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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12. 18.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76

 

23학년 2학기 서양의 역사와 문화

동영상 수업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매회 50분을 채운 동영상 강의는

사진과 함께

잘 정리된 PPT 자료와

정성어린 설명으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강추하고 싶은 과목,

이번 기회로

전반전인

서양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게 되어서

참 기쁘다.

 

그나저나 내일 시험은 어떨지?

 

 

 

 

 

 

 

 

1

서양의 역사와 문화

1 장 문명의 고향, 메소포타미아

- 헤로도토스: 인키피토스(글의 첫 부분: 라틴어로 쓰여짐.) 역사

- 역사란 무엇인가?E.H Carr 혹은 정기문이 쓴 책도 있다.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쓴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Civilization: civitas:기원전 3500년경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최초의 문명이 태어났다.

Culture: 라틴어 Colo에서 시작(재배하다) 공동으로 갖게 되는 습관

이 장에서 배울 내용(메소포타미아)

1.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2. 그리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3. 두 지역 신하 간의 유사성

4. 페르시아 설형문자

5. 길가메시 서사시

6. 지구라트와 바벨탑

7. (문명)은 동방에서

메소포타미야: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 지역(희랍어, 그리스어, 헬라어로 표기:역사는 기록한 사람이 승리자이다.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을 정리했으므로 희랍어로 쓰여졌다.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 이집트란 말도 멤피스의 주신인 PUTA신의 집이 있는 곳이므로 이집트인들은 이곳을 이집트라 불렀다.

로제타 스톤; 나폴레옹이 원정을 가서 발견된 돌에 이집트의 상형문자(신성문자, 민형문자, 신관문자)와 그리스어로 쓰여진 암호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리스어로 밑에 쓰여있던 것과 비교해 해독이 가능해 이집트의 역사를 알수 있게 된 사연 이집트는 현재 아프리카에 소속되었으나 고대 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와 합쳐서 그리스를 포함해 동방이라고 생각했다.

 

* 왜 이지역에서 문명이 태어났나?

이 지역은 비옥했다. 강이 있어 농사 가능, 잉여 생산이 이루어졌다. 식수 문제 해결 가능. 우루크가 최초의 지역, 인접 지역들이 이 지역으로 많이 들어왔다.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는 여리고에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종족이 바뀌면서 수메르인(기원전 6000) - 아카드인(2300 1900) 바 빌론(2000 1300) 앗시리아인( ) 신바빌로니아( ) 페르시아(540 343)인 등이 주도권을 잡았다.

* 왕의 길(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의 길)

 

2

서양 문명 1. 헤브라이즘(현대의 이스라엘 문명은 이집트(애굽; 중국사람들의 음차). 유대인이 믿는 종교. 기원전 1290년 경에서 출애굽을 하는데( 종살이 하던 이들을 히브 리 (헤브라이:라틴어로 종살이 하는 사람들)라고 불렀다. 초대왕은 사울 데이 비스(다윗) - 솔로몬 Before Christ(bc)하느님이 인정한 신성한 왕. 헤브라이 왕(남쪽을 유다왕국(신바빌론에 의해 멸망, 왕족을 바빌론으로 끌고 감;바빌론 유수, 북쪽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으로) 페르시아의 키르스 왕이 그들을 해방해 유다지역을 속주로 만든다.(이곳을 유대인이라고 부름- 유일신교의 절대 신앙)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이스라엘이라 부름(야곱의 별명이 이스라엘, 하나의 민 족이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에 해당한다.)

2.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문명)

 

서양 문명의 두 뿌리(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래)

헤브라이즘(Hebraism)

야훼를 숭배하는 기독교

- 의지적

- 윤리적

- 종교적

2. Hellenism(헬레니즘)

- 이성적

- 과학적

- 미적

그리스인들은 이 문명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서양인들이 계속적으로 이 생각들을 확대 재생산한다. : 왜곡되었다.)

@ 그리스 문명 합리적

- 민주적

- 자주적

- 능동적

@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제적

- 수동적

- 미신적

@ 대조적으로 보는 시각의 원인

- 페르시아 전쟁(B.C 491 B.C 479)에서 승리한 그리스인들은 경제력, 인구수, 군사력면 에서 훨씬 뒤떨어지는 자신들이 페르시아를 이긴 데에 자부심을 느낌.

- 승리한 이유를 두 문명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찾음

- 히포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르시아(아시아) 사람은 태만하고 무감각하여 전제적 지배의 예속을 받으며 대제국에 살고 있는데 반하여, 그리스(유럽)인은 자유가 지배하고 시민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해 운 영되는 작은 국가에서 생활한다.

@ 그리스 12신 가운데 11신의 신전이 이집트에 있다. 미노아 문명에 관한 여러 전설에 그리 스 신들이 등장한다.

@ 그리스 신화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의 유사성(그리스 신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 제우스가 소아시아에서 활동했다. 소와 관련 있다.

- 수메르에서 그리스까지 하나의 거대한 문명권 형성

- 바빌론 신화(메소포타미아 신화)가 그리스 신들의 탄생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신들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거의 흡사한 이야기 구조

- 메소포타미아인 동방지역은 달을 숭배한다.

- 메소포타미안 신들도 그리스 신들과 마찬가지로 신인등형론(신과 인간이 같은 모습을 한 다.) 신들은 자연 현상을 의인화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처음에는 달신(초승달)이 태양 신보다 높다고 하는 것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국기에 초승달 등장) 7일이 1주의 관념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 문명의 3대 요소: 도시, 청동기, 문자

 

3

* 페르시아의 설형문자(기원전 3400년 전)

점토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만든 펜으로 새겨 썼기 때문에 문자의 선이 쐐기 모양(이집트는 매우 건조해 많이 남아있다.)

페르시아인들이 이란의 선조.

점토에서는 쐐기문자를 기본으로 한다. (수메르인, 페르시아인도 . 그러나 언어는 달랐다.)

17세기 이탈리아의 한 여행가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가 새겨진 벽돌을 최초로 유럽에 가져왔다. - 메소포타미아에 위대한 고대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문명이 자신들의 믿음과 역사를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하노버 사람 니부어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왕궁 터에서 많은 비문을 발견

이 비문 해독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독일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로테펜트

페르세폴리스가 페르시아의 수도였고 페르시아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이야기가 비문 에 쓰여 있을 것이라고 추측, 쐐기 문자와 페르시아 왕들의 이름을 수없이 대조해가면서 암호 풀이에 열중, 1802년 설형문자 해독의 기반을 마련. 비문에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인 다리우스와 그의 아버지 히스타스페스,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냄.

주원준: 길가메시 비문 해설

헨리 롤린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 인간 중심의 문화

바벨탑(고유명사)

지구라트(지구라트는 보통명사:산꼭대기, 높이 세우기에서 유래, 신전)

각 지역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이 수호신을 제사 지낸 곳

지구라트: 높은 봉우리란 뜻으로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쌓아 올린 계단식 신전

기원전 4000년대 말부터 만들기 시작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지구라트와 바벨탑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는 바빌론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이 전설을 변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벨탑은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건설된 7층 탑

바벨: 아카드어 바브이루’, 바부: , 이루: 신의 문

그리스인들이 바벨을 바빌론이라고 부르고 이 지방을 바빌로니아라고 불렀다.

바벨은 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빌론을 말하는 것이고 바벨탑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쌓았던 탑

(문명)은 동방에서

- 서양인들이 서양 문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신화와 종교, 현세 중심적인 문화가 메소포 타미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언어, 교육, 천문학, 수학 등 많은 분야에서 서양 문명의 근간을 제공 했고 알파벳과 60진법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졌다.

 

4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보시길

민주주의 원형을 만든 아테네

아테네의 전성시대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1694 1778)는 인류사에 위대한 시대가 네 번 있었다고 말했다. 페리클레스가 다스리던 아테네의 전성시대가 그 첫 번째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로마제국의 시대가 그 두 번째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가 그 세 번째요.

루이 14세 시대가 그 네 번째이다.

파르테논 신전(아테나 여신의 별명: 파르테누스: 유네스코가 인류가 보존해야할 문화유산의 첫 번째로 꼽는다)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인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현대의 어느 나라도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 - 소크라테스 활동

Democracy(민주주의)의 원형을 만든 시대: 페리클레스 시대

B.C. 431년 페리클레스 연설(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사 속의 글)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시대)

우리의 정치 체제는 이웃 나라들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 보다는 남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 정치라고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주요 공직 취임에는 개인의 탁월성이 우선시되 며, 추첨이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 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 는 일도 없습니다.”(페리클레스의 두 번 째 부인 아스파시아가 썼다. 소크라테스도 아스파 시아의 제자였다.)

프랑스 인권 선언문은 혁명이 추구할 이념이고 페리클레스 연설은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자랑이다.

1789년 주권재민의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체제를 수립

나폴레옹: 혁명의 지도자 마라, 당통, 로베스 피에르가 죽고 나폴레옹(독재자)가 혁명 사산

 

2. 아테네 민주주의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티포스, 어머니: 아가리스테

투구를 쓴 이유는 정수리가 뾰족했고 머리가 길었다.

스키노팔로스 = 무릇머리(스키노:무릇, 케팔로스:머리)

매력적인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성품은 단아하고 깨끗했다.

* 페리클레스의 스승인 아낙스고락스는 지성을 강조하며 지성이 최초의 혼돈 상태를 질서있 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과학에도 깊은 지식을 소유했다.

* 일식에 관련된 페리클레스의 일화:

아낙사고라스에게 배운 페리클레스는 밝은 과학적 지식이 있었다.

* 제논과 교류로 연설 능력을 향상시켰다.

* 투키디데스는 내가 페리클레스를 쓰러뜨릴 때마다 그는 자기가 쓰러진 것이 아니라고 주 장할 것이고, 그가 쓰러진 것을 바라본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기가 쓰러지지 않았다고 믿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페리클레스를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페리클레스의 약점: 지독하게도 자식 복이 없었다.

장남 크산티포스와 갈등이 심했고 막내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3. 사연 많은 아테네 민주화

* 호메로스

그러나 데모스 가운데 누가 고함을 치며 말하는 것을 볼 때면 오디세우스는 홀로 내려치 며 이렇게 야단쳤다. 돌았어, 얌전히 앉아서 너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의 말이나 듣도록 해. 너는 전쟁도 할 줄 모르는 허약한 자며, 전쟁에서나 회의에서나 축에 끼지도 못하니 까 말이다. - 일리아스(일리아드는 영어식 표현)

* 데모스(Demos) = 피지배의 대상으로 사회 & 정치의 주역은 아니다.

* 귀족회의가 정치와 행정을 주도(아레오파고스라는 귀족회의)

* 민회가 있었지만 귀족회의가 민회의 소집 시기, 논의 내용을 결정했다. 민중은 찬반 의견 을 표시했을 뿐이다.

* 재판도 거의 전적으로 귀족이 담당했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레오파고스 의원들이 의회는 법을 수호하고 도시의 많고 중요한 사무를 처리하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사람을 벌하고 벌금을 징수하는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다.“

* 귀족들이 법을 수호하고 집행하고 재판하는 권한을 독점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 민중들은 재판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 아네테 민중의 정치 주도 기반은 솔론이 만들었다.

 

5

3. 사연 많은 아테네 민주화 계속

* 솔론: 귀족과 평민의 대립 원인

1. 사회 경제 문제(극심한 빈부격차)

2. 중갑보별술 도입 & 상공업 발달

3. 평민의 권리 신장을 위해 개혁 단행

400인 협의회 민중법정(Heliaia)준비

민회의 독자성 확보(규정에 따라 정기적 소집)

의제 선택에서 자율성 확보(의사 발언)

행정관 선출에 대한 실질적 권한 확대

다수결(11)로 행정관 선출:이후 행정관 업무 집행 심사

데모스테네스: 그리스인은 법을 보편적인 원리를 구현하는 정의라고 여겼다

본성이란 개개인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불균등하며 또 특이한 성질을 지니지만 또 특이한 성질을 지니지만 법은 모든 사람에게 통례적이고 평등하며 동일하다네. 법은 본질적으로 정의롭고 명예로우며 유용한 것을 요구한다네. 이 법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 와 같은 성질을 지닌 것이 있다면 너나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하나의 보편적인 법령으로서 공포되는 것일세.“

재판에서 민중의 큰 권리 확보

- 항소 법정(처음에는 민회 자체였다가 후에 배심원을 선출하여 구성)

민중은 관리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3. 아테네 민중은 법정 고발 가능

- 시민 개개인의 분별력과 권위 존중

실패: 귀족들은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생각

민중들은 얻은 것이 없다고 불만

페이시스트라토스: 참주정 독재가 아니라 민중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것

망명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낮은 지대로 민중에게 임대

순회 재판제 도입 귀족의 사법권 악화

클레이스테네스: 민주적 개혁을 약속하면서 권력 장악

1. 500인 협의회: 민회의 의사 일정마련, 결의 내용을 집행

2. 부족제 개편: 지역 단위에 근거한 새로운 행정 조직을 만들었다.

(데모스. 트리티스, 필레)

3. 도편추방제: 독재자 출현 방지

민주주의 확고하게 정착

페르시아 전쟁: 해군력 강화를 위해 평민들을 입대시킨다. 평민들이 국가를 위해 활동하자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가들이 등장한다.

에피알데스: B.C. 462년 민중을 위한 개혁

귀족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

권한의 대부분을 민회로 이관했고 이후 민회는 1년 에 최소한 40회 열렸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통해 아테네의 재판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사상범)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 운 신들을 들여와서 퍼뜨렸으며 또한 젊은이들을 타 락시켰다. 형벌로는 사형을 제안한다. ”

배심원을 결정으로 판결났다. 281: 220으로 유죄

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완고하게 무죄를 주장하면서 적은 금액의 벌금을 내겠다고 주장

화가 난 배심원들은 361 : 140로 사형 선고

소크라테스 사형(400년에 사형)

당시의 배심원? 시민은 대략 24만 명이었고 해마다 6000명의 자원자들로 배심원단을 구성해 재판시 일상적 사건 201명의 배심원, 보통 재판 501명의 배심원, 중요한 사건인 경우 1501의 배심원을 꾸렸다.

특정한 계층이나 당파가 결정을 주도할 수가 없었다.

재판에 참가한 사람은 일당을 받았다. 극빈자 & 노인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페리클레스: 민주주의 아버지로 그리스의 학교민주주의 전성기 : 1. 민회의 권한 강화

2. 관직 수당 도입

3. 관리 추첨제: 민중이 실질적으로 아테네를 이끄는 시대를 만들었다.

4.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 아테네 민주주의 역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 아테네 제국주의

* 델로스 동맹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군대 유지를 위해 폴리스 간에 동맹)

델로스 동맹을 반대했던 멜로스를 아테네가 정복: 멜로스의 스파르타 지지로 군대를 파견 한다.

우리가 교섭 상대로서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약육 강식의 원칙과 객관적인 인간 이성의 논리적 필연성이 정의라는 원칙에 따르고 쌍방이 희 망하는 것을 명시할 필요가 있음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테네의 노예제도

최전성기 인구 30, 그 중 노예는 10 20만이었다.

일반 인구 30만 중 시민은 4 5만명 시민 대게 한 두 명의 노예를 거느린 것이다

노예가 집안 일을 거들었기에 민회 참석이 가능했다.

민중 주도 민회는 분별력을 잃기도 한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승리 후 벌어진 사건

아네테 민주주의 비판에는 허점이 있다.

- 아테네 제국주의는 가혹하지 않았다. 아테네가 300여개의 소국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나 지배가 온건했기에 아테네에 헌신적인 속국이 많았다. 특히 속국 민중의 지지를 많이 받 았다.(민주주의 수출)

- 공납금 문제

공납금 = 속곡의 안전 보장 당시 해적이 횡행하고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아테네의 해 군이 절실했다.

- 민중의 분별력 부족 수백 년에 걸친 민회 역사상 치명적인 실수는 몇 차례 없다.

- 소수의 권력자가 통치했다고 해서 실수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 다. ( + 다수의 이익을 정책에 덜 반영)

민주주의 옹호론

민주주의는 지혜롭지도 않고 공평하지도 않으며 재산가들이 역시 통치에 가장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첫째, 데모스라는 말 은 구가 전체를 포함하지만 과두주의라는 말은 단지 일부만을 포함합니다. 다음으로 부자 들은 최상의 재산 수호자들이고 현인들은 최상의 조언자들일지 모르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 도 다중처럼 잘 경청하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과두주의는 다중에게 위험 부담을 주면서도 그 자체는 단지 이익의 최대 몫이 아닌 이익의 전부를 다 차지하지요.

 

6

페르시아 전쟁

전쟁의 명칭: 그리스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짐

현대에서는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이라 쓴다.

헤르도토스가 쓴 역사서: 인키피트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르도토스는 그의 탐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는 인간들이 이룬 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지 않도록 하고, 또 헬라스 인들과 이방인들이 보여 준 위대하고 놀라운 행적들과 특히 그들이 서로 전 쟁을 벌인 원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사)

 

페르시아: 인구 약 3, 4천 만 명, 넓이 5,500,000 제곱킬로미터

그리스: 인구 약 1천 만 명 현대 그리스 넓이: 131,957(한반도 223,646) 제곱킬로미터

페르시아: 이란 고원의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에서 시작

인도 유럽어족 출신의 페르시아인

초기 페르시아는 메디아의 속국이었음

고대 이란인이 그리스인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파르스라는 지역에서 발흥한 집 단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음 페르시아의 명칭의 유래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제국을 이룩했고 페소포타미아 문명을 종합했 음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일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함

 

크세노폰(키루스 대왕의 열렬한 지지자)

페으시아 사람 키루스는 거대한 도시들, 수많은 국민과 민족들을 잘 지배했다. 하여튼 우리가 알기로는 키루스가 있는 곳으로부터 며칠씩 혹은 몇 달씩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키루스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키루스를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기꺼이 키루스에게 복종했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키루스의 신민이 되려 했다.

 

키루스 대왕 사후 그의 아들 캄바세스 1(기원전 529 522)가 계승, 캄비세스 1세가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 수차례 반란 발생하였고, 유력 귀족 출신의 다리우스 1세가 계승

 

왕 중의 왕 다리우스 1

새로운 수도인 페르세폴리스건설 후 페르시아, 메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그리스 등 여러 문화를 융합하여 거대한 왕궁 건립.

페르세폴리스(파르사) 궁전 유적()과 조공 행렬 부조 아케메네스 왕조 때의 수도로, 다리우스1세가 착공해서 3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건축 양식은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 영향으로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알현전 돌계단 벽에는 주요 피정복 민족의 조공 행렬이 새겨져 있다.

 

다리우스, 1(기원전 521 486)

활발한 정복활동 이후 전국을 36개의 속주로 새롭게 편제, 총독 파견하여 행정과 조세 징수를 담당케 함.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감찰관 파견

제국에서 통용되는 주화를 제작하여 상품 유통을 원할히 함

왕의 명령이 신속하게 전달되기 위해 왕의 길이라는 도로 건설: 가장 빠른 길은 사르디스에서부터 리디아’, ‘니느웨’, ‘수사까지 총 2700킬로의 대로임

말을 탄 사자가 9일 이내에 주파할 수 있었음.

상업적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

 

비시툰(베히스톤 산)비문

나는 다리우스 왕이다.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왕 중의 왕이고 페르시아인이고, 페르시아의 왕이다. 다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 엘람, 바빌론을 비롯한 23개국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그들의 왕이 된 것은 아후라 마즈다의 보호를 통해서다. 나는 1년 동안 열하홉 번 전투했다고 아후라 마즈다의 보호 아래 승리했다.”

