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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1.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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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

개요

2.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의 주변 상황과 시민의식

3. 소크라테스의 생애

1) 독특한 삶의 방식

2) 소크라테스의 소명 의식

3) 철학의 순교자

4.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1) 산파술에 대한 짧은 시나리오

2) 산파술식 문답의 과정

3) 현대에 적용

5. 소크라테스를 향한 고발들

1) 소크라테스의 기소 항목들

2) 기소 항목들에 대한 분석

6.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최후

1) 소크라테스의 재판: 소크라테스의 변명

2) 소크라테스의 감옥 생활: 크리톤

3) 소크라테스의 최후: 파이돈

7. 소크라테스의 Swan Song

1) 어떻게 영혼을 돌보아야 할까요?

8. 소크라테스의 후예들

1) 크세노폰과 플라톤

2) 소크라테스식 대화의 저자들

3)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4) 아이스키네스

5) 파이돈(Phaidon)

6)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

7)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9.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

1) 철학을 인간에게로

2) 철학 하는 것 자체를 자극

3) 노장(老莊)사상과의 연계

10. 토론하기

 

참고 문헌:

1. 1학년 2학기 교수님의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2.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나남출판사

3. 서양고대철학1도서출판길

4. 교수님이 주신 아고라의 목소리

5. 나무 위키 및 다음 지도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

 

1. 개요

우리는 지난 학기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을 좀 배웠었죠. 그때 교수님께서는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언급했다고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맨 처음 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내부 기둥에 새겨져 있는 글귀라는 언급을 하셨는데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그의 사형 판결 원인 제공자 중 하나인 폭정 참주 크리티아스는,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이 말의 참뜻 운운하며 소크라테스를 역으로 가르치려 들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플라톤의 대화편 카르미데스에서 묘사되어 있다고 해요.

 

또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라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며 그는 악법도 법이어서 사형집행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의 친구였던 크리톤에게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가 그의 죽음을 빚진 닭 한마리 만큼의 보다 가볍게 여겼으며 심지어 죽음은 삶이라는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니 감사의 제사를 바쳐라. 고 언급했을 만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하죠.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왜 죽음을 기쁘게 여겼을까? 라는 의문을 풀어줄 열쇠를 제공하는데요.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영혼만 남는 사건이며 인간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며 이 영혼이 본질적인 부분이고 몸은 우연에 불과하며 이 우연적인 부분들의 소멸이 인간의 소멸을 의미하지도 않는데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으므로 죽음은 감옥에 갇혀있던 자가 풀려나듯 몸으로부터 영혼이 풀려나서 깨끗해지는 사건이므로 죽음은 좋은 것이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인식했다고 하죠.

 

우리는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의 스완송, 그의 죽음 직전 마지막 말이었다는 너 자신을 잘 돌보아라.”라 했던, 즉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명언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겠어요. 이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를 배경으로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활동했는지 그의 생애를 시작해서 나아가볼까요.

 

2.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의 주변 상황과 시민의식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전쟁과 기원전 460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건과 인물은 모두 시대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배웠죠.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들이 모두 어지러웠던 당시를 배경으로 등장해, 국가 백성을 선도하고자 자신들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가 오늘 언급할 소크라테스 역시 시대와 역사적 배경 속에 탄생한 인물이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활동 당시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우리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공부를 했을 때 소피스트들이 활동했을 당시의 그리스 아테네의 상황을 일갈할 수 있었지요. 소크라테스 역시 소피스트들이 주로 활동했던 기원전 400년 경의 인물이잖아요.

그 즈음의 아테네는 대외적으로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델로스 동맹에 의해 그리스와 에게해의 부와 패권을 차지하여 제국으로 성장할 때이고,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전히 만개할 때였지요.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라는 현명한 정치가의 지도 아래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면서 수많은 지혜로운 이들이 아테네로 모여들었으며 아테네 시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토론을 즐겼고, 그 결과가 국가의 정책과 여러 재판에 직접 영향을 미치곤 했으며 따라서 아테네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조리를 갖추어 설득력 있게 말하는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 시대상에 맞춰 가장 주목을 받았던 사람들이 지난 시간에 배웠던 이른바 소피스트(Sophist)’들이었죠.

 

소피스트는 재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나 연설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쳤으며, 때에 따라서는 법정에 직접 서기도 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이들에게는 진리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었고 돈을 주는 쪽에 따라 어느 경우에는 갑이, 어느 경우에는 을의 입장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고 소피스트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란 아예 없거나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다는 것이고 당시 소크라테스 역시 여느 젊은이들처럼, 법정과 시장 거리를 누비며 소피스트들의 논변을 듣고 배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죠. 해서 그는 자연철학자인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에게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아테네의 부흥과 팽창은 주변국의 저항을 가져왔고, 특히 민주주의 제도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던 아테네의 라이벌인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아테네의 팽창을 견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때였죠.

 

그런 위태위태한 상황이 결국 전쟁으로 터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30여 년간 벌어진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인데요. 기원전(BC) 431BC 404년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을 말하는데요.

 

펠로폰네소스 전쟁 결과 아테네는 패전하고 고대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아테네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민주주의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해요. 이 과정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고 당시의 아테네 시민들이었던 거죠.

 

당시 아테네인들은 대단히 물질만능주의적이었고,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보다는 육체적인 미를 추구했으며 심지어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사람은 심성도 아름답고 지적 능력도 훌륭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며 현실의 물질적 생활에 만족했는데 당시 아테네는 주변 약소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필요하면 점령하여 점령지 시민을 노예로 만들어 충분히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이러한 상황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소위 궤변론자들이라고 여겼던 소피스트들이 활동을 목격했고 소피스트들이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편견을 가지고 되었던 시대적 배경하에서 소크라테스 역시 활동하고 있었네요.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라는 외모가 정말로 볼품없는, 거친 피부에 개구리같이 툭 튀어나온 눈, 두꺼운 입술에 주저 않은 코, 산같이 솟은 배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 물질적 생활에 안주하지 말고, 정신적, 지적, 영혼의 삶을 깨닫고 살라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설득하고 다녔으며, 심지어 아테네인들의 눈에 이상하고 이질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테네가 아직 풍요롭고 패권을 잃지 않았을 때는 그런 소크라테스를 용납할 수 있었겠지만, 전쟁에서 패하여 속지들을 하나씩 잃어가고 스파르타 군대에 아테네가 점령당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테네인들은 점점 불안하고 신경질적이 되었고, 화풀이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요. 이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소피스트들이었고 아테네 대중들은 소크라테스 또한 소피스트 중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죠.

