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난 후에 느리게 도착하는 어수선하고 기꺼이 미완성인 편지들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진 않고 늘 미흡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시간이 무척 오래 지나서야 그러더군요.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우리는 먼지 같은 흔적에 지나지 않아요.” (585쪽)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내 삶은 그저 먼지 같은 흔적에 지나지 않다고 노 작가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인간들의 노력에는 의미가 있다고,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이 오늘을 살아내게 한다고 덧붙인다.
황석영 작가님의 『철도원 삼대』를 이제야 읽어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실감나게 다루고, 사료와 옛이야기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해 냈다.”는 글을 읽고 호기심이 동했지만 미루다 류보선 교수님의 특강으로 용기를 내게 되었다.
정보 면에서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어 6,25 전쟁을 거쳐 노동 현장에서 살았던 철도원 삼대의 이야기의 기술은 큰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재미 면에서는 워낙 방대한 정보의 서술때문인지 읽다 멈추다, 를 반복했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며 오래도록 창밖을 응시했다.
주안댁의 서술은 마술적 리얼리즘, 천명관 작가의 고래 속 금복이와 겹쳐져서 호기심을 끌었다. 이러한 역사소설을 다루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을 했지만, 순수한 문학적 측면에서의 의미를 찾아보려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던 책이었다.
현실과 괴리된 문학은 그 존재 이유가 부정될 수도 있겠지만, 과도한 정보의 나열이 문학적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면, 문학 아마추어인 내 실수일까? 묻게 했다. 더불어 이 소재로 내가 쓴다면 어떤 책이 될까,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책 속의 몇몇 구절들은 지난한 세월을 견디어 온 작가의 보석같은 문구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철도원삼대
#황석영
#창비
#lettersfromatraveler
(책 속에서)
농성 개시 전날 정과 막내 차가 함께 굴뚝으로 올라와 비닐 가리개와 천막 설치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맨 마지막에 난간을 가린 비닐 바깥쪽에 플래카드를 두르고 단단히 붙들어 맸다. ‘!라하장보동노용고 지저각매할분’이라는 글씨는 농성의 이유를 밝히는 제목답게 크게, ‘!직복원전 계승조노’라는 글씨는 소제목처럼 그 아래 작게 썼다. 이진오는 그것을 올려다볼 사람들의 세상 반대쪽에서 거꾸로 보이는 글씨를 읽을 수밖에 없다. (12쪽)
이 모든 노력들에 의미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에서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을 통해 그에게 전해진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낸다. (206 – 207쪽)
“너 굴뚝 위에 혼자 있는 거 같지?”
“할머니하구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그녀는 손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보구 있느니.”
진오는 다시 어린것이 되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영등포시장 거리로 나아갔다. 언제나 꿈속처럼 보이던 버드나무집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213쪽)
“노동자가 높은 데로 올라와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와 입장을 알아달라고 농성하게 된 것만 해두 엄청난 사회적 변화라구. 우리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어.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고.” (410쪽)
이진오는 지금 굴뚝 위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 혹한의 겨울밤에도 저 굴뚝 아래 아파트와 건물 빌딩들의 빛나는 창문들과 강변도로 위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매끈하고 날렵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물결을 볼 때마다 세상은 언제나 그냥 무심하다는 걸 실감한다. 그는 버려지거나 잊힌 것도 아니고 그냥 가로수보다도 못한 관심 밖의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412쪽)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564쪽)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진 않고 늘 미흡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시간이 무척 오래 지나서야 그러더군요.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우리는 먼지 같은 흔적에 지나지 않아요.” (585쪽)
(책 소개 / 편집장의 말– 알라딘에서 빌려옴)
"거장 황석영과 노동의 삼대, 노동의 백년"
투쟁의 역사도 유전되는 것일까.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삼대의 후손 이진오는 굴뚝 위에 올라있다. 아파트 십육층 높이의 발전소 굴뚝 위에서, 부당한 해고에 대항하여 투쟁중인 그는 페트병에 가족의 이름을,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 그들을 호명하며 길고 추운 밤을 견딘다. 꿈과 환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소환의 시간이 시작되면 가족들의 이야기, 노동의 백년이 유장하게 펼쳐진다.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의 철도노동자의 역사가 노동조합과 주의자와 사상과 투옥과 함께 독립운동가 '이재유'등의 실존 인물의 역사와 엮여 흐르고, 이백만의 아내 주안댁, 막음이 고모, 이일철의 아내 신금이와 같은 여성의 역사가 장쾌하게 이야기와 어우러진다. 부당한 대우를 당한 동료를 위해 파업을 결의하고 해고를 감수하는 공장 노동자 신금이의 활동을 따라 읽다보면 이 거대한 이야기가 곧 한국인의 노동의 백년에 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세계가 함께 읽는 작가 황석영이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린 필생의 역작을 펴냈다. 방북중 만난 영등포 출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작하게 된 역사를 질주하는 기차 이야기. 우리 소설의 계보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한다. 염상섭의 <삼대>, 채만식의 <탁류>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그리워한 독자가 특히 반가워할 만한 소설다운 소설. <객지>를 통해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정확하게 들여다본 황석영이, <장길산>, <삼국지> 등을 통해 수많은 인물의 개성을 거침없이 구성하던 황석영이, <손님>을 통해 우리 역사의 모순을 직시하던 황석영이, 독보적인 이야기꾼이 돌아왔다.
- 소설 MD 김효선 (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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