다리우스는 서쪽 지역 정복을 위해서 기원전 492기원전 479년까지 그리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킴 결과는 그리스의 승리

 

*아후라 마즈다는 여러 부족에 존재하는 차별을 철폐하고 세계를 하나로 통합할 것을 요구,

- 아후라 마즈다는 부족신의 한계를 넘어서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신의 개념임.

- 통치자들이 아후라 마즈다의 명령을 받들어 통합을 추구한다는 주장은 결국 세계 정복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함.

 

크세르크세스 1(기원전 519 466)

아버지 다리우스의 뒤를 이어 그리스를 침공 결국 그리스에게 패배

페르시아 전쟁 패배 이후 페르시아는 쇠퇴하기 시작함

크세르크세스 암살, 150년 가량의 쇠퇴기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군대에게 패배하여 멸망.

 

2. 교전국 그리스

그리스: 500 1000여개의 폴리스로 구성(인구 증가, 해외 식민으로 점차 증가함)

- 그리스인은 본래 자신들을 헬레네스(헬렌의 후예라는 뜻)라 자신들의 나라를 헬라스라 고 부름. 지금도 그리스의 정식 명칭은 헬라식 공화국(Hellenic Republic)

- 그리스인이라는 명칭은 로마인에 의해 불리게 됨. 로마인은 나폴리만의 정착지에서 처 음 만난 그리스인이 바로 그라키아인(Graikoi)였기 때문임.

 

(페르시아 전쟁 이전 주요 폴리스)

스파르타, 아르고스, 코린토스, 아테네, 테베, 밀레토스, 사모스, 키오스, 시라쿠사

올림피아: 4년마다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제우스 신전 제사 후 행사)

아테네: 시민 수가 약 2 4만명 이었으며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민주 정치를 구현하였다.

스파르타: 시민 수는 약 9천 명이었고 소수의 시민이 다수의 피지배인을 지배하였다.

(그리스인의 동족 의식)

- 언어와 혈통

- 종교

- 올림픽

- 정치 체계에 대한 자부심 폴리스에 속한 자유인

 

3. 페르시아 전쟁의 계기

1) 페르시아의 이오니아 지배

2) 이오니아의 반란: 밀레토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의 출세 욕심에서 비롯

기원전 499년 아리스타고라스가 페르시아 함대 200척 지원받고 낙소스섬 점령 시도

점령 실패 후에 참주직 박탈에 대한 걱정, 태도 바꿔서 이오니아의 그리스인을 선동(페르 시아에 대한 적대심 생성시킴. 아테네 지원- 헤로도토스 한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 다수를 속이는 것이 쉽다 라는 명언을 남김)

이오니아가 페르시아군 전선 600척에 맞서지 못했고, 반란은 실패함.

 

4. 페르시아 전쟁의 과정

-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의 1차 그리스 공격

페르시아 함대가 아토스산 앞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함선 300척을 잃고 돌아감.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의 2차 그리스 침공, 마라톤 전투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의 3차 그리스 침공, 테르모필라이 전투, 아르테미시온 전투, 페르시아의 1차 아테네 약탈,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2차 아테네 약탈, 플라타이아, 미칼레(소아시아 사모스섬 옆), 이오니아 해방 전투

 

페르시아 군대(기병, 보병, 궁수)

아테네 군대(보병 중심:시민병, 기병, 궁병은 보조병), 해군

중장보병밀집대(팔랑크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의 2차 그리스 공격,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함대가 아티카로 가는 도중 에게해 섬을 점령하자 아테네인 히피아스의 인도를 받아 마라톤 상륙(보병 25,000/기병 1,000/보조병 100,000)

아테네가 폴리스들에게 군사 지원 요청하자 스파르타는 카르네이아 제전 때문에 늦게 파견 하고 플라타이아가 소수의 군대 지원하고 다른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와 대립을 원하지 않아 마라톤에서 밀티아데스 장군이 지휘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전하는 전투 과정

페르시아인은 아테네인이 구보로 전진해 오는 것을 보자 맞아 싸울 준비를 했다. 페르시아 인은 아테네의 기병이나 궁수도 없이 적은 인원으로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멸망을 자초하는 미친 행위라고 생각했다.... 실제 우리가 아는 한 구보로 공격을 시도한 것은 아테 네인이 그 효시였고 또한 페르시아풍의 복장과 그 복장을 한 인간을 보고 조금도 두려워하 지 않은 것은 아테네인이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리스인은 페르시아라는 말만 들 어도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전사자 6,400, 아테네 전사자 192, 아테네 승

-마라톤 경기의 진실

상식: 마라톤 경기는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42,195킬로미터를 달려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죽었던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의 달리기를 기념.

- 그러나 헤로도토스에 다르면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에서 스파르타(246킬로미터)까디 달려 이틀째 날(3일만에 돌아왔는지 서술하지 않음)에 도착함, 스파르타는 Carneia 축제를 끝내고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함. 헤로도토스는 이후 페이디피데스에 대해서 묘사하지 않음. - 대신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 이후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로 향하는 것을 보고,아테네 전병력이 신속하게 이동하여 페르시아군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전함.

마라톤에스 급사(급사)가 승리의 소식을 전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전함

기원후 1 세기 전기 작가인 플루타르코스 아테네인들의 영광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전한다.

- 헤라이클레이데스 폰티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의 소식은 테르시푸스 (Thersippus of Eroeadae)가 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에우클레스(Eucles) 가 완전 무장을 하고 달렸고, 아테네의 최고 관리 앞에 도착한 후 기뻐 하십시오. 우리가 이겼습니다.” 라고 말한 직후에 죽었다, 라고 전한다.

기원 후 2세기 루키아노스(Lucianos)가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에 전하고 죽었다고 최초로 기록함.

마라톤의 소식을 가져온 페이디피데스는 아르콘들이 전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이겼습니다,“ 라고 말한 후 그의 마지막 숨을 쉬고 죽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는 정확한 거리는 36.75Km. 1896년 약 40킬로미터의 거리를 달리다가 42.195 킬로미터로 정해진 것은 1908년 런던 올림픽 때임.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3차 그리스공격

이집트 반란 진압 후 군대 징집하여 육로를 통해 그리스 침입

총 병력 520만 명을 동원9해군 517000여 명/보병 170만 명/기병 8만 명/전투 보조원 260만 명 등)

페르시아의 재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아테네는 삼단노선을 건조함

기원전 481년 코린토스의 이스트모스에서 폴리스들의 동맹을 맺음(그리스 폴리스의 반정도는 중도나 친페르시아)

총병력 20만 명을 동원(400여 척의 전함, 해군 약 8만 명, 육군 12만명)

페르시아 전쟁 준비 전 신탁 받은 내용

팔라스(아테네 여신의 별명 중 하나)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교묘한 재치로 애원한다해도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리라. 그래서 나는 재차 그대에게 강철 처럼 단단한 말을 하리라. 케크롭스 언덕(아크로폴리스)과 신성한 키타이론 산골짜기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지만 트리토게네이아(아테네 여신의 별명 중 하나), 멀리 보시는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 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

테미스트텔레스 중심 세력 왈

나무성채는 배를 말한다. 아테네를 떠나 살라미스로 이주

원로들 왈

나무성채는 아크로폴리스를 말한다.

-육군은 테르모필라이 계곡에서 해군은 아르테미시온 곶에서 대기, 가능한 한 좁은 곳으로 페 르시아군을 유인해 싸우기로 결정함.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테르모필라이 전투의 사령관

페르시아군이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하였고 스파르타인 300명을 포함한 4000명의 병력으로 페르시아군 300만 대군을 맞섬.

영화 300등으로 끊임없이 기억됨. 그러나 300은 역사를 심하게 왜곡함.

 

5.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델로스 동맹

1) 델로스 동맹 아테네 제국주의

- 기원전478년 아테네가 주도하여 에게해와 소아시아의 폴리스들을 규합해 델로스 동맹 을 결성, 델로스섬에서 동맹회의가 열렸고 동맹국들에서 거둔 기금을 관리하는 금고는 아폴론 신전에 설치한다.

- 소아시아와 에게해에서도 페르시아군이 모두 격퇴되자 전쟁의 위협이 없어졌고 일부 폴리 스들은 델로스 동맹의 필요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 많은 폴리스들은 아테네의 힘이 거대해지는 걸 염려, 기원전 465년 타소스는 공식적으로 동맹 탈퇴. 이후 낙소스, 사모스, 칼키스 등도 탈퇴 시도

- 아테네의 응징, 3년 동안의 타소스 공격 끝에 함락

-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옮겼고 동맹국들은 아테 네 해군의 유지 비용을 계속 지불했다.

- 아테네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동맹국들에 대한 아테네의 지배가 심해졌다.

- 금고의 돈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완성시키고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는데 사용됨.

2) 아테네 민주주의 발달

* 아테네 민주정치의 발전 과정

- 폴리스 성립 초기: 귀족들로 구성된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정치 주도, 민회는 동의 기구 에 불과함

- 솔론의 개혁: 평민에게 피선거권 부여, 400인 협의회 창설(민회의 예비 모임). 민회 독립 성 강화, 항소 법정 창설

-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지역에 근거해서 행정 구역 정비. 500인 협의회 창설, 도편 추 방법 제정

- 에피알데스: 아레오파고스 회의 권한 축소

- 페리클레스: 수당제 도입(배심원, 관극 관람). 관직 추첨제.

*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

페리클레스가 주도한 기원전 5세기.

- 민중이 정치 주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페르시아 전쟁기 해군의 육성 때문이었음.

- 해군에 수병으로 참가하게 된 민중은 정치 권리 요구

- 민중이 민회를 장악, 민회가 입법, 사법, 행정 주도

- 관직 추첨제, 관직 수당, 관극 수당을 통해서 민중의 정치 참여

3) 문명의 중심지 이동

- 페르시아 전쟁 이전 문명의 중심지는 메소포타미아 빛은 동방에서

-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철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

- 페르시아 전쟁을 전후하여 이오니아인이 대거 아테네로 이주함

- 아테네에서 철학, 문학, 과학의 발달(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아테네로 이주한 사람 들, 아스파시아,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외부인들)이 발달하면서 서양 문명의 원 류 형성

4) 그리스인의 동족 의식 강화 페르시아 전쟁 이전 동족 의식 약함

-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도 그리스인 동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언어, 종족, 종교, 관심

- 페르시아 전쟁 말기 아테네 사절이 스파르타인에게 한 말

아테네인이 종전을 위한 협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거절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들의 위대한 신들의 조각상들과 신전들이 파괴되었는데 이런 결과를 가져온 적들과 연맹을 맺을 수는 없고 이를 되갚아 주어야 할 것이다. 둘째 같은 피와 말과 공동의 의 식과 희생 제사와 생활 습관을 가진 헤레네스 사이의 유대 때문이다. 이를 배신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페르싱 전쟁 이전이나 이후에도 그리스인은 끊임없이 서로 싸운다.

-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그리스인 절반이 전쟁을 기피하거나 심지어 페르시아 편을 듬(역 사7138)

- 동족 의식이 약했음을 의미

-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지식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이긴 이유 논의

- 페르시아인(동방인)에 대한 규정

1. 물질적 풍요와 사치를 탐닉하는 자들

2. 군사적으로 허약한 자들

3. 노예 근성을 가진 자들

4. 합리적 사유 능력이 없는 자들

5. 잔혹하고 무지한 ㅏ들

6. 부도덕한 자들

- 그리스인에 대한 규정

1. 검약하고 절제하는 자들

2. 군사적으로 뛰어난 자들

3. 자유를 누리는 자들

4.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자들

5. 교양있고 도덕적으로 뛰어난 자들

*그리스인의 동족 의식 오리엔탈리즘의 원형

- 서양인들은 민주적이고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반면 동양인들은 전제적이고 수동적이며 타 율적이라고 주장

- 서양인들에게 페르시아 전쟁은 아시아를 물리치고 유럽을 구한 대사건으로 평가됨

-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첫 번째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열등하다라는 서양인들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다. 두 번째 동양은 획일적이며 게으르며 정적이기 때문에 동적이 서양이 동양에게 가르침을 주 어야 한다.

- 존 스튜어트 밀 왈

영국 역사에서 헤이스팅스 전투보다 마라톤 전투가 훨씬 중요하다.“

- 서양을 주제로 두고 동양을 교화나 서양의 삶에 맞춰 적응시켜야 하는 존재로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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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영원한 로마 제국

세계사 경이 로마 제국

제국의 기반,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의 수립

200여 년 지속된 팍스 로마나

정복보다 포용 택한 보편 제국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제국 후원

*로마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 정치사 공화정 정치(귀족 + 인민이 권력의 근점을 이룬다), 제국 운영의 원리(보편 제국, 유럽의 근간 마련)

- 실용 문화 , 토목과 건축

- 고전 문화 종합 그리스 문화를 종합하여 근대에 전수,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

1. 세계사 경이 로마 제국

징기즈칸 몽골 제국 150년만 유지

로마 제국: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붕괴

B.C. 202A.D. 800년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

의문점 : 로마는 476년에 멸망했다.

*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부른 나라의 사람들은 1453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로마인이고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라고 생각했다.

비잔티움 = 유럽인의 동로마제국 무시

B.C. 753 A.D. 1453년 존속기간 2200

로마 제국이 이렇게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은?

* 로마라는 국가의 명칭

로마의 명칭(플루타르코스)

1 1 로마라는 이름의 기원

1펠라스기아가 로마에 정착하고 그들을 군사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지었다.

(그리스어 힘을 의미)

2트로이인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로마라는 여인이 배를 태우고 정착을 요청해 그녀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

3토로이 여인 가운데 로마라는 동명이인이 있다.(이탈로스의 딸, 텔라푸스의 딸, 아스카 니오스의 딸)

4로물루스와 이름이 비슷한 여러 사람이 창설자이다.

5창설자가 로물루스(유력)

1 2 로물루스 출생설

1아이네아스 + 텍시테아의 아들 동생 레무스와 함께 어린 시절 이탈리아로 건너옴

2트로이의 여인 로마의 아들

3아이네아스의 딸 아이밀리아 + 마르스의 아들

4알바와 타르케티우스가 남자의 형상을 보고 딸을 바치라는 신탁을 받았으나 시녀를

바쳤다. 시녀가 쌍둥이를 낳았고 양육은 늑대가 했다.

5아이네아스 18대손(현재 통용되고 있는 설)

1 3 현대 학자들의 설

로마라는 명칭이 먼저 존재하고 로물루스라는 명칭은 거기에서 유래

티베르 강의 옛 이름 Rumon이나 Rumen에서 유래

움브리아어 Ruma, 흐르는 물(의 도시)

에트루리아의 ruma에서 유래, 이 단어는 늑대를 의미함.

urosma, hill. urobsma(urbs 도시)

 

S.P.Q.R(S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의 원로원과 대중

기원전 80년 경부터 쓰이던 국호(이전 국호는 Roma)

고대 문헌과 유적에 풍부하게 나타나며 310년대 콘스탄티누스의 동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6. 카피톨리누스 박물관에서

- 로마인의 조각상은 사실주의를 엄격하게 추구한다.

- 조상이 죽으면 imago(마스크)를 만들었다

- 마스크를 사당에 보관. 가문의 인물들을 흉상으로 만들어 집을 장식

공공 건물에도 많은 흉상을 설치한다.

키케로의 흉상(1C)

2. 고대 작명 방식

2-1 다른 사람이 지어줌

1. 기독교: ”최초의 그리스도 교도 안티오키아 교회의 신자

- 안티오키아 교회의 신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붙여준 명칭

-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

2. 그리스: 헬렌의 후예라는 의미의 헬레네스라고 불렀는데 로마인이 그리스인이라 부르기 시작

- 현재도 그리스인은 자기 나라를 헬라스 공화국(Hellenic Republic)이라고 부른다

3. 게르만족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북동 갈리아의 한 종족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

- 1세기 이후 갈리아 족 북쪽에 사는 모든 종족을 게르만족이라고 부름

4.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은 도시 이름

- 이 이름을 이용하여 동로마제국을 지칭한 것은 1555년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 (Hieronymus Wolf in 1555)가 처음

1-1 여성의 이름 차용 여성의 생식력이 만물을 낳았다고 생각

5. 유럽 에우로페(Europa)”

- 티로스인(페니키아인)은 에우로페가 끌려간 곳이라 하여 크레타 지역을 유럽이라고 불렀다.

6. 아시아 아사리아 시대 언어 asu 해가 뜨는 곳

1. 프로메테우스의 아내 아시아에서 아시아라는 이름이 유래

2. 마네스의 손자이자 코티스의 아들인 아시아스의 이름에서 유래

7. 아프리카

- 고대에 리비아라 지칭했다.(여성 이름)

- 그리스인들이 바다의 포말(아프로스)“ 너머의 세계를 아프리카라고 불렀을 수도 있 다.

- ”먼지, 을 의미하는 아랍어 afar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 로마 지배 전

- 로마는 60007000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종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다.

- 각각 독특한 문명을 발달 시켰다.

- 언어, 정부 형태, 종교, 사고 방식등이 다르다.

- 쉬지 않고 싸웠다.

그리스vs트로이, 이집트vs히타이트, 그리스vs페르시아, 스파르타vs아테네, 게르만인의 남 하

- 사람들 사이의 교역이 존재, 교환수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화폐 존재

- 저울을 가진 환전 상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했다.

* 로마 지배 후

- 종족의 차이 극복

- 문화의 통일 (기독교) 라틴어 & 그리스어 언어 통일

- 로마법으로 법적 보호를 받았다.

-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는 인류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고 언급했다.

- 보편 제국으로 유럽 문화의 기반 마련

현재 서양의 정치제도, 법률, 종교, 문화생활의 기반 형성

나라는 달라도 유럽인이라는 동질 의식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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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화정 정치 구조

초기 왕정 7명의 왕(기원전 753 509)

로물루스 (첫번째 왕)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가 루크레티아 겁탈을 해서 왕정이 폐지되었다. 공화정 시작

공화정의 정치 구조 2명의 콘술(민회에서 선출 통치권, 군대 통수권, 원로원, 민회 소집 권, 제정 집행권)이 통치

그러나 독재는 불가(상호 견제 및 원로원과 민회의 견제) - 원로과 민회

콘술(집정관), 통령. 임기 1. 원로원은 가부장 100명으로 구성. 전직 관리들 중

@ 원로원

- 국고 관장: 세입 & 세출 규제

- 중요 범죄에 관한 조사 & 재판

- 외교권

- 원로원의 결의 (국정 주도)

- 원로원의 비상 결의(계엄령)

@ 민회

- 성인 남성으로 구성

- 관리 선출

- 법 제정

- 국가 중대사 결정(전쟁)

- 외교 문제

1. 세계적인 경이, 로마제국

* 로마의 민회는 복수 쿠리아, 켄투리아, 트리부스(인민회, 평민회) 트리부스 평민회에 입법 권(호르텐시우스 법) 호르텐시우스 법으로 귀족과 평민의 법적 평등 구현

* 콘솔, 원로원, 민회은 견제와 균형을 유지

공화정(현재의 공화정과 차이가 있음). 국가는 공공의 것이고 귀족과 평민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했다.

2. 제국의 기반, 포에니 전쟁(3차 전쟁, 기원전 264기원전 146)에서의 승리

* 기원전 270년 경 이탈리아 반도 전체 통일로 지중해 재해권을 장악했던 카르타고와 대립 은 불가피 했다. - 카로타고의 로마 팽챙 저지

* 포에니 전쟁(2차 전쟁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코끼리를 동반. 10년 동안 이탈리아 본토를 유린)

3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기원전 146)하며 그리스, 이집트, 아시아 일대를 정복한 대제국 건설

* 통일 과정 라틴인, 에트루리아, 삼니움, 마그나그라이키아 차례로 정복

3.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의 수립

* 귀족의 대농장 조성으로 부를 얻었지만 평민(자영농)은 오랜 군복무로 몰락했다.