 

 

3. 소크라테스의 생애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행적과 가르침에 대해선 우리는 주로 그와 동시대인들이나 제자들이 남긴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요.

 

1)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서 비꼬았던 작품 구름을 썼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의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8 기원전 380)와 같이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이 언급한 글.

2) 플라톤과 크세노폰과 같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스승에 관하여 혹은 스승을 화자로 등장 시켜 쓴 글들.

3)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후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평가하며 기술한 글.

 

그러나 이렇게 수집된 증언들은 주관적이고 때로는 자의적이며 증언들 간에도 서로 상충된 내용들이 담겨 있어서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소크라테스에 관한 신뢰할 만한 증거인지를 가려내기란 어렵지만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아마도 제자 플라톤이 남긴 저술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지난 학기에서 배웠던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 태어나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던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생존했던 인물로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산파라고 전해져요. 그는 크산티페라는 여인과 결혼해 세 명의 자식을 두었고 크산티페가 소문난 악처였다는 혹은 그가 아르켈라오스의 동성애인이었다는 낭설이 전해지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한편 그는 만물의 아르케를 씨앗들이라고 했던 아낙사고라스나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아테네의 음악학자이며 플라톤의 라케스, 국가등에 등장하는 다몬(Domon)의 제자였으며 스승이었던 아낙사고라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에는 위에 언급한 자연학자인 아르켈라오스의 제자가 되기도 했답니다.

 

한편 기원전 500년에서 460년 경 아테네의 도기화 장인이었던 두리스라는 인물은 소크라테스가 노예로서 석조 작업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옷을 걸친 카리스 여신들 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수사에도 유능했는데 크세노폰의 말에 따르면 30인의 참주(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전쟁에 패하고 스파르타에 의해 세워진 정권으로 30명이 전권을 휘두리는 과두정체였는데 이들의 포악한 정치 때문에 30인 참주정이라고 불림)들은 그가 말의 기술을 가르치지 못하게 금지했다고도 하죠.

 

소크라테스는 참전(포테이다이 전투 기원전 431 430, 델리온 전투 424, 암피폴리스 전투 422)을 의해 도시를 떠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고 어떤 세계사적 사건의 중심인물도 아니었고 사회, 정치적인 영역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도 않았지만 사상적인 면에서조차도 어떤 획기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지요.

 

소크라테스 하면 우린 우선 산파술이라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이 떠오르겠지만 그렇다고 이 사유체계를 그가 직접 확립한 것도 아니에요. 그가 직접 저작을 저술한 것도 없고, 우리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나 주변 인물들의 저작에 의지해 그의 것들을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럼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도 철학사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찰해 볼까요?

 

1) 독특한 삶의 방식:

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앎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처 음으로 가치와 도덕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확립했죠. 그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에 관해 앎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 위의 산파술을 사용하며 그들의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을 드러내곤 했는데요.

2) 소크라테스의 소명 의식: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평가나 비난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어요. 오히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앎을 열망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이 자기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이러한 생각은 진정한 행복이 외모나 재산,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혼을 보살피는 데서 비롯될 뿐이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 죠.

3) 철학의 순교자:

그는 좋은 삶의 근거를 찾는데 평생을 바쳤을 뿐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불의와도 일절 타 협하지 않으려 했고 이러한 비타협성은 결국 그가 불경죄로 고발되는 원인이 되어 죽음으 로 몰아가는 상황에서도 불의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 이함으로써 후세에 와서 그를 철학의 순교자로 찬사를 받게 하지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애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그 중 단연코 우리는 그의 지혜를 추구하는 방식인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인 산파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더블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인식하에 당시의 정치가(국회의원)와 기술자(과학자), 시인(문화예술인), 변론가(법조인)들을 찾아가선 일명 산파술이라고 불리는 방법으로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깐 현대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구사하는 짧은 시나리오를 생성해 보았습니다.

1) 산파술에 대한 짧은 시나리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의 개념 탐구를 위한, 유치하지만 짧은 시나리오입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좋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의의 개념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정의'라 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학생 1: 정의는 공정성과 평등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땅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보 장하는 것입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흥미롭습니다. 정의가 실현된 상황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학생 1: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정의는 도둑이 범 죄에 대해 붙잡혀 처벌받는 것입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그것은 정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입니다.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나 요?

 

학생 2: 저는 정의가 단순한 처벌 그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일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합 니다. 따라서 도둑의 경우, 공의에는 그들을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둑이 훔친 사 람을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에는 처벌과 회복이 모두 포함됩니다. 처벌 과 회복이 모두 포함된 실제 정의의 사례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 까?

 

학생 3: 범죄자가 지역 사회 봉사 형을 선고받는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 들은 범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합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훌륭한 예입니다. 이제 더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정의는 누구에게나 동일 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학생 4: 상황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상황에 있는 것이 다른 상황에는 없을 수도 있 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흥미로운 관점이군요. 한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 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학생 4: 그렇죠. 두 사람이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놓고 싸우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아 직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한 사람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지만, 이미 공평한 몫 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따라서 정의는 주관적일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정의는 법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법 안에 불의가 있을 수 있는가?

 

학생 5: 법 안에는 불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이 합법적이라고 해서 항상 정의 로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법률이 있습니다.

