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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한국 철학 사상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3.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혼자 흐뭇한 시간,

 

황룡 튜터링 3회차 자료를 준비를 완성했다.

 

아직 생소한

한국 철학 사상사라니!

 

지난번

‘공자와 맹자와 사상’은

지난 1학년에서 공부했던 것이어서

비교적 쉽게 접근했고

나름 머리 속에

정돈이 되었는데

 

‘한국 철학 사상사’편은

머리 속에 구겨 넣고 있구나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그래도 뿌듯하다.

 

모든 지적 과정은

이렇듯

생것을 씹고

되새김질하는

소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내 삶의 영양분으로서의

가치가 발휘되는 법!!!

 

애들아(나의 튜티들),

우리 풍악을 울리자. ㅎㅎ

 

 

황룡 튜터링 3회차 자료 by 김은

 

<한국 철학 사상사>

 

목차:

한국 철학 사상의 신화적 맹아

1) 무속신앙

2) 한국 신화의 사상적 특징

3) 단군 신화의 내용과 사상

4) 한국 철학의 무속적 바탕

2. 유불도 삼교의 수용

1) 삼교의 전래

2) 시대별 삼교의 수용과 변화

a) 유교

- 초기

- 고려

- 조선(성리학)

- 근대(실학)

- 한국 유교 사상의 공과 사

b) 불교

- 초기 불교(고구려, 백제, 신라)

- 고려

- 조선

- 우리가 주목해야 할 초기 한국의 불교 인물:고구려의 승랑(僧朗), 신라의 원측(圓測), 신라의 원효(元曉), 

                                                                      신라의 의상(義湘), 고려의 의천(義天)

- 한국 불교의 윤리적 특징

- 한국 불교의 현대적 의의

c) 도교

- 도교의 기원

- 삼국의 도교 수용

- 고려

- 조선

- 동학

- 증산교

참고 문헌:

한국 철학 사상사, 윤사순(지음), 고려대학교 출판 문화원

철학 VS 철학, 강신주 지음, 오월의 봄

다음과 네이버

 

<한국 철학 사상사>

 

 

한국 철학 사상한국이라는 공간 안에서 생겨난 사상과 철학이라는 뜻과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해 온 사상과 철학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한 한국의 종교·정치·사회·경제 등 제범주를 포괄하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우리나라 경우 19세기 말 이후 서양철학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래되기 이전까지 철학과 종교는 엄격히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사상의 흐름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상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은 무속신앙이다. 이 신앙은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한국의 고유한 독자성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무속신앙의 터전 위에 외래사상인 유교·불교·도교 등이 중국을 거쳐 전래되어 오랜 시대에 걸쳐 한국적 풍토에 맞게 변용, 발전되어 한국문화와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이러한 외래사상이 토착화되어 한국의 전통사상 철학으로 정착하게 된 것인데 본고에서는 한국의 독자적인 사상과 철학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다른 사상과 철학들을 융합하며 어떻게 흘러 나갔는지를 고찰해본다.

 

 

한국 철학 사상의 신화적 맹아

1) 무속신앙

한국의 무속신앙은 시베리아 일원에 걸쳐 퍼져있는 샤머니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 나 그런 공통적인 기반 위에 한국의 독자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민족의 신화적 사유 를 이루고 원초적 잠재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신앙은 현재도 민간의 무속 중에 상당 부분 존속되고 있지만,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도교·불교 및 민간신앙 등과 접합, 동화되어 본래의 내용과 특성이 많이 변하게 되었다. 따 라서 문자화되어 기록된 신화 내용에서 그 본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다.

 

2) 한국 신화의 사상적 특징;

한국의 신화로서 대표적인 것들은 단군신화, 고주몽 신화(고구려 주몽왕 신화), 박혁거세 신 화(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에 관한 신화. 국가와 씨족의 시조 신화로, 박혁거세와 그의 비 알 영 부인의 출생), 석탈해신화(신라의 제4대 왕인 탈해왕에 관한 신화. 알에서 태어났다는 탄 생담과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에 오른 경위 따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알지신화(화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신비한 탄생에 관한 설화. 닭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 본 곳에 황금 궤짝이 있었고, 그 안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문헌에 따라 닭 우는 소 리가 아니라 큰 빛을 따라가 보아 황금 궤짝을 발견한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

a) 이런 신화들은 고조선 이후 고구려와 신라 등의 국조 탄생을 신의 특질을 지닌 신비한 영물들과 연관지어 신비롭게 수식한 내용이다.

b) 신들의 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전세 후세의 관념도 없고 오직 현세와 현세의 인간, 그중에도 국조인 단군의 탄생과 ‘그의 백성에 대한 통치’에만 신화의 비중이 집중되었 고 이런 점은 ‘신화성의 희박’인 만큼 ‘신 본위’가 아닌 ‘인간본위(人間本位)’의 성격, 곧 ‘인본사상(人本思想)으로 읽히는 한국 신화의 특징이다.

c) 위상의 높낮이가 있지만 등장하는 ’영물로서 신비성을 지닌 신‘들은 실상 모두 ’자연신 (自然神)‘이다. 따라서 ’다신사상(多神思想)의 풍토‘가 한국 신화에 깃든 또 하나의 사상 적 특징이다. 수많은 자연신을 믿는 사유는 인간의 ’영혼(靈魂)‘과 같은 ’정령(精靈)‘이 모든 자연물에 내재한다는 믿음에 있다.

d) 물이 흐르고 바람에 나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일종의 생명체로 믿는 ’물활론(物活 論)‘, 그와 짝하는 ’애니미즘(animism)‘을 지닌 풍토가 다른 나라 신화와도 같은 한국 신화의 공통적 요소이다. 인간과 자연을 ’동질‘로 생각하는 ’토템사상(totemism)‘이 그 런 실례이다.