- 병력 부족, 도시 문제 발생(대농장인 라티푼디아- 귀족들이 평민들의 토지를 사들여 대 농장을 이룸)

* 그라쿠스 형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호민관) 농지법

기아누스 그라쿠스(호민관. 형의 농지법을 부활시키고) 곡물법(세계 최초의 복지법)

* 귀족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영농 체제 복원을 위해 노력

공화정의 파국

귀족과 평민의 계급 대립 극심

장군들이 정치 체제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권력 장악

100년에 걸친 내전 시작

마리우스, 카이사르 (평민파)

술라, 폼페이우스 (귀족파)

Civil War(내전)

카이사르 암살(기원전 44) 후 내란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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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오스와 클라오파트레의 군을 물리침)

아우구스투스(신이 선택한 사람. 종신 집정관, 종신 호민관, 사실상의 황제)

- 원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구세주, 살바토르, 세이버)는 카이사르의 누나의 아들

- 그는 자신은 프린켑스라고 불렀다.(1시민이다)

- 종신 집정권 & 종신 호민관 제정시대

- 원로원에게 제국 반에 대한 통치권을 주었다. - 원수정(프린키파투스;황제정이다.)

- 1 시민(프린켑스)

* 원수정은 공화정의 외피를 입고 있다

콘술을 비롯한 공화정의 관리들을 계속 선출

원로원은 제국의 반에 대한 통치권과 입법권 장악

민회의 약화로 원로원이 권한 접수

원수정은 실질적으로 제정이다.

군사와 제정을 장악함.

4. 200여 년 지속된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란 뜻)

* 오현제의 등장 로마의 평화(아우구스투스서 시작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까지)

문명의 확산 유럽 지역을 문명화(켈트족과 게르만족 로마화) 리메스(목책을 쌓음)

- 법률 & 건축의 실용 문화 발전

- 12표법: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법으로 규정 & 조정

- 시민법: 로마 시민이 부당한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다.

- 만민법(자연법): 외국인도 로마의 시민과 같이 로마법을 따르시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로마법 대전 편찬. 성소피아성당 건축

로마법의 원리를 지중해로 확장시켜 힘과 폭력에 근거해서 작동하던 고대 세계를 법에 의해 작동하는 세계로 변모시켰 다.

토목 & 건축의 발달 : 로마 제국 도로망 85,000킬로미터

상수도. 수도교. 목욕탕.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을 넉넉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이 상수도 시설들을 보라! 그 리고 어디 한 번 이것을 그리스의 건축물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교해보라! 그러면 이 시설이야말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건축 물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을 수 있으리라!”

-1세기 로마의 상수도 관리관 프론티누스

- 콜로세움, 키르쿠스 막시무스(대전차 경기장), 극장: 거대 건축물 가능 공법 아치, 콘 크리트 덕분이다.

- 세고비아 수도교, 트리어 목욕탕, 아를 원형 극장,

오랑주 극장(루이 14우리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

5. 정복보다 포용 택한 보편 제국

로마의 치안, 도로망으로 교류 및 교역 증가.

로마시에 많은 동방인들 이주 주민의 다수가 됨

원래의 로마인은 사라졌다. 이주인들이 정통 로마인 행세를 했다.

로마시 거주자 90%가 외국인

출신이 다양하여 언어, 생활방식, 종교 등에서 이국적인 요소가 넘쳐났다.

로마에 외지 사람들이 홍수를 이룬다.

*카라칼라 212 년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었다.

정복한 사람들을 진정한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

로마의 시민권 확대

- 로마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시민권 수여

- 로마군 복무자

- 노예

- 노예를 쉽게 해방

- 해방된 노예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

- 피호제

- 노예가 해방된다 하더라도 주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봉사

- 여러 경제적 부담

- 반쪽 자유민 그러나 그의 자식은 로마 시민권자가 됨

- 시민권 부여가 형식에 그치지 않음. 속주민 출신이 황제, 원로원 의원이 많이 됨. 많은 지 식인도 배출됨

6.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로마제국 후광

* 2세기 말 팍스 로마나가 흔들렸다.

게르만족 남하: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황제

사산조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일대 점령

서기 235 284: 군인 황제 시대 50년의 위기

* 로마의 중흥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권 강화 추구

- 원로원 완벽히 무력화

- 도미나투스(도미누스)

- 황제가 제국과 신민의 주인으로 통치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해서 비잔티움으로 천도해 이름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 함

- 니케아 공의회

- 게르만족의 남하로 압박

- 중흥을 위해서는 동방의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했다.

디오클레티아노스는 사분 체제로 로마를 다스림

훈족 아틸라의 압박

게르만족의 남하로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 오토아케르가 서로마 마지막 황제 아우구스툴르스를 폐위시킴으로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로마를 차지한 지배자들은 동로마 황제의 비준을 받았다.

교황도 동로마 황제가 통제

476년 서로마 멸망 이후 게르만족 대이동

메로빙거 왕조

피핀 카를루스 왕조. 교황령 기증

동로마 내흥

이레네의 섭정

옛서로마 지역 영토 회복

카를링거 르네상스 문화의 중흥

800년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

유럽의 아버지라 불림

오토 1

962년 신성로마제국 건설

동로마 제국 =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 근대 유럽학자의 동로마 제국 무시

러시아의 이반 3: 러시아가 로마를 계승한다

모스크바 = 3 의 로마

미국의 의회당이 있는 언덕 캐피톨: 로마의 신성한 언덕

1달러 동전 :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라틴어 사요

미국 정부 문장

신은 우리가 하는 일을 좋아하시니라. ANNUIT COEP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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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 중세의 번영을 가져온 봉건제도

게르만 왕국들의 발전

* 로마는 라인강 & 다뉴브강 이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모두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 50 여 개의 크고 작은 부족 존재(ex: 앵글족, 프랑크족, 반달족등

* 국경

- 로마와 평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국경선을 중심으로 수세기 동안

- 교류를 하며 문화 사이의 융합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 게르만족 사회의 변화 & 인구 증가로 점점 남쪽 땅을 동경하기 시작

* 3세기 군인황제시대 혼란기 약탈이 빈번

* 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의 중흥으로 일시적으로 방어

* 370년 훈족의 침략으로 고트족이 남하하여 로마의 국경선은 무력화되었고 여러 게르만 족이 로마에 왕국 수립

* 대부분의 왕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 4 6 세기 대부분 로마에 동화되거나 다른 부족에게 정복당해 사라졌다.

* 5세기 프랑크족, 앵글로 색슨족이 남하하면서 새로운 국면

* 프랑크족은 원주지를 버리지 않고 팽창하였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인과 융합을 추 구했다.

 

2. 프랑크 왕국의 발전과 붕괴

* 메로베우스 왕조(클로비스)

국가를 왕의 개인 소유물이라 생각 사후 분할 상속, 무능한 왕

왕권 무력화 실질적 통치권이 궁재에게 넘어감.

*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투르 푸아티 전투 (이슬람을 막아냄)

* 게르만족의 종사제를 제도화 주종 관계를 맺고 은대지 지급한다.

이로 인해 봉건제도의 근간이 마련된다.

*피핀 (카롤루스의 마르텔루스의 아들/카롤루스 왕조 수립(피핀의 아들))

*카롤링거 르네상스 : 소문자체 도입

* 카롤루스 대제 로마문화 + 기독교 + 게르만 문화

새로운 문화 형성

이후 유럽 문화의 원형 형성

*카롤루스 사후에 후손들이 동프랑크(독일), 서프랑크(프랑스), 중프랑크(이탈리아)로 쪼개져 국가의 공권력이 무너져 대혼란(노르만족, 이슬람 족 마자르족이 쳐들어 오자 안전과 질서 추구하고자 힘이 강한 자에게 의지한다. (투탁:맡긴다) 이는 봉건제 발전의 중요 배경이 된 다.

3. 주종제도와 은대지 봉건제로

*은대지 원래 당대에만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왕권이 약해지자 봉신은 토지 세 습 시작하자 독자적 통치 시작되어 불수불입권

*서임식 제도화(주군 영지의 중심지)

신종서양 충성서약

*쌍무적 계약 관계 주군은 봉신에게 봉토 & 재물 하사로 부양, 붕신은 충성 & 부조 & 조언의 의무를 진다.

*서로 의무를 지기 때문에 의무를ㄹ 게을리 할 시 계약 철회 가능하자 다중 계약 가능해

시간이 흐를수록 주종 관계의 그물망이 매우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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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원 제도의 형성과 발전

장원의 형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3세기 이후 콜로누스가 부자유 소작인으로 전락

* 로마의 황제는 원적지와 토지에 긴박하는 칙령을 내림

* 토지에 긴박, 지주 동의 없이 재산 매도 불가

* 지주는 세금 징수권 활용 준사법권 행사

콜로나투스 제도 발전

* 외침, 내부의 혼란 공권력 약해짐

* 유력자에게 투탁하여 생존 농민의 예속화

농노 등장

* 봉신은 봉토에 관한 소유권 & 통치권을 가져간다

- 부역, 공납 강제

- 세금 징수, 재판권 행사

- 경제외적 강제 수행

농노제 부역이 제일 중요

- 제조 부역

- 수송 부역

- 경작 부역

영주와 농노의 관계

- 잡세, 상속세 영주 독점 소유물(제분소) 이용 대가 지불, 헌금 잡다한 의무

- 가족 형성, 영주의 보호, & 텃밭, 보유지 평생 경작 & 상속, 공동지 이용

망스 : 공동지 이용권을 가진 농가

장원의 기본 단위로 기능

5. 삼포제 등으로 급등한 농업 생산성

 

 

장원제 형성 & 발전

- 농업 생산성 증대

- 중세의 농업 혁명

- 생산성 2배 증가

(심경 쟁기, 농사에 말 사용, 방아 사용 증대, 삼포제(춘경제, 추경제, 휴한지))

촌락 공동체 발달

- 영주 직영지 분활 경작 현물 & 화폐지대로 받는 것이 유리하다 판단

순수 장원제, 지대 장원제

- 인신 예속의 약화

긴 지조의 쟁기질

 

 

가축을 이용한 농사

삼포제 운영

목초 & 임야 관리

영주와 계약 영지 명세장

농민 협상력 강화

- 촌락 공동체의 발건, 농민 권리 기록(현장)

흑사병 확대

14 6세기 계급 투쟁 발생

- 영국형, 프랑스형 동부 유럽형

6. 인구 증가와 도시의 탄생

7. 흑사병 덕에 커진 농민 발언권

흑사병으로 인해 급격한 인구 감소

농노는 처우 개선을 원했지만 영주는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착취

와트 타일러의 난

자크 쾨르의 난

독일 농민 전

계급 투쟁을 겪으며 신분적 예속 크게 완화 장원 서서히 해체

농도에 대한 신분적 예속은 프랑스 혁명에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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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대의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의회제도 수립

대의 기관에 주권이 있다는 개념의 뿌리

대의제: 의회를 구성해 국민의 주권을 대신 실천하게 하는 제도

중세시대가 인류 역사상 독특하게 공헌한 것: 스콜라 철학의 발전

고딕 양식의 발전

기독교 문화의 성립

대학의 발전(학문)

의회제도의 발전

민주주의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중세 초에는 왕이 모든 것을 통치. 왕권 봉건제도들이 발전.국가 공개념이 없었고 사적 개념이 있었다. 국가 공개념의 제도적인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대의제이다.

대의제: 선출된 대표들이 회의체를 구성하고 그 회의체가 국정 운영에 참가하여 나아가 주도하는 것(매우 중요. 그러나 개론서에 달지 않음)

대의 기관의 주권 관념은 (기독교 전통 + 로마 정치 전통) 공의회가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논의하면서 공식화

교리 통일 & 확정(니케아 공의회)

주교(선출직) 단 모임을 전 제국으로 확대&제도화

선출된 주교의 회의체 구성. 전제 교회 대표 대의 기관

로마법

@대의제 개념 발전에 기여한 로마법

인민주권의 개념

시민의 국가 운영 참여 공화정기 민회에게 최고의 권력을 준다

원수정기 황제는 인민의 비준을 받아야했다. 법에 의한 통치

중세 초기에는 왕정(왕이 주권을 가짐)

12세기 황제() VS 교황권 우위 논쟁 발생

휴구치오(황제파)

하느님이 황제직과 교황직을 설치, 각자에 적절한 영역배분

황제권은 인민과 제후에게서 나온다

헨리 브랙튼(황제파)

군주가 뜻하는 것은 곧 법의 효력을 갖는다.”

군주나 왕의 주재 아래 이루어진 제후들의 조언과 동의 그리고 신민 전체가 합의하여 규 정하고 인가한 것은 무엇이든 법의 효력을 갖는다.”

(알라누스. 에기다우스: 교황파)

기독교 사회가 통일체를 유지하자면 우두머리는 한 명이고 그가 교황이다.

군주는 법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 - “교황은 법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

교회 문제의 최종적인 주권은 공의회에 있다.

- 공의회는 신자들의 전체 대표

- 신앙과 교회 전체의 복리에 관련된 중대한 문제 결정

- 교황도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 1418)

13세기 왕권의 성격에 대한 논의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발견

정치학 : 혈연적, 지연적 결사체들인 가정과 촌락으로부터 성장한 가장 발달된 사회 공동 체 국가 -

신의 명령이 아닌 구성원들의 필요로 만들어진 결사체

인민의 의사가 정치 권력의 원천

인민이 국가 운영에 필요한 규칙과 법 제정 & 수정 가능

마리실리우스: 인민 전체가 최종적 주권 소유

인권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평민 주도의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여기지 않았다.

모든 전체는 그 부분보다 위대하다. 따라서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거부할지를 판단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민 집단 전체의 판단이 일부 집단의 판단보다 우월하다.”

2. 신분제 의회의 등장

유럽의 왕은 재정 문제에 대한 조언 & 협조를 위해 상인들을 소집

존왕은 각주에서 기사를 소집하여 나랏일을 논의하게 하였다.

대표 선출하고 대표가 권한을 갖는다는 인식

13세기 교회 법학자. 대표는 선거구민에게 전권을 위임받는 존재

이 개념하에 정치 제도 가정 먼저 발전한 나라 영국

13세기 영국에서 팔러먼트’ = 협의하다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생겨남

영국 대회의

- 왕이 재판관과 보조관 주요 관리를 대동하고 대제후와 고위성직자를 만나는 모임

- 주요한 법 제정, 세금 부과 시 대회의 동의 필요

시몽드 몽포르

- 헨리 3세에게서 반란 1258

- 1265, 각주에서 기사 2. 시민 2. 대표 선출

- 고위성직자, 대제후들과 회동

- 선출된 인민의 대표가 최초로 의회에 참가

에드워드 1

- 의회 폐지하지 않고 발전 시킴

- 1295년 모범의회 참가한 대표의 범위가 이전보다 넓음

만인의 일은 만인이 승인해야 한다.”

모범의회

- 1297년 영국의 중요한 원칙 수립

대주교와 주교 및 그 밖의 성직자(1신분)들과 귀족, 기사(2신분), 그밖에 모든 도시와 왕 국의 자유민들(3신분)의 선의와 동의가 왕의 과세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선언한 것

필리프 4

- 영국과 가스코뉴를 두고 전쟁 발생

- 사제들에게 세금 부과하여 전쟁 비용 마련

- 보니파키우스 8세 반대 1302년 삼부회소집

- 삼부회의 소집권자. 해산권자는 왕

- 신분별로 구성된 삼부회(신분별 투표)

보니파키우스 8여우처럼 교황이 되어 사자처럼 지배하다.”

3. 17세기 영국에서 근대 의회 탄생

영국 의회

- 왕에 대한 자문권 제도와

- 새로운 세금, 법령 제정 시 의회의 동의 필수

- 14세기 중엽 양원 성립

제임스 1

- 의회와의 대립

- 왕권신수설

- 30년 전쟁 신교도 편

* 찰스 1

- 의회의 권리 청원 제출(의회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 의회 없이 세금 부과

- 잉글랜드 국교회는 종교 강요

- 스코틀랜드의 봉기로 돈이 필요해진 왕은 의회 개최했지만 왕권 침해에 격분하여 32ㅜ 만에 의회를 해산(단기의회)

- 의회는 불법적 과세 폐지, 고등 종무관 재판소 철폐, 국왕 측근 대신 체포

- 3년 회기법. 해산 반대법

장기의회(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의회)

- 스스로 소집권, 해산권 가짐으로 신분제 한계를 벗어났다.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영국 최초 공화정)

- 네이스비 전투(내란에서 찰스1세에게 승리)

크롬웰의 아들 리처드

- 왕정 복고

- 찰스 2세 친가톨릭 정책 VS 의회는 심사법(영국 국교를 믿는냐, 아니냐) 1673과 인신 보호법(왕이 함부로 사람을 가둘 수 없다) 제정 1679

- 제임스 2세 친가톨릭 정책 강화 심사법, 인신 보호법 무시한다.

* 왕의 딸 메리의 남편 오렌지공 윌리암1688

- 명예혁명.

- 권리장전(의회 안의 국왕)

국왕의 법률 정지권, 특사권,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 상비군 등 모두 위법

- 의회의 시대가 온다.(의원내각제가 시작되는 개기가 된다)

영국은 가장 먼저 의회 발전을 이룩한 나라

대의제, 신분제 의회

- 인민주권의 원리에 입각한 의회제도는 유럽과 비유럽을 구분하는 척도

- 산업혁명 성공 중요 원인

일찍이 근대적인 의회제 확립

사회 & 정치의 불안 제거

- 브라질, 아르헨티나

19세기 번영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사회 정치 불안이 지속되면서 발전하지 못하고 변방 국가로 전락

4. 유럽 경제 발전으로 이어진 의회제도의 확립

 

6 장 근대 문화를 태동시킨 리네상스

지중해 무역의 부활과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번영

- 중세는 1453년에 끝난다.

- 근대는 언제부터인가. 476 1453(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시점

- 르네상스 시대(1350 1550): 근대를 탄생시킨 문화 운동

새로운 시대를 연 지표로 사용할 수 없다.

중세 말기에 의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세계를 문을 연 시대 라고 인정할 있지만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 홉스 봄 1726(영국의 산업혁명)

1789(프랑스 혁명)2중 혁명에 의해 중세적 질서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었 다

- 르네상스는 서양 중세사 파트에 가 있다. 새로운 근대 문화의 탄생

 

- 르네상스(다시 태어나다는 프랑스의 말): 그리스 문화나 로마 문화가 다시 재생된다는 뜻

- 남종국 (베네치아 상인들, 지중해 연안들)

- 서양 고전 문헌학(정기문) -르네상스시대의 문필 활동에 대해 다뤘다.

-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의 완전한 신 중심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의 이동하는 시기

1588 - 1603(엘리자베스1세 통치: 세익스피어 시대 때 영국왕 동인도 회사를 만듬. 미국의 버지니아.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격파. 대서양 무역의 규모가 지중해 무역을 능가. 대서양이 세계 역사의 중심 시대를 연 것은 바로 이때. 고대 시대는 지중해 무역 성황)

피렌느: 벨기에 태생 1930년 서양 중세 도시란 작품을 씀

: 무함마드(이슬람 문명의 상징)가 없다면 사를마뉴(카롤루스)도 없다.

