자 분쟁(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등이 대표적이다.

넓은 의미로의 이슬람의 '철학적'인 논쟁은 이슬람교 성립 당초부터 계속되고 있었지만, 통상은 그리스 철학이 이슬람 세계에 이입된 것을 가지고, 독립한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이슬람 철학'을 시원이라고 보는 것이 통상이다.

 

이슬람 세계에 그리스 철학이 전해진 것은 시리아를 개입해서였다. 이때의 이슬람 철학을 파르사파 (falsafah)로 부른다. 이는 아라비아어는 아니고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영어 등에서 철학을 의미하는 philosophy와 동 어원이다. 그러나, 파르사파로 불리는 이슬람 철학은 당시에는 학문으로서의 인식이나 명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후세의 철학사 연구에 의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인정되었다.

 

2) 특징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슬람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 아닌 저작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으로 되어 있기도 했다.

 

이슬람 철학은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교와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고 서양 철학과 다르게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다. 이슬람 철학의 기원은 이슬람 세계의 유럽 방면의 확대와 함께 이슬람 세계에도 이입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었다. 유일신 알라를 신봉하는 이슬람의 가르침인 이슬람 신학(카람)과 이들의 고대 그리스 철학은 자주 대립하기도 했다.

 

이슬람 철학이 가장 돋보인 것은 지리적으로도 확대기인 9세기부터 10세기 아바스 칼리파조 기에 걸쳐있다. 당시 그와는 대조적으로 유럽 세계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 등은 벌써 정식 무대에서는 멀어져 철학의 역사로부터는 일시적인 쇠퇴기이기도 했다. 유럽 세계에서 철학이 다시 개화하는 것은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철학이 다시 유럽에 초래된 것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철학의 흐름을 생각해도, 이슬람 철학이 완수한 역할은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철학을 번역했던 아비센나와 아베로에스 등이 활발하게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였지만 이슬람의 신비주의적 색채와 신학이 혼합되어 파르사파와는 이질의 것으로 변질되며 약화되기도 했지만 이슬람의 근대화와 더불어 부의 축척이 일어났고 현재는 이슬람 철학 외, 서양 철학을 중심으로 슬람 문화권 내에서도 이슬람 철학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인지·연구 교육되고 있다.

3) 이슬람 철학의 맹아

a) 이슬람 세계의 그리스 문화의 이입(번역 시대)

 

7세기에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 혹은 마호메트(570~632)의 사후 정통 칼리프 시대를 거치고, 아랍인 지상주의를 취하고 있던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750년에 멸망한 후 아바스 칼리파조가 세워졌다. 아바스 칼리파조은 비아랍계인 페르시아인으로부터의 지지도 있고, 아랍인 이외의 이슬람교들에게도 길을 연 세계 제국으로 바뀌어 갔다. 이 지배 하에는 페르시아나 이집트 등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현저하게 남아 있는 지역도 포함되어 있어 거기에는 철학을 시작으로 하는 의학·수학·천문학 등의 제학문이 그리스 시대의 것으로부터 이집트나 시리아 등의 동 지중해 연안의 각지에 남아 있었다. 아바스 칼리파조은 바그다드에 시리아인 학자를 부르고, 시리아어의 그리스 문헌을 아라비아어로 번역시켰다. 이슬람 철학의 기원의 하나로서 아라비아어에의 번역 활동이 활발했다.

 

그들은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의 대치에 반박하기 위해 혹은 철학적 방법에 따르는 기독교의 사상적 전개를 뒤지기 위해, 또는 시리아 것들에 대한 정당성을 갖기 위해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5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시리아의 기독교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포류퓨리오스(Porphyry, 234~305), 바울의 제자로서 초기 기독교 시대에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던 디오뉴시오스 더 아레오파기테이스(Dionysius the Areopagite)의 저작들을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하며 받아 들였다. 832년 압바스조 제 7대였던 칼리파(가톨릭의 교황과 유사)였던 압둘라 알마으문(786~833)은 학문 예술에 깊은 이해를 가져 아바스 왕조 학예의 전성기를 이룩하며 바그다드에 천문대를 세우고 그리스 철학 연구를 위한 학교인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을 세워 그리스 문헌의 번역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곳에선 그리스로 된 문서들 뿐만 아니라 시리아어, 증세 페르시아의 일종으로 조고아스터교나 마니교의 문헌이나 비문에 주로 사용되었던 팔라비어, 심지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다양한 문헌이 모아져 번역, 연구되었다.

