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공자와 맹자의 생애와 사상
황룡 튜터링 제2회 차 수업 자료 by 김은
목차
1. 중국 문명을 이끈 상징적 인물은 ‘삼황오제(三皇五帝)
2. 역사적 표준이 된 요, 순 시대
3. 하, 은, 주의 등장
1) 은나라의 등장
2) 하나라의 등장
3) 주나라의 등장
4. 춘추 시대의 도래
<공자>
5. 공자의 등장
1) 공자의 사회 진단
2) 시대의 혼돈을 해결하기 위한 제안
3) 공자의 인(仁)과 예(禮)인
4) 호학(好學)
5) 인성론(人性論)
6) 중용(中庸)
<맹자>
6. 맹자의 등장
1) 맹자의 시대적 배경
2) 맹자의 사상
3) 맹자의 본성론: 성선설
4) 사단(四端)
5) 호연지기(浩然之氣)
6) 내 안에 모든 이치가 있다.
7. 맹자 이후의 유가 사상
8. 공자와 맹자에 대한 현대적 수용
1) 공, 맹 사상의 현대적 의의
2) 공, 맹 사상에 대한 현대적 비판
9. 질문과 토론
* 참고 자료: 1. 23학번 1학년 때의 동양사상입문 수업 자료
2. 『중국철학의 기원과 전개』 정위상(지음) 손흥철, 최해연(옮김) 예문서원
3. 『중국 사상사』 森三樹三郞(지음) 임병덕(옮김) 온누리
4. 『동양 철학 스케치』 김선희 지음 풀빛
우리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 들어가기 전, 중국 문명의 시원과 그 이후의 흐름을 통한
즉 공자와 맹자가 출현했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1. 중국 문명을 이끈 상징적 인물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삼황: 수인, 복희, 신농
오제: 복희, 신농, 황제, 당요, 우순
이들이 사람들에게 문명과 공동체의 상징인 농경, 문자, 결혼 등에 대해 가르쳤으며 이들 의 전설이 형성될 시기에 고대 중국이 원시적인 공동체에서 점차 농경을 바탕으로 한 정치 공동체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2. 역사적 표준이 된 요, 순 시대
중국 사람들은 ‘요순’시대를 역사적 표준으로 삼아왔는데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무력에 의 한 지배를 부정하고 ‘도덕성“으로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의식이 사회 전반에 공인되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즉 ‘요순의 정치(堯舜之治)’라는 표현은 도덕적인 정치가 바탕이 된 이 상적인 사회라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는 올바른 통치의 원형을 폭력적인 힘이나 세습적인 권위가 아닌, ‘도덕성’에서 찾았다는 점이고 이는 다른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동아시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하나라는 중국 최초의 국가인데 창시자 요임금은 자신의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효성이 지 극했다던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이어 순 임금에 이어 오른 우(禹) 임금은 요임금 이 발탁한 곤의 아들로 최초로 왕위를 세습한 왕조가 되겠어요. 왕조가 세습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앙 권력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a) 요(堯)임금:
무력에 의한 강압이 아니라 백성을 가족처럼 돌보고 고통을 책임지는 ’도덕 정치의 표상‘이 된다. 하여 이 시대는 도덕이 강조되었던 부족사회로 추정 되여 요임금은 세습을 하지 않고 효성이 지극했던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 줍니다.
b) 요와 순임금이 중국인들이 흔희 ’요순정치(堯舜之治)‘라고 일컫는 도덕 정치, 즉 폭력적 인 힘이나 세습적인 권위가 아닌 도덕적 정치였고 이점이 동아시아의 특징이 됩니다.
3. 하, 은, 주의 등장
a) 하나라 :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2070 – 기원전 1600)
- 화산을 중심으로 서안에 위치.
- 화하족(華夏族)이 중심이 되어 설립, 이후 중화민족의 근간이 됨
- 황하 인근의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은 넓고 산물이 많다) 특징
- 요순임금에 이어 우(禹)임금이 세운 중국 최초의 국가
- 우 임금은 요임금이 발탁한 곤의 아들로 최초로 왕위를 세습한 왕조
- 왕위가 세습되었다는 것은 중앙 권력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
- 홍범구주(洪範九疇)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남겼다는 정치 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인 오행, 오사, 팔정, 오기, 황극, 삼덕, 계의, 서징 및 오복과 육극이다.
『서경』의 <홍범>에 수록되어 있다.