 

현대 소크라테스: 그것은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법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법 자체가 정의롭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짧은 시나리오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이 시나리오를 통해 현대의 소크라테스가 학생들이 정의의 개념을 탐구하고 비판적 사고를 장려하며 가정에 도전하도록 안내하여 궁극적으로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하도록 돕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일단 빼는 걸로 합시다. 라케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의 대화.)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의 교육과 관련하여 당대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었던 라케스와 니키아스라는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용기라는 덕목의 본성을 탐구하는데 소크라테스는 먼저 라케스 장군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정의해달라고 요청하죠.

 

플라톤의라케스고전본문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라케스님, 먼저 이것, 곧 용기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보도록 합시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으로 용기가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이 용감해질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죠. [] 자 먼저 제가 묻는 것에 대답해 주세요. 용기란 무엇입니까?

 

라케스: 소크라테스, 제우스께 맹세코, 그걸 말하긴 어렵지 않소! 누군가가 대오를 지키면서 적들을 막아내고자 하며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는 용감한 사람일 거라는 점을 잘 알아두시지요

 

소크라테스: 참으로 잘 말씀하셨습니다. 라케스. 그렇지만 제 잘못인 듯하네요. 제가 분명치 않게 말을 하는 바람에 당신께서 제가 질문하며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 대답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라케스: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제가 최대한 설명해보겠습니다. 당신도 말씀하시지만, 대오를 지키면서 적들과 싸우는 사람은 확실히 용감한 사람일 겁니다.

 

라케스: 나는 그렇게 주장하오.

 

소크라테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또 어떤가요? 적들과 싸우기는 하나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도망치면서 싸우는 사람 말입니다.

 

라케스: 도망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소크라테스: 이를테면 스퀴티아인들은 추격하면서 싸우는 것못지않게 도망치면서 싸우기도 한다라고 말해지지요. 또한 호메로스도 어딘가에서 아이네이아스의 말들을 칭송하면서 그 말들이 이리저리 너무도 민첩하게 추격하고 도주하는 법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

 

라케스: 그래요, 정말 훌률하오! 소크라테스. 호메로스는 전차에 관해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당신은 스퀴티아 기마병의 전법에 관해 말하고 있군요. 스퀴티아 기병대가 그렇게 싸우긴 하죠. 하지만 어쨌든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대는 내가 말하는 대로입니다.

 

소크라테스: 아마도 라케다이몬의 중무장 보병대는 예외로 해야 할 겁니다. 라케스. 라케다이몬인들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버들가지 방패부대와 대결했을 때, 제자리를 지키며 그들과 맞서지 않고 도망쳤으며, 그 뒤에 페르시아인들의 대오가 흐트러지고 나서야 마치 기마병처럼 돌아와 싸웠고, 그런 식으로 해서 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들 하니까요.

 

라케스: 당신 말이 맞소.

 

소크라테스: [] 사실 저는 당신에게서 그저 중무장 보병대에 있는 용감한 자들뿐만 아니라 기병대를 비롯하여 온갖 전투 부대에 있는 용감한 사람들에 대해서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전쟁에서 용감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다의 위험 앞에서 용감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질병에 맞서는 용감한 사람들과 빈곤이나 정치적인 일 앞에서 용감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에요. 더 나아가 고통이나 무서움에 맞서 용감한 사람들, 욕구나 쾌락에 맞서 싸우는 능력이 놀라운 사람들에 대해서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제자리를 지키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라케스! 이런 일들에 대해서도 어딘가에 용감한 이들은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라케스: 전적으로 그렇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그럼 그들은 모두 용감한 자들이겠지요.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쾌락 속에서, 어떤 이들은 고통 속에서, 또 어떤 이들은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같은 상황 속에서 비겁함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라케스: 물론이오!

 

소크라테스: 도대체 이 둘 각각이 무엇인가요? 이게 제가 알아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다시 먼저 용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 모든 상황 속에 동일하게 있는 용기란 대체 무엇인지 말입니다. []

이하, 생략

 

2) 산파술식 문답의 과정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인 산파술은 그의 철학적 사상의 핵심을 반영하며, 진리와 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인 학습과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좀 더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a) 비판적 태도와 의문: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의 의견을 도출하고 그 의견의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대화를 진행 합니다. 그는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합니다.

b) 무지의 인정: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는 바를 과시하 지 않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c) 개념의 분석과 정의: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로부터 얻은 의견을 분석하고 중요한 개념들을 명확하게 정의해 나 가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화의 주제나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입 니다.

d) 변증법의 활용: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는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고 그 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모순점이나 결함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상대방을 자신의 의 견을 재고하도록 유도합니다.

e) 기억 상기:

소크라테스는 대화 도중 상대방의 말을 반복하거나 개념을 되새기는 것을 통해 대화의 흐 름을 유지하고 대화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f) 불확실성과 자기 반박:

소크라테스는 종종 결정적인 답을 내리지 않고 불확실성을 남겨둡니다. 이것은 진리 탐구 의 과정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의문을 유지하려는 의도입니다.

g) 사전 지식의 부정: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사전 지식이나 일반적인 상식을 가정하지 않고, 대화의 과정에서 진리를 함께 찾아가려고 합니다.

h) 윤리적 촉구: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종종 윤리적인 주제에 관련됩니다. 그는 상대방의 행동과 가치에 대 해 깊이 생각하게 하며 더 나은 생각과 행동을 독려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식의 산파술을 즉 상대방의 생각이나 주장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상대방의 주장의 부족함이나 모순을 드러내는, 이는 단순한 반론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가진 주장을 분석하고 타파시키는 데 중점을 두어, 주로 의문의 질문을 통해 상대방의 논리를 흔들어 놓고 논증의 결함을 드러내며 대화 상대의 의견을 반박 질문하고 논리적 결함을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인 변증법이라는 철학적 사고와 연관지을 수 있겠는데요.

 

변증법은 서양 문명에서 최초로 체계를 갖춰가면서 발달한 논리적 사고 중 하나로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과거에 없던 개념이지요. 그렇다고 동양 사람들이 변증법을 아예 안 쓴 건 아니고 변증법을 의식하며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서양의 역사 속에서는 고대와 중세에 설득과 변론 속에서 주로 써왔던 것들을 대상화해서 다루기 위해 도입했던 개념인데 변증법적 접근의 목표는 다양한 이견들을 이해가능한 대상으로서 환원시키는 것에 있었는데, 이 과정은 곧 민주주의적 사고와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겠죠.