: 이슬람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유럽의 독자 문명 창출

: 11세기에 안정이 찾아오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동양과 원격지 무역이 부활하고 도 시가 새로 탄생되며 전통적인 교역망이 쇠퇴한다. 그러나 중세 도시는 기능한다.

: 이탈리아, 아프리카,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를 연결하는 원거리 무역의 중단

: 아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전통적 교역망 쇠퇴

: 그러나 중세 도시는 단절보다는 연속의 가능성, 스칸디나비아, 발트해, 흑해(카스 피해), 이스람 무역로 개척되었다는 사실을 피렌느가 밝혔다.

: 서방은 노예, 목재등 1차 산업 가공물은 동방으로 동방에선 향신료나 사치품이 서 방으로 거래되었다.

* 1000 1300년은 중세의 전성기

* 교역의 단점. 지중해 교역보다 왕래가 힘들고 운반 비용이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다.

* 서기 1000년 극적인 변화: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혼란이 끝나고 유럽에 안정과 번 영이 찾아온다.

* 1000년에 뒤이은 세 번째 해가 다가옴에 따라 거의 모든 지방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탈 리아와 갈리에서 교회 건물을 개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당들이 옛날에 매 우 튼튼하게 지어져 개축할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치열한 경쟁심 때문에 인근 교회보다 더 호화스러운 교회를 갖고 싶어 했다. - 브루고뉴 연대기 작가

인구 증가 10004,200

13007, 300

(현대 유럽 약 75, 러시아 15, 터키 85)

* 시장 형성, 원격지 무역 부활

지중해 무역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고대 로마 때부터 동양과 서양을 연계하는 세게 최대의 무역

16세기 전까지 지중해 장악한 자들이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인구를 통해 본 중세 유럽

- 대체적으로 작은 편

- 1만이 넘는 도시, 60 70

- 1250년 유럽 최대 도시 파리 인구 10

- 5 10:프랑드르의 겐트, 브뤼헤(부루게), 이탈리아 도시들 피사, 밀라노,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 1500년 베네치아 30, 밀라노 25, 피렌체 20

- 런던은 8, 파리는 20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이탈리아 도시 국가인 피렌체, 밀라노, 교황령, 베네치아, 나폴 리가 주도

베네치아가 가장 먼저 두각을 보였다.

8세기부터 비잔티움, 이집트 등에서 직물, 목재, 향신료를 구입하여 수출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특권을 제공받아 동지중해의 최강자로 성장(이슬람 & 노르만 때문에)

십자군 전쟁으로 성장:1096 1270(투르반이라는 도시에 클레르몽 공의회를 설립)

- 인구 팽창이 시작되며 힘이 남아 경제적 이익을 노린 면도 있다.

1차 십자군 원정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 같은 국가는 전쟁이 교류를 방해하여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시작 후 십자군을 도왔다.

제노바, 피사는 1차 십자군 도움 특혜로 소아시아 일대에 상관 세울 권리를 획득,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도음으로 특혜. -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부 할양, 라틴인이 세운 제국에서 자유롭게 거래(이 도시가 처음으로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해 무너졌다. - 라틴 제국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베네치아는 크게 성장하여 지중해 무역 주도 자본 축적 금융 발전

제노바는 4차 십자군에 의해 쫓겨난 비잔티움 황실을 도왔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복원 도움 주고 거류지를 받았고, 흑해 통행 보장받음.

2. 피렌체의 성장과 번영

무역의 선도자, 선진적인 제조업자

베네치아 : 조선업, 조선공만 16000, 모직물, 견직물, 유리, 거울등

피렌체 : 모직물, 금융(1300년경부터)

이탈리아 상사들은 영국 왕실에 접근하여 양모를 이탈리아로 수입할 수 있는 특 권을 얻는다.

모직 매매 길드, 모직 제조 길드 노동자 3만 처음피(방직 노동자) 반란. 최초의 염색 길드

교황청의 금고 역할로 유럽 전역의 상업망을 견고하게 만들었고 최대 자금의 금융 회사로 성장

오스만 튀르크, 베네치아 견제 위해 피렌체 지원, 피렌체는 지중해 무역의 새로운 강자로 성장

1350년의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은 피렌체의 경제 부흥기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의 부흥 현상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이탈리아가 경제적 성장의 배경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인문주의의 성장과 발달

인문주의:

- 고대 로마: 수사학을 위주로 한 인문학을 가르치는 그리스의 교육을 수용하면서 그 명칭 을 후마니타스(키케로의 번역)라고 하였다.

- 후마니타스(키케로 이래): 1. 시민과 인간으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덕을 함양하 기 위한 기본적 교육 인문학 중심의 기본 교육

2. 모든 인간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과 호의를 의미 인본주 의에 근거한 박애.

서로마 제국 멸망으로 사라진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이 부활하여 스콜라 철학이 생긴다. 로마 법학의 전래

토마스 아퀴나스 이성 + 신앙

오캄이란 인물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합리적 추론 추구하는 학문 발전(이성, 신앙)

대학 : 로마 법학 부활 1. 대학 수립 촉진

2. 로마 학문 전반에 대한 관심 촉발

페트라르카: 고전 라틴어 중 키케로 작품 필사집 모아 편집

라틴 고전의 부활 작업 선도, 비판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 학문 방법

주석 달기 & 필사본 대조 원문 복원

: 애인 라우라를 찬미하는 서정시 씀

- 연인 라우라를 위한 연작시로 유명

- 육체의 아름다움, 이성에 대한 사랑을 솔직하고 긍정적으로 묘사

- 인간의 감성에 관한 관심

- 키케로의 작품 복원에 열의

- 최초의 근대인

- 자연을 관조 & 즐기려는 태도(몽방투)

- 인간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태도

- 인간은 어떻게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고전 연구 와 고대 문화의 부활

- 궁극적인 목적: 선한 사람이 되는 것 등은 인본주의 전통이 되었다.

보카치오: 페트라르카보다 10세정도 아래면서 그의 제자

데카메론 씀 (인간 욕망 긍정하고 현실 교회 비판)

인간의 감성은 개인이 개별적으로 느끼는 것

중세: 보편적 가치, 공동체 추구

르네상스: 개인의 가치 명예, 개성 중시 개인주의 성장, 개체성 &정체성

묘비의 보편화

자서전의 증가

로렌조 발라 : 가장 합리적인 독법을 통해 원문 복원 시도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을 보고 중세 교회가 교황령 정당 지배 정당화위해 위조했다는 것을 발견

에라스무스: 권위 복종X 인식하고 이해하고 아는 것에 최대의 노력을 경주. 인문주의자의 - 왕이라 평가된다. (우신 예찬. 친구인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썼는데 자 본주의 체제의 이행, 사회 모순 비판, 새로운 대안 사회 모색)

- 그리스어 성경의 원문 확립(원래 신약성경은 팔라어로 쓰임. 제롬에 의해 라 틴어로 번역(불가타성경) 중세 유럽은 라틴어 성경을 읽음. 원래 성경은 헬 라어라서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헬라어 성경 복원 작업을 함.

- 기독교의 순수성 & 참된 경전 회복

- 교회 내의 부조리와 모순 비판

-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향 도덕적이고 예의 바르며 타인을 존중하는 인간을 배양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

- 인간 스스로 선악 선택 ,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 자유 의지론 집필했다.

- 인문주의의 왕 : 인간과 세상을 그대로 긍정

세상을 스스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인간에 대한 애정 속에서 현실 사회를 비판하는 것

4. 르네상스 정신의 상징,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가장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했다.

- 관찰, 실험, 기록, 인체 해부도, 자궁 안의 태아, 어깨와 척추 근육

미켈란 젤로: 조각 회화, 건축: 사실주의를 극도로 표현: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부각시킴

- 천지 창조, 다비드, 모세

-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깔려 있다

다비드 공화정을 회복한 피렌체 시민들의 정치적 자각

피렌체 시민은 불굴의 의지와 정복당하지 않은 정신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 며 이것은 모든 인간이 지향해야 할 참다운 가치이다, 라고 주장

- 라오콘 군상 : 소수 학자: 라오콘 군상의 진짜 조각가는 미켈란제로이다.(특 징을 잘 반영)

- 르네상스가 그리스, 로마의 부활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5세기 이후 알프스 북쪽으로 확산 인본주의 비판주의에 입각

- 뒤러: 서양 미술사에서 자연과 인간을 가장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 예술가

홀바인 대사들

농부의 결혼식

5. 르네상스에 대한 평가 스스로 보기와 함께 보기

페트라르카: 나는 앞과 뒤를 동시에 쳐다보며 두 문명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라는 책에서 르네상스가 인간과 세계를 재발견함으로 중세적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표현. (스위스 역사 학자)

계몽시대: 중세 신앙의 시대를 암흑의 시대로 파악해 르네상스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

19세기 말 이후

르네상스는 중세 후기에 지속된 문화 활동의 연장이다라고 해석함

- 르네상스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자연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긍정 하며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서 합리성을 추구하려는 학문 및 예술 활동이 발흥하였다. 기 독교가 중심인 중세를 극복하고자 고전 고대의 학문화 문화를 부활시키고, 관찰과 비판 에 입각한 학문 체제의 수립을 시도했다,

에스킨스

보카치오는: 초기 르네상스 주도자들은 고대 맹신 나는 나의 눈을 믿기보다는 고대 작가들 의 권위를 믿고 싶다.

재생, 부활 = 르네상스

비판에 입각한 합리주의 추구하여 스스로 보기

관찰과 실험, 기록을 통해 스스로를 보기를 통하여 소속된 사회와 자연을 인식했다.

함께 보기: 고대 학문은 소수 엘리트에게 한정(귀족 문화)였다가 활판 인쇄술 발달하고 시민 계급 형성되고 하층민 의식 이 성장하며 평등에 대한 지향

르네상스는 학문과 문화의 향유자가 크게 증가 & 서민이 예술의 주제로 등장

르네상스 운동의 성취는 과학혁명과 계몽사상으로 이어졌고, 근대 문화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교재 제 7 장 종교의 자유시대를 연 종교개혁

개신교란 종교가 어떻게 탄생했는가? 를 공부하는 챕터(시험 안 나오는 문제들)

기독교란 명칭: 기독교란 용어 자체는 예수라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이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종말론자로서 선택받은 사람들, 도를 추구하는 사람들, 나사렛 사람들, 성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그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 예수가 크리스토스(일반명사, 헬라어 즉 그리스말로 메시아의 뜻)였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나중에는 왕을 임명하는 의식인 도유식에서 후보자에게 올리브유를 붓고 나서 관을 씌어준다. 대주교나 교황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사무엘이라는 대사장이 사울이나 바울에게 도유식을 하는데 이 인물이 크리스토스이고 이는 기름 부우신 왕이다, 라는 뜻이다. 예수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로 죽임을 당함. 로마인들은 황제 이외에 왕이란 칭호를 쓰는 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도전이다. 기독교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를 능가하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왕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느님 나라를 만들 왕이다. 지상의 로마 제국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적인 나라이다.

카톨릭쿠스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식 기독교의 종파라는 인정을 받는다. 로마 가톨릭의 대응선상에 있는 것이 그리스정교

성상 숭배, 성화는 가톨릭에서는 인정된다.

1. 성상 숭배: 720년경 네오 3(동로마 황제)라는 황제는 성상 숭배를 반대했으나 서로마 교 황이 따를 수 없다고 했다.

2.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의 권위 문제:

330년 콘스탄티노플이 생기자 황제가 제일 우두머리인데 교황과 황제가 갈등 구조를 이 룩한다.

3.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를 정하는데 (성자, 성령, 성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동방교회) 에서는 성령이 성부에서 나셨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필리유께(서방교회)가 성령은 성자와 성부에서 나셨다고 믿었다.

4. 성직자 독신 추구(서방교회) 결혼 인정(동방교회)

5. 1524년에 서방 교회가 파문을 했다. 서로 이단이라고 파문.

 

서방교회를 로만 카톨릭, 동방교회를 그리스 정교라 부른다. 로만 카톨릭 내에서 1520년부터 루터가 우리는 새로운 교파다, 라는 루터파라고 주장, 프로테스탄트(항의하는 사람들: 개신교)라고 부른다.

기독교는 가톨릭, 개신교, 그리스 정교, 콤터 교회, 에디오피아 교회등을 포함한다.

 

루터는 신교를 수립할 생각이 없었다.

* 마르틴 루터(독일 1483 1546)34세에 개혁 시작. 95개 조 반박문

- 15171031일 종교개혁 시작, ‘95개조 개시출발점은 맞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 뒤 엎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 95개 조를 라틴어로 작성

-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95개 조를 게시하지 않았다.

- 동료 성직자 & 학자와 토의를 원해서 면벌부 판매 주관하는 마인츠 주교에게 보냈다.

* 루터 이전 면벌부 비판한 에라스무스

 

 

- 명백하고 직설적인 면벌부 공격(면벌부:성직자들을 시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준다는

증서. 중세 십자군 때부터 생긴 교황이 인정한 정식 교리)

- 신앙이 근본적으로 영적이고 내적인 것을 천명

- 노골적으로 교황 공격

- 에라스무스의 우신 예찬

터무니없게도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감면해 준다는 면벌부를 얻었다고 신바람이 나서 우쭐대고 마치 물시계로라도 재듯이 연옥에 있을 기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측정하여 몇 세기, 몇 년, 몇 달, 몇 시간이라고 정확한 계산표를 작성하는 그런 사람에 관해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요? 또는 어느 허영심 많고 탐욕스러운 사기꾼 사제가 지어낸 주 문이나 기도문을 맹신하고, 부귀와 영화, 쾌락, 번영, 건강, 정정한 노년은 물론 천국에 서 예수 옆에 앉을 권리까지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관해서 뭐라고 말해야 좋겠 어요. (연옥:중세에 고리대금업자들(원래 기독교는 이자를 못받게 했다. 고리대금업자들 은 대체로 유대인), 천국 연옥 지옥, 죄가 사하져서 천국에 간다는 연옥)

에라스무스 작품은 라틴어로 쓰여짐(지식인들만)

루터 95개조 발표 누군가 루터 95개조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전파

테첼의 대응: 이 이단자는 3주 안에 내 앞에서 화형을 당할 것

- 마인츠 대주교 & 교황의 철회 촉구

루터는 가톨릭 교회와 교황에게 반대하는 게 아니다

내가 성서, 교부, 교황의 칙서 또는 참다운 이성에 반하는 것을 말하고 행동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이성적이며 참되고 가톨릭적이다. 나는 그 어디서건 공적으로 나의 발언에 대해 해명할 수 있도록 해 주길 바란다. - 루터

내가 나의 주장을 시작할 당시 나는 수도사였고 가장 열성적인 교황주의자였다. 내가 그러한 소요에 빠져들게 된 것은 내 의지나 의도가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2. 개혁 신앙의 배태

- 루터의 95개 조를 독일어로 번역해 여러 개로 전파했다.

- 교부의 왕 아우구스티누스 소속의 루터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착한 일을 행할 단초 는 어디서 나오는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시작된다.

루터 안에 생긴 새로운 요소는?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을 강하게 인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개인적 체험(벼락) 22,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문

종교적 영성에 깊이 심취한 인물임을 암시

*비텐베르크 대학: 1513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 강의 시작

인간의 모든 행위는 불의하다.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구원 가능

- 아우구스티누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이기에 선행할 수 없다. 소수는 선행을 하고 가운데 구원받지만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구원받 을 사람은 태초부터 정해져 있다. - 예정론

중세에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정은 은혜와 영광을 마나는 의지를 용납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스스로 믿음의 길과 불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하 셨다. 그렇지만 믿음의 길이나 불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예정의 범위 안에 있다.

- 중세 성직자들은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권고, 칭찬, 명령, 금지, 보수, 형벌이 다 공허한 것이 된다.

- 루터는 이런 가르침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에 대한 가톨릭의 대응, 1, 2 종단 총회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예타누스 심문

1. 15184가브리엘 델라 볼타 하이델베르크 종단 총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성경에 근거한다고 역설

프리드리히(7선 제후)가 에라스무스에게 루터가 맞냐고 물음. 프리드리히, 에라스무스가 루터 지지

2. 151810월 카예타누스 루터 심문 공로 사상을 천명한 클레멘스 6세의 유일서 부정한 것이 죄(유일서)

이 문제를 명망있고 신뢰할 만한 재판관이 해결하도록 한다면 그것이 교화응ㄹ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세상은 진정한 복음에 목말라하며 시대의 흐름도 모두 그쪽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야비한 방법으로 그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 - 루터 지지

- 가톨릭 대응 3. 라이프치히 토론

15197월 루터지지

- 칼슈타드, 멜란히튼 VS 가톨릭 교회, 에크는 루터를 파문하라

- 교황의 기원과 권위, 성경의 권위 연옥의 존재, 면벌부와 고해성사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

가톨릭의 대응 4. 1520년 교황 주여 일어나소서 발표

루터 파문

루터에게 41가지의 이단적 오류가 있다. 루터의 책을 불태워라.

루터는 교황을 비난하면서 가톨릭과의 결별 정식 선언

멜란히튼 : 교황의 칙서 & 권위 옹호하는 신학 서적 공개적으로 불태움.

가톨릭의 대응 5 보름스 의회에 소집

카를 5교황의 요청을 수용하여 루터를 황제권으로 제어 시도

성경의 증거와 평범한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 한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양심에 거스리게 행동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올바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다른 방도를 취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느님 도우소서, -루터 회의가 끝난 후 황제가 루터 살해 기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피난 시킴

3. 카톨릭과의 결별 과정

1517103115214월 이 기간 동안 왜 루터는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았나?

처음부터 교황권 정면에 도전하거나 가톨릭 교리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정치 정세가 루터에게 매우 유리했다. 터키 문제, 황제 선출 문제

루터파 교회의 수립

루터의 지지자 확보

독일인들이 교황과 가톨릭 지배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교황의 암소로 많은 세금 납부

루터는 민족 감정에 호소

중세 말 가톨릭 개혁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위클리프(성경을 영어로 번역(부관참시)의 주장을 후스는 보헤미아 지방에 퍼트려 신교가 번성) 교황이 만든 교리는 없애야 한다.

예정론 성경 중심주의

기독교 인문주의

에라스무스(초기 루터는 찬성했지만 새로운 종파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자유의지론을 주장)

인쇄술 발전: 루터와 지지자들의 글이 신속하게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새로운 문제 대두: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이 없다.

5. 새로운 신학의 전개

- 루터는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선행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닫 고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전을 비판하기 위해 성격의 권위를 극단적으로 강조

3S sola: scriptura- 교회의 전통(성인 숭배, 교황제도는 없다, 7 성사는 세례와 일반미 사만 인정)

sola: gratia 인간의 의지(인간은 오직 은총으로만 선을 펼칠 수 있다.- 인간의 자 유의지를 무시)

sola: fides 인간의 선행(오직 믿음으로만, 가톨릭에서는 선행을 기대하나)

루터는 다음 책()을 통해 주장

루터(선행론):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공로, 선행을 비판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루터(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교황제를 없앨 때 비로소 진정한 교회 개혁이 이루어진다.

만인사제주의 주장

루터(교회의 바빌론 포로시대)

성사 문제(7성사)

화체설 부정 공재설 주장

루터파가 가톨릭과 다르다는 것이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난 성인의 인정 여부

가톨릭은 성인 존승

루터는 성인 숭배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비난, 하지만 성상 파괴는 루터의 주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칼슈타드: 급진적인 결별 주장하여 성상 & 성화 폭력적으로 파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쓴 가운데서 아무에게든지 폭력으로 사람을 제재하라고 하지 않았 다. 신앙은 강제나 압력이 없이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교회에 있는 성상이나 성화같은 것 에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견해를 가질 필요는 없다. 성상이나 성화가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 한 그것이 있다고 하여 나쁠 것이 없다.