 

3) 단군 신화의 내용과 사상

“옛날 하느님(帝釋, 桓因)의 아들 중 하나인 환웅(桓雄)은 하늘 아래 인간을 세상에 탐내었 다. 아버지 하느님이 내려다보니, 삼위(三危) 태백(太白)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할 수 있어, 천부인(天符印) 셋을 주며 내려가 다스리도록 했다.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 리고 태백산 마루의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였다. (...) 그는 풍백(風 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통솔하고,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악(善惡) 등 무 려 360여 인간사를 주관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늘 환 웅에게 인간으로 되길 기원했다. 환웅은 쑥 하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되리라.” 했다. 이것을 받아먹은 이들 가운데 햇빛 보지 않고 꺼림(忌)을 지킨 곰은 37일 만에 여자로 되었으나, 범은 꺼림을 지키지 못해 사람으로 되지 못했다. 곰 여인(웅녀)은 혼인할 상대가 없어 늘 신단수 아래 서 잉태하길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해(假化) 혼인해 주어, 그녀가 아들을 낳자, 이 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 이분이 중국의 요(堯, 唐高 중국 당나라의 고조를 다 른 왕조의 고조와 구별하여 이르는 말)즉위 50년(庚寅경인년(庚寅年)은 육십간지의 27번째 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고조선)

 

단군 신화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그 아들은 물론 신이고, 풍백, 우사, 운사 또한 바람, 비, 구름의 신(자연신)이다. 이는 으뜸 신인 하느님의 손자가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라는 사유는 한국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자손 곧 天孫‘이라는 사유의 표출이다, 天孫 思想을 이끌어 ’한국인의 독자적 위상‘을 마련한 것이다. 중국의 요와 같은 시기라는 지적은 곧 조선보다 더 큰 중국을 의식하면서 한국 역사가 중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한국인의 주체성’의 발로이며 곰과 범을 등장시키는 것은 토템 사상의 전형으로 무당(巫覡무당과 박수무당)의 주술(呪術)과 주력(呪力)을 인정하며 무속신앙 곧 샤머니즘“의 시대를 이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제시해 ‘인존적 인본사상(人尊的 人本思想)’의 구현이라는 철학적 이상을 제시한다. 이는 한국철학의 이념적 원형(理念的 元型)이 그려진 사례이다. (재세이화在世理化: 세상에 있는 동안 다스려 깨우치게 함)

 

4) 한국 철학의 무속적 바탕

a) 무속풍토의 도덕의식:

삼국시대의 천신제(天神祭)때의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이라는 행사는 한국인의 뿌리에 대한 숭배였고 이 의식은 곧 ‘조상숭배(祖上崇拜) 사상’이며 조상숭배는 유교의 ‘효 (孝)’ 개념으로 진화될 관습이고 사상이다. 또한 유교의 ‘충(忠)개념은 군왕을 숭배하는 제 사와 통한다. 충과 효과 유교의 중심 사상이므로 우리의 삼국 시대의 모습은 유교의 ’도 덕의식(道德意識)에 견줄 사상적 토대였다. 이는 무속풍토에서 자생하던 한국인의 도덕에 눈뜨던 ‘사상적 씨앗’으로서 한국철학사상이 자생의 싹을 틔운 실례들이다.

 

b) 무속 세계의 극복

사로국(신라) 국왕의 명칭은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의 칭호를 거쳐 ‘니사금(尼師 今)’인데 이 이름들이 의미는 존장자, 무당, 계군(繼君)이며 이는 무속이 지배하던 시대에 제사와 정치, 곧 종교와 정치가 분화되지 않은 시대의 명칭이었고 니사금 명칭 이후 ‘통 치자를 임금인 군왕’이라고 한 것은 무당의 제사장 역할로부터 분리된 왕의 독자적 통치 가 가능했음을 의미로 ‘제사와 통치의 점진적 분리’가 진행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는 신과 무당의 능력보다는 유능한 군왕의 ‘물리적 힘’이 실제로 크다는 인식하에 제정분리(祭政分離)의 현상이고 이것은 무속의 풍토로부터 보다 더 ‘이성적이고 경험을 중요시’하는 사유로 넘어온 배경이다.

 

2. 유불도 삼교의 수용

1) 삼교의 전래

a) 약화되던 무속신앙 풍토에 중국으로부터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의 삼교 전입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병존하던 ‘삼국시대에 이루어진다.

b) 유교의 전입 시기: 기원전 240년 무렵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유입된 것은 서기전 12세기경이라는 입장이 있다. 그 이유는 은나라 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한국에 들어와 홍범구주(洪範九疇)와 정전법(井田法) 등 유교적인 통치술을 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유교의 연원을 기자에 두는 이런 견해는 과 거 한국의 유학자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왜냐하면 공자 이전에 벌써 한국 의 유교는 중국보다 더 발달해 있었다는 주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의 많 은 유학자들은 한국을 유교의 종주국이라고 믿었으며 그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 었다. 그러나 기자의 입국은 확실한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공자를 도외시한 유교는 큰 의 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견해는 오늘날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대체 로 합의되어 있는 유교의 전래시기는 기원전 240년 무렵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무렵 한국의 지명에 한자의 사용이 본격화되고 지식인들로 보이는 중국인들의 유입이 많았 기 때문이다.

 

c) 불교의 전입 시기: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

신라의 불교 공인(公人)은 527년(법흥왕 14)년

 

d) 도교(여기서 도교는 중국 후한 시대의 장도릉(張道陵)이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창건한 ’오두 미교(五斗米敎)‘를 일컫는다.)의 전래

고구려: 643년(보장왕 2) 연개소문이 ’삼교를 솥발(鼎足정족)‘에 비유하면서 도교 수입을 왕에게 주청하여 당에 사신을 보냈고 당 태종이 도사(導師) 숙달(叔達) 등 8명을 도덕경(道德經)과 함께 보냄.

신라: 당에서 유학하고 온 학자들(특히 丹鼎派, 丹學派)가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 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백제: 내용과 시기 불분명하나 신라나 고구려보다 별로 늦지 않았다.

* 도교의 도입은 삼국 어느 경우나 ’개인 차원‘에서 유입된 것을 추측하는데 기록상 시기보 다 더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은 중국과의 잦은 교류로 인해 개인 차원의 도교 유입은 늦어 도 4세기경으로 추측.

 

2) 시대별 삼교의 수용과 변화

a) 유교:

유교의 초기 수용

주로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등의 오경과 사기, 한서, 후한서등의 삼사(三史), 그리고 논어, 효경, 문선 文選등을 통한 것이었고 곧 삼국 각각의 역사 서의 저술로 이어진다. 고구려에서는 국초에 저자 미상의 고구려사 『유기留記』 백 권이 나 오고 백제에서는 박사 고흥(高興)의 『서기書記 』, 신라에서는 대아찬(大阿飡먹을찬벼슬이 름), 거칠부(居柒夫)등을 시켜 『국사國史』를 내었는데 이 저술은 삼사와 춘추를 익힌 역사 중요시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한 ‘자기 정체성의 확인’ 으로 드러나는 유학의 초기 수용의 형태지만 곧 이어 372년 고구려의 태학에 이어 백제와 신라에도 국학(國學) 또한 태학(太學) 설립 등 교육기구 설치된다.