특히 의학 이외에도 천문학, 점섬술에 관련된 문헌 번역이 번성하고, 천문대나 도서관 등의 시설도 병설되고 있었다. 이것들은 일상의 예배나 농사 달력에 관련되는 등에 달력의 제정에도 천문학이나 점성술의 지식은 빠뜨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 시대의 번역 업이나 관측의 사적은 후세의 이슬람 사회나 제정권에도 다대한 혜택을 주고 있다. , 동시에 아바스 칼리파조는 쿠데타에 의해서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타도 탄생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논리학적인 지식을 바라고 있던 면도 있었다. 이에 인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해 그리스의 제저작 및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가 아라비아어권에 소개되었지만, 단순한 지적 욕구라는 것보다도, 오르가논(Organon: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트피카(Tafika"움직임" 또는 "움직일 수 있는 것")등에서 다루는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확립된 논리학의 방법론을 체제 측이 배우기 위해라는 현실적인 요구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에 의해서 고대 후기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진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소개되게 되고

또 게다가 이 시리아어 (안에는, 그리스어로부터의 번역도 있었지만)가 기독교도 등에 의해서 아라비아어로 번역되고 있었다. 이에 의해, 이슬람교들에게도 그리스 철학의 연구가 가능했다. 그러나 때때로 이슬람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저작이 실제는 플로티노스의 것이 듯이, 약간의 와전이 있었다. 또 이슬람교의 철학자들은 의사나 수학자이기도 했으므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과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며 동시에 철학자 였던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212년경)최고의 의사는 철학자라는 말로 유명한 로마제국 당시의 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129~199) 등의 저작도 번역되었다.

4) 샤리아의 해석과 철학의 발전

이러한 번역 활동은 확실히 이슬람에게 철학을 가져왔지만, 이것만으로는 이슬람 철학의 성립의 계기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후 꾸란과 하디스에 나오는 규칙들과 원리들과 그 판례들과 율법으로 편찬된 이슬람의 율범이며 규범 체계인 샤리아의 해석이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무하마드의 무렵과는 달리 이민족의 이슬람교들을 거느린 세계 제국이 되어 있던 이슬람 제국은 이미 꾸란과 하디스만으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유연하게 제정되고 있는 샤리아에서의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게 되어 왔고, 많은 학자가 다른 사람의 이설보다 자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지각색인 해석으로는 합의하기 위해 철학적 방법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의해 샤리아 논의와 그 정당성을 주장할 때에, 신학 (카람)과의 대립이 발생했다. 신학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으면, 논증하는 것은 필요하게 되지 않는 전제 (즉 종교적인 교의)로 논의되어 법 해석의 올바름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철학은 확실히 의심할 수 없는 전제가 요구되고 있어 비록 이슬람교에서의 종교적인 교의에서도 논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한, 결코 받아 들여지지 않고, 그것을 전제로 한 논의나 추론은 결코 증명되는 것으로는 되지 못하고, 기피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철학과 신학과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해,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이에 격렬한 서로 욕설까지 발전했다. 철학자들은 신학을 '모순점을 조롱해, 적대자나 이단을 논박할 만한 발전성이 없는 학문'이라고까지 평가했지만, 그러나 실제는 단순한 관점의 차이 (텍스트 해석 (신학)과 논증할 때의 전제 (철학))이며, 양쪽 모두에 귀결하는 점으로는 결국, 큰 차이는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다양화되어 혼돈되어 온 이슬람의 법해석의 타개책으로서 철학이 환영되었던 것도, 이슬람 철학 발전의 요인의 하나이다.

