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난 후에 느리게 도착하는 어수선하고 기꺼이 미완성인 편지들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창비
네 권째 읽는 최진영의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속 주인공 고등학생 제야는 괴물도 짐승도 아닌 다정하고 친절한, 동네 어른들과는 달랐던, 젊고 부유한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제야는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그 침착함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으며 살아남기 위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제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싶었다. 우울과 고통과 불안을 듣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제야는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걸었다. 때로는 달렸다. 미로의 길을 다 걸어야 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언제가는 출구에 닿을 것이고, 이제 제야에게는 출구가 중요하지 않았다.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걷는 동안 들여다보는 자기 마음이 중요했다. 언젠가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들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설 수 있도록, 왼쪽 벽에 손을 댈 수 있도록, 그들의 오른손을 잡고 싶었다. 그리고 평생,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제야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232 – 233쪽)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느리게 숨을 고르며 이따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이따금 창밖을 한참 동안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야가 쓰러지지 않을까,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으며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 제야 옆에 있을 수 있을까 자문하곤 했다.
다행히 제야는 '나를 견디지 않고, 나와 잘 살아보고 싶다'는 목소리를 들려주어서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지!
최진영 작가와 몽골 여행을 하며 최진영을 경험하고 바라보았던 소설가 황현진은
“아마 최진영은 끝까지 우리 삶의 전부를 써낼 것이다. 그 어떤 과거로도, 그 어떤 미래로도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이 모든 불행의 연대를 일인칭의 노래로 외우고 있을 것이다.”라는 발문을 쓰며
향우 최진영이 써내려 갈 작품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킨다.
또한 나도 작가 최진영처럼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 혹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타인의 마음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 언제나 ‘미안하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려 애쓰는 사람, 모든 세상의 불행의 연대를 말하려 애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애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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