하나라를 이어 중국을 통치하게 된 것은 은나라인데 은나라 당시의 3천여 자의 갑골문자가 발견되고 은허라는 도시국가의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오늘날에는 실제 이 국가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은나라는 조상신을 숭배하는 신정(神政)국가로 즉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는 국가였다고 합니다. 하여 은나라는 하늘의 뜻을 받은 사람만이 왕이 될 수 있는, 통치자를 신격화했으며 최고의 권력자가 최고 권위의 조상신 상제를 섬기며, 천자만이 상제의 명을 받든다는 의식이 있어 이는 상제로부터 정복 행위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즉 하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의 정치 행위는 선민의식을 가져와 다른 부족들을 사정없이 정복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은나라는 다른 조상신을 모시는 이민족에 대해 배타성을 가짐으로써 주변 민족과 갈등하고 정치면에서도 권력이 강할수록 상제와 가깝다고 여겨, 상제의 명을 받은 왕을 중심으로 일종의 피라미드식 권력 위계를 형성합니다.
b) 은나라(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
- 동방 해안가에서 황하를 따라 내륙으로 진출한 동이(東夷)족이 세운 나라
- 은허(殷墟:'은나라 터', '은나라의 황폐해진 흔적'이란 뜻‘)의 발굴
- 3천여 자의 갑골 문자 사용(한자의 기원이 됨)
- 조상신을 숭배하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는 신정(神政) 국가, 제정일치국가
- 통치자의 신격화가 되어 최고의 권력자가 최고 권위의 조상신 상제를 섬겼고 천자만 이 상제의 명을 받듬.
- 상제를 모신 은나라의 통치자는 강한 선민의식으로 다른 부족을 정복하는 정당성을 확보함.
- 다른 조상신을 모시는 이민족을 배타해 주변 민족과 갈등
- 정치에서도 권력이 강할수록 상제와 가깝다고 여겨 상제의 명을 받은 왕을 중심으로
일종의 피라미드식의 권력 위계가 형성됨.
- 은나라가 망할 시점에 왕의 친척들인 미자, 비간, 기자가 등장
c) 주나라의 등장(기원전 1046 – 기원전 256년)
- 은나라로부터 교훈
- 조상신을 모신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특별한 부족의 조상신보다 보편적인 힘의 존재 를 내세움. 조상신 상제보다 더 높은 하느님(天)을 설정함. 즉 은나라의 상제가 주나라의 천으로 대체되었고 왕을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라고 불렀습니다.
- 농경사회, 청동기 사회
- 봉건제도 탄생: 거대한 중원을 장악한 주나라의 첫 번째 사명은 넓은 지역, 다양한 부족들을 하나로 다스릴 효과적인 통치 방법을 고안하는 것. 주나라 왕은 거대한 영토를 친족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제후로 봉하고 그
들로부터 권위와 복종을 얻습니다.
- 주의 건국 초기 무(武) 임금은 은(殷)을 정복한 후 모두 71개의 제후국을 세우고 이 중 55개국에 자신의 형제와 동성 씨족을 제후로 봉하여 ’혈연적 유대(親親)를 지키게 하고 ‘예’를 준수하게 함으로써 통치 질서를 굳건히하고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대신 자신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게 함.
- 종법 제도의 탄생(세습적인 지배 체제로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형성됨)
- 주나라가 1000년도 못 되어 망한 이유 – 대를 거듭할수록 피가 연해짐
- 농기구 사용 이후 수학량이 크게 늘었고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로 지역의 경제 규모 가 커지고 토지, 기후, 인구, 정책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생산력과 사회 규모에서 나라마다 상당한 격차가 발생하자, 이 차이는 곧 갈등과 혼란으로 빠지고 남이 가진 것을 빼앗는 상황이 전개된다.
다시 한번 주나라의 특징 반복(주나라의 혼란의 원인으로 춘추 시대를 시작으로 해서 제자백가들의 출현, 즉 중국 사상적 기틀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중요 하겠지요.)
1) 조상신을 모신 은나라를 꺾고 특별한 부족의 조상신보다 보편적인 힘의 존재를 내세우 는 주나라가 등장합니다. 주나라는 상제보다 더 높은 하늘(天)을 설정합니다. 즉 주 왕조는 주변 부족들을 다스릴 힘과 권위의 정당성을 하늘에서 찾았는데 이는 은나라의 ‘상제’가 주 나라에서는 천(天)으로 바뀌게 되며 주나라는 왕을 하늘의 아들, 일명 천자(天子)라고 부릅니다.
2) 주나라 때는 농경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하늘은 생명력의 근원으로 만물의 생성과 변화는 하늘에 달려 있고 농사는 햇빛과 비, 바람과 같이 하늘과 관련된 자연현상과 깊 은 관계가 있다는 인식을 해 하늘을 두려워하고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주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은 은나라 왕조가 타락했기 때문이라 고 믿었는데, 즉 하늘이 부도덕한 정권을 심판하고 새로운 왕조인 주나라를 세운 것은 천명(天命)의식으로 인식합니다. 이는 주나라가 중원을 통치할 정당성을 하늘로부터 받 았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4) 봉건제도의 탄생
주나라는 거대한 중원을 장악한 첫 번째 나라입니다. 넓은 중원을 통치하기 위해, 다양 한 부족들을 하나로 다스릴 효과적인 통치방법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주 나라의 왕은 거대한 영토를 친족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제후로 봉하고 그 지역을 다스 리게 합니다. 그 조건으로 왕은 제후들로부터 복종의 서약을 받는데 이것이 주 왕실의 봉건제도입니다.