5) 동방 이슬람 철학

이슬람 철학의 세계는 홍해를 경계로 동서로 나눌 수 있다. 동방 이슬람 세계와 서방 이슬람 세계에서는 각각 다른 특징의 철학이 전개되었다. 동방 이슬람 철학의 세계는 아라비아 반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나 중앙 아시아 일대에까지 미친다. 동방 이슬람의 철학자들은 많은 페르시아나 중앙 아시아 출신 등 비아랍권의 인물이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이슬람에서 철학이 외래의 학문인 것을 이야기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이름으로 아라비아 철학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아라비아인이 다루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아라비아어로 철학이 전개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라비아어는 이슬람교 이외에도, 부근의 유태교도·기독교도 등에게도 널리 사용되었던 언어이다.

 

a) '아랍의 철학자' 킨디

최초로 이슬람 철학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랍인 철학자 아부 유스프 야꿉 이븐 이스하끄 앗삽바흐 알킨디(801년경~866년경)이다. 그는 별칭으로서 '아랍의 철학자'라고 불리고 있다. 그를 아랍인이라고 언급되는 것은 오랫동안 철학 등의 사상 관계로는 시리아계나 이란계 등 사람들의 활약이 눈에 띄어, 순수하게 아랍계의 출신자는 오히려 드문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쟈히리야 시대에 해당하는 5세기 후반에 아라비아 반도 중앙부의 네지드 고원에 킨다 왕국을 쌓아 올린 아랍 유목민 킨다 족의 혈통이다. 그는 앞에 언급한 번역 시대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막대한 양의 번역이나 저작물 250편이 넘었지만 현존 하는 것은 40작품 정도이다.

 

킨디는 철학자는 경험계의 모든 것의 본질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백과 사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 지리·역사·수학·음악·의학·정치 등 광범위한 장르에 건너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리스어로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리스어 문헌으로부터의 많은 것들을 아라비아어 번역하며 특히, 아라비아어에 의한 철학 어휘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관련한 '형이상학'이나 '신학' (그러나 실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아니고 플라톤의 이데아에 관한)에서부터 로마 시대의 지리학자였던 클라우디오스 프롤레마이오스의 '지리학' 등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킨디는 인간의 지성을 4개에 나누어 능동적 지성, 가능태에서의 지성, 획득된 지성, 현실태에서의 지성과 후의 이슬람 철학의 기초가 되는 지성론을 전개했다 그는 신을 진리 ()라고 인식해, 철학 독자적인 목표를 '인간의 능력의 한계 내에 있어 가능한 한 사물에 실로 있는 그대로에 인식하는 것'이라고 해, 이와 같이 획득한 진리 (이는 이슬람 신자에만 보증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야말로 보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세계가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거난 신의 계시에 대한 세계의 우월성, 또는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세계의 본원이 세계와 만물을 구성하는 에너지와 질료를 정묘한 상태에서 거친 상태로 계층적으로, 또는 단계적으로 발출 혹은 유출시키는 계층적 · 단계적 구조와 질서를 통해 우주 전체가 운행된다는, 혼을 본원으로 하는 유심론(관념론의 세계관으로 물질 세계의 현실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론인 유출론이 우위가 되는 후세의 철학자들에게는 볼 수 없는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 이와 같이 킨디는 이슬람 철학에 독자적인 길을 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b) 2의 스승 파라비

두 번째로 이슬람 철학의 중요 인물로는 나스르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파라시(872~950)을 들수 있는데 그는 투르크계 철학자이며 중앙 아시아 파라브 부근에서 출생하여 바그다드에서 활동했다. 그는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튀르키예어를 비롯한 수십 개의 언어에 능통했다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초로 신 플라톤 학파를 주축으로 삼는 철학 체계를 세우며 당시 이슬람 철학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제 1스승으로 칭했다 파라비를 제 2의 스승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무슬림 신자로서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의 스승'이라고 이슬람 세계에서 바라봐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해석이 융성해 나가는 중, 킨디가 열린 철학의 길에 기초를 굳힌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킨디와 같이 그도 저작이 많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서는 많았는데 킨디와 비교해서 파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도 정확했다.