 

이런 기반 위에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다 같이 나름의 국사를 찬술하고 유교적인 예속화(禮俗化)를 도모하는 한편,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때 유교적 교육에 의해 충·효의 사상이 생활화하게 되었으며 이런 체제의 강화책은 당시의 부족연맹 적 국가 형태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던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더욱 적극화되어 6세기경에 이르면 유교적인 정치 이념이 민본(民本)·위민(爲民)의 정신 아래 덕과 예로써 통치하는 것 임을 설총(薛聰) 같은 학자는 물론 진흥왕과 같은 통치자까지도 인식하게 되었다. 유교 이 념의 확대와 충실한 실현을 위한 계속된 의지는 마침내 왕조나 사회 체제의 변혁에 대해 합리화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9세기 신라 말기의 유학자들이 당시의 골품제의 모 순에 저항하는 분위기를 형성해 왕건의 고려 건국을 합리화시켰다.

 

고려 건국(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918년, 송악(지금의 개성)의 고구려계 대호족 출신인 왕건이 역성혁명으로 자신의 군주였던 태봉(후고구려)의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건국하면서 삼한이 재통일 된다. 고려 제6대 성종 대에 이르면 그 이전에 비하여 큰 변화가 나타는데 우선 중국식의 3省制로 대표되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며, 유교적 정치 이념이 제도적으로 강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일찍이 태조에서 경종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상황을 직접 체험하면서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왕권과 臣權 간의 상호 협조와 조화가 있어야 하며, 또 유교적 정치 이념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최승로(崔承老)와 김심언(金審言)과 같은 유학자들은 지방 관제의 확충과 군도(君道)·신술(臣術)·이도(吏道)를 실현시키려 애썼으며, 과거제의 시행을 확립했고 관리의 부정부패 방지를 위해 감찰제의 시행과 함께 통치의 기술 및 관리로서의 출세 도구로 간주되던 11, 12세기의 고려 유교는 국학 및 사학기관의 교육과 궁내 대신의 강회(講會)를 통해 높은 수준으로 연구, 발전되지만 12세기 후반부터 관료적인 한계와 폐단을 드러내어 사치스런 귀족문화의 풍조만을 조장하는데 그칠 뿐 더 이상 강력한 사회사상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시대 사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신유학으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주희의 성리학을 살펴보자

춘추 전국 시대 때의 공자나 맹자의 유교는 형이상학적으로 그리 현란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한 학문 체계였다. 그러나 진에 이르자 유학 서적들이 분서갱유로 소 실 되고 한나라(BC 206 ~ AD 220) 시대에 이르자 진나라 때에 훼손, 상실된 경전을 정리 하고 자구 해석하는 훈고학이 탄생하여  당나라(618-907) 시대에는 유학의 주류가 된다. 이러한 훈고학은 당나라 때에 공영달이 저술한 오경정의가 출판되어 관확화되자 결국 획일 화, 형식화된 학문으로 전락하게 되어 결국 당말송초(唐末宋初), 당송 교체기(唐宋交替期)에 이르자 기존의 유학인 훈고학은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더 불어 전한 말부터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이전까지는 중국 사상계에선 주목받지 않았던 여러 형이상학적 논점들을 깊이 다룸으로써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도교 또한 후한말부터 재조명을 받기 시작하자 당나라 말기에 지금까지 형식화 획일화된 유학에 대한 문제의식,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일으킨 불교와 도교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여러 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유학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유학을 불교와 도교에 비해 우위를 갖는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형식화와 획일화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송나라 시기에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유학자들이 구체화하였고 이를 주희(朱熹1130 ~ 1200)가 집대성하여 이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성리학은 11세기 말 12세기 초부터 사신들의 교류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13세기 말엽 주희(朱熹)의 학설이 고려에 전해진다.

 

조선 건국(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통치 원리로 채택되어 조선이 멸망하는 20세기 초까지 도교· 불교·무속신앙을 배격하면서 그 자체의 기본적 논리를 성리학자와 관리들을 통해 실현시켜 나가려고 애썼다. 특히 15, 16세기에는 성리학적 이상주의에 철저한 일군의 학자들, 즉 사림파(士林派)가 대거 집권세력층에 가담하게 되어 성리학의 사회 사상적 기능이 적극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학의 이론적인 탐구도 왕성하게 진행되었다.

조광조(趙光祖)의 이상 정치를 지향한 제반 개혁은 전자를 대표하며, 이황(李滉)과 이이(李 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같은 인성 연구(人性硏究)는 후자를 대표한다. 인성의 연구란 사단칠정에 대한 이기론적 해석을 의미한다.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理)의 발(發)’, ‘기(氣)의 발(發)’ 혹은 더 복잡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등에 대한 새로운 본체론적 탐구(本體論的探求)로서 시의 시대 배경과 연결시켜 보면 군왕의 덕치(德治)·예치(禮治)의 근거와 유교 윤리의 근거를 밝히는 작업이다. 이황은 8년의 세월에 걸쳐 기대승(奇大升)과의 논쟁을 통해 연구를 심화시켰으며, 이 문제는 이이 이후에도 거의 2세기 동안 계속 논의의 초점이 되어 한국 성리학의 연구 수준은 중국보다 높이 고양되었다. 뿐만아니라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학설의 대립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학파의 성립이 이로 인해 형성되어 ‘퇴계학파’·‘율곡학파’ 혹은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인성 연구는 18세기에 일어난 ‘인성·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논쟁’과 함께 한 국의 성리학적 이론 탐구의 대표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래 유교의 정치는 예 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성리학을 통치 원리로 채택한 조선시대에는 예의 교육과 그 보급·실 천이 정책적으로 매우 강화되었다. 15세기 이후 『가례 家禮』, 『삼강행실록』, 『소학』 등의 활발한 간행과 배포가 그 좋은 예이다.

더구나 내면적인 수행을 철저히 행하는 불교를 배척하고 그 대행의 구실까지 해야 했던 관 계로 한국의 성리학은 심성 수양에 기초한 예의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2세기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17, 18세기에는 예의 절대화 풍조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16세기의 인성에 대한 탐구도 예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욱이 17세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되어 그 안정이 시 급히 요청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를 절대화하는 사고와 행동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 다. 당시의 학자들은 예설(禮說)의 수집·정리·세목화의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일반 지식 인들의 일상 생활은 물론 관리들의 당쟁까지도 예의 실천론을 중심적인 문제로 하는 정도 였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성리학이 지닌 명분론적 사고의 산물로서 나타난 것인데, 한국 의 경우는 그 정도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강했으므로 특색으로 꼽히고 있다.

예를 절대시하는 사고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형식주의적인 사고이다. 그런 까닭에 17,18세 기 성리학자들의 현실감각은 상당히 둔감하여 격동하는 사회에 대해 융통성 있는 자세를 보이지 못하고 고식적인 태도만을 견지하였다.

