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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아버지에게 갔었어』신경숙/창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7. 15.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리게 도착하는 어수선하고 기꺼이 미완성인 편지들

 

 

며칠을 연거푸 내리는 빗님의 성화가 대단하다. 창문 앞 옹벽 위에 세워진 거대한 송전탑은 안전할까, 행여 옹벽이 무너져 거주지를 덮친다면…… 이라는 쓸모없는 생각을 하다가 잠든 밤, 꿈속에서 원하지 않는 이의 세레나데에 쫓겨 도망치고 도망치다 열리지 않는 공간에 꼼짝없이 갇혀버려, 어쩔줄 몰라하며 우왕좌왕하다 선잠을 깬 이른 아침, 아직 옹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송전탑은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순을 넘겨 이제 거칠 것 없이 살아도 될 나이련만 아직도 이처럼 내면의 두려움이 여전하다. 하여 지금까지도 나는 내 뒤에 나를 붙들고 계실 아버지를 느끼며 아버지가 꼭 붙잡고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의지하며 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삶을 지탱할 힘, 나아갈 미래를 잃을 것 같기만 하다. 나약한 내 심성을 위한 안전장치가 돌아가신 지 30여 년도 더 지난 아버지라니, 부끄럽지만 어찌하겠는가?

 

여기 또 나의 아버지와 비슷한 아버지 이야기가 있다.

 

신경숙 작가의 아버지에게 갔었어

 

 

 

 

 

읽으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읽다 멈추고,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끝내 읽어내고야 말았다. 여전히 스토리텔러의 무궁한 에너지를 느끼며 감동을 주는 작가의 역량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책 속의 어떤 부분은 표절 시비에 휘말린 자신의 변명을 하는 문구를 만나기도 했다. 내 개인적인 판단은 작가의 실수였고, 그 실수에 대한 확실하고 빠른 사과가 우선이었을 텐데, 라는 안타까움이 동시에 사장 되어서는 안 될 우리 문학계의 보물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되지 말기를 희망한다. 작가의 다음 책이 기대되는 이야기였다.

 

 

 

<책 속에서>

언젠가 내가 아버지에게 당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응수하자 아버지는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 (7)

 

 

나는 다급한 마음에 어두운 가게에 대고 아버지 아버지…… 불렀다.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와 헤어지게 될 때 가끔 그때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멈춰 서는 버스를 보며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던 다급한 내 목소리. 헤어지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관계에 봉착할 때면 그때 그 신작로에서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던 절박한 내 목소리가 북소리처럼 둥둥둥 머릿속에 울린다. 내가 떠난 후에 그 자리엔 무엇이 남을지 생각할 때도 그때 내가 아버지 나 가요, 소리치며 버스에 올라탄 후 차창 밖에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16 17)

 

어떤 물건들은 그렇게 사라진다. 버리지도 없애지도 누구에게 준 적도 부숴버린 적이 없어도 어느 시간 속에서 놓치고 나면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고 희미해진다. 그래었지. 그래었는데, 라는 여운을 남겨놓고. (20)

 

살아가는 일의 얼마간은 왜곡과 오해로 이루어졌다는 생각. 왜곡되고 오해할 수 있었기에 건너올 수 있는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62)

 

 

아버지는 어느날의 바람 소리, 어느 날의 전쟁, 어느날의 날아가는 새, 어느날의 폭설, 어느날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로 겨우 메워져 덩어리진 익명의 존재. 아버지 내면에 억눌려 있는 표현되지 못하고 문드러져 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 (76)

 

사는 일이 꼭 앞으로 나아가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고 뒤가 더 좋았으믄 거기로 돌아가도 되는 일이제. (중략) 붙들고 있지 말어라. 어디에도 고이지 않게 흘러가게 둬라. (92)

 

 

나는 하마터면 아버지,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라고 할 뻔했다. 나는 하고 싶어서 쓰는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쓰는 것 같아요, 라고.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쏟아져나온 비탄과 차마 나를 다 내려놓지 못해서 발생한 남의 탓과 무엇과도 연대하지 못해 고립된 개인적인 원망들 차마 없애지 못하고 파일을 따로 만들어 저장해 놓은 맥락이 닿지 않은 메모들, 삭제도 수정도 하지 못한 채 파일을 만들어 저장해놓으니 새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저장해놓은 파일 속의 부서진 글들을 불러와 매일 다시 읽어보는 일, 나도 버리고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바뀌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일 파일 속의 글을 불러와 조금씩 고치는 일로 시간을 보냈는지도. 큰 줄기는 손도 대지 못하고 으로 당신으로 들판벌판으로 수정하면서. 그러나 그럴수록 절실히 깨달을 뿐이었다. 차마 버리지 못해 저장해놓은 깨진 것들을 바닥까지 비워내도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조차 없다는 두려움에 눈꺼풀이 떨렸다. (93)

 

 

어떤 사실들은 때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라 시간이 흘러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끝내 사실일까? 싶은 의문과 회의가 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싶어서 사실이 우연이나 조작에 의한 것처럼 보이고 어떤 형식에 맞추기 위해 도식을 끌어온 것처럼 여겨지며 상상에 의한 허구가 오히려 사실처럼 느껴진다. (103)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를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126브레히트의 시)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197)

 

 

내가 웃으니 아버지가 재밌냐? 물었다. 내가 고갤 끄덕이자 아버지는 바로 그거라고 했다.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재밌게 여기면 금방 탈 수 있다고 했다. 넘어지려고 해도 뒤에서 아버지가 꽉 붙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228)

 

 

어떤 사람들은 말이네. 시대와 상황이 앞날을 결정지어버리더라고……그런데 뭘 생각하란 말인가. 어떤 물살에 쓸려가는 줄도 모르고 쓸려갈 수야 없으니까 생각을 계속해야 된다고? 어떤 물살인지 알아서 뭘 하나…… 바꿔놓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297)

 

 

세상의 기준은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소.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312)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면 이해하겠나?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한없이 선하고 끝간 데 없이 폭력적이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자취를 남기네.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흔적 말이야.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그 흔적 찾기였는지도 모르겠어. (322)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뜯어 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 게 인간 아닌가. (323)

 

 

나는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려고 한 번이라도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먼 이국의 사람들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데 나는 내 아버지의 말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아버지 뇌만 기억하도록 두었구나, 싶은 자각이 들었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라고 해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딸이 되어주었으면 수면장애 같은 것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낯선 나라에 와서 겨우 백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쩔쩔매다가 결국 옷장 속까지 기어들어 갔을 때에야 수면장애를 겪는 아버지의 고통이 어떤 것일지가 떠올랐다. (373 374)

 

 

모두들 각자 그르케 헤매다가 가는 것이 이 세상잉게. (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