파라비는 철학은 진리를 요구하는 학문이며, 사람은 이에 전념만 하면 최고의 정신의 경지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라비는 종교 차원의 이슬람적인 것보다도, 철학적인 것을 더 우위에 두었는데 그렇다고 이슬람 종교에 대해서 적의를 안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슬람에 철학의 개념을 도입해, 이슬람의 국가, 정치, 사회가 안정되기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파라비에 의하면, 이슬람에서 중요한 개념인 계시는 본래 철학자가 직접적으로 형이상학적 인식으로서 파악해야 할 것으로 해, 예언자 무하마드는 이를 형상적, 시적으로 표현한 천재이지만, 철학자보다는 일단 아래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 논리학에도 뛰어나 차후 유럽의 스콜라 철학에서 대논쟁이 된 이른바 보편 논쟁(普遍論爭 중세 스콜라 철학 전체를 일관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스콜라 철학은 이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이 문제로 끝났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보편개념()의 타당가치 문제 및 개념의 실제성·객관성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초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학상의 삼위일체론이나 교회의 보편성과 결합되어 문제가 됐고, 12세기의 사상계를 들끓게 하였다. (1. 유와 종은 실재인가, 또는 사고상의 존재인가. 2. 실재한다면 물체인가, 또는 비()물체인가, 3. 감각적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가, 또는 감각적 대상 자체 안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은 파라비로부터 발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밖에도, 세계의 존재를 신플라톤주의적인 유출론으로부터의 설명을 실시하거나 형이상학이나 킨디도 논하고 있던 지성론을 근거로 10의 지성 유출설 등 깊은 논급을 해, 이슬람 철학에서 위대한 존재의 인물인 것은 물론이지만, 파라비의 논급한 문제는 후의 유럽의 중세 철학의 요점이 되었다.

c) 이븐 시나

이븐 시나(980~1037)아비센나는 이슬람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대가였으며, 중세 유럽의 의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페르시아 제국의 철학자이자 의학자로 중세 최대 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철학과 의학을 집대성했으며 라틴어로 아비센나로 불리기도 했다. 존경의 표시로 의사들의 영주라 불리기도 했다.

이븐 시나는 980년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도시인 부하라에서 태어나 10세 나이로 꾸란과  아라비아의 많은 시문들을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 후로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스승들의 수준을 뛰어넘자 18세가 될 때까지 몇 년간 독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40회나 정독할 정도로 학문에 열의가 깊었는데 21세에 정식 교육을 모두 마쳤고 그때부터 이미 뛰어난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가 종사하던 사만 왕조가 카라한 왕조에 의해 부하라를 잃고 패주하자 그는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학문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며 페르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떠돌아다니다가 카즈원에서 다시 의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가 학술적인 일을 할 만한 환경이 조성되는 곳은 없었다. 그는 부이 왕조의 통치하에 있던 하마단에 도착해서야 통치자의 호의를 받으며 그 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치유의 서(治癒)의학전범(醫學典範)의 저술을 시작했다.

1022년 그를 총애하던 통치자가 죽자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은 이스파한으로 이주 후 정착해 치유의 서(治癒)의학전범(醫學典範)의 저술을 마칠 수 있었고 그 뒤로도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전쟁 수행 요원으로 출병하였다가 병에 걸려 1037년 하마단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븐 시나는 아라비아 철학의 최고봉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플라톤을 가미한 철학으로 이슬람 신앙을 해석했는데 이는 12세기 후반 유럽의 아리스토텔레스 부흥 운동의 계기가 된다. 논리학에도 영향을 끼쳐 앞서 언급한 보편 논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편 그가 심리학에 있어서 영혼의 기능을 분리한 것은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프란체스코파의 사상적 기분이 된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연 과학 분야에도 관여해 당시 연금술사들이 신봉하던 금속 변환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연금술사들이 만든 귀금속은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학, 물리학을 연구하며 천문 기구를 고안했고 광물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으며 중세 유럽에 전했고 이 외에도 음악의 화성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동방 이슬람 철학에서의 절정기라 할 수 있었던 때였고 그의 장대한 철학 체계는 아직도 연구 중이다. 그는 존재 일반의 문제, 즉 형이상학이었는데 '공중 부유 인간'설을 가지고, 존재라는 것을 설명했는데 즉, 진공 중에 부유하고 있는 완전한 한 명의 인간이 있는데 그는 완전하게 맹목이며, 밖을 볼 수 없고 진공이므로 공기의 촉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오직 자신의 존재를 나의 존재라는 확신한 자신을 느낄 수 있다는 것으로 이는 근세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의 선구적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존재의 입장으로부터, 이븐 시나는 자연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의 본연의 자세를 파악하지 않는 학문과 형이상학의 독자성을 주장한다. 그 외 그는 지성·가능성·보편성의 문제 등 중세 혹은 근세·근대의 철학사상에서 논급되어 온 문제의 선구적 실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 한 편으로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인정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으로서의 이슬람 철학 이외에도, 신비주의적인 조명 철학이라고 명명한 독자적인 체계를 생각하려고 했지만 현존하는 자료가 부족해 자세히 알 수 없다.