 

실학의 대두

중국에서 실학으로써 학풍이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 서구 과학의 전래와 청나라 초기의 고증 학풍이 일어나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세웠다. 청조 고증학파 실학은 한족이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 정복된 민족 문화 운동 또는 경전 재정리로 청조 타파와 한족 국가의 재흥을 기도한 민족적 사상과도 합류된다고 볼 수 있다. 청조의 실학파 학자들이 경서 고증에 치중한데 대하여 한국에 있어서 실학은 조선 후기라고 하는 특수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산출된 특수한 사상이다. 따라서 그 배경과 관련하여 볼 때 비로소 그 의미가 확실히 드러나는 사상체계이다.

한국의 실학사상이 발생된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양란과 당쟁(黨爭)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쇠퇴하고 부패·타락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국가사회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해 보려는 일부의 뜻 있는 정치가와 재야(在野)의 학자들의 자가 반성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구국구폐운동(救國救弊運動)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때마침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고증학(考證學)과 천문·지리·역산(曆算)·농학·의학 등의 놀라운 과학적 지식을 비롯하여 새로운 세계관·인생관을 제공해주는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의 도입, 청조(淸朝)의 찬란한 문화와 산업제도를 그대로 배울 것을 주장하는 북학파(北學派)가 서로 합치되어 일종의 경세의 학(經世之學)으로 발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실학(韓國實學)의 내용이 되었다.

 

한국의 실학은 서구 과학과 청의 농법·농제를 토대로 하는 경세의 학문을 주로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실학은 종래의 공리공담이 주로 된 도학과 주자학의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의 세계에서 온갖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참다운 이상과 방법으로서 해결하여 다 같이 행복한 생활을 하자는 데 그 뜻이 있으며 이것이 한국 실학의 특징인 동시에 이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임진왜란을 전후한 우리 국내 사정은 지주(地主) 및 관료층의 착취와 이전부터 상공기술(商工技術)에 대한 천대에 겹쳐 조선 후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3정(三政) 문란은 부패한 사회의 개량을 더욱 촉진케 하여 새로운 생활 타개를 위한 구국구폐운동(救國救弊運動)이 개별적 혹은 체계적인 개혁 방안과 사회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난이 있은 뒤 국민들의 곤란한 생활의 타개책으로 관리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며, 권리의 유지책으로 드디어는 당쟁을 이용하게 됨에 따라 당쟁의 격심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은 임야(林野)에 들어가 역사와 정치·경제 문제를 연구하였으며 국가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의 사회적인 요구가 절실한데서 비로소 실학사상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치명적 타격은 비판 정신을 길러 사회생활과 정치의 지도이념으로 되어온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지행합일주의(知行合一主義)를 주장하였다. 주자학에 대립되는 양명학(陽明學)의 전래에다 청조의 고증학이 영·정조(英·正祖) 때에 하나의 새로운 학풍을 이루어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治國)의 이상을 올바르게 하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정치를 실현하려는 일종의 혁신운동이 그들 사이에 일어났다.

 

실학파의 비조(鼻祖)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인데, 그를 계승한 성호 이익(星湖 李瀷)과 더불어 실학의 앞길을 닦아 놓았다.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사설』은 현실적인 문제들, 즉 정치의 길(道)·지방제도·경제·과거제도·학제(學制)·병제(兵制)·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상과 구상을 논한 책이다. 이리하여 실학의 계통을 밟은 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으니, 앞에 말한 유형원의『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사설』 외에 정약용(丁若鏞)도 『목민심서』『경세유표』를 지어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18세기 실학은 20세기에 접어들어 시대 상황과 맞물리면서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20세기 초,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목적에서 그리고 밀려오는 서양 학문를 접하면서 실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1901년 김택영편의 『연암집(燕巖集)』을 시작으로 『흠흠신서(欽欽新書)』와 『목민심서(牧民心書)』가 각각 장지연(張志淵, 1864-1921)에 의해 광문사(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었다. “실로 우리 대한제국의 정치학 가운데 제일 신서(新書)가 목민심서이다”는 1902년 5월 19일 자 『황성신문』의 찬사도 이어졌다. 당대의 과제 해결로서 다산 정약용이, 서양 근대학문과의 만남 속에서 연암 박지원의 위대성이 부각된 것이다.

 

현실 타개책으로 주목받았던 실학은 1930년대 들어와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조선학운동’의 일환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최남선이 1931년 『조선역사』에서 조선후기 신학풍을 근대 학술 용어로서 실학이라 지칭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어서 1935년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정인보·안재홍 교정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이 간행되면서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 경향으로서 실학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지칭되기에 이른 것이다. 1930년대 실학은 여러 가지 용어로도 표현되었다. 예컨대 문일평(文一平)은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정인보는 ‘의독구실지학(依獨求實之學)’, 백남운은 ‘현실학파’, 홍이섭은 ‘실증학파’라 지칭하였다.

 

1930년대 시작된 실학 연구는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에 더욱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실학 개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특히 천관우는 최남선과 정인보의 견해를 계숭하여 영조·정조 연간을 전후하여 일어난 새로운 학풍을 실학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실학의 ‘실實’을 학문적 자유인 ‘실정實正’과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실증實證’, 그리고 현실성을 의미하는 ‘실용實用’의 실이라고 정의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을 근대정신의 태반이자 근대사상의 맹아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본 것이다.

 

1960년대 들어와 실학 연구는 더욱 활발하여 유파별로 구분하기 이르렀다.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 ‘실사구시파’로 구분하기도 하였고,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으로서 실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근대와 민족이 강조되던 시기를 지나 1980년대 이후에는 민족주의와 근대지향적 측면을 북학파를 통해 밝혀 보려는 연구도 진행되었고, 성리학과 실학의 개념 문제가 함께 논의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시각은 실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성과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실학 용어의 무한대적 범람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고 있는 것이었다.

 

해방 이전의 실학 연구는 진보적인 특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실학이 보수적인 사상체계였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는 여말선초 기록에 보이는 ‘실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 관점대로라면 실학은 조선후기 실학이 아닌 통시대적인 명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동향은 그간 민족주의와 근대지향적 성격을 띤 조선후기 실학 개념에 한계를 느끼고 세계주의와 현대 지향적인 새로운 개념의 실학을 모색하려는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학은 과연 실체로서 존재한 것인가? 실학 개념을 둘러싼 논의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 유교 사상의 공과 사

유교가 한국의 국가 발전과 문화향상에 이바지한 공헌으로서는 흔히 다음 몇 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1. 정치제도 면

삼국시대에는 부족 연맹 국가를 봉건 군주국가로 체제 전환을 시키는 데 있어서 이론적 뒷받침을 하였고,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는 한층 강력한 중앙집권의 군주국가·관료국가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과거제도를 채택하여 인재 등용의 기준을 삼으면서부터 더욱 전형적인 유교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국가와 국민을 유교화 시키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2, 사상 면:

유교는 국민의 윤리·도덕의식을 함양·계발함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른바 오륜(五倫)은 가정생활·사회생활·국가 생활에 있어서 기본 윤리가 되었다. 충(忠)·효(孝)·절(節)·의(義)의 사상은 널리 국민 일반에게 보편화되어 가정과 국가를 유지해 가는 정신적 지주(支柱)였으며, 예의·염치를 존중하고 '군자'·'소인'의 구별을 중히 여기어 군자 되기를 힘쓰고 소인됨을 부끄러워하는 윤리의식은 드디어 외국인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란 평을 받게까지 되었다.