 

소크라테스의 경우, 하나의 전제가 모순에 도달함을 보여 전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기본적인 개념과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충돌한 이후에 등장하는 효과로서의 결과물과 논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죠. 이를 지식이라는 아이를 받아낸다는 의미로 산파술이라고도 불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크라테스 방식의 변증법, "대화를 통한 진리의 발견"은 논리적인 논쟁보다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모순이나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대화와 질문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도출하고 분석함으로써 진리나 지식을 찾아내려는 것이 변증법의 핵심 아이디어인데 차후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들도 사용한 방법으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이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하며 헤겔(G. W. F. Hegel, 1770~1831) 이것을 변증법이라는 철학적인 사고의 발전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죠. 이는 대립되는 두 개념이 충돌하고 그 충돌로부터 새로운 개념이 생성되며, 이 과정이 지속되면서 개념들은 점차적인 진보와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것을 강조하고 완성된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헤겔의 변증법의 원형을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겠어요.

 

3) 현대에 적용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적 대화가 현대적으로 갖는 의미는 교육, 특히 교육 및 학습 분야에 적용되는데요.

a) 비판적 사고: 소크라테스식 조산술은 개인이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증거를 평가하며 논 리적으로 생각하도록 장려함으로써 비판적 사고 기술을 장려합니다.

b) 문제 해결: 대화에 참여하고 탐구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소크라테스식 방법은 개인이 문제 해결 기술을 개발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c) 학습 촉진: 조산사처럼 교사나 진행자는 학습자의 사고 과정을 안내하여 그들이 자신의 아 이디어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도록 돕습니다.

d) 대화 장려: 소크라테스식 방법은 열린 대화를 장려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장려하여 개인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탐색하고 표현할 수 있는 권한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e) 윤리적 고려 사항: 자기 성찰과 지혜 추구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강조는 윤리적 맥락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개인이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성찰하도록 장려합니 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방법은 비판적 사고를 자극하고 적극적인 학습을 촉진하기 위해 교실, 세미나 및 토론에서 적용된다면 우리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복잡한 아이디어에 참여하고,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데 보다 더 능숙해질 수 있겠네요.

 

정리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산파술(Socratic Elenchus)이라는 대화법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이나 주장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상대방의 주장의 부족함이나 모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반론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가진 주장을 분석하고 타파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데 주로 의문의 질문을 통해 상대방의 논리를 흔들어 놓고 논증의 결함을 드러내는 셈으로 대화 당사자들이 이러한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무지함을 깨닫게 되는데요.

이것이 당대의 정치가나 변론가들로부터 소크라테스가 미움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답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지혜 추구 방식과 활동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고발들과 한편으로 연결되는데,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더불어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웠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 473)의 철학적 탐구에 대한 자세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철학적 탐구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나 암기 과정이 아니며, 탐구자 스스로 문제와 직접 씨름함으로써 궁극적인 이해와 통찰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 말이죠. 이것 또한 소크라테스식 지혜를 추구하는 방식과 어느 정도 통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아마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대화법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적 탐구 자세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 말입니다. 이건 개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철학적 탐구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회였습니다.

 

5. 소크라테스를 향한 고발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린 것은 서기전 399년이었고 그의 나이 79세였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받은 뒤, 약 한 달간 감옥에 갇혀있다가 사망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관해서는 플라톤과 크세노폰 모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작품을 통해 상세히 접해 볼 수 있는데 이를 근거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재판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1) 소크라테스의 기소 항목들:

a)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았다.

b)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도입했다.

c)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2) 기소 항목들에 대한 분석

a) 의 항목을 부연하자면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멜레토스는 그가 결코 신을 믿지 않았다고 단언합니다. (플라톤의 변론26e)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고발 항 목처럼 그가 아테네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는 주장은 두 번째 고발 항목 2) 즉 새로운 영적 인 것을 도입했다는 항목과 상충 됩니다. 이는 영적인 것들 역시 신들에 다름 아니기에 고 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그가 새로운 신들을 믿는다고 비난한 셈이 되는데요. 사실 소크라테스는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신들에 대한 전통적인 이야기를 비판했던 것은 사실이랍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반성이나 비 판없이 전승되어진 신들의 권위에 대하여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러한 전통적인 신 들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신화의 전파자인 시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것은 아테네 사회의 전통 도덕과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을 뜻하기도 해서 아테네의 정치, 문화, 교육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는데요. 그가 생각했던 신들은 일체의 악과 흠결에서 벗어난 선 하고 순수한 신들이었다고 합니다. (플라톤 에우튀프론6a ~ c)

 

b) 번째 항목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도입하였다는 죄목은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영적인 신호와 연관된 것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어떤 잘못된 행위를 하려 들 때마다 이 영적인 신호가 개입하여 제지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영적인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 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혹자는 이것을 신과 조우하는 개인적인 체험으로 보기도, 혹자는 이 성의 규제적인 힘이 의인화된 것을 이해하는데 분명한 것은 이 신호가 적극적인 행위를 추 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즉 특정 행위에 대한 금지 명령으로서만 작 동한다는 것으로 고발자들의 비난은 소크라테스가 이 신호를 가지고서 종교적인 혁신을 꾀 하려 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에 크세노픈은 소크라테스의 영적인 목소리가 예언자들 이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나 천둥 소리를 가지고서 미래를 내다보듯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영적 체험일 뿐, 종교와 관련된 혁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항변합 니다. (크세노폰 변명4,12~13) 또한 플라톤은 이 영적인 신호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일 종의 금지 기제로서 가능한 것처럼 묘사할 뿐(플라톤 변론40a~c) 이것을 종교적 혁신의 대안으로 언급한 적은 결코 없다고 합니다.

 

c) 번째 항목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은 앞의 항목들이 신과 관련 된 죄인 불경죄에 해당된다면 이 기소 내용은 사회적, 교육적 측면에서 제기된 것으로 크 세노폰에 따르면 고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충동질하여 그들의 부모보다도 자기 에게 복종하게끔 만듦으로써 그들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입니다.

