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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밤을 채우는 감각들/세계시인선 필사책/민음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1. 13.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1. 양 떼를 지키는 사람

     1

     생각한다는 건

     바람이 세지고, 비가 더 내릴 것 같은 때

     비 맞고 다니는 일처럼 번거로운 것,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2. 양 떼를 지키는 사람

     2

     나의 시선은 해바라기처럼 맑다.

     내겐 그런 습관이 있지, 거리를 거닐며

     오른쪽을 봤다가 왼쪽을 봤다가,

     때로는 뒤를 돌아보는......

     그리고 매 순간 내가 보는 것은

     전에 본 적 없는 것,

     나는 이것을 아주 잘 알아볼 줄 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진짜로 태어났음을 자각한다면 느낄 법한

     그 경이를 나는 느낄 줄 안다......

     이 세상의 영원한 새로움으로

     매 순간 태어남을 나는 느낀다......

 

3. 양 떼를 지키는 사람

     7

     내 마을에서는 우주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땅이 보인다......

     그래서 내 마을은 다른 어떤 땅보다 그렇게 크다,

     왜냐하면 나의 크기는 내 키가 아니라

     내가 보는 만큼의 크기니까......

 

     도시에서는 삶이 더 작다

     여기 이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내 집보다,

     도시에서는 커다란 집들이 열쇠로 전망을 잠가 버린다,

     지평선을 가리고, 우리 시선을 전부 하늘 멀리 밀어 버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크기를 앗아 가기에, 우리는 작아진다,

     우리의 유일한 부는 보는 것이기에, 우리는 가난해진다.

 

4. 양 떼를 지키는 사람

    44

    나는 밤중에 갑자기 깨어난다.

     내 시계가 온 밤을 채우고 있다.

     저 밖에 있는 자연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방은 희미한 흰 벽들에 둘러싸인 어두운 무언가.

     저 밖에는 아무 존재도 없는 듯한 고요함뿐.

     오로지 시계만 계속해서 소리를 낸다.

     내 책상 위에 저 태엽으로 만들어진 작은 물건이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를 잠식한다......

     이것의 의미를 생각하다 거의 나를 잃을 뻔한다.

     그러나 불현 듯 멈추어, 한밤중에 입가에 미소를 느낀다,

     왜냐하면 내 시계가 자신의 작음으로 거대한 밤을 채우면서

     상징하는 혹은 의미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작음으로 거대한 밤을 채우는

     이 신기한 감각뿐이니까.

 

5. 사랑의 목동

     5

     사랑이란 하나의 동행,

     이제는 혼자 길을 걸을 줄 모르겠어,

     더 이상 혼자 다닐 수가 없어서.

     어떤 선명한 생각이 나를 더 급히 걷도록

     더 적게 보도록 만들고, 동시에 걸으며 보는 모든 걸 좋아하게 만든다.

     그녀의 부재조차 나와 함께하는 그 무언가이다.

     그리고 난, 그녀를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욕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보지 못하면, 그녀를 상상하고 나는 높은 나무들처럼 강하다.

     하지만 그녀가 떠는 걸 볼 때면, 그녀의 부재를 느끼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의 전체가 나를 버리는 어떤 힘.

     모든 현실이 한복판에 얼굴이 있는 해바라기처럼 나를 쳐다본다.

 

6. 봄이 다시 오면

 

     봄이 다시 오면

     어쩌면 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이 순간 난 봄을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그녀가 자기의 유일한 친구를 잃은 걸 보고

     우는 모습을 상상하려고,

     하지만 봄은 심지어 어떤 것조차 아니지,

     그것은 말을 하는 방식일 뿐.

     꽃들도, 초록색 잎사귀들도 돌아오지 않아.

     새로운 꽃, 새로운 초록색 잎사귀들이 있는 거지.

     또 다른 포근한 날들이 오는 거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아무것도 반복되지 않아, 모든 것이 진짜니까.

 

7. 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

 

     나는 해나 비 아래 있는 것 외에는 바란 게 없었다 -

     해가 있을 때는 해를

     비가 올 때는 비를 바라고,

     (다른 것들은 전혀)

     더위와 추위와 바람을 느끼길,

     그리고 더 멀리 가지 않기를.

 

     나도 한 번은 사랑을 했지, 날 사랑하리라고도 생각했지,

     그러나 사랑받지는 못했지.

     꼭 받아야만 하는 법은 없다는

     유일한 큰 이유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지.

 

     나는 해와 비에게로 돌아와 나를 위로했어,

     집 문간에 다시 앉아서.

     초원도, 결국, 사랑받는 이들한테는 그렇게 초록이 아니더라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한테만큼은.

     느낀다는 것은 산만하다는 것.

 

8. 어쩌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시인이 죽은 날 남긴 말)

 

     어쩌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오른손을 들어, 태양에게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9. 우리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자만

 

     우리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자만 우리를

     제한하고 억누르는 건 아니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덜 제한하지는 않지.

     산들이 허용하기를, 내가 정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정점의 차가운 자유를 가지도록,

     적은 걸 원하는 자는, 모든 걸 가지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는

     자유롭지. 아무것도 없고, 또 욕망하지도 않는 자 그는, 신들과 다름이 없지.

 

10.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산다.

     내가 생각하거나 느낄 때면, 나는 모른다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 누군지.

     나는 그저 느끼거나 생각하는

     하나의 장소.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

 

     내가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엇갈리는 충동들이

     나라는 사람 안에서 다툰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다. 내가 아는 나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불러 주지 않지만,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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