상직자의 결혼 문제

칼슈타드: 오직 결혼한 사람만이 성직자가 될 수 있다. (과격)

성직자의 결혼 허용(루터,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

수도원 제도 무의미

루터파 수도원은 폐지되었고 재산 몰수

- 루터는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루터왈: 최근에 내가 교구 시찰에서 마주친 통탄할 만한 상황 때문에 나는 이 짧고 간단한 교리 문답서를 준비하였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이시여 얼마나 비참한 사태를 제가 보았습니까? 사람들, 특히 시골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혀 알 지 못합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많은 목회자들이 아주 무능하고 또한 가르치는 일 에 부적격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지만 그들은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모르고 있고 마치 돼지와 미친 야수처럼 살 고 있습니다.

교리 문답서 작성, 소교리 문답서 , 대교리 문답서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세례 성찬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분이 요구하는 것을 기꺼이 해야한다.”

고등 교육기관 설립 추진: 대학 교육을 인문학 중심 재편

1590년 팔츠 루터파 성직자 86% 대학 교육 수료

6. 칼뱅의 개혁

- 성당 채색 유리창 부숨

- 성인 조각상 파괴

- 명확한 청사진 없었다. (파렐)

- 프랑수아 1세는 칼뱅과 니콜라스 콥을 체포하려 했다.

- 칼뱅 세상과 악한 자들이 신자들에게 순수하고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이단, 미혹 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 불러왔습니다.

구교와 단절 선포 신교 교리 체계회 위해 기독교 강요집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가톨릭 교리 비판, 7성사 가운데 성찬만 인정, 츠빙글리 기념설 지지

파렐은 긴급한 시기에 도움의 요구를 거절하고 무시한다면 하느님이 은둔과 평화로운 학문 생활을 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말하며 칼뱅을 초대한다.

칼뱅은 이후: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

극단적인 성경 중심주의

가톨릭 성직자 개념 완전 부정

예배의 간소화 오로지 설교를 듣고 찬송하며 모든 시민의 일상생활을 기독 교 교리에 근거하여 통제(주일에는 일체의 오락 금지)

제네바 시민에게 극단적인 신앙 실천 요구 , 1538년 추방 1541년 캎뱅파렐 다시 초청

교회 희의 조직(제네바 통제)

지상의 하느님 나라 건설 시도(강력한 통제)

칼뱅의 예정론: 인류에 속한 모든 인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경륜 을 가리켜 예정이라고 한다. 모든 인류는 다 비슷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이 준비되었고 다른 이들 을 위해 서는 영원한 저주가 기다리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의 절대적 주 권자이신 하느님이 어떤 인간을 영원한 지옥불에 넣은다고 해도 인간으로 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 막스 베버: 예정설에서 두 가지 목회적 권고(신학적 해석) 가 특징적으로 부각된다. 첫째,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어떤 의심도 악마적 유혹으로 물리쳐야 한다는 데 대한 절대적 의무다. 자기 확신의 결여는 신앙 부족의 결과이고 이는 은총이 충 분치 못한 데서 유쾌한 것이기 때문이다......둘째 이런 자기 확신에 이르기 위 한 가장 훌륭한 수단으로 직업 노동이 강조되었다. 직업, 노동, 그리고 직업 노 동만이 종교적 회의를 떨칠 수 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준다.

8 장 근대적 세계관과 과학의 발달

1. 전근대 시대 주술과 미신의 시대

프랑스 혁명에 의해 신분제 사회를 벗어난 평등사회로 갔다.

산업 혁명에 의해 농업사회가 깨뜨려졌다.

과학혁명 이전인 전 근대사회는 종교(미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제우스가 별과 일식 주관 바람, 구름, , 바람

헬리오스는 태양 끄는 전차

폭풍우는 죽은 자의 무리가 유령이 되어 떠다닌다. 악마의 무리

자연 현상이 신이나 신적인 존재에 의해 발생

여호수아

동방박사

요한네스 크리소스 토모스

하늘에서 별이 내려와 예수가 탄생한 집 위에 머물렀다.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 신탁, 맹세, 사죄법, , 점성술, 결투

2.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

원시인에게 별은 생활의 지침

스톤헨지와 같은 거석문화의 일정한 방향성

별을 면밀히 관찰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 특징

1. 달을 중심으로 월상의 세계는 완벽하고 월하의 세계는 불완전하다.

이대 별들이 있는 우주는 완벽하기에 변화가 없다.

2. 별들이 있는 우주는 여덟 개의 천구로 구성되어 있기에 우주는 유한하고 그렇게 크지

않다. - 천구는 하나의 큰 공이다.

3. 이렇게 구성된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다.

로마인 + 기독교

창세기의 창조 신화와 잘 어우러지고, 이 세상은 불완전한 것이니 미련을 두지 말고 완전한 저 세상, 즉 신의 세상을 추구하라는 기독교의 교리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월상의 세계 = 천국

단테 신곡: 지구가 우주의 중심, 하늘이 지구를 돈다.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묘사할 때 지구 위에 연옥이 있고 연옥위에 지상 낙원이 있고 그 위에 월성천, 수성천, 금성천, 태양천, 화성천, 목성천, 토성천, 항성계, 투명구계 마지막으로 최고 천계가 있다.

3.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코페르니쿠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1514년 라테란 공의회 역법에 대한 의견 율리우스력의 오차

춘부, 321일 이후 보름달이 뜬 다음 일요일 부활절

오차로 부활절 혼돈

수학과 천문학의 한계로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없엇다.

고대인은 5개의 행성이 별자리 사이를 옮겨 다닌 다는 것을 관측하였고 화성이 가끔 정반대로 움직이는 것도 확인하였다. - 화성의 공전 주기가 지구와 다르기 때문에 발생

프롤레마이오스: 하지만 우주 관측 자료가 쌓이고 이슬람의 천문학 자료가 소개되면서 근 본적인 재검토 필요.

플루타르코스: 어떤 사람들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의 필로라우스는 지구가 태양이나 달과 같은 불의 주 위를 비스듬한 원형 운동으로 돈다고 말한다. 폰투스의 헤라클레이데스와 피 타고라스 학파의 에크판투스는 지구가 마치 바퀴와 같이 중심 주위로 뜨고 지는 다소 제한된 움직임만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 아리스타르코스: 태양까지 거리 측정, 최초 지동설 주장

- 성경 부정(이단)하는 생각

4.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1564 1642)

망원경(16095, 처음으로 발명) 개량, 특수렌즈 제작

달의 분화구 발견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은하에 수많은 항성의 존재

케플러의 법칙;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데 타원형으로 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힘.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다.)

갈릴레이는 케플러의 법칙을 일반인들까지 믿게 만든다.

1632두 세계의 발견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에 관해 썼다.

갈릴레이는 이탈리아 말로 썼다.

1633년 종교재판소에 끌려가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그러나 재판정을 떠나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한다. 가택연금 상태에서 죽음.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지난날의 유죄 판결은 교회와 과학간의 비극적인 상호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밝히며 교회 탄압이 부당한 것을 사과

갈릴레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조르다노 브루노(1548 1600)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부정 무수한 태양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지구(행성)들이 자신들의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라고 말해서 교회에의해 화형당했다.

5. 뉴턴의 관성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

뉴턴(16421727)은 갈릴레이 주장을 이론적으로 정립함

1687자연철학의 수학적 제원리발표해 우주의 별들이 움직이는 법칙을 제시

뉴턴의 관성의 법칙: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작용이 없으면 물체의 운동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작용이 없으면 물체의 운동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 물체는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한 채로 있거나 등속도운동을 계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뒤엎는 것으로 우주의 별들이 왜 계속해서 움직이는지가 설명됨

뉴턴의 중력의 법칙: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를 끌어들이는 중력을 가지고 있고 물체가 크면 클수록 중력이 커지지만 그 물체가 발산하는 중력은 거리가 멀어지면 양해진다. 두 물체 사이의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뉴턴의 법칙은 태양, 위성, 행성들이 자기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운동하는 것은 상호간의 중력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뉴턴은 과학과 이성을 존중했고

우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종교적, 미신적 고대 사고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합리적 사고관을 수립해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과학의 혁명) 16 17세기 새로운 세계관은 만듬.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에 의해 우주가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 작동되는 물질계라는 사실이 확고하게 입증되었다. 우주는 그곳 어딘가에 신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며, 어느 곳이 특별히 신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과학과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

6. 진화론 탄생의 여명

1859년 영국의 다윈(1809 1882)이 생명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이론인 진화론을 제시한다.

다윈은 창조론을 부정해 불멸의 영광을 얻었다.

다윈이 왜 이렇게 혁명적인 이론을 제시하면서도 영광을 얻었을까?

1)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한 영국 성공회의 지지를 받았다.

2) 일반 대중의 지지자들이 많았다.

다윈 이전의 진화론 주장

1) 1809년 라마르크(1744 1829) “동물 철학에서 생물의 발달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2) 1844년 작가 미상의 책 창조의 자연사적 흔적에는 인류가 하등동물에서 생겨났다고 주장되었고.

3) 월리스(18231913)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요체를 Rleie1858년 다윈에게 자신의 논문을 출판해 달라고 보냈다. 논문에서 윌리스는 어떤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 변종들은 멸종하고 잘 적응한 변종들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

- 사실상 자연선택설은 월리스의 저작권이다. 이에 당황한 다윈은 친구 라이엘을 통해 다윈의 논문을 정리하여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하도록 한다. 자신이 이 이론을 확보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윈은 1857년 식물학자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를 같이 실으며 다윈의 자연 선택설의 우선권을 확보함.

18591124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7. 지구의 나이에 대한 옛사람의 생각

17세기까지 교회는 창세기에 기초해서 지구가 대략 기원전 4000년에 창조되었다고 믿었고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주장해 교회를 반박했고 고생물학자들도 교회에 반박.

아일랜드의 큰 사슴이 멸종되었다. 왜 멸종되었는가에 대한 의문?

퀴비에(1769 1832)는 해부학적 비교를 통해 큰사슴의 멸종을 입증

이 말은 창조 이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

산업혁명으로 석탄 생산이 증가하면서 멸종한 동물들의 뼈나 화석이 점차 많이 발견.

멸종한 동물들의 중요성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중 한 명인 뷔퐁(1707 1788)은 지구 현재의 형태는 신이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형태가 서서히 변화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해 생물 형태의 변이를 서식 환경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그러나 뷔퐁은 생물체의 변이를 인정했지만 변이가 개체간의 생식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원형을 크게 변화시키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화론으로 가는 길목을 열었다고 평가

8. 다윈의 진화론

다윈에 대해

1809년 영국 슈루스베리에서 태어나

할아버지는 진화에 대해 선진적인 생각을 해 주노미아(동물 분류)”라는 책을 발간

16세때 다윈은 에딘버러 의과대학에서 해양생물학자인 그랜트를 만난다. 그랜트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공개적으로 옹호했고 히드라 충류나 산호와 같은 해양 무척추동물에 관심을 가졌고 이런 피조물들이 식물과 동물을 잇는 교량역할을 한다고 주장 후에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제도를 여행하며 그랜트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깨달음

1827년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진로를 바꾸고 그곳에서 식물학 교수였던 헨슬로(1796-1861)의 강의를 들으며 생물학자로 성장

박물학자는 동물, 식물, 광물 등 자연물의 종류, 성질, 분포, 생태 등을 연구하는 종합학문 연구하는 학자였다.

남태평양을 연구하기 위해 1831227일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서 아종발견

68종의 딱정벌레를 수집

동물의 화석 발견: 하나의 종이 태초부터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종은 소멸하고 또 어떤 종은 새로 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됨.

여행 기간 다윈은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리를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이는 지질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멜서스의 인구론이란 책이 다윈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자연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새끼를 많이 낳는데 이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한다. 자연은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한다.

1835년 다윈은 갈라파고스에서 핀치라는 방울새를 만나며 방울새들의 부리 모양이 먹는 먹이가 다른 것을 보고 환경에 따라 생물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게 됨

다윈의 범생설: 생물의 몸은 재뮬이라고 불리는 무수한 입자를 만들어 내고 이 입자가 혈액을 통해서 생식기관으로 운반되어 한 기관이 지닌 특성이 그대로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획득 형질의 유전이 자연선택을 보완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틀렸다. 유전자를 몰랐기 때문에. 20세기 초에야 생물체의 형질이 유전자를 통해서 후손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9. 다윈 이후의 진화론

바이스만(1834-1915)은 획득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

드 브리스(1848 1935) 달맞이꽃

모건(1866 1945) 초파리 관찰

모건의 제자 멀러(1890 1967)는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음을 발견(194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는다.):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유전적으로 질병을 가진 개체나 기형적인 개체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내고 자연 상태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그 돌연변이가 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냄.

진화론의 원리가 명확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다.

진화론은 창조론에 도전

진화론이 제기된 후 생명체의 비밀을 밝히는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9 장 세계사의 주도권을 바꿀 미국의 건설

아메리카로 출발한 최초의 이민자 선박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

1776년 미국설립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평화;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으로 평범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 시기까지 동양에서는 나침반이 있었지만 서양에서는 나침반이 없었다.

최초의 대항 항해, 4번이나 항해했다.

인도의 서쪽에 도착했다는 착각(1492년 콜롬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착해 대서양 시대를 열었다.)

1500 1600초까지 에스파냐의 영광(1588년에 영국을 공격하다가 엘리자베스 군대에 의해 깨진 후 에스파냐의 주도권이 무너지고 1600 1700년 사이에 청교도 혁명을 겪으며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17세기는 네덜란드가 패권을 차지함), 3차 네덜란드를 싸움을 한 영국이1680, 1차 세계대전까지 패권을 차지함.

1492년 콜럼버스 서인도 제도 도착

1494년 토르데실라스 협정

영국의 해외 진출

헨리 7대서양 연안 탐험 뉴펀들랜드 상륙(1497)

엘리자베스 버지니아(1584)

엘리자베스가 동인도 회사 설립(1600)

런던회사, 버지니아회사(1606) - 제임스1플리머스 회사

인클로저

농협혁명

영국의 무적함대

제임스 1

아메리카로 출발한 최초의 이민자 선박

제임스 타운(1607, 143명 도착)

존 스미스(의무 노동 4시간 규정: 일하지 않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거나 추방하겠다.)

존 롤프 & 포카혼타스가 결혼하자 백인들에게 인디언들이 담배 농사법을 가르침

 

초기 식민의 물결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으로 된 청도교도인이 폴리머스항(보스턴근처)에 도착해 이주한다.

이주 첫해 배고픔과 괴혈병으로 1/2이 사망. 찰스(찰스11625 1649)타운으로 이주 청교도인 성도고 나머지는 비성도

메이플라워의 서약(미국 최초 자치규약 1619년경)

아메리카 식민지 성공 이유

(정치적 자유, 신앙의 자유, 넓은 땅(세계 3위 면적, 가용면적은 1))

(자유와 기회의 땅, 지상의 유토피아라는 별명1700년부터)

투표로 주민의 참정권, 의회제도, 토지 사유등을 규정한 신대륙 최초의 민주주의 조례 제정(1619)

투표로 관리 선출, 양원제 의회제도, 읍민 회의

1618 1648년도까지 신앙 때문에 싸움이 잦았다. (1534년 수장법이 되어 영국이 국교를 정하자 가톨릭, 소수의 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몰려감)

3. 가자, 아메리카로

독립하기 전 13개의 식민지가 만들어짐. 현재는 48개주가 있다.

북부 4(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로드아일랜드, 코너티컷)

중부 4(네덜란드로부터 쟁탈, 뉴저지, 펜실베니아(퀘이커), 델라웨어 중부인들을 양키라고 부름

남부 5(메릴랜드, 버지니아, 남북 캐롤라이나, 조지아, 남부는 카톨릭, 지주, 농업)

13개 식민지 건설 이후 이주

* 인두권-미국에 건너온 사람에게 토지 지급

* 토지 지급 매력, 그러나 뱃삯이 비쌈(범선, 7 12주 소요)

* 계약 노동제 뱃삯을 노동으로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미국에 온 사람들

* 흑인 1500 1800년 사이에 천만 명의 흑인이 대서양 삼각 무역을 통해서 아메리카 행( 그중 40만 정도가 미국으로 흘러들어옴)

* 이민을 통해서 인구가 계속 증가(171540, 1763250)

4. 영국 정부, 통제를 시작하다.

식민초기 과잉 인구 배출지

1650년 이후 식민지 경쟁 심화, 자원의 보고 인식(사탕수수가공물, 담배, 목재) 고래, 비 버

1650년 이후 규제 시작 항해법 1651

모자법 1732

철강법 1750

식민지들의 대응 밀수, 자체 산업 강화

그러나 갈등이 심각하지는 않음

1676년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베이컨의 반란(나다니엘 베이컨:제임스타운을 불사름)

1686년 매사추세츠의 반란

유럽(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7년 전쟁

* 7년 전쟁 이후 증세와 갈등

a) 17세기 1등 국가는 네덜란드

b) 18세기 1등 국가는 영국

c)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경쟁

d) 프렌치 인디언 전쟁- 1754년부터 아메리카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진행됨 식민 지 영토를 두고 프랑스와 영국이 싸운 전쟁

e) 프로이센의 성장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서 슬레지엔 확보, 7년 전쟁 주도

f)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가 동맹 한편이 되어 싸 운 국제 전쟁(1757 1763, 플라시 전토, 1757년 프랑스 패배)

* 7년 전쟁 이후 세금 부과

a) 전쟁에서 승리한 식민지인들은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로 진출하고 싶어한다. - 인디언 과의 전쟁 의미

b) 영국 정부는 1763년 식민지인들에게 서부 진출 그미 명령

c) 전쟁 비용 보충, 주둔 비용 마련 위에 증세

d) 1764년 설탕법

e) 1764텬 통화법

f) 1765년 인지세법(내국세이기 때문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g) 식민지인들의 동의 없이 새로운 종류의 세금을 부과한 것은 영국 법을 어긴 것이다.

h) No represenation, no tax: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

1757년 윌리엄 피트(1708-1778)

1763년 파리조약

5. 독립을 향하여

새무얼 애덤스 자유의 아들들

인지 세법 시행 방해

1765년 식민지인들은 인지세법이 식민지의 권위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영국상품 배척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767년 타운센트 법

영국 정부 군대 파견 치안 유지

보스턴 학살 사건 177035

: 타운센트 법 철폐(이미 철폐 그러나 소식이 전달되지 않음), 영국군 철수 해빙

동인도 회사(1620년 엘리자베스 만듬) 영국 차 법(1973. 5)을 만들어 동인도 회사가 영국 본토에 차를 보급하였는데 이때 이후 동인도 회사가 직접 아메리카로 수출하자 차 가격이 폭락하여 차 밀수업자들이 망하게 되어 자유의 아들들의 핵심 멤버들이 식민지 통제하는 영국을 비판.