d) 가잘리와 철학 비판

킨디로부터 아비센나와, 이제 언급할 신학자 아부 하미드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가잘리(1058~1111)출현으로 동방 이슬람 철학은 큰 변절점을 맞이한다. 그는 마호메트 이후의 가장 위대한 무슬림이라고 일컬어지는 신학자로 철학이나 수피즘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호라산의 투스에서 태어나 셀주크 조의 명재상인 니잠 알물크와 친구가 되어 바그다드의 니자미야 학원의 교수가 되어 재임 4년 동안 파라비와 이븐 시나의 철학서를 숙독한 후 철학자의 모순을 저술했지만 결국 종교상의 번뇌와 기타 다른 원인으로 명성에도 불구하고 영직(榮職)을 버리고(1095) 하나의 수피 행자로서 메카와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닌 후 투스에 돌아와 한때는 니샤푸르의 학교에서 교수도 재직하다 은퇴하여 세상과 작별한다.

그는 종교 제학의 소생,미혹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명저를 후세에 남겼다. 그는 정통파 신학과 수피즘의 조화를 꾀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철학의 전성기였던 이븐 시나의 철학을 잘 이해하고 비판한 후 정통파 이슬람 사상을 공고히 함으로써 이슬람 종교 사상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신학, 법학과 수피즘을 종합하여 후자의 인격적·신비주의적 체험과 직관지(直觀知)를 기초로 정통 신학을 재구성했다. 이것은 공인된 아시아리 신학과 이슬람 교도 대중간의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였으며, 이때까지 수피즘과 대립하고 있던 신학·법학자 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피즘을 섞어서 형해화(形骸化)되어 있던 종교 체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가 죽은 16년 뒤에 최초의 정규 수피 교단(敎團)이 형성되고 뒤이어 다수의 수피 교단이 전 이슬람 세계에 걸쳐 이슬람 교도를 교단으로 조직하였다.

그의 종교적 편력은 지식인의 정신적 동요를 나타낸 것으로 처음에 그는 법학자·신학자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학문의 형식 논리에 반항하여 스스로 자기의 내적 세계를 강조하여 이슬람의 여러 종교학, 특히 주지적(主知的)인 철학파를 차례로 편력한 뒤 최종적으로 내면적인 고뇌를 거친 다음 수피즘의 종교 체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의 역할은 이슬람 종교사상에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어, 첫째 이슬람의 학문을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탈피시켜 꾸란과 하디스를 살아있는 것으로 부활시켜서 마치 기독교가 유럽에서 스콜라주의의 얽매임을 깨뜨린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둘째로는 외경(畏敬) 요소를 다시 도입하였다. 셋째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수피즘의 지위를 이슬람교 내에 확립하였다. 넷째로는 철학을 일반 이슬람 교도에 접근시켰다.

이슬람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세계는 시간적으로는 무한하고, 꾸란과 같이 신의 창세라는 시원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으로서 부정했지만, 가잘리는 신의 창세는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고, 본질적인 문제이며, 예를 들면 태양과 같이 태양의 본체와 빛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 태양이 있으니까 빛을 발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태양 본체가 먼저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학자는 시간적인 상대적인 입장과 이러한 본질적인 입장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그 밖에 철학자가 부정한 신의 개체지의 증명이나, 인과율 부정 등, 후에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동시에 역사가로서 서양 철학과 계몽주의에 관련된 인물인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을 선취한 내용의 철학을 말하거나, 다양한 비판 활동을 실시했다. 이러한 철학 비판은 원래 철학 사상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반 신자의 사람들로 결정타를 날려, 동방 이슬람의 각지에서 아비센나의 책이 '무신론'이라고 비난당해 구워 버려지거나 짓밟혀지는 사태가 되었다. 이후 철학의 무대는 이베리아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방 이슬람 세계로 옮겨 갔다.

e) 그 외 동방 이슬람의 철학자들

번역 시대에는 이슬람교도 이외에도, 번역 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인물이 많다. 또 동시대에 킨디 외에 이븐 자카리야 라스 및 파라비의 제자에는 아미리, 야하야 이븐 아디 등이 있다. 이븐 시나의 제자에는 이븐 마르즈반이나 아브 장미카트 바크다디 등 스승의 계승을 도모한 인물등이 있다.