5) 종법 제도의 탄생
왕실로부터 영토를 받은 각 제후들은 천자와 마찬가지로 세습적인 지배 체제에 돌입해 통치의 권리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고 차남들보다는 장자가 더 우선권을 가지는, 가족 간의 관계와 질서를 명확히 하는 종법제도(宗法制度)가 발달 됩니다. 이 종법제도 는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정치 구조이므로 위로 올라갈수록 강한 권위를 갖 는 수직적 구조이며 가족 구성원은 각기 태어나는 위치에 따라 애초부터 불평등한 관계 에 놓이게 되는 상하 위계의 강한 권위 의식이 만들어지고 복종과 지배의 논리가 만연하 게 됩니다.
6) 주나라의 혼란
주나라 시대는 농기구를 사용했고 이에 따라 수확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수공업이나 상업 의 발달로 지역의 경제 규모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토지, 기후, 인구, 정책등 다 양한 요인으로 인해 생산력과 사회 규모에서 나라마다 상당한 격차가 발생하자 이 차이 는 곧 갈등과 혼란으로 나타나 남의 나라가 가진 것을 빼앗는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4. 춘추 시대의 도래(기원전 722년~기원전 481년)
주왕(周王)과 제후들 사이에 적장자 상속 원칙이 약화되며 봉건 질서가 붕괴되며 주왕실의 왕권이 약화되고 제후 간 혈연적 연대가 쇠퇴하며 사회 경제적 기초의 변화에 따른 제후국 간의 멸국겸병(滅國兼倂)으로 ‘예’가 붕괴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제후국 간의 관계 변화는 그대로 주 나라 정치 구조에도 반영되어 공실은 쇠퇴하고 사가가 대두되며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세자가 권력을 찬탈하는 무도한 행위가 빈번히 발생하는데 이 춘추 시기 241년 동안 모두 36명의 군주가 신하에게 피살되고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공자>
5. 공자의 등장
공자는 바로 이 춘추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공자(기원전 551년~479년)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려서부터 예(禮)에 밝았다고 합니다.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고,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를 지냈는데 잘 다스렸는데 이에 노나라의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지금의 법무부 장관격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의 벼슬까지 제수받아 중앙정계에 들어온 후 노나라의 세 권세가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업을 맡았으나 끝내 좌절되어 실각합니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노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이후 여러 제자를 이끌고 13년 동안 중국 천하를 방랑하며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았지만 이 역시 좌절되고 맙니다.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한 공자는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았으나 역시 등용되지는 못하였고 이후 제자 양성과 고문헌 정리에 힘쓰다 세상을 떠납니다.
공자는 살아생전 천하에 도가 사라진 상황, 예가 무너지고 악이 붕괴된 상황으로 춘추 말기 공자는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1) 공자의 사회 인식
a) 주 왕실과 제후 간의 관계
당시의 제후들이 주왕의 권한을 무시한 채 각자의 직분을 뛰어넘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 다.
b) 제후와 제후 간의 관계
강대국의 제후들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을 통해 약소국의 주권을 유린하고 있다.
c) 군주와 기층민과의 관계
군주들이 전쟁 물자 조달과 사사로운 부귀를 목적으로 징병, 부역, 공납을 통하여 참혹 할 정도로 착취를 일삼고 있다.
고 지적하며 공자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2) 시대의 혼돈을 해결하기 위한 제안
a) 주 왕실과 제후 간
정명(正名)과 극기복례(克己復禮)
정명이란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으로 사회 각 계층이 극기복례 즉 이기심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여 각자의 신분과 직책에 맞게 권한을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할 때 사회는 안정을 이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b) 제후들 간의 시정책
약육강식의 쟁탈전을 벌이는 제후들에게 공자는 ‘인(仁)’과 서(恕)‘를 제시하며 인은 사 랑, 서는 용기, 공손함, 관대함, 신의, 은혜로움, 경건함, 진실함 등을 예로 들며 각국의 제후들이 인을 실현하여 덕을 갖춘 인격자가 될 때 제후국 상호 간의 침탈 행위는 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때 ’서‘는 어원상 ’같은(如) 마음(心)에서 기원하는 역 지사지(易地思之)의 가능성을 엽니다.
c) 군주의 기층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
군주는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배풀기를 권장하며 이 인정은 기층민의 생존에 필요한 최 소한의 여건을 보장해 주는 복지주의적 통치관을 설파합니다. 공자는 “널리 대중을 사랑 하고 사람들에게 친하게 대하라.”라고 하며 인정의 근거를 ‘사랑’이라는 이타적 감정에 두기도 하지만 때로 “군주가 너그러워야 많은 노동력을 얻을 수 있고, 군주가 신의가 있 어야만 기층민도 그를 신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인정’의 근거를 군주와 기층민 상 호간의 이익 보장이라는 ‘호혜성의 원칙’에서 도출합니다.
