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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휘파람 부는 사람/메리 올리버/마음산책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2. 4.

#책소개

 

 

 

 

 

나는 이른 아침, 늦은 오후, 또는 해가 질 무렵 바닷가에 내려와 갈매기들의 탐욕스러운 날갯짓을 부러워하며 신비하고 농밀한 파도의 열망에 들뜬 맹렬함을 응시하거나 서사에 귀를 기울이며 은빛 구슬로 빛나는 물결 너머로 내 오래된 그리움의 편지들을 실어 보내곤 한다.

 

때론 느리게 느리게 해변을 걸으며 내 정신을 모아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의 영혼에서 어떤 것들을 듣기 위해 혹은 느끼기 위해 버려진 장소에서 멀리 와버려 그저 존재만을 유지하며 망각의 길을 여행하는 해변의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는데 특히 소금물에 절여진 나뭇가지를 호기심과 열정과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전 바람 그물 노릇을 했던 그의 시간대를 더듬는 것으로 내 산책의 맛을 누리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공포나 슬픔 혹은 욕망 같은 것들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렸을, 풀 수 없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내야 했으며 아무리 맹렬하게 싸우고, 아무리 다정하게 사랑하고, 아무리 우주의 법칙을 비난하고, 아무리 교활하게 숨어도 피할 수 없는 광대한 영원 속에서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며, 사랑하는 이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그의 시간의 무늬를 간직했을, 이젠 어떤 공포도 슬픔도 욕망도 보이지 않는 그의 허옇게 닳아버린 견고한 몸을 쓰다듬으며 나는 내 언어의 날개 속에 한 올 한 올 수를 놓듯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차에 집어넣으려고, 그러나 너무 길어서 도저히) 어느 하루는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버려진 그를 버리기로 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영원한 휴식을 갈망할지도 모를 너는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거나 심해의 빛, 은하의 별로 태어날 것이 분명할 거야.”라고 나는 부끄럽게 변명했는데 우리의 연대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그는 가만가만 속삭이며 너와 나뿐만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우주의 모든 것은 각각의 심오한 빛을 가지고 있어 그 빛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마음의 집을 항상 열어 두었을 때 가능하다.”라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 2019)

 

휘파람 부는 사람/마음산책

 

나의 트레이드마크는 재주가 아닌 열정이다. (23)

 

나는 내 모든 시가 강렬함 속에서 쉬기를원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들로 풍부해지기를 원한다. 지각으로 느낀 세계가 지적인 세계로 이어지기를 원한다. 지성, 인내, 열정, 기발함으로 산 삶(반드시 내 삶이어야 하는 건 아니고 공식적인 나, 작가로서의 삶)을 나타내기를 원한다. 나는 내 시가 무엇인가를 묻기를, 그리고 그 시의 절정에서 그 질문이 응답 되지 않은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 질문에 답하는 건 독자의 몫임을 작가와 독자 간의 약속에 명시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시가 고동침을, 숨 차오름을, 세속적인 기쁨의 순간을 담기를 원한다. (45)

 

 

영혼을 믿는다면, 늘 눈에 보이는 산이나 손톱을 믿듯 확고하게 영혼을 믿는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광대하고 철저하게 경이로운 일인가! 그런 믿음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고 달라질 테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영혼이 존재하고 우리의 입은 그 영혼을 노래하고 우리의 마음은 그 영혼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은 전체 세상의 반쪽이 된다! (155)

 

나는 열정과 영혼을 믿으며 세상의 모습들로 풍부해진 그의 시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았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걸 느낀다.”는 어느 소설가(김숨)의 감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최고의 문학은 문학이기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인공물이라는 한계를 넘어 복합적인 인간 기록, 언어가 아닌 현실로 이루어진 것의 일부가 되고자 애쓴다. (75)”는 시인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나 또한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44)”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새김질한다.

 

책 속의 글들은 때맞춰 내리는 비처럼 나를 흠뻑 적시고도 종종 겸허하고 기꺼이 그대에게 손을 내밀며 자연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본 것들에 대해 열정으로 관찰하고, 인내심을 갖고 생각하고, 늘 기꺼운 마음으로 살면서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받아쓰기를 하자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속삭일 것이다.

