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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각각의 계절 /권여선/문학동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5. 27.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리게 도착하는 어수선하고 기꺼이 미완성인 편지들...
 

 
 
 
 
 
사슴벌레식 문답)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 신입생들은 낯선 공간에 던져진 새끼 오리들처럼 초창기에 대학가에서 함께 지낸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시원시원한 리더 부영, 상냥하고 고지식한 정원과 인내심이 강하고 자신의 벽이 있던 경애. 이 서로 다른 친구들은 꼭 한번 강촌으로 충동적인 여행을 떠난 일이 있다. 긴 시간이 흘렀고 이들은 필연적으로 '어떻게든 이렇게' 됐다.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 단체 대화방에 나, 준희는 부영과 경애를 초청했다"가 이 소설의 첫 문장. 정원은 죽었고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과거의 일들을 회상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아……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 (책 28 – 29쪽)
 
언제부터든, 어떻게든 우리가 이렇게 됐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준희는 마치 자신이 사슴벌레처럼 어디로 들어오기는 했는데 어디로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태와 친구들과의 관계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36쪽)
 
나는 이 문장들을 접하면서 각각의 인생의 합리화가 곧 자신의 모순이지만 동시에 이해 못 할 바도 없는 게 삶이라는 것, 우리는 사슴벌레식 문답을 통해 어떻게든 삶의 모순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작가가 직접 말하지 않는 희망을 발견한다.
 
 
실버들 천만사)
‘반희’는 코로나19로 일하던 체육관이 휴관에 들어간 어느 날 가까운 곳으로 함께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자는 딸 채운의 전화를 받는다. 이혼을 한 후 채운과 따로 살고있는 반희는 그 제안에 다소 놀라지만
 
 
두 사람은 여행을 통해 이혼이라는 것이 채운에게 반희가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서로는 한 개인으로 서로를 지켜 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변명처럼 들리지만 반희는 자신의 이혼이 혹은 채운의 본가와의 의절 또한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75쪽) 라고 짧게 말한다. 더불어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이 숲은, 이 벤치는 참 이상도 하지. 그러면서 반희는 어제저녁과 똑같이,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일러주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채운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79쪽)
 
반희의 생각들이 서슴없이 나에게 스며드는 것은, 아마 살아보니,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실버들처럼 엮여 사랑하자, 라고 말하는 작가의 낮은 속삭임으로 들렸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일흔두 살에 병으로 죽은 마리아를 회상하는 성당 신도들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며 마리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재구성한다. 신도들은 각자가 기억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앞다투어 이야기하며 마리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그 시선에는 마리아를 자신들보다 아래에 놓는 은근한 배타성이 담겨 있다. 화자인 베르타 또한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91쪽) 하고 생각하며 그들의 위선을 예민하게 느끼며 마리아가 죽기 전 그녀와 함께 동행했다가 어떤 여자의 양산에 눈가가 찔리고 주저앉는데, 황급히 자신에게 다가와 눈가를 살피려는 마리아에게서 구취를 맡고 그녀를 밀친 적이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며 자신 또한 전혀 고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애초에 없던 목숨인데 이렇게 태어나서 살았으니 됐고 살아서 좋은 때도 있었으니 됐지요, 하고 마리아는 말했다. 제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건 거기까지예요 사모님. 더는 하느님의 은혜를 바라지 않아요.” (95쪽)
라는 마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연옥에 있는 마리아의 영혼이 부디 최악의 곳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수산나의 넙데데하고 무표정한 얼굴 뒤에 드리운 슬픔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는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114쪽)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관계(자신, 혹은 타인들, 어쩌면 자연, 음악, 그림 등)같은 우리가 찾고자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들로부터 비롯될 것이라는 희망을 얻는다. 나의 낙관주의의 폐단? 여하튼 나는 그리 읽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내가 가장 끌린 단편이다. 마침 내가 현재 고민하던 문제 중 하나였으므로.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172쪽)
어머니와 아들 오식과 여동생 오숙의 관계는 오식도 모르는 사이 자꾸만 틀어지고 여동생 오숙은 원망과 함께 절연을 선언한다. 오식은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고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199쪽)는 사실을 깨달으며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원채가 바로 사는 일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관계, 나 때문에 아픈, 혹은 나를 아프게 하는 인연들에 대한 생각을 되풀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꼬인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좀 힘들지라도 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풀어보자, 매듭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은 꼭 찾아오리란 기대를 가지게 하는 작품이었다.
 
기억의 왈츠)
화자인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에 갔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203 – 204쪽)
나는 그 시절의 경서에 대한 생각을 한다.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내가 그를, 경서라는 인간을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었다. (219쪽)
나는 젊은 시절 경서의 마음을 두려움, 혹은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모르는 체 했다는 기억을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241쪽)
떠올리며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중략)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중략) 공중에서 거미들이 내려와 왈츠의 리듬에 맞춰 은빛 거미줄을 주렴처럼 드리울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241 – 242쪽)라는 삶의 비밀을 깨닫는다. 다행이다. 주인공에게 와인 한 잔을 들려주며 “짠”하고 부딪히며 웃고 싶어졌다.
 
우리 모두는 각각의 계절에 각각의 고난과 역경을 치를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실타래처럼 엮여 있는 관계의 신비를 찾아내 함께 왈츠를 추며 삶을 지속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 어쩐지 작가 권여선이 쑥스럽게 웃으며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나이 듦에서 오는 삶의 지혜, 혹은 수용이라고 한다면 너무 평이한 결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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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언어로는 도무지 포착할 수 없는 일상의 미묘하고도 미세한 영역들을 더듬고 묘사하면서 거기에서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놓기에 이를 만큼 격렬한 정동이 범람하게 만드는 권여선의 내러티브는, 소설 속 한 요소로 노래를 활용하고 있다기보다 ‘이야기로 된 노래’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이야기로 만들어진 ‘노래’인 동시에 ‘이야기’가 된 노래가. 우리가 이 ‘이야기-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우리의 무엇인가를 다시 쓸 수 있을까? 그 답은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 것 같다. - 권희철 (문학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교수)
 
 

 
권여선(1965년 출생, 안동시)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 『레몬』, 산문집 『오늘 뭐 먹지?』가 있다.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유려하고도 엄정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며 한국문학이 신뢰하는 이름이 된 작가 권여선이 삼 년 만에 신작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펴낸다. 술과 인생이 결합할 때 터져나오는 애틋한 삶의 목소리를 담아낸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에두르지 않는 정공법으로 현실을 촘촘하게 새긴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 2020) 이후 일곱번째 소설집으로, 책으로 묶이기 전부터 호평받은 일곱 편의 작품이 봄날의 종합 선물 세트처럼 한데 모였다.
 
1996년에 등단해 사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글쓰기에 매진하며 많은 사람의 인생작으로 남은 작품들을 선보여온 권여선은 이번 소설집에서 기억, 감정, 관계의 중핵으로 파고들며 한 시절을, 한 인물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그 직시의 과정을 거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결코 화사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하는 곳으로 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알라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