3) 공자의 인(仁)과 예(禮)
a) 인(仁)
번지(樊遲)가 인(仁)을 물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아끼는 것이다"
번지가 다시 지(知)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아는 것이다"
원문: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논어』안연편 22장
논어에 인(仁)이란 글자는 총 109번 등장하지만, 정작 A=B와 같은 식으로 명확히 정의 를 하는 부분은 발견되지 않고, 위 문구가 그나마 가장 그러한 형식에 가까워서 자주 인 용되는 구절입니다.
공자는 ‘인’을 ‘예’를 실행하기 위한 내면적 바탕이라 생각했고 ‘인’은 무너져 내리는 ‘예’ 를 회복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며 인(仁)은 용기(勇), 공손함(恭), 관대함(寬), 신의(信), 기민함(敏), 은혜로움(惠), 경건함(敬), 진실함(忠), 남을 나같이 대함(恕) 등의 덕목을 총칭하는 걸로 해석됩니다.
춘추 말기, 제후들의 사욕 추구와 잔혹함으로 인해 수많은 기층민들의 폭동이 일어났던 현실에 대해 공자는 지도자의 도덕적 감화력으로 백성을 끌어 모으고 교화시켜 안정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이란 자기가 서고자 한다면 남도 세워 주고 자기가 도달하고자 한다면 남도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남을 자신처럼 여기는 도덕적 관점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서(恕)의 관점,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은 약육강식의 쟁탈을 통해 더 많 은 영토와 패권을 차지하려는 당시의 탐욕스러운 제후들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도덕적 처 방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사부(사부)의 축적을 위하여 기층민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착취와 수탈을 일삼는 폭군들을 향한 도덕적 충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공자의 인(仁)의 사상과 공자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인 묵자의 사상인 겸애(兼愛)을 잠깐 비교해 보겠습니다.
묵자는 전국 시대의 사회적 발전과 변화 자연 과학적 성취를 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자각한 하층민의 이해를 반영하는 다양한 사상의 종합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요. 혼 란의 시대에 대해 유가는 천하의 도가 사라지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진 단하면서 도덕성의 회복을 주장한다고 했지만 묵자는 다른 각도에서 사회의 문제를 진단 합니다. 사회가 혼란해진 것은 함께 이익을 나누려 하지 않고 제 이익만 추구하는 데서 기인한다며 공자의 인과 같이 타인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주장하고 이것을 겸애라는 사상으로 설파하는데요. 공자의 사랑은 친친(親親)의 성격을 띠어 자기 부모, 자기 형제 에 대한 사랑을 그 출발점으로 합니다. 즉 공자가 주장하는 인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기 초하면서도 가족으로부터 점차 사회로 확대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기도 하 지만 한편으로는 위계적일 의무일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바로 묵자가 유가 식의 사랑을 차별적 사랑이라며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요. 묵자의 겸애는 유가의 배타적인 별애(別愛)는 서열과 위계에 갇힌 폐쇄적인 사랑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묵 자는 이와 다르게 사람들이 네 것 내 것 구별 없이 서로 사랑해야 사회적 혼란이 가라앉 을 것이라 말하며 혈연관계에 묶이지 않는 넓은 범위로 사회적 책임을 확대해야만 사회 적 혼란이 종식될 것이라는 좀 비약을 하자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개념을 읽을 수도 있는, 또는 공리주의적 성격을 지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묵자의 사상은 다 음으로 넘기겠습니다.
b) ‘예(禮)’는 사회의 외재적 규범으로써 내면 도덕의 표현되는 형식적 기제를 말합니다.
임방(林放)이 예(禮)의 본질을 물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질문이 훌륭하구나!
예(禮)는 사치스러운 것보다 차라리 검소해야 되며,
장례는 평온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젖어야 된다.“
원문: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논어』팔일편 4장
예(禮)란, 존중의 뜻을 표현하여 양보하는 행동양식을 말하는 것으로, 그 사회가 서로 합의한 형식을 뜻하며 검소한 것을 지향하며, 장례 같은 경우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 니라 드러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는데 무엇보다도 이러한 예(禮)의 형식은 반드시 간결해 야 되지 복잡해서는 안된다며 결국 예절이란, 존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위의 인과 예는 공자의 핵심 사상으로 통치자의 자질로 요청되는 덕성, 즉 인의 회복을 주장하며 이상적 사회규범으로써의 ‘예’로의 복귀를 외칩니다.
