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1. 양 떼를 지키는 사람
1
생각한다는 건
바람이 세지고, 비가 더 내릴 것 같은 때
비 맞고 다니는 일처럼 번거로운 것,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2. 양 떼를 지키는 사람
2
나의 시선은 해바라기처럼 맑다.
내겐 그런 습관이 있지, 거리를 거닐며
오른쪽을 봤다가 왼쪽을 봤다가,
때로는 뒤를 돌아보는......
그리고 매 순간 내가 보는 것은
전에 본 적 없는 것,
나는 이것을 아주 잘 알아볼 줄 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진짜로 태어났음을 자각한다면 느낄 법한
그 경이를 나는 느낄 줄 안다......
이 세상의 영원한 새로움으로
매 순간 태어남을 나는 느낀다......
3. 양 떼를 지키는 사람
7
내 마을에서는 우주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땅이 보인다......
그래서 내 마을은 다른 어떤 땅보다 그렇게 크다,
왜냐하면 나의 크기는 내 키가 아니라
내가 보는 만큼의 크기니까......
도시에서는 삶이 더 작다
여기 이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내 집보다,
도시에서는 커다란 집들이 열쇠로 전망을 잠가 버린다,
지평선을 가리고, 우리 시선을 전부 하늘 멀리 밀어 버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크기를 앗아 가기에, 우리는 작아진다,
우리의 유일한 부는 보는 것이기에, 우리는 가난해진다.
4. 양 떼를 지키는 사람
44
나는 밤중에 갑자기 깨어난다.
내 시계가 온 밤을 채우고 있다.
저 밖에 있는 자연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방은 희미한 흰 벽들에 둘러싸인 어두운 무언가.
저 밖에는 아무 존재도 없는 듯한 고요함뿐.
오로지 시계만 계속해서 소리를 낸다.
내 책상 위에 저 태엽으로 만들어진 작은 물건이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를 잠식한다......
이것의 의미를 생각하다 거의 나를 잃을 뻔한다.
그러나 불현 듯 멈추어, 한밤중에 입가에 미소를 느낀다,
왜냐하면 내 시계가 자신의 작음으로 거대한 밤을 채우면서
상징하는 혹은 의미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작음으로 거대한 밤을 채우는
이 신기한 감각뿐이니까.
5. 사랑의 목동
5
사랑이란 하나의 동행,
이제는 혼자 길을 걸을 줄 모르겠어,
더 이상 혼자 다닐 수가 없어서.
어떤 선명한 생각이 나를 더 급히 걷도록
더 적게 보도록 만들고, 동시에 걸으며 보는 모든 걸 좋아하게 만든다.
그녀의 부재조차 나와 함께하는 그 무언가이다.
그리고 난, 그녀를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욕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보지 못하면, 그녀를 상상하고 나는 높은 나무들처럼 강하다.
하지만 그녀가 떠는 걸 볼 때면, 그녀의 부재를 느끼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의 전체가 나를 버리는 어떤 힘.
모든 현실이 한복판에 얼굴이 있는 해바라기처럼 나를 쳐다본다.
6. 봄이 다시 오면
봄이 다시 오면
어쩌면 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이 순간 난 봄을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그녀가 자기의 유일한 친구를 잃은 걸 보고
우는 모습을 상상하려고,
하지만 봄은 심지어 어떤 것조차 아니지,
그것은 말을 하는 방식일 뿐.
꽃들도, 초록색 잎사귀들도 돌아오지 않아.
새로운 꽃, 새로운 초록색 잎사귀들이 있는 거지.
또 다른 포근한 날들이 오는 거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아무것도 반복되지 않아, 모든 것이 진짜니까.
7. 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
나는 해나 비 아래 있는 것 외에는 바란 게 없었다 -
해가 있을 때는 해를
비가 올 때는 비를 바라고,
(다른 것들은 전혀)
더위와 추위와 바람을 느끼길,
그리고 더 멀리 가지 않기를.
나도 한 번은 사랑을 했지, 날 사랑하리라고도 생각했지,
그러나 사랑받지는 못했지.
꼭 받아야만 하는 법은 없다는
유일한 큰 이유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지.
나는 해와 비에게로 돌아와 나를 위로했어,
집 문간에 다시 앉아서.
초원도, 결국, 사랑받는 이들한테는 그렇게 초록이 아니더라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한테만큼은.
느낀다는 것은 산만하다는 것.
8. 어쩌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시인이 죽은 날 남긴 말)
어쩌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오른손을 들어, 태양에게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9. 우리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자만
우리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자만 우리를
제한하고 억누르는 건 아니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덜 제한하지는 않지.
산들이 허용하기를, 내가 정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정점의 차가운 자유를 가지도록,
적은 걸 원하는 자는, 모든 걸 가지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는
자유롭지. 아무것도 없고, 또 욕망하지도 않는 자 그는, 신들과 다름이 없지.
10.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산다.
내가 생각하거나 느낄 때면, 나는 모른다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 누군지.
나는 그저 느끼거나 생각하는
하나의 장소.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
내가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엇갈리는 충동들이
나라는 사람 안에서 다툰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다. 내가 아는 나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불러 주지 않지만,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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