크세노폰은 이들의 비난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면에서도 결코 젊은이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교육에 관한한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것은 그가 가 장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크세노폰 변명19~21)

이와 달리 플라톤은 세 번째 기소 내용을 앞의 두 가지 항목인 불경죄의 하위 항목으로 설 명합니다. 즉 소크라테스가 도시의 신들을 믿지 말고 그 대신 자신의 영적인 것들을 믿으 라고 젊은이들을 충동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이 의미 있 는 비난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며, “첫째 교육이란 전통적인 가 치의 전승과 재생산이다. 둘째는 전통적인 가치는 전통적인 신들에 관한 이야기 속에 확립 되어 있다. 이 경우 소크라테스는 도시가 믿는 전통적인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젊은이들에 주입함으로써 그들이 전통적인 가치를 멀리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것이 되는데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오래된 비난인 동 시에 방어하기가 더 어려운 고발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플라톤 변론18a~c)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고발에 앞서 더 오래된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악의적인 소문과 비난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어려서부터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지혜로운 자로서 대기 중에 있는 것들과 지하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탐구하는 사상가이며 더 약한 주장을 더 강하게 만드는 자(플라톤 변론18b)” 라는 소문을 듣고 자라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반증이며 소크라테스를 향한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요.

 

우리가 ’“대기 중에 있는 것들과 지하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탐구하는 사상가라는 소문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연철학자들 한 명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인데 당시 탈레스를 비롯한 자연 철학자들은 세계의 원리를 신들의 조화가 아니라 자연에서 찾음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신들의 권위를 파기했다는 혁신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비춰지고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작품 구름에서 또한 소크라테스가 바구니에 들어앉아 천체 현상을 탐구하는데 골몰하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를 희화화하며 그를 자연 철학자의 일원으로 간주하게끔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곳곳에서 자신이 자연 탐구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이 주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임을 거듭 강조(플라톤 변론19c~d)하지만 동시대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자연철학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함으로써 반() 전통적 세계 설명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를 더 약한 주장을 더 강하게 만드는 자라는 묘사는 대중들에게 소크라테스를 당시의 민주 정체 아래서의 소피스트들의 폐해를 그대로 지닌 한 명의 소피스트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소피스트들의 지식과 말솜씨는 경탄할 만한 것이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되는냐에 따라서 그것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변론의 고발자들은 판관들에게 소크라테스가 말이 능수능란, 무시무시한 자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에는 수없이 많은 소피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 중 몇몇은 소크라테스 보다 더 유명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제자로 거느렸는데 유독 소크라테스에게 돌아온 치명적인 비난과 고발의 원인에 대해 우리는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세노폰은 회상에서 지금까지의 고발들과는 또 다른 일련의 비난들을 열거하며 반박하기도 합니다. 그 비난들은 소크라테스는 추첨으로 대표자들을 선출하던 당시의 방식이 비정상적이라고 청중들을 선동함으로써 법을 무시했고 아테네 정치사에서 가장 큰 과오를 저질렀던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스승이었으며 젊은이들에게 부모를 무시하라고 가르쳤는가 하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같은 시인들의 작품들 중에서 비도덕적인 부분들만을 뽑아 가르침으로써 젊은이들을 범죄자로 더 나아가 참주가 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언급한 서기 전 404년 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27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고 굴욕적인 종전 협상에 의해 아테네 인들은 스파르타에 대한 증오와 동경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데 크리티아스를 위시한 일군의 젊은 정치인들은 스파르타의 승리가 엘리트주의적 귀족 정체에 있다고 보고 이것을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여기며 스파르타의 비호 아래 아테네의 권력을 장악하는 이른바 30인 참주정을 체제를 만들어 아테네 시민들의 선거권과 지위권 등의 권리들을 제한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민주정의 지도자들을 숙청했고 불과 8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수백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처형되고 수천여 명이 도시에서 추방됨으로써 아테네 정치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저질렀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이 열린 것은 이 사건이 끝나고 4년 뒤인 399년인데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익명의 고발자는 소크라테스를 30인의 참주정과 연결했다고 합니다. 이는 참주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크리티아스와 그 추종자들이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그들이 참주가 되도록 사주한 인물이 소크라테스라는 지적이었던 것이죠. 또한 이 참주들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의 가족이 섞여 있었다는 것으로도 30인 참주정이 소크라테스와 연결되었을 것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불어 언급한 소크라테스적 대화인 산파술에 의해 당시의 권력자들을 난처하게 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과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6.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최후

기원전 39970세의 소크라테스는 고발을 당해 법정에 섭니다. 당시 28세였던 제자 플라톤은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보며 사형 선고가 확정되었을 때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비통해하며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과 그 재판 과정과 죽음에 관련해 3권의 저서를 남깁니다.

 

재판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사형 선고 후 감옥 안에서 탈출을 권하는 친구와의 대화를 기록한 크리톤, 죽기 직전에 찾아온 제자와 친구들에게 죽음과 영혼 불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독배를 마시는 파이돈까지

 

1) 소크라테스의 재판: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당시의 법률전문가, 시장상인, 수당을 받으러 온 알바생들로 구성 된 배심원 501명이 참석했는데 1심에서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유죄와 무죄에 대해서 280220으로 유죄를 선고했으며 2심에서는 피고 측에서는 벌금형으로 원고 측에서는 사형으로 논의되었지만 결국 360140으로 사형이 확정됩니다.