 

6) 서방 이슬람 철학

역사적으로 보면, 서방 이슬람 철학이 발전한 것은 아바스 칼리파조이 쇠퇴·멸망한 후의 12세기에서 13세기이다. 이 시기는 아비센나나 가잘리도 사망한 후이고 그들의 동방 이슬람보다는 서방 이슬람 철학은 융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시기 이전에도 서방 이슬람 세계에도 철학자는 존재했지만, 동방 이슬람을 전수했다는 공적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여지고 있다.

 

서방 이슬람으로는 지성의 본연의 자세, 개인과 사회의 관계나 철학과 종교의 관계 등에도 중점이 두어져 세계의 창조나 영혼론에 중점을 둔 동방 이슬람 세계와는 한 가닥 다른 특징의 철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아프리카 출신 이슬람의 무라비트 왕조, 그 후 무와히드 칼리파조가 융성함에 따라 이슬람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비라 반도까지 달한다. 무라비트 왕조은 당초는 이슬람의 최초의 모습을 되찾으려고 한 보수적인 왕조였지만, 점차 그것도 희박해져 사상적으로는 완전하게 부패한 왕조가 되었다. 사람들은 꾸란을 단지 암송하는 것만으로 있어, 그 안에 쓰여져 있는 내용에의 질문이나 연구늘 터부시했고 이슬람이 신성으로 여기던 하디스조차 소홀해져 사상적으로도 부패해 버려 신학자 가잘리에게 비판 당하는데 이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문화적인 부흥을 내건 신왕조가 탄생했으니 이것이, 무와히드 칼리파조이다. 서방 이슬람이 활발하게 된 것도 이 무와히드 칼리파조 왕조 아래서 였는데 그들도 원래 사상사적 배경이 부족했기 때문에, 칼리프(가톨릭의 교황)였던 아브 야아크브가 철학·신학 쌍방의 발전을 왕조의 정책의 일환 내세웠고 서방 이슬람의 독자적인 사상 전개를 시도했다. 가잘리에 의한 철학 비판으로 큰 변절점을 맞이한 동방 이슬람과 달리, 이베리아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방 이슬람 철학은 또 독자적인 시점에서 그리스 철학을 받아 들였고 그들의 철학은 그 후의 이슬람 사상의 전개로는 영향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 성과는 중세 유럽의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a) 이븐 밧쟈

서방 이슬람 철학은 유럽의 라틴어로 아베파케라고 알려져 있는 이븐 밧쟈(~1138)에서 시작한다. 그는 왕조의 재상을 맡고 있던 정치가로서 행정에도 관여했는데 동방 이슬람의 가잘리와 같은 가잘리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싫어했다.

그는 신비가가 요구하는 감성적인 능력이 아니고, 이성적인 능력 (지성)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고 우주를 구성하는 것의 최하위의 존재는 감각적인 것으로 차지해져 이 존재에 지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성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는 이것보다 고도의 것이고 보다 고도의 것은 감성적인 요소가 없어져, 순수하게 지성적인 존재가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지성의 경우, 감각적인 것은 없어지지만, 한층 더 상위에 능동적인 지성이 있어, 인간의 지성이 최고위는 아니라고 한다. 최상위의 존재, 즉 인간보다 한층 더 상위이지만, 이는 최고로 순수한 능동적인 지성을 가진 존재이며, 이 존재는 완전하게 행복한 존재라 한다. 이 완전한 지성과의 합일이야말로, 철학이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며, 이 지성으로서 존재 (진리 혹은 신) 하나가 될 때, 최고의 행복이 방문한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 중에서 영원적인 능동적 지성을 최고의 능력에 일어나 인류의 지성 (이는 개개의 존재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고, 지성은 인류 전체에 하나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생각하고 있었다)은 이 능동적 지성의 유출과 다름없다는 생각은, '지성 유일설'이라는 형태로 후의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대논쟁이 되었다. 이것은 후에 말하는 아베로에스의 생각이 기본으로 되어 있지만, 기원은 이븐 밧쟈라고 하고 있다. 이 나름 지성적인 신비주의는 감각적인 것을 배제한 경향이 인정되어 가잘리와 같은 신비주의자들과는 분명하게 이질적인 것이었다.