보스턴 차 사건 (73. 12인디언 복장을 하고 가서 배 위에 올라 차를 던져버림) - 과격파 주도

온건파: 인디언도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과격파 비탄)

보스턴 차 사건으로 조지 3 세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한다

* 참을 수 없는 법들(74) - 보스턴 항구 폐쇄

매사추세츠 정부법

군대 민박법

1차 대륙 회의(74.9) - 반영 운동, 불매 운동, 참을 수 없는 법 철폐 청원, 민병대 조직

존 핸콕(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나옴: 차 밀수 업자였다.), 새무얼 애덤스,

페트릭 헨리는 자유 아니면 죽음 달라고 말함

렉싱턴 콩코드 전투 반발(75, 4, 19)

2차 대륙 회의(77. 5.10)

대륙군 창설(75.6), 본격 전투 준비

토머스 페인 책 상식”(76.1) 발표(많이 팔렸다.0

인간이 따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법은 자연법인데 그에 가장 어긋나는 것이 군주제이다. 군 주권이 강도와 같은 귀족들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와 같은 거대한 대 륙이 영국과 같은 조그마한 섬나라의 지배를 받은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이 책의 의미: 일반인 사이에도 독립에 끌어 들었다.

독립 선언(76.7.4)

적극적 소수가 머뭇거리는 다수를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영국 정부의 독선: 식민지인들과 타협하지 말 것을 명령

식민지인들이 반항하면 무력으로 엄격하게 다시리겠다고 선언

영국의 국력과 군사력 과신(7년 전쟁 승리, 산업혁명 국력 신장)

6. 불붙은 독립전쟁

조지 워싱턴 :연합군 총사령관(민병대: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

독립 선언서

민병대 자기 고장이 위험할 때만 싸웠고, 추수 때는 귀가

하우(영국군 사령관)가 이끄는 군대에 진다.

교만에 빠진 하우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뉴욕으로 가버림, 남은 병사들도 헤이한 분위기

워싱턴은 이 틈을 이용해 하우 군대 공격하여 승리

세러토가 전투 177710월 식민지 군의 승리

프랑스 참전 계기 마련(해군), 영국군을 격파. 이때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음. 영국에게 적대적이었던 나라들도 참전한다.

버고인(캐나다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보내 하우군과 올버니에서 합류하도록 함.

요크타운 전투 승리 17819(프랑스등의 연합군이 이김,영국이 미국을 포기하는 계기가 된다.)

1783년 파리에서 영국과 아메리카 대표들이 평화 조약을 맺고 영국은 아메리카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

7. 독립선언서(177674)와 미국의 출범

독립 선언서 안에는 자유 & 자연권

스튜어트 왕가는 세속적 폭정과 종교적 압제를 했다.

존 디킨스

자연의 법칙을 세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안에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탄생해서 우리와 함께 존재하며 우리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는 인간의 힘으로 빼앗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 자연권은 이성과 정의에 관한 불변의 공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 로크, 사회 계약설

사회를 구성할 때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권리 가운데 통치권을 왕에게 위탁한 것이다. 왕은 사람들의 통치권을 위탁 받아 질서를 바로잡고 나라는 다스린다.

토마스 제퍼슨

우리는 다음의 원리가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 되었다. 인간에게는 그의 창조자로부터 부여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것은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정부를 만들었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서 나온다. 정부가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인민은 언제든지 이를 변혁 내지 폐지하고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다주는 원칙에 기초해 이를 위한 기구를 갖춘 정부를 새로이 조직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고대 로마에서도 논의 되었으나 정치적으로 구현하려고 한 것은 미국. 최초의 인권선언)

계몽 사상에 입각해서 인간의 평등, 자유 규정한 최초의 선언문, 재산권 행복추구권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 그러나 우리의 범위는 백인 남성, 재산 소유권자임

종전(1973) 전후 별도 위원회를 조직하여 아메리카의 통합 논의

연합 및 항구적 동맹에 관한 헌장’(1781)

내용은 다음 페이지 명칭 사용

당시 영국왕은 조지 3

아메리카의 연합한 국가들

연합 및 항구적 동맹에 관한 헌장

USA(United States of America) 국명 생겨남

13개 국가들의 완전한 주권을 가진되 국방, 외교, 인디언 대책과 같은 공통 사항은 연합 의회가 담당하도록 했다.

연합 의회에서 각 국가들은 한 표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의결은 9표의 찬성 필요

그러나 연합 의회의 의결 사항은 권고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각 국가들의 자율

경제적 문제(수출 타격, 수입 물가 상승, 전비 처리0 셰이즈의 반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세워야 한다.

재헌의회 수립 1787. 5

연방파 VS 공화파

헌법 제정 1787. 9

초대 행정부 구성 1789. 4

제헌 의회

우리들 연합주의 인민은 더 완벽한 연방을 형성하고 정의를 수립하고 국내의 안녕을 유지하고 공동의 방위를 준비하고 일반의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들과 자손들에게 자유의 혜택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국을 위하여 이 헌법을 제정한다.

인민 주권의 원리 명시

독립 선언서가 제시한 자유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삼권분립의 원칙 채택

입법부: 상원 & 하원

대통령은 각 주의 선거인이 선출(임기 4)

대법원 휘하에 사법부

178772611개국 국가들이 비준을 완료함으로 정식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 미국 출범

자유와 기회의 나라

혁명을 통해 의회 제도를 발전

가용 자원이 많았다.

10장 불평등을 갈아엎은 프랑스 혁명

혁명을 잉태한 175년 만의 삼부회

제정 위기

근대 시민 혁명: 청교도 혁명, 프랑스의 시민(부르주아:상공업자, 법률가, 지식인들)

혁명, 미국 혁명

루이 14: 짐이 곧 국가, 전쟁, 베르사유 궁전 건설

루이 15: 막대한 품위 유지비

루이 16세 미국 독립 전쟁 참전(20억 리브르 소진, 프랑스 1년 예산 5억 리브리)

재무 대신들은 세금 징수액을 늘리고 부채를 줄이기 위해 노력, 하지만 근본적인 제도 개혁 필요. 토지 40% + 면세 누리던 1, 2 신분에게 과세 추진

칼론느: 세금 징수액을 늘리기 위해서 제 1,2 신분에게 과세를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한다.

명사회: 1,2 신분은 납세의 의사가 없다고 선언

177888일 삼부회 소집 결정:선거 공고가 나자 선거운동 본격

삼부회 의원을 뽑는 선거가 시작되면서 개혁의 목소리가 나온다. 진보적 인사들이 봉건 제도의 모순과 특권 계급의 부도덕함 공격(Ex: 인민의 파수꾼, 미라보(프로방스 인에 호소함), 시에예스(3신분이란 무엇인가))

시에에스: 3신분은 사회의 생산을 담당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모든 것인데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닌 대접을 받았으나 앞으로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178955175년 만에 삼부회 개최: 자리 배치부터 전근대 질서 반영

평민 대표 640, 1신분 대표 295, 2신분 대 표 278명 제3신분 대표가 과반수 차지

삼부회의 소집 권한은 왕이다.

2. 삼부회의에서 국민의회로 혁명의 시작

3신분 대표들은 전통적 관념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을 요구했다.

1. 자신들이 의원들의 자격을 심사

2. 머릿수 표결 주장

612일 평민 대표들은 독자적으로 위임장 점검 실시(국민회의)

왕과 귀족이 이들을 해산하려 하자 3신분 대표들은 617일 국민의회 결성, 20일 뽀므 경기장에 모여 해산을 결의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 왕의 해산권 부정&혁명 시작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혁명을 막으려 했지만 군인들도 혁명을 원했다.

전제 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군인들, 화약들이 있었음) 함락(1789714)

파리 시장 플레셀 죽음

바뵈프 온갖 종류의 처벌, 즉 사지 찢어 죽이기, 고문, 수레에 매달아 끌기, 화형, 교수형 그리고 온갖 방면의 잡다한 처형은 우리의 도덕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쳐 왔고 우리의 지배자들은 그들 자신이 야만스러웠기 때문에 우리를 개화시키는 대신 우리를 야만인으로 만들었소. 그들은 자신들이 뿌린 것을 거두고 있으며 장례에도 그럴 것이요.”

시민의 복수를 했다는 뜻

인권 선언만으로 현실적인 굶주림 달랠 수 없다.

재산의 평등

소수의 봉기를 통한 혁명의 실현

공산주의 선구자

제헌 국민 의회

프랑스를 새롭게 운영할 헌법을 만드는 것

로베스피에르 같은 젊은 의원이 두각을 보인다

음향 시설이 없었으므로 회의에 속도가 붙지 않자 분과위원회를 만든다

.

178984, 국민 의회는 봉건제를 폐지한다

강 드끄랑갈 대의원의 봉건제 모순 비유쾌락을 사랑하는 영주들의 잠을 개구리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연못가를 두들기면서 밤을 새우라고 인간에게 강요하는 고문서를 가져와서 불사릅시다.”

봉건제 폐지 22일 뒤,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에 대한 선언인 인권선언발표

라파예트: 인권선언 작성 제안

토마스 제퍼슨: 미국 독립 선언서 기초자: 개인에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주는 것, 즉 사회나 국가가 개인이 행복해지도록 보호하고 여러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여건 만들어 주는 것

인권 선언: 1.

2.

인권 선언은 자유와 평등을 기본 정신으로 주권 재민의 원칙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며 단시일 내에 가능했던 것은 계몽 사상 때문이다.

3. 계몽사상(이성, 자연법,

신화적 세계관: 인간을 종교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태도

베이컨(1561-1626): 학문의 진보: 지식 재산 일람표, 자연에 대한 연구 매우 부족하다.

데카르트(1596-1650): 세계를 기계론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

과학혁명: 세계를 이성으로 설명하려 한 움직임

- 1687년 뉴턴 자연철학의 수학적 제원리를 발표해 자연 세계는 법칙대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고 주장했고 이 영향으로 베이컨이나 데카르트는 인간 세계에서 자연법이 존재한다 고 추론하며 주장한다.

- 자연법: 인간의 이성은 본질적으로 선하다.

악이 존재하는 이유: 이성이 기독교의 압박을 받아 왜곡되었다. EX) 행복한 중국인

17세기 이전 순환론적 사고 방식

고대 & 중세인은 과거의 이상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꿈꾸었다.(에덴 동산이나 요순시대)

상업 발달

새로운 인간 관계 모색

고대인과 근대인에 관한 논쟁

많은 학자들이 고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대인들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였다.

퐁트넬(1657-1757.최초의 진보사상 제시): “죽음의 대화에서 고대는 근대보다 우월하지 못하다. 고대인과 근대인의 차이는 예술에서 고대에 근대 차이가 없지만 과학과 산업에서 고대에 비해 발전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식이 더 많이 축적되었기에 미래는 더 위대한 시대가 될 것

콩도르세

4. 프랑스 휩쓴 개혁 열망

계몽사상: 인간 사회를 뿌리부터 변혁 & 진보

아를르의 대주교: 루소&볼테르의 작품이 시골에서 싼 값에 유통된다.

코아예 신부: 루이 14세 치세에는 농민의 아들들이 토지 경작 밖에 몰랐는데 이제는 종교를 토론하고 법정에 나서며 연극에 대한 소감을 말한다.

책을 구하기 쉬운 도시 노동자의 독서열

레스티프: 얼마 전부터 파리의 노동자들을 다룰 수 없게 되었는데 그들이 우리의 책에서 매우 자유분방한 진리를 읽었기 때문이다. 진리란 다름 아닌 노동자도 값진 인간이라는 것

루소(사회개혁론자 중 진보적인 사람): 민중의 의견 적극 반영.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성선설 신봉.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가는 곳마다 쇠사슬에 묶이게 되었다.”

자연상태에서(이상적인 상태) 누구도 예속됨없이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소유 개념등장으로 혼란이 생겼고 이를 제어하기 위해 국가 등장. 하지만 국가의 변질로 억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인민이 통치권을 가지고 합의를 통해 국가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

장 라송의 말: , 우리는 위대한 루소를 잃었다. 다시는 그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의 책을 읽으면 그에게 최고의 존경을 보내게 된다. 만약 언젠가 내가 에르므농빌 근처를 여행하게 된다면 나는 반드시 그의 묘지를 찾아갈 것이며 그곳에서 눈물을 흘를 것이다.

루이 16: 왕국을 갱생하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갱생: 계몽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왕국을 갱생해야 한다는 열망을 가짐.

삼부회는 소집되자마자 혁명의 길로 인권선언 발표.

5. 입헌군주제를 유지한 초기의 혁명 상황

국민회의 입법의회 국민 공회 총제정부 통령정부 나폴레옹 쿠테타

국민회의: 온건 개혁파로 진보적 귀족, 상층 부르주아

부르즈아: 신분은 평민이지만 부를 축적한 사람

17896.17 1791.9.30. 혁명은 온건: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되 왕의 권한을 어느 정도 제한할지 결정하는 것

179193일 헌법

1791101일 입법의회 열림

입법의회

입헌군주제 채택: 국민주권의 개념 명확히 왕은 행정부 수반, 그러나 의회의 통제를 받음.

시민을 수동적 시민과 능동적 시민으로 구분

루이 16세는 법류 거부권&각료 선택권 왕권은 여전히 강함

루이 16세 혁명 초기 왕권이 강해졌지만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가 혁명에 반대하는 견해를 표명하자 상황이 달라진다.

제헌 의회 기간 중 왕은 통치권을 소유. 1789922일 제헌 의회: “프랑스 정부는 군주제다.”

법률안 거부권. 각료 선택권, 외교권 부여

루이 16, 1791621일 외국으로 도망가려다가 바렌에서 잡히다.

샹드마르스 광장의 학살

1791717일 파리 시민들은 마르스 광장에 모여 공화제 실시를 주장.

입법 의회 구성

보수파(푀양파) 264, 좌파 136, 독립파 345

좌파? 가코뱅 클럽 등록의원 통칭

입법의회가 진행됨에 따라 지롱드 출신 의원들이 브리소를 중심으로 뭉쳐 지롱드파 형성

지롱드파: 독립파 의원들의 협조를 받아 입법의회 주도

대게 지방 부르주아 출신 경제적으로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며 자유주의 정책 추구

파리의 민중운동 혐오

보르도, 낭트, 마르세유등의 상공업자와 손을 잡고 있었고 스위스, 네덜란드, 벨 기에 등에서 프랑스로 망명온 금융업자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부르즈아 이익 대변: 급진적 민주파와 대립

1972810일 봉기 발생

6. 전쟁을 획책한 루이 16, 탑 속에 갇히다.

17924& 7,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선전포고 혁명의 무력 진압을 선전. 전쟁 시작은 프랑스. 당시 프랑스의 각 정파는 전쟁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이 16: 패전을 통한 왕권 회복,

푀양파 라파예트: 전쟁 시 지휘권 확보

지롱드파: 반혁명 세력 몰살 시킬 기회

전쟁이 장기화 되며 민중 세력의 급격한 성장

라파예트: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우지 않고 후퇴한다,

라파예트는 오스트리아에 휴전을 제의했고 루이 16세의 뜻대로 프랑스의 패전이 보였다.

이에 입법의회는 왕이 주도한 것임을 알고 민병대를 파리로 부르려 했지만 루이 16세가 의용병 소집에 반대하며 내각을 해산한다.

620일 파리 민중 봉기

애국자인 대신들을 복직 시키라. 자유의 모자(빨간 모자)

지롱드파는 711조국 프랑스가 위기에 처했다.’ 선언하며 계엄령을 선포한다. 수동적 시민에게도 무기 휴대를 허락하고

파리의 48개 구민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이후 파리 민중은 구민회의 장악- 세력증가

지롱드파에게 왕권 정지 선언, 혁명 적극 추진, 민중 위한 정책 요구 하지만 지롱드파는 왕과 타협하려 했다.

810일 파리 시민 봉기

혁명 시의회 만들어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의회로 가 왕군 정지, 국민공회 소집 요구(새로운 헌법)

탕플 수도원 탑

루이 16세는 탕플 수도원 탑에 갇혔고, 왕을 옹호했던 귀족 세력은 파멸했다.

 

7. 루이 16세의 죽음과 혁명의 수출

- 1792920일 국민 공회소집

프랑스 제1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발미 전투 승리

괴테: “이날 이곳에서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

국민공회 1791920일 공화정 선포 921

의원 수 750, 지롱드파 150 200여명, 중도파(평원당) 과반수 차지, 산악파 소수파(의사당의 높은 자리에 앉다.(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자코뱅 수도원에서 많이 모여서 자코뱅파라고도 불림

국민 공회에서 입법의회를 주도한 지롱드파가 다수를 차지한 이유는?

지방 민중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의 810일 봉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지방 민중은 혁명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지 않았다.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국왕의 처리를 놓고 격하게 대립

신선한 국왕을 재판을 할 수 없다. 지롱드파

왕을 처형하고 혁명을 진전시키자. 산악파

튈르리궁 비밀 벽장에서 반혁명적 문서가 발견되어 1793114일 사형 판결이 내려진다.

루이 16세 처형(1793121, 콩고트 광장): “나는 죄가 없다. 그러나 나는 적을 용서하겠다. 나의 피가 프랑스인에게 행복을 주고 또 신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프랑스에서 민중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왕을 처형하자 유럽이 경악

혁명군은 전세 역전을 위해 알프스, 라인, 벨기에 쪽으로 진격

혁명이 전 유럽으로 수출되려는 순간

대프랑스 동맹군 결성(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에스파냐, 이탈리아등)

1793년 프랑스 전역 긴장 & 불안 증폭

전쟁 비용 마련

인플레이션 격화

생필품 품귀 현상

30만 징집령(혁명 세력)

방데 지역 농민 반란

뒤무리에 장군 오스트리아로 도주

8. 로베르피에르의 공포정치

산악파의 혁명 강화로 혁명 재판소를 만들고 공안 위원회

최고 가격제 도입

에베르, 바를레

지롱드파의 체포로 대립이 격심

마라의 봉기 촉기

1793531일 민중봉기

62일 의회 포위하여 지롱드파 의원 축출

로베스피에르, 당통

민중의 힘에 의해서 의회가 전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지롱드파의 축출만 원함

1792810일 봉기: 민중은 정치의 전면에 등장

이듬해 62일 봉기: 혁명 정부의 정권 완전히 장악

이제 혁명은 민중의 손에서 진행

아테네 민주주의 : 관직 추첨제, 민회참석 수당. 관극 수당. 대규모 건설사업

1793년 프랑스

95: 구민회의 참석 시민에게 수당 지급

911: 최고 가격제 전국 확대 실시, 국립 작업장

319: 공공 부조의 일반 조직에 관한 원칙을 법으로 정한 바 있다.

1. “모든 인간은 건강하다면 노동을 통하여 일할 수 없다면 무상으로 부조를 받아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지닌다.”

권리선언: “사회는 곤궁한 시민에게 일터를 제공해주거나,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에게는 생존 수단을 보장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국민 공회 교육 중시

624일 권리선언: 사회는 총력을 다하여 공공 이성의 진보를 촉진시키고, 모든 시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810일 헌법 공표

1010일 헌법 시행 보류

에베르: 재산의 평등

재산의 최고액을 규정, 직접 경작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많은 토지 소유 불가, 공 장이나 점포는 11개만 소유

프랑스 대내 정세 불안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군대 프랑스 북부 침공, 에스파냐 군의 남쪽 위협

1793년대 방데 반란군이 루아르 강을 건너 세력 확대- 국민 공회 로베르피에르 주도하에 과감하게 20만명 학살

국민 총동원령

95일 공포정치시작

공안위원회

군 통수권 등 최고의 권력 가진다

로베스피에르

1010일 프랑스의 임시 정부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 공안위원회에 비상대권 부여

공안위원회(비상혁명위원회)

프랑스 외교, 군사, 행정 일체 감독

불파 활동으로 인한 역량 분산 막기 위해 분파활동 금지 혁명재판소

반혁명 분자들, 분파 활동자 처형

EX) 지롱드파, 에베르파, 당통파, 왕비

파리의 민중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민중 조직도 악화되었다.