4) 호학(好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에게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원문: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논어』위정편 17장
공자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점 중 하나는 호학(好學)인데 배운다는 것은 '묻는 것'이고 이것이 학문(學問)의 출발점이며 무엇을 물어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人)의 상태를 물어 보는 것으로 남에게 끊임없이 물어봄으로써, 남을 더 이해하고 남에 대해서 배워 나가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仁)의 성격이겠지요. 묻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묻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아낄 수 없기 때문에 인(仁)에 대해 물었을 때 공 자는 다른 사람을 아끼는 것이라고 말했고, 지(知)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는 다른 사 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5) 인성론(人性論)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사람의 본성(性)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
원문: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논어』양화편 2장
공자는 타고날 때부터 저절로 알아서 선(善)을 행하면 가장 최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배운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6) 중용(中庸)
자공이 물었다. "자장(師)과 자하(商) 중에 누가 어집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
자공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자장이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원문: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然則師愈與 子曰過猶不及.
『논어』선진편 15장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닌, 딱 알맞은 적절한 정도, 자신의 중심은 꽉 잡으면서도, 변하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하는 것이 중용(中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 려서 적절하게 대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꾸준히 정도(正道)를 펼쳐 나가라는 것이 중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맹자>
6. 맹자의 등장
맹가(孟軻) 주요 저서로는『맹자』가 있습니다. 기원전 372년~289년, 공자가 사망한 후 백 여년이 지난 후 산둥성 쩌우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가정에서 자랍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 之敎:학문과 같이 오랜 시간 이루어야 하는 바를 중도에 폐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뜻이다.)로 유명한 맹가의 어머니는 맹가에게 공자의 고향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을 육경을 배우도록 합니다.
장성한 맹가는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의 묵자와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며 공자의 유가 사상을 확립합니다. 불혹 이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며 천하를 유력하는데 법가와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은퇴하여 육순 이후의 삶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1) 맹자의 시대적 배경
맹자가 살았던 전국 시대 또한 천하 질서의 중심이었던 주나라가 붕괴하기 직전으로 사 회적 생산력이 확대되면서 이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그치지 않았던 전국 시대입니다.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으로도 분열과 다양성의 시대, 역사적 으로는 자연스러운 분화와 발전의 과정이며 점차 분화하고 변화하는 사회를 이끌기 위해 새로운 지식과 이념이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시대적인 상황도 춘추 시대와 달랐는데 소 규모의 귀족 중심의 전차전 방식이었던 전쟁의 양상이 대규모 농민 중심의 보병전으로 바뀌면서 국가 단위의 총력전 양상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이 변화합니다. 이런 큰 비용 과 희생을 치르면서 단순히 제후 세습이나 하는 자잘한 수확으로는 전쟁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고, 마침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나라의 눈치 볼 일도 없어지면서, 결국 어느 한 국가를 멸망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국가의 사활을 건 전쟁이 200년 내내 벌어지 는데 결국 국가들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과거 봉건질서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었던 주 변 소국을 합병해 나갔으며, 이런 치열한 싸움에서 사실상 연(燕)나라, 조(趙)나라, 제 (齊)나라, 위(魏), 한(韓)나라, 초(楚)나라, 진(秦)나라 7개국이 살아남아 역사는 이들을 전국 칠웅이라 부릅니다. 이 시기 역시 춘추 시대와 마찬가지로 온갖 권모술수와 피 튀기는 전 쟁이 난무하는 군웅할거의 시대로 수많은 인재들과 인간 말종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인간군 상과 시대의 혼란상을 선보이던 난세였습니다. 이와 부응하여 수많은 학파가 출현하여 자 신의 사상을 퍼뜨리며 난국을 극복하고자 했고 우리는 이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 릅니다.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한 유가 사상뿐만 아니라, 도가, 묵가, 법가, 농가, 종 횡가들이 서로 경쟁합니다.
2) 맹자의 사상
a) 인정(仁政)과 왕도(王道)정치
맹자 철학의 중요 축은 인정이며 인정에 의한 왕도 정치를 주장하는데 왕은 인의를 통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왕도 정치는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나무며 백성 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입니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이 다음이며 임금 이 가장 가볍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맹자』진심 하
또한 인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곧 사회 구성원 사이에도 도덕적 책임 관계가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꾸준한 생업(恒産)도 없이 꾸준한 마음(恒心)을 가지는 것은 오직 선비라야 가능합니다.
만약 백성들에게 꾸준한 생업이 없다면, 이로 인하여 꾸준한 마음도 없습니다.