 

이 과정 중에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변명이 아테네인 여러분!”으로 시작하는데 소크라테 스의 이 말 중에는 아테네 시민들을 깔보는 듯한, 아테네 시민이 나를 재판한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뉘앙스가 배심원들의 심정을 건드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 으며 또한 재판장은 소크라테스 선생, 이제 우리는 고발자 중 하나인 아뉘토스의 말을 믿 지 않고 선생을 방면합니다. 다만 더 이상 이런 탐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지혜 추구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방면합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계속하다 발각될 때는 당신은 죽게 될 겁니다.”라고 말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조건을 달고 저를 방면하신다 면 저는 여러분에게 말할 겁니다. 아네테 시민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존중하고 좋아하지 만 여러분보다는 신의 말을 더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숨쉬고 있고 존재하는 한은 지 혜 추구하는 일,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또 매번 제가 여러분 중 누구와 마주치게 되는 간에 그분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하며 당당함을 보였던 것 역시 배심원들의 심정을 거슬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 여러분, 참으로 받아 마땅한 것에 따라 제안해야만 한 다면 뭔가 좋은 것, 그것도 제게 어울릴 만한 그런 좋은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요, 유공자이며 여러분에게 권고하는 일을 위해 여가를 누릴 필요가 있는 제게 무엇이 어울릴까요?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런 사람이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올림픽 승자같은 국가 유공자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사절들이 국가가 내는 비용으로 식사를 제공받는 프 뤼타네이온에서 식사 받는 일만큼, 아니 그 보다 더 어울리는 일은 없습니다. 적어도 여러 분들 가운데 누군가가 올림피아 경기에서 말 경주에서든 2두 마차 경주에서든 4두 마차 경주에서든 승자가 되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어울립니다. 저는 죄가 없으니 구류, 벌금, 추 방도 제안할 형량이 없습니다.”라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배심원들을 자극하는데 배심 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2) 소크라테스의 감옥 생활: 크리톤

크리톤은 어렸을 때부터 소크라테스의 친구였고 그는 소크라테스를 찾아 감옥에 가서 소크 라테스에게 탈옥을 권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칼에 거절하죠.

 

우리가 합의해서 여태 지켜온 폴리스 법을 그러니까 국법을 내가 죽게 되었다고 지키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칙들을 깰 수 없음을 강조하지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하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는 사실 소크라테 스가 직접 언급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어 책을 일본어로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 정에서 생겼던 오류, 혹은 이 말의 유용가치를 위해 누군가가 오역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 다.

 

3) 소크라테스의 최후: 파이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던 소크라테스는 친구 크리톤에게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의 해석은 자신의 죽음은 닭 한 마리만큼 보다 가볍다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소크라테스는 의술의 신에게 죽음은 삶의 질병으로부터 의 해방이니, 감사의 제사를 바치라며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살펴 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영혼만 남는 사 건으로 인간의 몸은 우연적인 부분이고 영혼이 본질적인 부분인데 우연적인 부분들의 소멸 이 인간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 즉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죽음 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좋은 것이라고 인식했을까요? 그 답을 위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구절들 을 인용하며 찾아 나가겠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죽어 있다는 것은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a) 그것이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고(無化) 죽어 있는 자는 어떤 것에 대 해서든 그 어떤 감각도 갖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그런데 죽음이 아무 감각도 없는, 이를테면 잠과 같은 것이라면, 즉 누군가 잠자면서 아 무 꿈을 꾸지 않을 때의 상태와 같다면 그것은 놀랄만한 이득일 겁니다. 제 생각에 누군 가가 꿈조차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그런 밤을 골라내어 자신의 삶의 다른 밤들을 이 밤과 견주어 보고서 자기 삶에 있어서 이 밤보다 더 좋고 달콤하게 산 게 몇 날 밤이었는 지를 숙고하여 말해야 한다고 하면, 다른 날과 밤들에 비해 이런 밤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는 걸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이득일 것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b) 전해지는 말들에 따라 어떤 바뀜 즉 영혼이 이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것이거 나.:

그럼 이번에는 죽음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과 같고 죽은 자들 모두가 그곳에 있다는 게 진실이라면 이것보다 더 큰 좋은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재판관이라 고 자처하는 당신들에게서 벗어나 하데스에 도착해서 거기서 재판하고 있다고 이야기되는 바로 그 진짜 재판관들인 미노스와 라다만튀스, 아이아코스, 트립톨레모스 그리고 반신(반 신) 영웅들 가운데 자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정의로웠던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때 그 떠나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혹은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는 얼마의 대가를 주 고 오르페우스와 무사이오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와 함께 지내게 되는 것을 택하시겠습 니까? 저로서는 이것이 진실이라면 여러 번이라도 기꺼이 죽을 의향이 있거든요.”

 

 

7. 소크라테스의 Swan Song : 파이돈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 지는데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 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죽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죽음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 파이돈속에 소크라테스의 swan song(유언)너 자신을 잘 돌보라.”는 말이 전해집니다.

 

너 자신을 잘 돌보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유언은 너의 영혼을 잘 돌보라는 뜻이겠지요.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노인이든 젊은이든 여려분 모두에게 여러 분의 육체나 재산을 우선하여 고려하지 말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영혼을 돌 보라고 설득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혼을 정화하라고 외쳤던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외침을 상기해 볼까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혼이 신체의 사멸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닌, 신체를 벗어나 스스로 살아가는 불멸의 것으로 보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하는데요. 즉 혼은 윤회하며 전생의 혼은 현생의 육체에 들어오고 다시 현생의 혼은 후생으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현생의 혼이 더렵혀질 경우 후생에서 더욱 낮은 육체 계급으로 들어가게 된. 더 나아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혼의 영원한 해방을 이루기 위해서 혼을 정화시키고자 하 였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혼의 정화를 위해 육체적 순결 및 음악과 수학(철학)을 통한 정화를 추구했다고 배웠잖아요.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문제를 언급했던 것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 분리를 통해 불결한 육체로부터 어떤 방식의 정화를 통해 영혼은 정화되어야 한다는 피타고라스 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겠는데,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영혼을 돌보기 위해 음악과 수학(철학)이라 했는데 음악과 더불어 그들도 철학하는 것이 영혼을 돌보는 길에 들어가는 입구 같은 것에 하나임을, 철학함으로써, 무지를 깨닫고 지혜를 얻는 방법임을 강조합니다.