또 전술과 같이, 이 철학자는 정치가로서의 얼굴도 가지고 있어 속세의 일로 가득하고, 그의 희망이기도 한 철학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 좀처럼 할 수 없었는데 그는 가장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속세로부터 멀어져 한 명 고독한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도 '고독자의 안내'라는 제목이다. 이 속세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다음에 나타나는 이븐 트파일에 의해서 명확하게 의식되고 있다.

b) 이븐 트파일

이븐 트파일은 이븐 밧쟈의 문하생으로 그라나다 근교의 출생으로 전해지는 데 무와히드 칼리파조의 시의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철학 사상은 대표작인 야크잔의 아이 하이이에 집약되고 있다. 이는 철학적인 이야기 작품이며, 이른바 철학서와는 구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야크잔이란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을 의미해, 즉 신이다. 하이이란 살아 있는 사람을 의미해, 즉 이성이다. , 그의 철학은 이 책의 제목처럼 철학계 전체를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이 저서에서 그는 대다수의 인간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또 알려고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신앙에 의해서 구해지려고 하지만, 이것으로는, 현세적이고 저급한 부분 밖에 머물지 못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며 진리를 안다는 행위는 철학으로 밖에 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종교로는 이를 상징적으로 암시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밖에 하지 못하고, 단순한 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철학을 종교 위에 명확하게 둔 트파일의 사상은 당시의 종교가에게서는 반감을 사고 만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제제 이븐 루시드에 의해 계승된다.

c) 이븐 루시드

이븐 트파일의 뒤를 받아 등장하는 것이, 이븐 루시드이다. 그의 이름은 이슬람 굴지의 대철학자로서 서양 철학사에서는 이븐 시나와 함께, 이슬람 철학에 대표격이 된다. 이븐 루시드는 1126년에 현재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법학·철학·의학으로 이름을 떨치며 스승 이븐 트파일의 뒤를 이어 왕조의 주시의로서 복무하며 이에 칼리프(이슬람 교황)는 이븐 루시드의 철학에 대한 지식의 우수함을 인정해 칼리프의 보호 아래, 아리스토텔레스를 주 해석하도록 돕는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의 실적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서 후의 서양 철학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이븐 루시드는 이븐 시나의 신플라톤주의적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해, 어디까지나 순수한 모습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응시하려고 노력했다. 이 자세는 후세에 이븐 루시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신격화한 인물'이라고 마저 평되는 만큼이기도 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 뿐만 아니라, 그의 독자적인 사상은 대부분이 후의 서양 철학사에 논쟁을 불러 일으킨  세계 영원성(이 세계는 시작이 없이 영원히 존재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설과 배치) 이나 신의 개체지의 문제, 지성이 개별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실체라는 지성 단일론, 신학적 진리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인정되지만, 이것은 합리적 추론이나 철학적 논리와 상반될 수 있는데 종교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가 각각 자신의 영역에서 유효하다고 받아들이고, 두 가지 영역이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이중 진리설 등으로 유명하다. 그는 서양 철학자로 후세에서 그의 반박자이기도 한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미루어진 우주 창조의 영구성은 인정하지만, 시간적인 시작을 부정한 것으로 이 사상은 신학 상에서는 모순된 생각이지만, 이븐 루시드에 의하면 신학자들은 세계의 창조를 어느 한 점에서만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오류이며, 세계는 항상 창조되고 있는 것이라고, 이븐 루시드는 우주 (세계)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중에 하나의 본원적인 질서 (즉 진리)를 보고 있었다. 이것이, 이븐 루시드의 사상의 신념으로도 되어 있다.