 

 

(책 속에서)

 

시를 쓰고 언어의 상자 속에서(아니면 언어의 날개라고 해야 할까?) 생각과 감정을 다루는 일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움직임의 생명체니까. 오직 부차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 곧 사색, 기쁨, 슬픔, 기도, 혹은 공포의 순간에만 우리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의도적으로나 불운해서나 비활동 자세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가련한 노동자인 시인의 자세다. (21)

 

 

나의 트레이드마크는 재주가 아닌 열정이다. (23)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열정적이고 웅변적으로 이야기해도 그것이 해외 뉴스 정도에 그치지 않도록 잘 전할 수가 없는 소식이 있다. 사람들은 그걸 기꺼워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건 개인적인 늙어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단 하나뿐인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거기 도달하면 반대의 길로 접어드는 것. 그 길 역시 즐겁지만, 이전의 길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건 내리막길이다. 아무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고, 무슨 말로도 그 경로를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시간은 이미 쾌 지났고, 남아 있는 시간은 아주 활동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아하고, 세심하게 보내야 한다. (28~29)

 

 

이젠 몸을 바삐 움직이고 싶은 갈망은 줄었고, 정신의 묘기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도 쓸모없는 목재에 새로운 애정이 생겼다. 버려진 자리에 조용히 남아 그저 존재만을 유지하는 것들 말이다. 물결무늬가 생기고 소금물에 절인 해변의 널빤지들, 좀조개가 파놓은 구멍 천지인 말뚝들. 그리고 숲에 떨어진 오크 목, 단풍나무, 비바람에 시달린 귀한 소나무 가지들. 그들은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망각의 길을 가는 여행자들이다. (30)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목수 청년을 지나쳐 숲으로 들어왔다. 오솔길 근처에 키 큰 단풍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지금은 초봄이라 주름진 적갈색 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한 상태다. 쓰러질 때 방은 충격으로 나무껍질이 여기저기 갈라져 있다. 하지만 그 단풍나무는 서 있을 때와 거의 다름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다. 예전처럼 바람 그물 노릇을 잘하진 못하지만 말이다. 이제 그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나태함은 결코 아니고 여전히 야망과 견줄 수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그걸 휴식이라고 부르자. 나는 그 단풍나무 가지 하나에 앉는다. 나는 한가함을 누려도 괜찮다. 나는 만족스럽다. 내 집을 지었으니까. (30 31)

 

 

휘트니 부인의 손녀가 언급한 대물림된 책임감이라는 표현을 마음속 주머니에 챙겨두었다.

내가 느끼는 책임감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형의 재산을 물려받은 건 아니지만, 원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과 사상이라는 무형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오래전 땅에 묻힌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남긴 재산. 나는 그 지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지혜는 내게 사려 깊고 지적으로 살아야 할 책임을 요구하니까. 즐기고 질문하라고, 가장하거나 짓밟아선 안 된다고 주문하니까. 그렇게 위대한 인물들은(나의 위대한 인물들은 여러분의 위대한 인물들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내게 가르쳤다. 열정을 갖고 관찰하고, 인내심을 갖고 생각하고, 늘 기꺼운 마음으로 살라고. (39)

 

 

거북이는 연못 바닥에서 오래도록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몸을 돌렸고,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이자 공포도 슬픔도 없이, 지상의 신 가운데 으뜸인 식욕의 탐욕스러운 품 안에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 모든 존재가 해야만 하는 것을 했다. 모든 것은 분해되고 대체된다.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이다. (43 44)

 

 

내가 쓰는 모든 시는 진짜 몸과 진정한 힘, 정신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시든 이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퇴짜를 놓고 다시 쓰거나 과감히 버렸다. (45)

 

 

나는 내 모든 시가 강렬함 속에서 쉬기를원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들로 풍부해지기를 원한다. 지각으로 느낀 세계가 지적인 세계로 이어지기를 원한다. 지성, 인내, 열정, 기발함으로 산 삶(반드시 내 삶이어야 하는 건 아니고 공식적인 나, 작가로 사는 삶)을 나타내기를 원한다. 나는 내 시가 무엇인가를 묻기를, 그리고 그 시의 절정에서 그 질문이 응답하지 않은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 질문에 답하는 건 독자의 몫임을 작가와 독자 간의 약속에 명시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시가 고동침을, 숨 차오름을, 세속적인 기쁨의 순간을 담기는 원한다. (독자를 심각한 주제의 영역으로 유혹할 때도 즐거움은 결코 하찮은 요소가 아니다) (45)

 

 

독자가 자신을 참여자로 느끼지 못하는 시는 건물 속 갑갑한 방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듣는 강의다. 내 시들은 모두 야외에서, 들판, 해변, 하늘 아래서 쓰였다. 마무리까지 되진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시작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내 시들은 강의가 아니다. 중요한 건 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독자가 시가 던진 질문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백조는 기대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47)

 

 