진실로 꾸준한 마음이 없다면 방탕, 편벽, 사악, 사치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죄에 빠지고 나서야 벌을 주게 된다면 이는 백성들을 죄로 유도한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 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죄로 유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명군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어서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충분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식을 양육하기에 충분하여, 풍년에는 늘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죽음 을 면하게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선(善)으로 몰고 가니, 백성들이 따르는 것을 가벼이 여 깁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기가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 식을 양육하기에 부족해서, 풍년에도 늘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는 다만 죽음에서 구제하는 데에도 넉넉치 못할까봐 두려운데, 어찌 예의로 다스릴 겨를이 나 있겠습니까?
왕께서 그것을 행하고자 한다면, 왜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다섯 이랑의 집에서 뽕나무를 심는다면, 오십살 된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을 것이고
닭이나 개, 돼지와 같은 가축이 그 (번식하는) 때를 잃지 않는다면, 칠십살 된 자가 고 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 백 이랑의 밭에서 그 (농사짓는) 시기를 뺏기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의 가족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고 학교의 가르침으로 삼가고 효제의 의로움 을 펼친다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길에서 짐을 이거나 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젊은 백성들이 굶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했던 사람은 아직껏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맹자』 양혜왕 상(上)
왕도정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생활을 우선시하는 정 책을 먼저 펼쳐야 됨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일단 해결되어야 도덕(仁義) 으로 인한 왕도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다시 말하자면 도덕 정치 이전에 최소 한 먹고 사는 문제와 복지를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b) 역성혁명
맹자는 역성혁명을 인정합니다만 권력이 부패하고 폭압적일 때만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 장합니다. 즉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권력은 심판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 니다. 오로지 도덕적 인물 만이 부도덕한 정권을 심판하고 왕조를 교체할 수 있는 것이 지요.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탕(湯)은 걸(桀)을 몰아내고 무왕은 주(紂)를 쳐내었다고 하던데 이 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이 옳은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해롭다'라 말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인하다'라 말하니, 잔 인하고 해로운 사람은 '일개 보통사람(一夫)'에 불과합니다. '일개 보통사람에 불과한 주 (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습 니다.” 『맹자』 양혜왕장구 하(下)
위 대화는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맹 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 엎어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 은 도둑놈이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 과 함께 하라"는 것이었고 특히 천(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 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이 천명이 바뀌는(革)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 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습니다. 그 시대에 맹자의 민본 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민 (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습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었고 이후 이러한 맹자의 민본주의는
동아시아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한 부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c) 경제 문제 제안
맹자는 공자와 달리 경제적 안정을 중시했습니다. 먹고살 만해야 인의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백성들의 생존권 보장을 올바른 정치의 첫 단계 로 제안합니다. 맹자는 도한 정전제(井田制)를 통해 토지 제도를 정비하고 조세, 인재 등용, 상인들에 대한 세금, 국경의 통해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군주들에게 권고합 니다.
d) 교육 제안
위의 경제 제도가 안정한 이후 다음 단계는 올바른 교육의 시행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곳곳에 학교를 설치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 교육이 절실함을 설파합니다.
3) 맹자의 본성론: 성선설
맹자는 여타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을 도덕성으로 봅니다. 도덕 성은 인간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가장 본질적인 특성인데 그에게 도덕성의 실현 은 인간만이 가능한, 인간이 마땅히 걸어 나가야 할 길이라고 합니다. 즉 맹자는 일관되 게 인간의 내부에 선천적으로 도덕적 성향(四端: 仁義禮智)가 내재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데 이는 인간 본래의 선한 마음의 싹을 가지고 있고 이 선학 싹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근거로 제시됩니다.
* 공자와 대비되는 맹자의 性善論의 특징
a) 맹자는 도덕성을 내면화하는데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선하며 인의예지의 도덕성은 외 부의 목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안에 이미 존재하는 도덕성 지향성이지만 반면 공자는 “인(仁)은 멀리 있는가? 내가 인하고자 하면 인에 당장 이르는 것이다.”『논어』 술이편
공자에게 도덕은 내면화된 도덕적 실마리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 결단과 실천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b) 이러한 맹자의 성선론의 긍정적 의미로는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타 고난 신분이나 위치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중심에 설 수 있 다는 것을 함축하는데요. 선택받은 소수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전체에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c) 부정적 함축으로는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만일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은 왜 악을 저지르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맹자에 따르 면 외적 환경에 인간이 초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 이는 고자의 본성론과 대비되는데요.
고자는 도덕적 성향이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고자는 인간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인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 덕목은 사 람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 외적인 학습에 의해 ‘후천적’으로 익힌 것 이라는 것입니다. 고자는 또한 사람이 타고난 것은 도덕적인 성향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본성’ 뿐이고 도덕적 성품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학습된 것으로 물이 트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듯 사람의 성품도 어떤 조건에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 진다는 것입니다. 고자는 인간이 타고난 생물학적 본성에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과 환경이 더해져 개인적 인 성품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 순자의 성악설과도 대비됩니다.