 

3. 특히 조선에 있어서의 송학(宋學), 그중에서도 정주학(程朱學)들이 정치를 담당하고 부패·부정의 세력들과 싸우다가 도리어 부정세력에 희생되는 이른바 사화(士禍)도 종종 생겼으나, 그들이 남긴 도의정신은 역사상 영원히 빛나고 있다. 비록 정치에는 실패하였지만 그들이 보여준 정의와 진리를 위한 불굴의 정신은 드디어 사림(士林)을 통하여 서원(書院)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뒷날 서원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내었지만, 서원의 당초 창설은 원래 도의를 위하여 순신(殉身)한 선현(先賢) 또는 그 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4. 조선의 사화와 당쟁은 유학자들을 산림(山林) 속으로 몰아넣어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이론유학(理論儒學)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른바 심성(心性)·이기(理氣)의 토론,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변론 같은 것은 중국의 성리학(性理學)을 능가할 정도였고, 그 영향은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일본에 퇴계학파가 생길 정도였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로는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유학이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하여 철학, 형이상학적인 이론유학으로부터 현실의 정치·경제·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리면서 새로운 경향의 유학인 실학(實學)을 탄생시켰다. 유학은 원래 내외(內外) 양면이 있다. 수기(修己)와 정덕(正德)은 내적(內的)인 면이요 치인(治人)·이용후생(利用厚生)은 외적인 면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성리학은 '수기'·'정덕'면의 이론과 실천에 치중했고 그 후의 실학은 '치인'·'이용후생'면의 이론(그 경륜과 실행의 구체적 방법의 제시)에 힘썼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역사·지리와 문물 제도에 관한 검토·비판이 이루어지면서 유학은 한층 더 한국화·토착화된 유학으로 발전하였고, 청국(淸國)을 통한 서구 문물의 수입에 따라 '북학(北學)'·'서학(西學)'에까지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교는 한국의 역사 발전에 다음과 같은 많은 폐단도 드러냈다.

 

1. 너무 예의에 집착된 결과로서 관혼상제의 '번문욕례(繁文縟禮)'가 심하였고 따라서 형식적인 것에 구애되고 체면차리기에 급급하여 내심의 성실성을 잃어버리는 폐단이 생겼다.

 

2. '사·농·공·상'이라 하여 '사(士)'의 신분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반(班)·상(常)'의 구별이 생겨 소위 양반계급은 하나의 특권계급으로서 상민을 천시하며 노력을 착취하여 국민간의 적대의식을 조장하고 노동을 싫어하며 학문을 하나의 행세거리로 삼으면서 유교의 이름을 팔아 국민을 기만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3. 도학이 인간의 덕성 함양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 소위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德者本也 財者末也)"라는 관념이 '사(士)' 계급에서 굳어져 물질적인 생산산업, 이익을 도모하는 상공업 같은 것을 천시하고, 그런 기술도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 이외의 생업, 즉 상공업이 발달할 수 없었고 과학기술도 발전시킬 수 없었다.

 

4. 유교 경전을 존중함에 따라 그것도 습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한문(漢文) 학습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 자기의 문자(한글) 사용을 등한히 하여 민족적 문학·예술의 발전을 지연시켰고, 경전의 교훈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행세 위주의 '양반 유학자'들이 증가되어 감에 따라 시(時)와 세(勢)를 가리지 못하고 시중(時中)을 맞추지 못하는 보수·완고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유교의 특유한 성격처럼 되었다. 유교에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내포한 본질면이 있고 그것을 응용함에 있어서 시대와 사회에 따라 생기는 말단적인 폐단도 있다.

 

불교의 초기 수용:

 

고구려의 호국불교(護國佛敎):

중국 북방의 동진과의 외교 통로로 왕권 강화와 왕실 번성과 관련되어 왕실불교 더 나아가 호국불교의 성격으로 수용.

백제의 왕실불교:

근초고왕때(346~375)의 융성기에 왕실에서 불교를 보호했지만 성왕(聖 王: 재위 523~544)때 열반경(涅槃經) 수입해 전문적으로 불교 연구.

신라:

불교 초기에 무속 사상과 갈등이 시작되어 이차돈(異次頓)의 죽음을 유발했고 왕실과 밀착된 불교의 공인으로 무속신앙을 기반으로 하던 촌장들의 저항을 무마해 왕권 강화의 성격으로 불교를 수용한 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인도와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당나라의 13종(十三宗:成實宗·三論宗·俱舍宗·地論宗·攝論宗·天台宗·法相宗·涅槃宗·念佛宗·密宗·禪宗·華嚴宗·律宗)이 도입되어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분파를 이루었다. 국가 안태(安泰)와 왕실의 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국민 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또한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圓光)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경흥(憬興)·지통(智通)·표훈(表訓)·명랑(明朗)·승전(勝詮)·대현(大賢)·도의(道義)·신행(信行)·체징(體澄)·지증(智證)·혜소(慧昭)·현욱(玄昱)·개청(開淸)·낭공(朗空)·범일(梵日)·무염(無染)·원랑(圓郞)·진경(眞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고려 건국(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진관사(津寬寺)·부석사(浮石寺)·관음사(觀音寺)·숭교사(崇敎寺)·석왕사(釋王寺)·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교장(敎藏)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수기(守其)·균여(均如), 말기의 나옹(懶翁)·보우(普愚)·보조(普照)·백운(白雲)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화엄종·총남종(摠南宗)·자은종(慈恩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도문종(道門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자은·총남·중신·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조선 건국(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미증유의 수난기(受難期)를 맞이하였으니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田)에도 과세를 하였으며 승려의 궁중출입과 도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과(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德) ·흥천(興天) 두 절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중종(中宗)은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은 민가를 짓는 데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앙 자체를 말살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상류층 부인의 신앙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역대왕 중에는 호법왕(護法王)도 있었으니, 태조는 석왕사 ·태고사 ·해인사 등에 비판(婢板)을 하사하였고, 세종 ·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을 간행하였다. 특히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를 단행하여 조계 ·천태 ·총남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 ·자은 ·시흥 ·중신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선 ·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이름 높은 명승도 많이 배출되어 무학(無學) ·함허(涵虛) ·보우(普雨) 등과 임진왜란 때의 승장 서산(西山) ·사명(四溟) ·처영(處英) ·영규(靈圭)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末寺)로 구분되었고, 3 ·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成)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 ·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 교구제(敎區制)를 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원을 설치, 종헌(宗憲)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 ·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립, 동국대학 · 해인대학 · 경기대학과 해동(海東) ·용인(龍仁) 등 10여 고등학교 및 20여 개의 중학교를 운영, 문화사업에도 기여하고 있다.