엘레오노라의 빛나는 눈: 불가능을 되찾으려는 에드거 앨런 포의 꿈

포가 그린 진정한 주제는 우주라는 구조물, 그 안의 도덕적 질서, 도는 개인의 운명에 대한 우주의 철저하고 오만한 무관심을 설명해줄 어떤 존재에 관해 무지한 데서 오는 고통이다. 우리 대부분은 확실성을 충분히 경험하며, 형이상학적 우울을 겪을 때 그 경험에 의지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 그러나 포에겐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이 없는 게 아니라 전혀 없었다. 이런 결여가 그를 망가뜨렸다. 그건 정신적 결여가 아니라 감성 조직의 결여, 확신의 결여였다. 이미 복잡한 자산인 자기 확신의 결여가 아니라 세상 전체에 대한 확신의 결여, 세상이 악의적일 뿐 아니라 자비로울 수도 있다는 확신의 결여였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포는 과거와 다른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태생적 비애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포는 묘사의 대가요, 언어의 완벽한 곡예사였다. 엄청난 용기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풀 수 없는 문제를 풀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로 시와 소설을 썼다. 어쩌면 하나의 시와 소설을 쓰고 다시 고쳐 썼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무 문제도 풀지 못했다. (63 64)

 

 

최고의 문학은 문학이기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인공물이라는 한계를 넘어 복합적인 인간 기록, 언어가 아닌 현실로 이루어진 것의 일부가 되고자 애쓴다. (75)

 

 

포가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지 못했던 건 그의 체험에서 생겨난 반응일 뿐만 아니라 그의 극도로 비옥한 정신이 만들어낸 하나의 창작, 끝없이 반복 가능한 어둠의 모험이기도 하다. 만화경처럼 찬란한 그의 작품들은 자신과 우주와의 논쟁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논쟁을 담고 있다. 우리가 모두 가끔은 포의 화자들과 독같이 상황의 벽에, 우주의 한계에 저항하지 않는가? 다행히 우리는 자신의 짧은 생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연인,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모하는 마음은, ! 그건 다른 문제다. 사랑의 신비와 힘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 모두든 포의 화자들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드리워진 시간의 그림자를 끔찍하게 여긴다. 우리는 날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진 않지만 절대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가 늙거나 병들거나 결국 떠나버릴 것임을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맹렬하게 싸우고, 아무리 다정하게 사랑하고, 아무리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아무리 우주의 법칙을 비난하고, 아무리 교활하게 숨어도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광대한 영원 속에서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며, 사랑하는 이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을 준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그것인 포의 진짜 이야기다.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를 찬미하며 그의 이야기에 깊이 매료된다. 그는 우리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해 쓴 것이다. (75 76)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이름의 남자

프로스트의 시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인생은 내리막길이다. 인생에는 본질적이고 기억할 만한 일들이 가득하지만, 그 모두가 변화를 겪으며, 살아갈수록 더 크고 심각한 걱정만이 따른다.’ 이것이 내가 프로스트가 시에서 얻은 메시지다. (79)

 

 

프로스트의 시의 목소리는 그것이 프로스트 자신의 목소리든 그렇지 않든 인생을 하나의 시련으로 여기는 사람의 목소리다. 물질계가 아름다우면서도 무상하다는 것을 아는, 현실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절감하는, 고독에 대한 갈망과 공동체에 대한 동경이 쉽게 해결될 수 없음을 느끼는, 사랑과 고통을 아는, 씁쓸함과 연결되지 않은 달콤함은 없음을 깨달은 그런 사람의 목소리다. (81)

 

 

월트 휘트먼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그의 작품에는 신비적 농밀함과 분투, 영혼이 이례적인 흥분과 충동으로 움직인 듯한 정서가 존재한다. (96)

 

 

하지만 지식의 궁전은 발견의 궁전과 다르며 나는 발견의 궁전의 진정한 코페르니쿠스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그 이상이다! 나는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131)

 

 

 

나는 이 숲을 수천 번은 걸었다. 숲속이 다른 어느 곳보다 심지어 우리 집보다 더 편안했다. 숲의 세계로, 풀과 오솔길로 발을 들이면 늘 안도감 같은 게 밀려들었다. 나는 무언가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었다. 기쁨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경계를 넘는 것이었다. 경계를 넘으면 세상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변했다. 나는 거대한 큰 떡갈나무들이 나를 안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건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나무들이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해서 알아봤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개별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나무들은 나의 존재를 그리고 나의 기분을 알아보고 반응했다. 나무들은 조용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내가 나물들의 인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그건 갑작스러운 기온의 변화, 따스하고 편안한 감정의 고조 같은 것으로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나무들을 향해 걷고 나무들에서 뻗어 나온 가지 아래를 지나며 그걸 느꼈다. (140 141)

 

 