반면에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도덕 이성이 배제된 자연적인 것으로 봄과 아울러 인간의 질 높은 문화생활을 위해 본성의 야만성을 극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 인간의 본성을 극 복하지 않을 경우 사회 질서가 더욱 파괴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순자가 본성 자체를 바 로 비경험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본능으로 상정해 순자는 악의 기 원을 경험적인 세계에 두었던 것으로 순자는 악의 기원을 이성적 교육이 결여된 상태에 서 나타나는 예의 없는 무질서로 보았습니다. 순자는 인간이 예의가 없으면 어지러워지 고 예의를 알지 못하면 어그러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순자는 선과 악의 기준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 불변의 고정적인 상태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경험의 상태로 설정하며 생물학적인 본성 속에는 사회를 혼란시킬 수 있는 요소가 있지만. 인간은 그러한 본성을 따르지 않고 인위적인 노력을 통하여 사회에 질서 를 형성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에 의해 확립된 사회 질서 를 선으로 보았으며 도를 인식하는 방법으로 허(虛:심을 청소하고 비우는 것), 일(壹: 집 중하는 것), 정(靜:고요하게 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4) 사단(四端)
맹자는 선한 본성의 싹을 네 가지 도덕적인 실마리로 세분화해서 이 네 가지 마음 속 선한 싹을 사단이라고 하며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도덕적 실마리로 해석하는데 악 또 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이 가려진 것이라고 해석하며 천하의 악당이라도 그 본바 탕은 요순처럼 선하다고 설파합니다.
a) 측은지심(惻隱之心): 다른 사람의 상황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마음(仁)
b)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과 수치를 아는 마음(義)
c) 사양지심(辭讓之心): 예의와 존경의 마음(禮)
d)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智)
5) 호연지기(浩然之氣)
맹자는 자기의 맑고 깨끗한 기를 길러 자신이 타고난 인의예지의 도덕적 단초를 확장시 키라고 말합니다. 도덕적 단초는 가만히 내버려둬서는 안 되지만 억지로 조장(助長) 해 서도 안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맹자는 부동심(不動心)으로 외부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주체적인 마음을 가지고 호연지기를 기를 것을 권합니다. 호연지기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해 있는 지극히 크고 강한 기운을 말하는데 이러한 호연지기가 의로움(義)와 결합되 는 것이 바로 도덕적 경지, 곧 인의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경지에 이르면 외부의 물질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으며 이는 관념적 초월 상태 가 아니라 도덕적 수양과 실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실천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6) 내 안에 모든 이치가 있다.
맹자에 따르면 하늘(天)은 도덕적 가치의 진정한 원천인데 그의 하늘은 만물의 근원이고 천명을 내리는 존재지만 서양의 종교적인 신처럼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즉 마음(心) 과 본성(性)과 하늘(天)이 하나인데 내 밖의 만물도 실은 나와 근원이 같고 따라서 인간 은 그 누구도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우주 전 체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내재적 본성론의 의의는 인간은 외부의 규범이나 법률을 통해 억지로 강제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율 적으로 입법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안의 본성이 향하는 방향대로만 실천하면 된다는 의미를 도출할 수 있습니 다.
7. 맹자 이후의 유가 사상
살펴본 공자와 맹자의 철학은 세상이 어지러웠던 춘추 전국 시대에는 그리 인기가 없어 송나라 이전까지는 잘 조명받지 못했습니다.
전국 시대 이후 이들의 철학은 당시 유력하게 대두되던 법가와 충돌합니다. 전국 시대에는 주의 질서가 파괴되고 신분제가 하극상에 의해 나날이 뒤집어지고 한편으로는 법가의 변법(變法)에 의해 새로운 제도가 들어섭니다. 변법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의 전환입니다. 이는 제후, 경, 대부 등의 중간 권력 계층이 사라지고 일원적 권력의 전국 직할 통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법가는 세습적 봉건 제후들을 완전히 소거시키고 그 자리에 철저히 법(法)에 의거해 국가 행정을 처리할 일종의 행정 관료를 채워 넣은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 결과 신권은 하락하고 군권은 급속히 상승하지만 중국은 이를 통해 제국의 시대로 나아가는데 지식인 계층의 역할을 강조하던 유가 입장에서 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갔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秦)이 등장하며 유학자들의 책들은 분서갱유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지나친 제국 질서의 구축과 광대한 영토를 법가의 철학으로 통치하려던 진이 멸망하고 한(漢)이 들어서자 한의 통치자들은 진의 멸망의 원인을 지나친 무력 통치에서 찾으며 문치를 통한 새로운 기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한 무제(기원전 156~87)에 이르러 백가를 내몰고 유가만을 높이는 시대가 개막합니다.
이 후의 유가의 흐름은 다음 번으로...