9. 테르미도르 반동과 혁명의 종결

국외 상황의 개선으로 공포정치 완화 요구 & 온건파 등장

로베스피에르; 나는 오래 살 생각이 없다. 오직 미덕과 신의 섭리를 위해 나를 희생시키고 싶을 뿐이다.

생쥐스트: 1794727일 생쥐스트가 연설을 하려 하자 방해

탈리앙, 비요바렌(온건파)등 은 숙청 명단 발표로 생각

온건파 의원의 공회 장악, 로베스피에르 & 생쥐스트 체포

테르미도르의 반동

로베스피에르 처형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프랑스 혁명은 동결되었다. (1804)

주요 지도자 사망, 파리 민중 세력 와해, 혁명의 보수와, 장군 득세, 총재 정부, 통령 전부를 거체 나폴레옹 집권

나폴레옹의 대관식

군주제 부활

19세기 혁명의 시대

7월 혁명

파리 코뮌

2월 혁명

19세기 유럽 각국의 진보적인 지식인과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투쟁하였다. -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하게 뿌리 내렸다.

11 장 맬서스의 환경을 극복한 산업혁명

맬서스적 환경(사람 이름17661834): 다윈이 영향받은 책: 라엘, 지질학원리, 맬서스의 인구론)

- 산업혁명 이전: 인류의 주 산업 농업- 인구 90%이상이 농업에 종사

- 어느 마을의 가축이 죽으면 다른 마을에는 그만큼 가축이 증가한다고 믿음- 식량 한정

- 아고브라드 사람들- 그리모랄드 공작이 들판에 이상한 가루 뿌렸다고 믿음

- 전근대인들은 인구 조절의 필요성을 느꼈다.

- 피임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 유아와 & 노인 방기하고 죽음

- 스파르타인: 어떤 자가 몹시 연로해지면 모든 친척들이 함께 모여 다른 가축들과 더불어 그 를 제물로 잡아 죽이고 그 고기들을 삶아서 차치를 벌인다. 그들은 이것을 가장 행복한 죽음으로 여긴다. 반면 병으로 죽은 자의 경우에는 먹지 않고 땅에 묻는 데, 그들은 그가 제물로 죽지 못하게 된 것을 불행으로 간주한다. - 마사게타이 인 습속

튀르크, 몽골족: 질식

시베리아 북쪽: 노인 자살

안데스인: 노인을 죽여 시체를 먹는다

12세시 잉카 지도자 만코 카팍이 정복한 후 그런 풍습이 사라짐

우리나라 고려장

인구가 증가하고 식량이 모자라면 대규모 인구 이동 전쟁 발생

인구가 줄고 토지가 남는다

인구증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 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식량이 일정하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와 감소를 반복 맬서스적 환경

동물의 세계에도 존재한다.

2. 농업 혁명(농업경영의 효율화, 농작 기술의 발전)

14세기 전 유럽에 전염병, 전쟁, 반란, 기후 조건 악화 등으로 인구 급격히 감소

흑사병(1348 -1350)

백년 전쟁(1337 1453)

와트타일러의 난(1381:영국) 귀족제,

16 7 세기 농업 기술 혁신(계급 투쟁. 기술 혁신)

14세기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현상 새로운 토지 소유제 등장

장원제(농노와 영주)

영주: 토지 소유권 & 지역 지배권 농업 생산량의 70% 차지

농노는 토지 대한 경작권으로 보유지 평생 경작, 후손에게 상속, 판단대로 경작, 토지 운영은 농노의 자유.

14 16세기 계급 투쟁

농노들의 인신 예속 문제

농노들의 토지 보유권 문제

영국 영주들은 1349년 이후 이주 허가 벌금을 올려 농민 이주 억제

농민 반란& 도주로 실패

농노 소유 토지를 영주 직영지에 병합

영주는 점차 농노의 경작권 부정

대규모 토지 집적 인클로저 운동(농노를 쫓아내고 울타리를 침)

지주는 농민을 소작인으로 고용

토지를 목초지로 만들어 양 방목 모직물 업 성장

토머스 모어;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1789년 봉건제 폐지 선언

고대 로마 라티푼디아

귀족들은 대규모 토지 집적 상품 작물 재배

16 7 세기 영국 대토지 집적

관개 목초지 도입

새로운 윤작체제의 도입

삼포제 3년째 휴한지 토지에 순무, 클로버, 가시 완두 심는다

(땅에 질소 고정 & 사료 사용)

토지 생산성 급격히 향상, 4

인류는 맬서스의 고리를 빠져나왔으나 인구 증가로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며 도시 문제 & 빈곤&실업 문제가 발생

3. 공장의 탄생(1769년에 와트가 증기 기관을 효율을 크게 개선:특허)

수공업자 11세기: 상업 부흥 & 교역증가. 동방과 원격지 무역 정기시

중세말 선대제 도입 전문화 & 분업화

기계제 공장 공업 탄생(1760) 메뉴팩처 분업 체계화 메뉴팩처 등장

독립적 수공업자를 자본가의 통제 하에 하나의 작업장으로 통합

같은 종류의 물품 생산하는 수공업자를 한 작업장에 고용하여 각 기 개별적으로 작업

모직물 공업. 국민적 산업

& 면화 대량 수입 1602 동인도 회사 수립

인도산 면포는 거의 수세기 동안 국가 번영의 수호자로서 신화적인 신뢰를 받아 왔고 18세기 말까지도 아직 강력한 산업 분야였던 구래의 모직물 공업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베인즈

영국은 면방직 공업에 유리한 여건 갖추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신교도들의 영국 이주 면사와 면포 제조 기술, 염색기술

영국 식민지 인도 & 미국에서 목화가 대량으로 재배

값싼 노동력 풍부

길드의 제약이 없다

기계의 발명

존 케이, 하그리브스, 아크라이크: 방적기 개량

1769년 와트: 증기기관 실용화

1792년 증기기관 이용한 방적기

1793년 엘리 휘티니: 조면기

기계제 공장의 등장

7년 전쟁(1757년부터 17637년 전쟁: 세계 전쟁 발생. 인도와 아메리카 전쟁)

공장 탄생의 중요한 의미 1. 인류의 주산업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2. 새로운 생산관계가 정립 되었다.

4. 자본가들의 논리, 자유주의

부르주아 공장

11세기 상인 집단은 옛 로마의 행정 & 종교 중심 도시 근교에 성을 쌓았다.

성을 부르크 & 부르그로 불렀고 그 성에 사는 사람을 부르주아라고 했다

자본가: 도시 인구 집중으로 도시 문제 발생

영국 정부, 인클로저중단, 직인법, 구빈법 시행

시장의 성장을 막고 있는 종교, 사회적 규제와 관습 노동력과 토지의 시장 편입 규제

직인법(1563) - 직인의 임금 관리가 산정,

구빈법(1601) -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 교구가 구제

종교적 제약이 고용 방해 기독교 신자는 자신이 속한 교구 안에서 살아야 한다.

스피남랜드법(1795): 빈민은 수입 상관없이 최저 소득 보장

경쟁적 노동 시장이 확립되지 못함

구빈세는 대중적 부패가 되었다. 방탕한 자들은 부양 받아야 할 자신의 사생아들을 과시하고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의 몫을 얻게 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무지한 소년, 소녀는 그것을 믿고 결혼했다. 밀렵자, 도둑, 매춘부는 협박을 하여 그것을 강제로 탈취했다. 지방 판사는 인기를 끌기를 위해 구빈위원은 편의 주의에 빠져 아낌없이 주었다.(해리엇 마티노)

관리에 의한 임금의 사정, 노동 능력이 있는 실업자 구제, 최저 임금, 생존권 보장을 철폐하려 했다.

애담 스미스: 고전 자유주의: 우주를 창조한 신은 그 우주가 필연적인 인과 법칙을 따라 운행되도록 만들고 그 속에 인류를 창조하였다. 일정한 본성을 가지고 그 우주의 자연 질서에 따르기만 한다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 이신론

이신론: 신은 시계 제조공: 세상을 창조했지만 시계가 스스로 움직이듯 세상의 운행에 관여할 수 없다.

인간은 법칙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애담 스미스: 경제의 기본 원칙 :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다.

신이 인간에게 두 가지 본성을 부여하였는데 하나는 이타적 본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적 본성이다. 이타적 본성은 도덕 생활의 동기가 되고 이기적 본성은 경제생활의 동기가 된다.“

인간의 이기심 = 경제 활동의 기본

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 정부는 치안 유지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

존 스튜어트 밀: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 완성

개인 방임: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부 를 증가시키는 원천이므로, 국가나 사회가 그것을 규제하면 안된다.

자유주위 성장: 자유주위 사상가 빈민에 대한 책임을 시장에 맡겨라. 그러면 모든 것이 스스로 조정될 것이다.“

1848513일 이코노미스트

고난과 사악은 자연의 훈계이다. 사람은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법률로써 이 고난과 사악을 세계에서 추방하려는 성급한 자선적 의도는 항상 선보다 더 많은 사악을 가져왔다.

1795:정주법 완화

1813: 직인법 철폐

1834: 수정 구빈법 제정, 구빈원 설립

관습이나 종교, 정부의 통제없이 오직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작동하는 자율적인 노동 시장 형성

5. 비참한 아이들

인간 기계의 단순화 부속물화

1830년 이전에는 아주 열악한 상환에서 유아들이 노동을 했다

평균 12시간 주당 72시간 노동 아이들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체벌이었다.

나를 부렸던 조방공은 길고 무거운 막대기를 쥐고 있다가 심하게 때렸습니다. 우리가 기계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매질을 피할 수 있었을 때는, 그는 기계 위에서 쇠와 나무를 만들어진 롤러를 끄집어 냅니다. 롤러 끝에는 그것이 빠지지 않도록 철봉이 박혀 있습니다. 나는 종종 그 철봉에 머리를 얻어 맞았습니다. 그는 가끔 롤로를 던지는데, 한번은 그가 힘껏 던진 롤러가 내 머리를 살짝 비켜 날아가 바닥에 2야드쯤 높이 튄 다음 옆의 기계에 떨어져서 그 기계를 부셨을 정도였습니다.

자유 방임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 & 방지

12 장 근대 유럽의 세력 균형을 바꾼 독일의 통일(1871)

독일 민족의 형성

독일인의 기원: 고대 게르만족: 주로 유럽 중북부 거주

야스토르프인의 독자적 문명권 형성 이후 로마와 대치

갈리아 북쪽에 사는 종족 통칭 게르만 족

타키투스: 게르마니아란 책을 써서 세 부족으로 나눔

인게보네스(하위 부족 테우톤(튜턴), 반달, 킴브리, 유트, 앙겔, 색슨

페르미노세스

이스태보네스

프랑크족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독일 민족 형성

카룰루스 대제

루트비히 1: 분할 상속

슈트라스부르크 서약

루트비히 2, 3남의 서약

링구아 로마나 루스키카이(프랑스어:서프랑크)

테오디스크(독일:동프랑크) ” 백성의 말 “- 도이치

843년 베르뒹 조약: 카를 후에 프랑스,

루트비히 후에 독일

독일 지역을 최초로 한 명의 통치자가 다스렸다.

작센 지역 오토 1

중세의 주종 관계로 나라를 새로이 편성

도나우 분지에 바이에른 수비 지역 동부변경 수립(후 오스트리아)

962년 황제의 관 받음

신성로마제국은 주로 현재의 독일 지역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지리적으로 지중해와 떨어져 있었고 독일 중북부는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아 인구 밀도가 낮았음, 1200년 전까지 도시나 대학의 발달은 없었고 사회 문화적으로 후진 상태에 처함

독일은 800- 1000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1100년 이후에 엘베강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 확장

현재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은 1157년에 독일의 영향권으로 들어옴

1200년을 기점으로 발트해 부근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스칸디나비아, 발트해, 라인 하류를 연결하는 무역으로 건설

한자동맹의 무역 경로

한자(Hansa, 모임 또는 단체라는 뜻) 동맹: 해안 도시에서 한자 동맹 결성, 스칸디나비아에서 폴랑드르 지역에 이르는 교역망을 통해 국제 무역 주도, 폴랑드르, 노르웨이, 러시아 쪽에 상관 설치.

국가의식 & 민족의식 약함

카를 4 : 황금 문서: 7선 제후가 황제를 선출하도록 법제화

 

카를 5(합수브루크가, 오스트리아 왕)

: 행운의 상속

독일 제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남동생을 헝가리왕의 딸 안나와 결혼시켜 헝가리를 영향 하에 둔다.

다른 나라들은 전쟁을 하게 내버려두라. 그대 복된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한다.

2. 프로이센의 등장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통치권에 도전 카를 5:네덜란드 펠리페 2

: 독일지역 페르디난드

앙리 2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각 지역에서 믿는 종교는 그 지역을 지배하는 제후가 결 정한다. (중부: 개신교,

칼뱅파 득세

신교와 구교 대립(1618 1648)

베스트팔렌 조약(종교의 자유가 확립되었다.)

독일 지역 200여개의 소규모 독립국가(영방)로 분열

요한 게오르크

변경백 브란덴부르크 세력 성장(호엔촐레른 가문)

알브레히트

- 프리드리히 빌헬름: 군대와 관료제 정비

1620 -1688 종교적 자유 허락

이주민 받아들임

독일 산업 발전에 기여

프리드리히 1 1701 - 1713: 프로이센 왕국 선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군대 증강

1713 - 1740 군국주의 원칙으로 국가 운영

전국을 징병구로 분리

토지 귀족 융커 장교 임명

프리드리히 2: 계몽전제군주

학문과 예술 장려 볼테르

반 마키아벨리 작성국민의 행복은 군주의 이익보다도 더 중요하다.”

포츠담 상수시 궁전 건설 (1759 1763 7년 전쟁)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병합(7년 전쟁 표트르 3세의 도움)

(마리아 테레지아와 싸움 후 슐레지엔 병합)

상수시 궁전(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카를 6세 사망 마리아 테레지아 계승(오스트리아 왕실)

표트르 3

3. 나폴레옹의 침입과 민족의식의 각성

독일 지역 중심국 오스트리아

나폴레옹(유럽의 황제 나폴레옹)

프란츠 2

아우스테를리츠 패배

신성로마제국 해체

라인 동맹: 라인란트 지역의 세력화를 위해 만들었으나 이후 독일의 지도를 간략화 했고 독일 연합체 구성의 전기를 제공한다.

독일인의 프랑스 매료

태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 독일학자 니퍼다이

칸트: 역사철학에 입각한 통찰의 결정적 암시를 프랑스 혁명에서 얻었다.

피히테: 프랑스 혁명을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풍요로운 그림이라 주장

헤겔: 나폴레옹을 새로운 사회 질서를 체현하는 인물로 높이 평가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인습의 족쇄를 끊어버릴 수 있는 민중의 권리 표현하며 전제 정치에 분노, 파우스트: 인간은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다는 이상 제시

베토벤: 3번 교향곡 영웅 작곡했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에 실망하여 표지를 찢었다.(1804)

나폴레옹에게서 돌아온 것은 압제 & 징발

독일 수출 위축: 프랑스 수출품에 혜택 제공, 수입품에는 높은 관세 부과-독일 상공업 크게 타격

정복 전쟁 독일인 징병, 러시아 원정에 독일인 20만명 동원

문화제국주의의 정책, 라인 동맹을 맺어 프랑스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라고 강요

피히테; 나폴레옹의 베를린 점령

1807독일 국민에게 고함”, 연설

나폴레옹은 자유 혁명 이념의 변조자이자 독일 민족의 압제자라고 선언하고 독일 인들은 폭력으로 그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

슐라이어마허: 애국심을 종교적인 신앙과 결부하는 설교

실러: 빌헤름 텔: 독일인의 저항의식 고취

독일 지식인들 독일 민족의 공통성을 국가가 아니라 언어, 관습, 문학, 예술에서 찿음

독일인을 근원 민족으로 제시(모든 것에 근원이 되는 민족)

게르만족 우월주의 원류

반 프랑스운동이 낭만주의로 발전

과거 독일 민족이 남긴 시, 예술, 습속, 역사를 정리 보존하여 민족 감정 구체화 감성의 영역 부활

전체보다 개체, 세계주의보다 독일 문화의 특수성, 합리성보다 기독교 민중 신화 추구

그림형제의 동화

4. 통일 운동의 시작

나폴레옹의 지배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오스트리아

스타디온, 외무장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에서 독일 민족의 해방자 & 통일자가 나와야 한다.

1806, 1809년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통해서 저항, 그러나 패배 후에 전의를 상실하고 결혼을 통해 나폴레옹과 결합을 추구한다.

1812(6-12)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패배하자 프랑스 저항 본격적 대두

라이프치히 전투: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승리

나폴레옹 패배

오스트리아, 나폴레옹 독일 침략 이전으로 돌아가자(오스트리아 영향력 확대)

빈 회의(지식인 1815: 1815년 입헌주의 운동, 학생조합 결성, 독일 통일 위해 노력. 독일 연방 결성 34개의 군주국 +4개의 자유도시(1866년 북독일 연방으로 대체)

- 괴레스: 독일 연방국 제안

아른트: 통일 국가를 위한 헌법 작성

1818년 프로이센 관세법 제정: 국내 관세 폐지, 외국 상품에 10%관세 부과

프로이센 주변 군주국은 프로이센 관세제체에 통합

- 1829년 통상 조약(프로이센, 헤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사이에서 체결, 1834년 독일 관세 동맹 체결, 프로이센과 대립하던 오스트리아와 북부국가들은 제외, 이 동맹의 체결로 프로이센은 이후 독일 통일에서 주도권 장악)

5.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8482월 혁명: 프랑스에서 발생한 혁명이 독일의 진보적인 시민 계급과 민중 자극

토그빌: 정부는 주주가 차지할 이익만을 위하여 운영하는 산업회사와 비슷하다.

18482월 만하임 대규모 민중 집회

독일 3월 혁명: 313일 빈 폭등 발생- 독일의 봉건적 질서에 결정적인 타격

독일 통일에 대한 여론을 전국민적으로 확산

독일 의회 구성 요구. 18485월 프랑크푸르트 독일 국민의회 개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국민 주권에 기초하는 민주적 통일 의회(인구 비례로 대표선출)

난제: 1. 국경선 문제. 2. 독일 내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

불구 & 중부 독일: 소독일주의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배제

프로이센 주도하 통합

분리주의자& 가톨릭교도&오스트리아: 대 독일주의자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포함

아른트; 그것은 전 독일이어야 한다.

184934일 오스트리아가 제국 전체를 빈 통제하에 둔다고 발표

의회는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 황제로 선출 &헌법 제정

프리드리히 빌헬름 4: 티롤과 트리에스트, 오스트리아을 제외한 독을은 코 없는 얼굴보다 흉할 것이다.라며 거절했고 이로써 독일 통일 무산

6. 비스마르크의 현실 정치

비스마르크:

통일 주도권 장앙 군대 증강

자유주의자가 장악한 의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 시민의 희생

1861년 의회는 군대 증강에 필요한 자금 일체 추가 지출 거부, 국와으이 통치에 정면으로 맞선다.

강력한 군대 육성: 독일 내에서 프로이센의 지위는 자유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힘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오늘날의 중요한 문제들도 연설과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와 철에 의해서만 해결될 것이다.

빈 회의 주도한 오스트리아는 독일을 38개의 작은 국가로 분할

독일 연방

국간 간 협력 독일 연방 창설

1815년 프랑크푸르트 연방 의회 설치

연방의 통합력 매우 약했다

국가의 범위 자주 변했다.