나는 시를 쓸 때 복종적이고 순종적이다. 할 수 있는 한 자존심과 허영심, 심지어 의도까지 내려놓는다. 그리고 귀 기울인다. 내가 듣는 건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언어에 가깝다. 자기 자신이기보다는 나뉠 수 없는 한 공동체의 일부일 때 귓가로 밀려들어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르거나 귓속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바다다. 블레이크는 받아 적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블레이크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안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걸 안다. 어떤 이는 기교를 배운 뒤 과감히 버린다. 받아 적는 재능을 갖고 싶은 것이다. 그런 물리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친밀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초고를 쓸 대 종이와 연필만 고집하는지도 모른다. 이 느리고 심오한 듣기에 타자기와 컴퓨터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나는 자연계가 없었다면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계 없이도 시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에게 숲으로 들어가는 문은 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나는 나무들 아래를, 창백한 모래언덕을 걸으며 점점 더 환희에 빠져들고 이 환희를 글로 찬양한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을 보고 그걸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143 144)

 

 

내가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어느 순간 나를 쿡 찌르는 손길이다. 컴퍼스풀이 주름진 가지를 구부려 차가운 모래밭에 완벽한 원을 그릴 때나 가을에 노란 말벌이 내 손목에 내려앉았다가 꿀 묻은 접시로 옮겨 갈 때, 내 몸을 관통하는 감사의 불길이다. 그건 그리 특별할 건 없다. 무언가를 증명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는 충심으로 내가 사는 대로 산다. 나는 사실적이고 유용한 것보다는, 기발하고 구체적이고 함축적인 걸 좋아한다. 나는 걷는다. 그리고 주의 깊게 살핀다. 나는 정신적으로 되기 위에 감각적이다. 나는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고 모든 걸 들여다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M이 묻는다. 어땠어? M은 늘 그렇게 묻는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고 자연스럽다. 놀라웠어. (145 146)

 

 

나는 바람, 떡갈나무, 떡갈나무 잎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대신해 이야기할 것이다. (148)

 

 

우리 개개인과 다른 모든 것 사이엔 끊어질 수 없는 무수한 연결 고리가 존재하고 우리의 존엄성과 기회들은 하나다. 머나먼 하늘의 별과 우리 발치의 진흙은 한 가족이다. 어느 한 가지나 몇 가지만을 찬양하고 끝내는 건 품위나 분별 있는 일이 아니다. 소나무, 표범, 플랫 강, 그리고 우리 자신, 이 모두가 함께 위험에 처해 있거나 지속 가능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운명이다. (149)

 

 

폭풍은 밀물을 타고 온다. 그래서 여섯 시간 동안 우리를 향해 번쩍거리며 뒹굴며 밀려오면서 힘이 강해진다. 바람은 남남서에서 온다. 폭풍의 진로 내 취송거리는 만 전체의 크기다. 이곳 항구의 바다에 거친 파도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거리다. 그런 취송거리와 바람이 밀물에 작용해 바다의 수면이 아름답고 경이롭게 만든다. 구름이 얇고 바람에 질주하고 있어서 주면은 반짝거린다. 수면의 빛깔은 회색에서 강철색으로 변했다가 지독하게 번쩍거린다. 주름진 수면에 빛의 조각들이 득실거린다. 여름이면 가끔 수면은 햇빛만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든,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빛까지 품고 있는 듯하다. ( 149 150)

 

 

 

영혼을 믿는다면, 늘 눈에 보이는 산이나 손톱을 믿듯 확고하게 영혼을 믿는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광대하고 철저하게 경이로운 일인가! 그런 믿음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고 달라질 테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영혼이 존재하고 우리의 입은 그 영혼을 노래하고 우리의 마음은 그 영혼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은 전체 세상의 반쪽이 된다! (155)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건들은 지나가고, 세상은 변하고, 상처는 희미해지고, 행운은 찾아왔다가 사라졌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가 스무 살 때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기억하는 한 영원히 일어난다. 나는 그 눈이 부신 빛이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걸 감사한 마음으로 느낀다.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가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불행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내가 내년에,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쓰게 될 말들이 프로빈스랜드의 화려한 잡초 꼬투리에서 나와 어딘가에서 바람에 떠다닌다. (156)

 

 

빛의 비밀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의 집에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재에서 싸구려이거나 하찮은 걸 모두 치워야 하지 않을까? 늘 희망과 기쁨, 흥분 속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초록 바다가 푸른 봄의 빛깔을 띠고 봄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지치고 졸린 겨울은 긴긴밤에 천천히 달을 윤나게 닦고 북쪽으로 물러난다. 겨울의 몸이 줄어간다. 녹아간다. 해묵은 수수께끼 뭉치가 또 한 해 풀리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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