8. 공자와 맹자에 대한 현대적 수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살펴본 공자와 맹자로 대변되는 유가 사상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취해야 할 어떤 덕목이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폐기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 공맹 사상의 현대적 의의
a) 윤리와 도덕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여전히 윤리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현 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윤리적 원칙은 개인 및 집단 행동의 근간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b) 지도자와 리더십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지도자와 리더십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리더십, 특히 윤리적 이고 효율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현대 조직과 사회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c) 교육 철학
공자와 맹자는 교육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교육 철학은 현 대 교육 체제에서도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d) 사회적 안정과 조화
그들의 사상은 사회적 안정과 조화를 중시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가치는 사회적 통합과 국제적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 인간관계와 대인관계: 공자와 맹자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와 중요성에 관한 통찰력을 제 공합니다. 그들의 사상은 가족, 친구, 동료 및 사회 전반에 걸친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 합니다.
2) 공, 맹 사상에 대한 현대의 비판
a) 젠더 평등 문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대부분 남성 중심입니다. 그들의 사상에서 여성에 대한 역할은 제한 적이며, 젠더 평등에 대한 관점이 부족합니다.
b) 사회적 변화 대응의 한계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고대 중국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기반으로 합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보다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c) 개인의 자유와 권리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종족, 가족, 사회 질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종족이나 사회에 대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d) 정부와 권력에 대한 태도
공자와 맹자는 중앙집권적이고 전통적인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권리 와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e) 문화적 상대성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뿌리를 둔 것으로, 다른 문화나 사회에 적용 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동양 철학의 한계 중 하나로 지적됩니 다.
이상과 같이 공자와 맹자 사상의 현대적 의의와 비판의 이유를 살폈는데요. 또 한편으로는 저의 관점으로 본 단견을 말씀드리자면 유교는 지상의 정치와 세속 공동체의 가치에 치우쳐 종교적 인간의 영혼과 몸의 활력을 다시 배제하지 않았나, 비판해 봅니다.
또한 앞서 묵자의 두루두루 사랑하라는 겸애(兼愛)사상과 비교했을 때 말씀드린 바처럼 친친(親親)의 사랑을 강조하는 배타적인 유가의 별애(別愛)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유가의 인이든, 묵자의 겸애든 그 원뜻은 자신 이외의 타인을 향한 사랑의 추구임을 또한 인정해야 겠지만요.
9. 질문과 토론
이제 여러분은 이상과 같은 발표를 통해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 대한 나름의 개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깊고 넓은 공부를 통해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공부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언뜻 떠오르는 생각들 또한 있을 것입니다.
(발표를 듣고 공자 혹은 맹자에 대한 자신의 소견 말하며 나누기)
토론 주제 (다른 주제들을 각자 생각해 와서 나누길)
1) 일상에 스며든 공, 맹의 도가 오랜 관습이 되어 우리의 삶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 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기.
2) 내 삶에서 공, 맹의 도를 가져가 가장 실천하고 싶은 사상이 있다면? 혹은 공, 맹의 사상 중 폐기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3) ’맹모단기지교‘ 라는 말의 일화를 보고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기,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맹자의 어머니가 베클의 실을 끊어 맹자를 훈계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말이다. 학문과 같이 오랜 시간 이루어야 하는 바를 중두에 폐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뜻이다. 이는 맹자의 어머니가 가난에 못 이겨 거처를 옮기다가 맹자의 어린 시절의 교육을 위해 끝내는 굶주림을 감수하고서라도 서당 근처로 거처를 세 번이나 옮겼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일화와 함께 엮어볼 수 있다.
이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거처를 세 번이나 옮긴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문을 갈고 닦을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맹자는 어느덧 나이를 먹고 집을 떠나 학문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맹자는 오래 집을 떠나있다 기별도 없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맹자는 문밖에서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러 보았으나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의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줄 것 같건만 맹자의 어머니는 반응이 없었다. 맹자가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때마침 어머니는 베를 짜고 있었지만 돌아온 맹자를 보고도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무덤덤하게 앉아서 맹자에게 물었다.
“네가 기별도 없이 돌아오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러자 맹자가 대답하기를
“어머님을 잠시만이라도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이에 어머니가 되묻기를
“그래, 학문은 얼만큼 갈고 닦았느냐?”
맹자가 또 대답하기를
“아직 다 마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틀의 날실을 갑자기 잘라 버렸다. 맹자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
“아니, 베틀의 실은 왜 갑자기 잘라 버리십니까?”
하고 묻자 어머니는 맹자를 꾸짖었다.
“네가 학문을 중도에 폐하고 돌아온 것은 내가 지금 짜고 있던 이 베의 실을 끊은 것과 같느니라.”
맹자는 이를 보고는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가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공자에 버금가는 훌륭한 유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맹자의 어머니였더라면, 혹은 현대의 내가 맹자였더라면 나의 어머니는 어떠하기를 바라는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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