 

1954년 이래 비구(比丘) ·대처(帶妻) 두 파의 분쟁으로 분열된 후 여러 개의 종단으로 갈라졌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종파는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 ·법화종(法華宗) ·미륵종(彌勒宗) ·법상종 ·보문종(普門宗)·일승종(一乘宗) ·용화종(龍華宗) ·불입종(佛入宗) ·원효종(元曉宗)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淨土宗) ·진각종(眞覺宗) ·총화종(總和宗) ·진언종(眞言宗)·천화불교(天華佛敎) ·한국불교법화종 등 18개 종파가 있다. 사찰수는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만여 명, 신도수 1,30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신문을 비롯하여 각 종파·단체들에서 정기간행물도 30여 종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초기 한국의 불교 인물들

고구려의 승랑(僧朗)

승랑(僧朗)의 생몰년(生歿年) 및 생애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승랑은 장수왕(394~491) 후기에 랴오둥(遼東)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으로 가기 전 고구려에서 이미 구족계(具足戒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으며, 고구려를 떠나기 전에 불교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론학(三論學: 중론, 십이문론, 백론의 삼론에 근거한 논종)의 연구로 중국에 들어가 ‘중국 삼론학의 선구’로 공헌했다.

 

통일 신라의 원측(圓測 613~696)

신라의 왕손(王孫)이라고 전해진 원측은 3세에 출가하여 15세에 당나라로 가서 유식학(唯識學) 연구의 개척자인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으로부터 유식학을 배웠다. 특히,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어뿐만 아니라 범어를 비롯한 7개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원측에게 친히 도첩(度牒)을 내리고 원법사(元法寺)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비담(毘曇)·성실(誠實)·구사(俱舍) 등 유식학 연구의 기본이 되는 소승경론(小乘經論)을 연구하는 한편, 대승경론도 폭넓게 연구하였다. 특히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여신라 신문왕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결국 중국 땅에 묻혔고 현재 중국 시안시(西安) 흥교사(興敎寺)에 그의 탑묘가 남아 있으며 탑묘 안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통하여 중국 불교학계에 명성을 떨쳤으며 ‘유식학자’로서 독창적인 유식론(唯識論:외부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마음(식, 識)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보는 관념론적 입장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이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하였기 때문에 현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남겼는데 특히 심의식설(心意識設)을 담은 그의 책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1권에서 9권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3. 신라의 원효(元曉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최초의 사찰 절 흥륜사에 모셔졌던 역대 신라 10대 불교 성인.) 중 한 명이다. '모든 건 자기 마음에 달렸다.' 는 해골물 일화로 유명하며 파계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ㆍ철학사ㆍ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이다. 또한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도 유명하다. 삼학에 능통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를 두고 만인지적(만 명의 사람을 대적할 만한 지략과 용맹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아미타불을 사실상 발굴한 인물인데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등 불교 이론가, 교종으로서의 면모가 매우 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에게 있어 '불교의 경전은 이해가 어려우니 신경쓰지 말고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라.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면 된다'는 내용으로 대표되는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생활 불교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4. 신라의 의상(義湘 625(진평왕47)~702(성덕왕1))

신라의 승려로 속명은 김일지(金日之). 동시대에 활동한 고승인 원효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한국에 화엄종을 최초로 일으켰으며 8세 위인 원효를 만나 친교를 맺고 그와 함께 고구려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우기도 했는데 661년 원효와 함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가던 중 원효는 한 고분에서 깨친 바가 있어 발길을 돌리고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제조였던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부석사 등 많은 사찰을 세우고 교화 활동을 폈다. 원효가 저술에 힘쓰고 개인적인 교화 활동을 편 데 반해, 의상은 교단 조직에 의한 교화와 제자들의 교육을 중시했다.

6두품 출신인 원효와 달리 의상은 진골이었는데 화엄종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로다.'라는 입장에서 우주 만물을 하나로 아울러서 국왕 중심의 체계를 잡는 데 사상적 바탕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왕실 종파로 자리잡았지만 의상은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중앙귀족 세력과 결탁하기를 피하려 하였다.

원효가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퍼트렸듯이 의상은 현세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관음 신앙과 아미타 신앙을 함께 전파하는 데 힘썼다. 의상이 관음 신앙만 이끌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이 아니다.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관음 신앙을 화엄 종단의 중심 교리로 받아들였다. 저서로는 화엄 사상의 요지를 210자로 축약해 시로 표현한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 등이 있다.

 

5. 고려의 의천(義天)

의천(義天: 1055 ~ 1101) 고려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로 11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 13세에 우세(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론 삼장(三藏)은 물론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요나라(대요大遼, 916~1125) 거란족이 중국 화북지역을 정복하고 세운 왕조)에도 알려져 요나라 도종 천우황제의 초청을 받기도 했으며 송나라에 유학해 수도 변경의 여러 절에 머물면서 화엄과 천태 등의 교학에 대해 토론하며 견문을 넓으면서 1086년(선종 3)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한 뒤,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불교전적 정비·편찬에 힘썼다. 1097년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개립하여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했다.

 

6. 고려의 지눌(知訥 1158년~1210년)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은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스님으로 참선만을 일삼거나 불경만을 가르치면서 각기 그것만이 옮다고 주장하는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한국 조계종의 사상적 기초를 수립한 중흥조로 불린다. 돈오점수(頓悟漸修) 곧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해 나간다, 정혜쌍수(定慧雙修)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수행해 나간다는 선 수련의 방법을 제창하고, 화엄종의 사변적 형이상학을 선종의 체험에 연결시켰다. 무엇보다도 혼자만의 수행이 아닌 결사운동을 통한 조직과 대중운동을 경험하게 했다는 데서 큰 평가를 받는다.