비스마르크, 연방 주재 공사를 지내면서 오스트리아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통일 주도하려 한다

18638월 오스트리아 개혁안 토의 제안

비스마르크 반대로 프로이센 왕 불참

슬레스비히, 홀슈타인 문제: 덴마크 민족주의자 슐레스비히 지역 통합 요구

1864년 궁정회의 비스마르크의 합방 선언- 덴마크와 전쟁 의미1864년 비스마르크가 두 지 프로이센에 합반 선언

오스트리아와 동맹 맺어 장악

홀슈타인 오스트리아

슐레스비히 프로이센

나폴레옹 3: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위해 프랑스아 이탈리아 회유

186667일 홀슈타인에 군대 파견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승이를 예상했으나

몰트케 7주만에 오스트리아와 연합군 격파하고 항복 받아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나폴레옹 3세는 소독일 요구(비스마르크 수용)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지역 획득

중북부 통일 소독일 건설 성공

나폴레옹 3: 룩셈부르크를 차지하고 벨기에로 진출하려는 야먕

18673월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국왕에게 룩셈부르크의 주권 팔라고 제안

이사벨라 여왕 축출: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_ 에스퍄냐인이 독일인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 추진

엠스 온천 사건: 비스마르크의 프랑스와 전쟁 준비 돌입

719일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전쟁 선포

187092일 세당 전투 승리. 프로이센 승기 잡음

세당 전투: 187111일 베르사유에 머물던 빌헬름 에게 독일 황제 관 바침

18711월 프랑스 항복

알자스 로렌 지역 차지함

배상금 50억 프랑 지급

독일 통일 완수

통일은 독일을 유럽 초 강대국으로 등장 시켰다

2차 산업혁명 주도- 국력 성장

20세기 독일인이 유럽을 주도하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19세기말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강력한 군사력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게르비누스: 통일 이후 독일의 앞길이 어둡다

독일은 갈등 해결을 군사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1, 2차 세계대전 발생

13 장 사회주의의 발달과 러시아혁명

산업사회의 두 얼굴

- 산업사회의 이중성: 생산성의 증가, 문명의 이기 증가, 풍요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 증폭, 그 러나 빈부 격차 증가, 노동자의 생활 악화

- 엥겔스가 인용한 영국 잡지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현실

- 노동자가 비참해진 이유: 인구 증가: 17501850년 영국의 인구 세 배 증가,

1800-1846년 프로이센의 인구 두 배 증가

- 그러나 산업혁명기 생산의 증가> 인구의 증가

- 문제: 무절제한 자본가들의 탐욕과 그 탐욕을 용인하는 사회 제도

- 산업혁명기 자본가는 새로운 왕이자 노예주

- 자본가들의 횡포, 폭력적인 노동 조건 부여

- 자본가의 횡포 임금마저 현금이 아닌 물품으로 지급

- 임금 삭감 & 해고

경기 순환: 경기 순환에 따른 불황: 생산 소비의 불균형으로 인한 경기 순환, 19세기 10주년을 주기로 반복됨. 대공황, 아담 스미스의 이론이 틀린 것 입증, 자유주의 경제학 수정 필요.

케인즈 고용, 화폐 이자에 관한 일반 이론,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이론적 배경 제공

자본주의를 대체하거나 최소한 수정할 새로운 대안 필요.

2. 초기 사회주의자들

자유주의 생산성 증대로 모든 문제 해결될 것, 그러나 현실은 더욱 악화됨.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등장 바로 사회 주의자

사회 주의자: 개인주의에 반대하며 사회주의자는 인간에게 사회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사람

자유주의: 개인의 자유 & 권리 신성시, 경쟁이 사회 발전의 근본 동력

사회주의: 인간은 집단으로만 존재(사회성), 사회내의 모든 사람은 평등, 협력해야 발전

기계 파괴운동: 전통적인 생산 방식 고수하려한 운동으로 19세기 초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산업 혁명의 거대한 물결을 막지 못했다.

생시몽: 낙관주의에 입각하여 산업화를 추진해야 하며 산업사회의 정착이 인류의 풍요를 가 져 올 것, 그러나 자유주의에 맞서 새로운 대안 제시, 경쟁을 배제하고 협동을 강 조, 소유주가 아니라 생산자 중심의 사회 구성 필요. 소유권 제한 소유권을 부정 하지는 않았으나 공공의 안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

산업화 산업 사회의 운영에 대해서 자유주의와 다른 생각 제시

푸리에: 빈부 격차를 해결하려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조직해야 한다

팔랑스테르- 1800명으로 구성된 작은 단위로 구성, 이윤을 노동자에게 5/12, 관리 자에게 4/12, 자본가에게3/12. 자본가 중심 세계 해체, 노동자 중심인 새로운 사 회

오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있을 때보다 공동 이익을 위해서 함께 일할 때 더 열심히 일하며 이렇게 협동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칠 수 있다.

유사한 노동자 공동체 구상
자본가가 탐욕을 부지지 않고 노동자들과 협조하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

뉴래너크(스코틀랜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뉴하모니 건설(1825, 인디애너주). 고 된 노동 감당 못하는 사람 증가, 내부 파당 생기면서 실패

3. 마르크스와 과학적 사회주의

마르크스: 1818- 1883. 아버지 유대인. 기독교로 개종,

184210월 주필이 되어 베를린의 사회, 노동, 경제에 대한 논설을 쓰는 과정 에서 자본주의 & 노동자의 현실을 알고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문제 해결 해야 한다는 신념 가짐 (라인 신문)

파리 망명 엥겔스(1820 1890)와의 만남: 공산주의 가담

노동 가치설 수용, 노동자의 소외 문제 집중 다룸, 초기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 주의로 규정, 과학적 사회주의 수립 시도, 첫 책 경제 철학 수고(1844)

다음책이 공산당 선언 1848년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

공산당 서언의 요구사항 10가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려 한다

헤겔

헤겔 관념론 반대 사상과 사회적 제도들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서 물질 관계의 발전을 따른다.

3. 마르크스와 과학적 사회주의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유물론적 철학 기반으로 세계 역사 분석 정치 경제학 비판 1857, 자본론1

자본주의 속성 분석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악한 제도.

역사적 유물론

인류 역사 원시적 공산주의 고대 노예제. - 중세 농노제 근대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변화

- 생산력 + 생산 관계가 상호작용하여 프랑스 혁명이끔

자본주의도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 양식이 될 것이다. 대규모의 계급 투쟁이 발생하여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 성립 사회주의 & 공산주의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받는다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할 때까지 강력한 계급 투쟁 지양하고 기다려야 하는가?

낙후된 사회일지라도 계급 투쟁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가?

4. 수정주의자들

사회주의 폭력 혁명을 통한 새로운 사회 건설

마르크스 이상에 동조하며 실현 방향에서 다른 방법 제시 수정주의자

fabian Society: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 선거&교육중시, 노동자들이 투표하면 집권 가능

파피우스

베른슈타인

차티스트 운동 1838년부터 1840년대 후반까지를 보통선거를 바탕으로 한 의회민주주의의 실시를 요구하며 영국에서 벌어졌던 최초의 노동자 운동.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주장

페이비언주의자들이 중시한 교육은 엘리트 계층을 목표로.

마르크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국가 =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폭력적인 기구

페이비언주의자: 엘리트 집단을 교육하면 사회주의 전향 가능 국가= 중립적인 존재 선거를 통해 국가 권력 장악가능하며 새로운 세계 건설 가능

베른슈타인: 1872년 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입당

1881년 사회 민주주의자 편집장 임명(마르크스, 엥겔스)

1896년 사회주의 문제들

1899년 사회 민주주의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 과제들- 수정주의 이론 본격 발 표

노동자 계급은 폭력적인 혁명을 지양하고 자신의 정치 경제적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

- 현재 유럽 여러나라의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정책 추종

- 1959년 독일 사회민주당: 공식적으로 베르슈타인의 주장을 당 노선으로 채택

5. 레닌과 러시아 혁명: 러시아 인구 대부분 농민, 자본주의 발달은 초보적

러시아 근대화 운동

1825년 데카브리스트 러시아 제국에서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 지향 군사 정변

1870년대 브나로드(인민속으로)- 농촌 공동체에 기반 자본주의 뛰어넘고 이상 사회건설 추구

1890년대 산업화, 1898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인구 12(세계 3), 산업 생산 세계 5

플레하노프 러시아 최초의 사회주의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기에 앞서 먼저 자본주의를 성립시키고 시민혁명을 촉진시켜야 한다.

볼세비키의 주장: 1. 시민혁명을 빨리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2. 정치는 사회주의자(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있어야 한다

3. 시민혁명은 사회주의자들의 정권 탈취로 이어져야 한다.

볼셰비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강령 레닌(소수)

멘세비키(다수):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시기 상조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혁명 상황에 대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응

러일 전쟁(190428일에서 190595일까지 )폐배로 경제적 어려움.

피의 일요일 사건(군의 발표로 천명 사망)

19051월 이후 러시아 혁명 상태

계급의 시민혁명 주도

10월 선언: 시민 권리 & 자유 존중: 입법권 가진 의회 설립 하지만 겉으로만 양보, 자유주의 와 노동자 분리 시도. 듀마 설립. 전제정치 부활(니콜라이 2)

191471차 세계대전

레닌(:제국주의)은 망명지에서 전쟁을 지켜보며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새로이 정립하고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을 찾았다.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 규정하고 고리가 약한 주변부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

19172월 혁명: 노동자 및 사병 대표 소비에트(평의회라는 뜻)- 임시정부 구성 정권 장악

멘셰비키는 러시아는 아직 시민 혁명 완수되지 않았기에 시민계급을 대변하는 임시 정부 안정이 먼저

레닌: 4월 테제 발표. 시민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즉각 이행 주장

평화, 토지 그리고 빵

러시아 농민

농토는 그것이 직접 일구는 자의 소유여야하며 거기서 땀 흘리는 자의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 노조 결성

군대 운영 위원회 선출

임시 정부 멘셰비키의 지지 속에 전쟁 지속

10월 혁명(볼셰비키) 인류 최초 사회주의 정권 수립. 반혁명군(백군 + 외부 세력) 과 내전을 통해서 혁명을 지켜냄.

197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 몰락 시작되어

사회주의는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고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몰락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가 아님을 입증했다.

 

14 장 하나의 유럽을 지향한 유럽 통합(27개의 국가연합이 하나의 국가처럼 운영)

유럽이라는 말의 등장

- 아카드어: 아수(asu) - 해가 뜨는 지역

에레브(ereb) - 해가 지는 어두운 지역(악한 신의 땅)

유럽(Europe): 해가 지는 땅

에우로페: 페르시아어 해지는 곳: 어두운 피부의 사람(제우스가 에우로페 납치해, 크레타섬으로, 미노스 탄생)

유럽이란 단어: 그리스 시대에 본격 등장

호메로스: 아티카 반도에 사는 사람을 유럽인이라 부른 것 같다.

헤로도토스의 세 대륙 구분: 아시아: 현재 아랍지역&이집트

아프리카: 현재 이집트 제외한 아프리카 대부분

유럽: 그리스&이탈리아 포함한 동남 유럽 일대

유럽의 경계: 동 흑해, 서 퀴네테스(이베리아반도)인 거주지, 남 지중해 북 스키타이 이남.

유럽은 문화나 종족 역사면에서 아시아와 뚜렷이 구별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2. 그리스인들의 유럽 인식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문화의 황금기: 소크라테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아시아인: 수동적 유약하기에 열등하다

그리스인: 능동적이고 강인 하기에 뛰어나다.

소크라테스, 국수주위적 생각 발전

아리스토텔레스; 동방은 폐쇄적 수동적 사회 조직 체제

그리스폴리스는 열려있고 사회 문제를 효과적 & 합리적으로 처리

그리스 우월함 주장

이소크라테스: 그리스인들을 동족으로 본다.

그리스인들은 이분법적 사고

3. 영원한 제국 로마와 기독교 유럽 개념의 탄생

로마인들은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지리적 개념으로 생각, - 유럽과 아시아에 영토를 두고 있어서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음

로마가 유럽 개념에 남긴 유산: 1. 영원한 로마의 개념

2. 기독교 세계

키케로: 영원한 통치

아우구스투스: 영원한 로마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악티움 해전:로마가 세계의 중심

도시 로마와 세계 동일시

로마는 세계를 영원히 지배할 운명이다.

베르길리우스: 로마를 하나의 신으로 만든 여신 로마 탄생(기원전 195)

트라야뉴스: 121421일 로마의 탄생일 지정

하드리아누스: 137년 여신 로마을 위한 신전 건설

로마제국과 기독교는 하나다.

클라우디아누스: 로마는 모든 자를 품으로 안아 들였고 모든 인류를 똑같은 이름으로 품어 들였다. 권위적인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어머니의 자애로운 품속과 같이 그리고 그들을 동포라고 부르며 길들였고 사랑의 끈으로 모든 분열된 것들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낯선이가 이곳에서 고향처럼 살 수 있게 했고 우리 모두를 하나의 민족처럼 살 수 있도록 한 이 모든 것은 평화를 가져 다 주는 로마의 선한 관습 덕분이다. (보편제국) 로마의 힘은 경계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할 것이다.

에우세비우스: 하나의 세계 국가인 로마제국이 일어나 번영하면서 여러 국가 간에 쌓여 있 던 증오심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유일신에 대한 이해와 하나의 종교 및 예수를 통한 하나의 구원이 알려지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기독교 수용

카롤루스 대제 일반 훈령(800125일 서로마 황제가 됨)

오토 대제 신성로마제국(962년에)

4. 중세시대의 유럽

동서로마 분열

동로마 영역: 단성론(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은 각각 다른 존재이면서 하나다

예수인 성자는 인성 + 신성의 합체는 단성론(하나)이다.

서로마 영역: 성상 숭배

동로마 레오 3세 성상 숭배 금지령 서로마 지역 교황 반대

레오1: 교황 수장권 발표

교황 발렌티아누스 3: 서로마 주교들이 교황의 재판권에 복종할 것을 명함

교황권이 탄탄하지 않았다.

교황권 성장 결정적 기여 :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겔라시우스 1: 두 칼 이론; 동로마 황제 황제 교권 주의 반대

정신사&교회사 수장권은 교황에게 있다.

그레고리우스 1: 주교와 성직자들에 대한 교황 지배권 강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보편적 지배권 부정

롬바르드족의 로마 교황령 포위: 프랑크족 실력자 피핀이 해결. 동로라 황제에게 즉위 추인 받지 않는다.

피핀

스테파누스 2

서로마: 가톨릭

동로마: 그리스 정교

니케아 공의회: 삼위 일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동방: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고 하는 이중 산출의 개념은 신성의 유일 긍원인 성부를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비난

1054년 서로 상대를 파문

그레고리우스 1: 유럽을 갈리아&이탈리아를 가리키는 개념

현재의 서유럽 지역이 하나의 독특한 정체성 형성.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유럽인 명칭

카롤루스 대제: 유럽의 아버지

유럽: 프랑크 제국 중심으로 한 유럽 전역

성 키릴로스: 가톨릭이란 단어, 동서로마 교회를 모두 합해서 가리키던 말

유럽은 스스로를 가톨릭이라고 부름

자기와 대비되는 세계로 그리스 정교

정치적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동로마 제국에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권의 이전

신성로마제국: 기독교 제국 건설(유럽은 기독교로 묶인 하나의 통합체라는 개념)

그러나 정치적으로 중세 정치구조 분권적, 원심적 성향이 강했다.

유럽이 하나: 종교와 문화면

5, 근대 서양에서의 유럽 개념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기독교 세계의 보편성을 깨뜨렸다.

기독교의 전파에 따라 새로 발견한 지역과 구별 필요

서양(The west)

옥시덴트(occident)

라틴어 오키도(occido)

해가 지는 서쪽

1492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유럽인 본격적 세계여행 시작, 세계에 대한 보고서 증가. 서양인은 문명화 동양인은 야만스럽다. 오리엔탈리즘 공고화

십자군 전쟁: 유럽인들을 자신들이 뭉쳐야 하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근대로 오면서 유럽 내부 경쟁 시대 도래

백년전쟁(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 프랑스 혁명(1789)으로 민족주의 발달

민족주의 강화로 유럽 개념 희석

영국, 프랑스, 독일인이 각각 독자 국민이라는 인식이 강화

토마스 크롬웰

나폴레옹 대관식

영국과 프랑스가 먼저 민족 국가로 발전하고 독일&이탈리아가 뒤를 따라간다.

조르주 소렐: 게들이 우글거리는 바구니

더 이상 유럽이 없다.

하지만 유럽이 하나라는 인식은 유럽인에게 살아 있었다.

6. 유럽의 통합(17 8세기에 민족주의 우선이지만 유럽 주의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었음)

윌리엄 펜(퀘이커 교도): 유럽 각국이 인구와 경제력에 비례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유럽 의회를 구성하자. (유럽 평화론)의 책을 써서.

루소: 국적을 초월한 유럽 시민만 있을 뿐이다.

유럽 통합 운동 시작, 1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의 등장

쿠덴호브 칼레르기: 범 유럽운동(유럽의 문제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통일이냐, 멸망이냐?)

아리스티드 브리앙: 유럽 연합 제안

 

2차 대전 이후에 미국이 강국이 된다.

소련은 군사력으로 유럽 위협

미국, 러시아, 유럽 세계 대립 구도

처칠: 프랑스와 독일의 화합을 바탕으로 유럽합중국 건설하자

슈만: 유럽 통합의 첫 장을 열다. 독일을 유럽 통합에 편입시켜야 한다. 독일에 석탄, 철광 공동체 수립 제안. (프랑스 관리였다.)

1951418일 유럽 석탄 철강공동체.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참여(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산하 최고 관리청 결정 사항이 회원국과 회원국 내의 기업에 적용. 6개 국가는 주권의 일부 양도한 셈.

19573(로마 조약) 유럽 경제 공동체(ECC)- 회원국간 관세 철폐

착가국 사이 관세 철폐 회원국 외의 국가들과 교역 시 동동 세율 적용 명시

196189일 영국 정식 가입 신청에 이어 덴마크,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스위스, 포르투갈이 가입을 원했다.

-영국과 친한 미국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탓에 영국 불허

유럽경제공동체 + 유럽석탄철강 공동체 + 유럽 원자력 공동체 집행부 = 유럽공동체(EC) - 196771

1973년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가입

1981년 그리스 합류

1986년 에스파냐, 포르투갈 가입

199112월 체결: 마스트리히트 조약:유럽 공동체가 시장 통합을 넘어 정치, 경제적 통합체로 진전하는데 필요한 기반 제공, 유럽 중앙 은행 창설, 단일 통화, 노동 조건이 통일 공동 방위

1999년 유로화 도입 : 유럽인 실감

생겐조약 - 1995년 발효, 조약 국 내 무비자 출입,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

2009년 리스본 조약 발효(정치적 통합 시도): 유럽 의회 의장직, 외교안보정책 고위 대표직 신설, 유럽 연합 법인격 소유. 자율적인 외교, 각국 정부 견제 권한

우럽 연합 회원국 : 인구 45: 유럽 연합의 미래_ 암초들 등장, 회원국 내 경제 불균형 - pigs 독일 정치적 통합의 지연

2020 영국 탈퇴(2013년 크로아티아 가입으로 현재 회원국은 27개국) 외부의 위협 러시아 위협

앞으로의 과제: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 부채가 매우 많다.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연합의 중추 국가들의 극우 정당의 세력 확대.

2016년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연합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로마 문화를 공유하는 단일 문화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유럽 연합을 통해서 협력해야만 발전 할 수 있다는 인식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