이에 의해 독특한 지성 단일론을 말한다. , 지성은 개개인에 의해 다른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든 단 하나로 동일하고 보편적 지성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개개인의 사이에 현현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개개인에 대한 현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지성이 향해 가는 것은 하나라고 한다. 사람은 개개인의 지성이 완전하게 최고의 지성 (이슬람 철학 용어로 말하면 '능동적 지성')과 합일했을 때, 현세에서 최고의 행복이 방문한다고 한다. 이븐 루시드의 이 독특한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유출론도 보인다.

이에 관련해, 이븐 루시드는 인간의 3단계설을 주창한다. 이 능동적 지성의 기능에 따라, 최하급의 대중, 중간으로 떠나는 신학자, 그리고 최상위의 철학자이다. 그에 의하면, 중간의 신학자만이 '환자'이며, 함부로 성전을 해석해, 잘못된 해석을 베풀어 이것을 절대적인 진리로서 민중에게 주고 있다. 그러나, 이에 의해서 종교를 불필요하고 해악인 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 민중은 이 종교를 통해서, 철학자가 스스로가 직관하는 진리를 가까워지기 쉬운 감각적인 것으로 옮겨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에게는 벌써 직시해 체득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것이라 한다. 이는 이븐 루시드에 의하면 철학과 종교가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는 성전의 말의 모순을 어디까지나 추구해, 해석해 나가는 것이 성스러운 의무이며, 한편 일반 민중은 철학자와 달리 지성이 불충분하기에, 지성은 아니고 신앙이라는 능력에 의해서 이 성전에 가까워져야 한다. 민중은 신학자가 잘못된 해석에 유혹해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따라서, 궁극에는 철학과 종교는 일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후세에 이븐 루시드에 대해서 적지 않은 무신론적인 평가가 내려지게도 되지만, 이것은 전의 이븐 트파일의 사상에도 보여지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이 지성론과 관련해, 인가의 이중 진리설의 제단이 되는 설이 전개되었다. 이는 철학과 종교가 협조시키려는 시도로, 상 모순되는 두 개의 명제가 한 편이 철학의 원리로 진리이면 진리이며, 한편도 종교적 신조에 의해서 진리이면 진리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전에 접한 인간의 3단계설을 봐도 아는 대로, 결과적으로 철학적 진리의 추구를 하는 입장인 철학이 우위에 떠나도록 되어 있어, 오히려 신학 쪽에서 비판을 뒤집어 썼다. 이 이중 진리설은 라틴 아베로이즘의 신봉자에 의해서 기독교 세계에 가져와져서 거듭되는 이단 선고를 받는 것에 도달했다.

이븐 루시드는 1198년 모로코에서 사망했고 그의 사망 후 이슬람 세계는 그의 이성주의적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곧 이어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도 끝이나 그리스 철학에서 출발한 서방 이슬람의 철학세계도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7) 그 후의 이슬람 철학

이븐 루시드의 사망과 함게 아랍 소요학파라고 불리는 이슬람 철학의 1학파가 마지막을 맞이해 서방 이슬람 세계의 안 안달루스(오늘날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세력)나 북 아프리카의 철학적 활동은 현저히 감퇴하고 동방 이슬람인 특히 이란이나 인도에서의 이슬람 철학의 활동이 훨씬 길게 존속되어 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시대는 아랍 철학·이슬람 철학의 진정한 '황금 시대'를 이룬다. 이 시대는 가잘리의 논리학이 이슬람식 교육기관인 마드라사에서 연구되고 이븐 시나의 철학이 융성하면서 이들의 철학은 통합되기 시작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같은 서유럽에서의 정치와 종교는 이슬람교로부터 기독교로 옮겨가 그 지역에서의 이슬람 철학은 쇠퇴하지만 반면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통치하던 광대한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튀르키예)의 학자들과 오늘날의 이란이나 인도의 이슬람교 왕국의 동방 이슬람교의 철학은 계속되어 마드리사에서 연구와 가르침이 계속되며 이브 루시드 이후 이슬람 철학 후기의 많은 학파가 융성해지며 조명 학파, 초월론적 신지학, 스피, 철학, 전통주의파들에 의해 현재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