 

한국 불교의 윤리적 특징

인도 및 중국 불교와 마찬가지로 한국 불교 역시 개인의 해탈과 더불어 타인의 구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비의 실천을 강조해왔다. 특히 백성들의 생활 속에 끈끈하게 뿌리를 내리고 이들을 구제하는 데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불교 본연의 측면에서도 자비를 강조해 온 한국 불교의 전통은 한국 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다.

한편으로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가 종파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나뉘어 전개되었던 것과는 달리, 여러 종파를 아우르고 통합하려는 회통적 경향을 보여 주었다. 교종과 선종은 다른 종파와 대립하고 갈등하기보다는 포용하고 조화를 이루고 회통하려는 특성을 드러내었다.

조화와 통합의 한국 불교는 기존의 사상과 융합하는 특징도 보여 주었다. 예를 들어 불교 수용 당시에는 당대에 성행하였던 무속 신앙이나 산악신앙과 결합하면서 한국 불교 특유의 기복(祈福)적인 특징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유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변화를 모색하였으며 그에 따라 현실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청정한 세계를 만들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불교는 또한 대승 불교의 전통을 확장하여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는 전통을 수립하였다. 불교 신앙을 통한 국가를 보전하고 발전시키려는 호국 불교의 전통이 나타났고 이는 한국 불교의 전통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국 불교의 현대적 의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통해 조화와 균형의 원리를 발전시켜 온 한국 불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특히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사회 불평등이나 인간 소외와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미래 세계를 조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소통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포용하고자 하였던 한국 불교의 정신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주장과 의견을 화해시키는 원리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 지역과 세대 간의 갈등 등은 한국 불교가 보여 주었던 소통과 포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화해와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개인의 주체적인 수행에 관심을 기울여 온 한국 불교는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주체적 수행을 바탕으로 소유와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본연의 자신을 찾는 데 기여할 것이다.

나아가 중생의 구제에 힘썼던 한국 불교의 전통은 다른 사람과 공동체 전체를 이롭게 하고 나눔의 가치를 되살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특히 고통받는 우리 사회의 이웃에 대한 자비 정신의 실천은 우리 사회가 보다 인간다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c) 도교의 수용:

도교의 기원:

도교는 본래 민간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중국의 자연 종교이다. 도교는 정령 숭배를 기반으로 하여 신선 사상을 중심으로 삼고 거기에 도가, 역, 음양오행, 복서, 참위, 점성 등의 사상 및 이론과 무격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그 위에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떠 결합한 불로장생을 주목적으로 하는 한편 장수, 오복, 높은 벼슬을 구하는 현세이익적인 자연 종교이다. 

자연 종교로서의 도교는 후대에 종교 교단으로 체제와 조직을 갖추어 교단 도교가 되었고 도교 정전으로서의『도장』, 도교 사원으로서의 도관, 도교의 성직자 또는 전문 종교인으로서의 도사, 여도사의 체제를 갖추어 성립적(成立的) 종교 또는 교단적 종교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에 따라 도사들 간에 주장의 차이가 생겨나고 이에 따라 많은 분파가 생겨 1910년 경에는 중국에서 140여개의 도교 종파가 있었고 이 종파 종교를 성립 도교 또는 교단 도교라 부르고 이에서 벗어난 도교 및 그 집단을 민중 도교라고 부른다.

민중 도교는 매우 강한 주술성을 보이며, 고타마 붓다, 공자, 관음보사, 예수, 무함마드, 관우, 토지신 등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을 토대로 형성된 보권(寶卷) 계통의 성격을 띤 종교이다. 민중 도교에 속하는 분파 또는 단체로는 무위교(無爲敎) · 원돈교(圓頓敎) · 홍양교(弘陽敎) · 선천교(先天敎) · 구궁도(九宮道) · 금단팔괘도(金丹八卦道) · 일관도(一貫道) 등이 있는데, 이들은 전적으로 현세 이익적이라고 한다.

 

고구려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한국의 도교 유입 기록은 기원후 624년 고구려 영류왕 때로,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도사와 천존상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보장왕 때 연개소문에 의해 기존 고구려 왕실과 귀족층과 결합한 상태이던 불교계를 억압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도교를 받아들이고 장려하였으며, 이러한 행보가 당시 고구려 내의 분열을 오히려 부채질하여 고구려 멸망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도교적인 신들과 신수들의 모습, 별자리 신앙,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제천의식을 기반으로 그 이전부터 한국에 원시 도교적인 토속신앙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 문화 특별전에서는 한사군 시절의 도교(특히 외단 도교)와 관련된 약재나 의례 용품류의 유물을 전시한 바 있다.

 

2. 백제
백제의 경우 도덕경의 구절을 언급한 막고해의 발언 기록이나 도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산수무늬 벽돌과 금동대향로 등 조형물, 도교의 토지신(토백)이 등장하는 무령왕 매지석을 통해 어느 정도 도교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추정은 있으나 고구려처럼 직접적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유입되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하면서 주금사나 도교의 술법인 기문둔갑에 대한 책들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 신라
신라에서는 『신라사선(四仙)』에 대한 기록이나 화랑들을 신선에 비유한 기록,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을 통해 고구려 못지않게 도교가 활발하게 도입되었으며, 동시에 풍류도로 대표되는 토착 신앙과의 융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고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불교가 이미 중심 종교로서 우세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불교와 토착 신앙과의 융합도 강해 후발주자였던 데다 토착 신앙과 유사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상호 영향이 시작되어 공통 분모가 많이 생긴 상황에서 도교가 고유의 색을 가진 채로 깊이 파고들 만한 여지는 없었다. 자연히 도교는 독립된 교단이 아니라 불교와 토착 신앙과 융합하는 형태로 한국 문화의 한 구성원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 한국 불교와 무속 신앙에서는 중국 도교적인 성격을 가진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불자들이 애독하는 경전 중 하나인 『북두칠성연명경』을 보면 불경이라고는 하지만 칠성신에게 비는 것은 토착 신앙이나 도교적인 요소며,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아니라 중국 도교의 신인 태상노군이 주연으로 언급된다. 조선시대 문헌인 『증보해동이적』에서도 '원래 불교와 도교는 주문을 읽고 부적을 쓰는 데서 유사점이 많은 데다, 조선에서는 서로 섞여 어느 게 불교고 어느 게 도교인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이나, 남궁두에 대한 기록에서 남궁두의 스승이 스님이면서 신선술을 연마한 도사로 기록된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로 들면서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국의 도교가 유입된다. 적극적으로 도교를 수입한 예종 때 최초로 도관 복원궁이 세워지고 중국에서 파견된 도사들이 초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때도 기존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불교와 토속신앙과 충돌보다는 동화되는 형태를 보였고, 도교는 왕실과 지배층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기존 한국의 종교들과 서로 공존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때 고려에서 유행한 도교는 수련 도교가 아닌 제초 도교로서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이나 종교의 교리 연구보다는 도교식의 초제(醮祭별을 향해 지내는 제사)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액을 물리치는데 집중된 철저한 기복신앙이었다.