 

그럼 이제 소크라테스가 외쳤던 영혼을 돌보는 방법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어떻게 영혼을 돌보아야 할까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돌보면 행복할 수 있다는 언질을 주며 그는 육 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인간의 본질을 영혼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만일 부정한 행위로 해를 입고 정의로운 행위로 이익을 얻는 부분인 영혼이 타락해 버린 다면 우리의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또는 정의와 행복과 관련된 영혼이, 육체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가?” (크리톤47e~48a)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돌보아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고 설파 합니다.

 

첫째로 무지를 깨달아야 하고 둘째로 그 위에서 지혜를 쌓아야 하는 것인데 지혜로운 자가 곧 행복한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으나 소크라테스는 향연에서 완벽한 지혜는 신이 소유한 것으로 인간은 달성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이 지혜로운 자라면 인간은 그 지혜를 향해 나아가는 자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즉 인간은 무지한 동물과 완전하게 아는 신 사이의 중간자로 무지의 자각을 통해 지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중 간자로서의 인간이 하는 일 바로 철학하는 일이겠지요. 지혜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활 동, 그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돌보아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합니다.

 

좀 비약해서 생각해 보면, 1학년 1학기의 동양사상 입문을 통해 배웠던 사상들을 꺼내 봅 시다.

 

유교는 나라를 치화하려면 먼저 수신(修身)하여 군자가 되라고 하고, 도교는 천지 만물과 조화하려면 먼저 심신을 허정(虛靜)하게 하여 정()과 신()을 기르라고 하며 불교는 하 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려면 먼저 상구보리(上求菩提:위로 깨달음을 추구) 의 지혜를 깨우치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저는 나라를 치화하는 자리에 나의 영혼을 돌보는이라는 대목으로 바꾸고 싶 습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잘 돌보면 행복할 수 있다는 대목에 이르는 지혜추 구가 어느 면으로는 불교의 이치에 통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 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삶의 최대의 구현은 행복 추구가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 이제 여러분, 아니 철학과에 들어와 함께 철학하는 우리는 철학하는 자이므로 지혜로 운 자의 길에 들어섰고 영혼을 돌볼 수 있음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겠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요?

 

지혜를 추구하는 성찰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더 사유해 보지 않겠어요?”

 

8. 소크라테스의 후예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과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소크라테스의 사상들이 그들에게 얼마간 전수 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데 그들 이외에 또 어떤 후대의 인물들이 있는지 또한 살펴보겠는데요.

 

1) 크세노폰과 플라톤 (PPT 만들 때 크세노폰과 플라톤을 비교해서 표를 만들어 주세요.)

앞서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글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소크라테스의 탐구 내용이 정확하게 어떤 것이었나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문헌들에 의지해 하는데 이 두 사람의 설명은 몇몇 핵심적인 부분에서 갈라집니다.

 

우선 덕에 관한 내용인데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덕이 훈련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라 고 생각하며 훈련을 게을리하면 다시 잃게 된다고 주장하는데(크세노폰 회상1, 2, 19~24) 반면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는 덕이 일종의 앎이며 앎이기 때문에 일단 획득하면 영혼 안에 단단히 고정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는 각종 욕망 과 고통에 맞선 극기를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했고 생활에서도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권장하지만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덕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기만 하면 굳이 욕망 의 유혹에 굴복하거나 무절제한 상태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신체적인 힘 역시 덕의 훈련 과정과 획득에 필수적인 요소 라고 보아 몸을 돌보는 일에도 중요성을 부여했지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돌보는 일 말고는 다른 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고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덕이란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 데 이러한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정의관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플라 톤은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일이 정의라는 생각을 소크라테스는 결코 받아 들이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절대로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되며 심지어는 남이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경건과 관련해서도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숭배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전통적인 신들의 부도덕한 면을 인정하 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이 두 사람의 소크라테스에 관한 공통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 우리는 개인적으로 각자의 이미지로 소크라테스의 사상들을 수렴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에 놓이게 됩니다.

 

2) 소크라테스 식 대화의 저자들

소크라테스가 사망하고 난 뒤 그를 따랐던 젊은이들은 세간의 비난에 맞서 스승을 복권시 키고자 했는데 그들 중 다수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모방해 글을 썼고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소크라테스의 대화들이라고 부르며 당시에 유행하던 글쓰기 양식 중 하나처럼 언급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1441a28~b13), 수사학

 

3)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서기전 450~355)

아테네 출신의 안티스테네스는 덕을 지혜라고 본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유사한 관점을 취 하지만 행복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는 덕이 행복의 충분조건이라고 단언하는 동시에 여기 에 강인함이 더해져야 한다며 덕이 충분조건이면서도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말은 인견 모 순처럼 보이지만 덕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그러한 삶을 살수 있기 위 해서는 덕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 앎을 행위 속에서 실현하는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안티스테네스는 이후 퀴니코스(젼유학파) 학파의 디오게네스에게 영 향을 미칩니다.

 

4) 아이스키네스(서기전 430/20~375/?)

아테네 출신의 아이스키네스는 알키비아데스아스파시아라는 작품을 통해서 덕이 수련을 통해 획득하고 향상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아스파시아에서는 플라톤의 매넥세노스에서 페리클래스의 후처이자 소크라테스에게 수사술을 가르쳐준 것으로 알려 진 아스파시아가 크세노폰과 그의 아내를 상대로 소크라테스가 전개했던 것과 유사한 논박 술을 펼치기도 합니다.

 

5) 파이돈(Phaidon 서기전 418/416~?)

앨리스 출신의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와 페르시아의 마법사 조퓌로스 간의 대화를 그린 조 퓌리스와 시몬이라는 구두장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시민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 며 이들 작품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혈통이나 재능, 신체적 조건 혹은 가문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엘리트 철학 이 아닌 대중 철학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이는 폴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남녀노소 는 물론 자유인과 노예, 내외국민을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어왔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 습니다.