5. 조선
한반도에서 도교의 신선 수련이 발달한 것은 놀랍게도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을 중시하면서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적인 윤리주의와 유교적인 제례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기복신앙적인 제초도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나 국가 의례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고, 나중에는 마니산의 참성단 초제 정도만이 남게 된다. 이때부터 도교와 불교 융합적인 민간신앙의 발달과 몇몇 지방 양반가에서 가풍으로 내단 수련과 선행을 중시하는 이른바 내단파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의 도교의 수행이론 역시 정리되는 모습을 보인다. 현재 국내의 여러 단학 수련단체에서 중요시하는 『용호비결』이나 개운조사파에서 중시하는 『선불가진수어록』등의 서적이 모두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책들이다.


여기서 도교의 이해에 있어서는 민간신앙과 내단파의 관점이 조금 차이를 보였다. 민간신앙에서는 도교, 불교, 민간신앙이 뒤섞이면서 민간신앙에서 도교의 수경신 행사를 비롯한 몇몇 도교 의례의 도입과 더불어 도교적인 신의 위격, 호칭이 사용되었고, 이는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도참서 및 구세주를 자처하는 민간 반란 세력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내단파에서는 종교적인 부분보다는 유교/도교의 사이에서 심성을 닦고 선행을 중시하며, 삼교의 어느 극단에 치우침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시대 종교적 도교의 경우, 관성제 군신앙이 선조 이후 명나라를 통해 유입된다. 이러한 관성제군 신앙은 조선말 무상단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상단은 삼성을 중시했는데, 삼성은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이었다.


조선 후기를 거쳐 근세로 들어오면서 민족의식의 발달과 유교의 경직화, 신분제도의 붕괴 등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이때 들어서야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한반도의 특성상 중국처럼 순수한 도교 교단을 갖추기보다는 유불선 삼교와 토착 신앙이 섞인 성격을 하고 있었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등장한 도교 혹은 도교적 요소가 다분한 민족종교 교단들로는 동학, 남학, 정역파, 증산교의 교단들이 있다. 특히 동학과 증산교은 도교의 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동경대전에 상제라는 표현이 나온다)과 더불어 다양한 도교계 신령들과 원시적인 민간 도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는 의례와 이 과정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모습, 선계(仙界), 신선, 무위이화(無爲而化) 등의 다양한 도교적 관념과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이들 신종교의 사상은 중국 도교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동학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 최제우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창시는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19세기 후반의 사회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西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되며 미륵신앙, 도참사상(圖讖思想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 등 다양한 형태의 반봉건적 민중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유(儒)·불(佛)·선(仙)과 같은 기존의 사상들로는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포덕문)을 내기 위해서도 천명(天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여겨 당시의 여러 사상들을 정리·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유(儒)·불(佛)·선(仙)이 비록 뜻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 근원은 모두 하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학은 이 세 가지 도(道)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점을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동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동학은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귀하므로 사람 대하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처럼 경건하고 겸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동학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 주며, 성리학의 지배 이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써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당시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동학은 1894년 전봉준(全琫準) 등이 주도한 대규모 농민 봉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동학과 이 사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동학이 주체가 되어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는 견해에서는 이 사건을 ‘동학혁명’, ‘동학운동’ 등으로 나타낸다. 반대로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았으며 봉건사회와 외세의 수탈에 맞선 농민의 항쟁이 주된 측면이었다는 견해에서는 ‘동학’이라는 표현을 넣지 않고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반봉건·반외세의 농민전쟁이 주된 측면이지만 동학이 조직 동원이나 사상에 미친 영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나타낸다.

 

농민전쟁이 패배로 끝난 뒤에 동학은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고, 살아남은 북접 지도부는 도피 생활을 하며 조직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손병희(孫秉熙)·손병흠(孫秉欽)·이용구(李容九) 등의 노력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새로 교세를 넓히기도 하였으나, 최시형마저 처형되면서 존립의 어려움을 겪었다. 1897년 최시형에게 도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교단 조직 정비에 나섰으나, 1901년 손천민(孫天民)·김연국(金演局) 등의 핵심 지도부마저 관군에 사로잡히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 등은 일본과 협력하여 국내 활동의 기반을 넓히려 하였다. 이용구를 국내로 보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고, 경의선·경원선 철도를 부설하는 데 동학교도를 동원했다. 진보회도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나, 일본군의 후원을 받던 일진회(一進會)의 압박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김연국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로써 동학은 포교의 자유를 얻었으며, 1904년 12월에는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 그리고 1905년 12월 1일에는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었으며, 1906년 1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대도주(大道主)가 되었다. 그러나 1906년 8월 교단 내부의 갈등으로 이용구 등에게 출교 조치를 하여 일진회와 분리했으며, 이용구 등은 김연국과 함께 따로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었다.

 

증산교(甑山敎)

증산교의 발생은 1894년(고종 31)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동학혁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동학혁명은 조선 말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 억압받고 소외되었던 농민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대표적인 사회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결국 그 이념과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가담하였던 하류 계층은 혁명의 진행 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혁명 이전보다도 심한 욕구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급진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 혁명이 실패한 다음, 쉽사리 자기의 본래 생활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사회를 개혁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는데, 증산교는 이들이 강일순을 중심으로 하여 일으킨 조선 말의 신종교 운동이다.

강일순(甑山姜一淳1871년 ~ 1909년)에 의하여 1901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신종교(新宗敎)인 증산교는 강일순의 가르침에 따르는 여러 교파를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훔치교(吘哆敎)라고도 했다. 우리 민간신앙과 무교(巫敎)ㆍ선(仙)ㆍ불교ㆍ유교ㆍ기독교적 요소까지 함유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의 강일순, 미륵불(彌勒佛)로서의 강일순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해원(解寃)ㆍ상생(相生)ㆍ조화(造化)의 이념 실천으로 지상선경(地上仙境)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는 간략하게 나마 한국 철학 사상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이성과 지성으로 뒷받침하는 예지(叡智)가 곧 철학이고 사상임을 상기하며 우리는 우리나라에도 고조선 이래 어엿한 철학과 사상이 있었으며 그 철학과 사상 위에 중국을 비롯한 타국들의 사상과 철학을 받아들여 우리의 것과의 융합을 통해 반만년 역사와 문화에 기여했음을, 그것들이 우리의 문화유산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 지키고 우리식으로 변형시키시켜야 할 것임을 사유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