 

6)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 서기전 450/435~365)

메가라 출신이자 메가라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우클레이데스는 좋음()이 여러가지 이 름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하나라고 주장했다고 전해집니다. 즉 그것은 때로는 지혜, 때로는 이성으로 불리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좋음과 대립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몇몇 학자들은 좋음이 하나라는 이러한 주장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며 또 다른 몇몇 학자들은 이 주장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내세웠 던 덕의 단일성 논제, 즉 정의, 경건, 절제, 용기, 지혜는 모두 동일한 덕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라는 주장과 이어집니다.

 

7)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서기전 430~355)

소크라테스주의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화편을 남기지 않은 사람은 퀴레네 출신의 아리스 티포스인데 그는 보수를 받고 가르침을 전한 최초의 소크라테스주의자였다고 하는데 그에 관해서는 쾌락주의의 창시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쾌락주의 학파로 알려진 퀴레네학 파가 만들어진 것은 그의 자식 세대에 이르러서라고 합니다.

 

* 그 외 역사가로서 아르고스의 지리에 관한 글을 쓴 다른 소크라테스도 있었고 비튀니아의 소요학파 사람인 또 다른 소크라테스도, 짧은 풍자시들을 지은 또 다른 소크라테스도, 신들 의 이름에 관해서 글을 쓴 코스의 소크라테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 소크라테스 사후의 계승자들을 살펴보았지만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어느 한 제자의 증언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주의자들의 증언이 좀 더 많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면,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더욱더 다채로웠을 것이며 그만큼 더욱더 환원 불가능한 모습이어서 소크라테스의 더 다양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아쉬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고대뿐 아니라 르네상스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강조했고 평생을 통해 탐구하는, 철학하는 삶을 몸소 보여주었다는 것이 중요하며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현재 더불어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과 철학이 많은 영감을 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9.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

1) 철학을 인간에게로:

기원전 106~43년 사망한 로마 공하국의 철학자이며 기원전 1세기 집정관이었던 마르쿠 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책 투스쿨룸 대화5.4.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옛 철학으로부터,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에게 배운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수와 운동들이 연구되었고, 만물이 어디에서 생겨나고 어디로 돌아가는지가 다루어졌 고, 이들의 의해 별들의 크기와 간격과 궤도 등 천문이 전체적으로 열심히 탐구되었다하 지만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도시로 가져다 놓았으며 집안으로 까지 들어놓았으며 삶과 도덕과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탐구하게 했다.”

 

2) 철학 하는 것 자체를 자극:

요한네스 힐쉬베르거는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는 일정한 학파의 교의(도그마) 를 남겨주려고 했다기보다, 오히려 철학하는 것 자체를 자극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 이 평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자기의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서로 다르게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사상은 그만큼 비밀스러웠던 말인가? 또는 그렇게도 풍부했다는 말인가? 또는 그만큼 미완성품이었단 말인가? 이런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사상의 방향들 중에서 어느 것이 스승의 원래적인 본질과 의도에 꼭 들어맞는 것일 까? 이런 물음에 관한 결정은 우리들이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즉 플라톤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려질 수 있다.”

 

3) 노장(老莊)사상과의 연계

동양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좀 살펴보았는데요. 마침 중앙대 심 리학과 이장주 교수의 언급이 있네요. 그는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 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음을 강조하며 이런 의견을 내놓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퇴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을 것이다이런 사고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는데 어떤 의미로는 노 장(老莊)사상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나무 위키 응용)

 

이런 기술들을 베이스로 한다면 우리는 자칫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할 수도 이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그의 귀납적 방법론을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계승되었고 더 나아가 2,600여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으로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인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이고 그의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 그의 죽음의 상징성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안깁니다.

 

10. 발표를 듣고 토론하기

 

질문과 토론

(발표자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기다리며 토론의 장의 될 수 있도록 유도한 다.)

예를 들어)

1) 이제까지 간략하게나마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것을 고찰해 보았는데요. 이 지 점에서 우리 각자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가 생성되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발표 후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2)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영혼을 잘 돌보아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영혼을 잘 돌보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방법 이외에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잘 돌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 이 있을까요?

 

3)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도 그대로 사형을 감수했는데 또 다른 대안은 없 었을까? 가령 친구들이 권했던 탈옥이나, 제자들이 권했던 벌금형으로 목숨만은 건져도 되 었을 성 싶은데. 내가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였고 나의 친구나 제자들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탈옥하기를 권유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4) 내 배우자가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불사르는)이라는 설정을 한다면 나는 내 배우자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다른 토론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기)

 

 

마지막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자신의 신념을 철저히 실천했던 태도, 즉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당당했던 철학자로서의 삶에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퀴즈 내기)

1) 파르메니데스(엘레아: 기원전 510 450년경)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창시자. "형이상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하는 생성 소멸하고, 운동하거나 변화하며, 분할 되고 불완전한 것은 실재하지도 않고 사유나 지시(언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보며 오직 생성 소멸하지 않고, 부동 불변의, 연속적인 완전한 하나의’ ‘있는 것만이 사유와 언어의 대상이 되다고 하며 생성/운동/변화/분리/소멸/하는 현상 세계는 신뢰할 수 없는 세계로 있는 것의 진리의 세계만이 참된 인식의 세계임을 강조하는,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 구조의 출발점이 된다.

 

2)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 473)

철학하는 자세에 대해로써 즉 철학적 탐구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나 암기 과정이 아니며, 탐구자 스스로 문제와 직접 씨름함으로써 궁극적인 이해와 통찰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탐구하는 길(반성)과 자연을 탐구하는 길(감각)을 통해 철학적 탐구를 계속하라.

 

3) 파르메니데스(엘레아: 기원전 510 450년경)

철학하는 자세에 대해로서,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으나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길을 끝까지 가서 문제와 직면하는 것, 이것은 지성만으로 철학을 하라는 플라톤의 이상과도 통한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의 초기 성장기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한 학파가 던진 화두이다. .

4) 피타고라스(기원전 570~490년 경)

오르페우스 종교 전통을 계승한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후대 사 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 분리를 통해 불결한 육체로부터 어떤 방식의 정화를 통해 영혼은 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혼의 윤회와 불사: 영혼 불멸설, 영혼 윤회설, 영원 회귀 역사관, 혼의 정화에 대해 말한 철학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