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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은유의 힘/장석주/다산책방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2. 8. 21.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득 담았다 펼쳐보았다.

스르르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담뿍 드러나는

가을이 배인 그것들은

가끔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나를 따라오렴,

나직이 속삭이는 것도 같다.

 

오늘은 햇살을 따라

나서야겠다.

 

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햇살까지

춤추는 그곳으로

나도 가고 싶다고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우편 배달부 마리오가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가르침 속에서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과정을 답습하듯,

 

오늘은 나도 햇살의   '시인'이 되고 싶다. 

 

 

"'하늘이 운다'가 뭐지?"

"비가 오는 거죠."

"그래 그게 은유야."

 

영화 일포스티노 중 파블로 네루다가 우편 배달부 마리오에게 은유를 설명하는 대사이다.

 

 

 

 

은유란 무엇인가, 시인 정석주의 문장들을 읽으며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알라딘의 책 소개를 빌려오면

시인이자 독서광, 문장노동자 장석주가 들려주는 은유 이야기.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시인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월간 「시와 표현」에 연재됐던 '권두시론' 24편을 다듬어 책으로 묶었다. 저자는 시가 생성되는 비밀의 핵심을 은유라고 보고, 그에 관한 사유와 영감으로 가득한 문장들을 풀어놓는다.

월트 휘트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윌리엄 블레이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틸라 요제프 같은 외국 시인들과 김소월, 이상, 서정주, 윤동주, 김수영, 고은, 정현종, 송재학, 송찬호, 황인숙, 이장욱, 김근, 강정, 이원, 김언희, 심언주, 김민정, 오은, 홍일표, 류경무, 유진목, 제페토 등 대표 시인들의 시편을 고루 담아 만화경 같은 현대시의 세계를 포착했다.

뿐만 아니라 장자, 니체, 라캉, 사사키 아타루, 질 들뢰즈, 하이데거 등 동서양을 막론한 사상계의 별들을 통해 시를 봄으로써 시와 철학은 왜 만날 수밖에 없는지를 역설한다.

 

 

 

죽 내려 읽은 후, 한 번 더 읽으면서 수없이 밑줄을 그었다.

 

 

 

 

 

 

 

 

 

 

P. 15

시는 눈먼 부엉이의 노래, 바람과 파도의 외침, 늑대들의 울부짖음, 땅이 내쉬는 깊은 한숨이다. 시인은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시로 빚어낸다. 시는 단지 의미의 수사학적인 응고물이 아니다. 시는 말의 춤, 사유의 무늬, 생명의 약동이다. 시는 수천 밤의 고독과 술병을 집약하고, 세계를 향해 뻗치는 감각의 촉수들은 천지만물의 생리와 섭리를 더듬는다.

 

 

P. 17 - 18

시는 불행으로 빗은 빛이고, 진리가 언어로 화육(化育)하는 기적의 물건이다. 시는 감각의 착란 속에서 떠오른 언어거나, 세계의 이미지를 조형하는 것, 이름 없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 불러주는 행위, 그도 아니면 거의 모든 존재의 역사를 꿰뚫어보고 존재 현상을 살펴 헤아리는 새로운 관점의 창이 될 수도 있을 테다. 시는 언어 놀음이고, 항상 놀음 그 이상이다. 시는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말함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불행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걸 호명한다. 시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고, 뇌의 전두엽에 내리꽂히는 우레며, 모든 물질은 우연성이고, 이것은 무상성에서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낸다. 그런 맥락에서 시는 만듦이고 낳음이며, 위함이고 이름이다. 인간 내부의 구멍이고 그 구멍 속에 사는 신이다. 시인은 항상 외부 세계, 멀리 있는 다른 우주의 신과 소통한다. 그래서 시는 때때로 낯선 신의 알아듣기 힘든 방언이기도 하다.

 

P. 23

서정시의 질료적 본질은 나 자신의 노래, 나 자신의 숨결이다. 시인은 낮과 밤을 살며, 형태와 색깔과 향기와 소리, 만물이 내는 기척들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시인은 사물과 세계를 향한 시각과 청각과 촉각을 열어두고 사방을 살펴야 한다. 모든 시작과 끝을, 탄생과 죽음들을 눈여겨봐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며, 가장 좋은 것들을 드러내야 하고, 그것을 가장 나쁜 것에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P. 31 - 32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그것은 차라리 텅 빈 신체다. 이것은 항상 없는 것,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을 새 현전으로 뒤집어쓰고 새로 태어남이다. 살로 채워진 것으로서의 신체와 텅 빈 신체의 관계가 그렇듯, 대상과 은유 사이에는 엄연하게 벌어진 틈이 있다. 대상과 은유 사이가 벌어질수록 은유의 효과는 커진다. 틈이 생긴다는 것은 항상적 불일치, 혹은 낯설게 함을 전제로 삼는다. 은유를 만드는 자들은 은유를 전유하면서 이 틈의 이격(離隔) 효과를 손아귀에 넣는다. 이 틈이야말로 의미가 말없이 깃드는 장소이니까.

 

 

P. 36

은유는 시적인 것의 번뜩임, 시적인 것의 불꽃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P. 39

나쁜 은유, 해로운 은유란 없다. 오직 명석한 은유와 덜 명석한 은유가 있을 뿐이다.

 

P. 41

시인들은 고뇌와 기쁨들을 보는 천 개의 눈을 가졌다. 천 개의 눈으로 천 개의 세계를 본다. , 향기, 새들에 매혹돼 이것들과 덧없는 연애에 빠지는 자들이 시인이다. 이것들의 빛과 어둠, 영원과 찰나를 노해하는 일들의 하염없음이라니!

 

P. 44

시인은 다양성과 신성한 것의 중재자이자 그 열쇠다. 어떤 다양성인가? 사물의 다양성, 정념의 다양성, 경험의 다양성, 육체와 질병의 다양성, 선과 악의 다양성들이다. 이 다양성들은 스미고 섞이며, 더러는 끌어안거나 배제하며 세계라는 것을 직조해낸다. 시인들은 이 옷감 위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옷감 위에서 우리는 저마다 제 삶에 따라 각각의 문양을 만든다. 시인은 남자들과 여자들 안에서 영원을 본다. 그들은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찰나에서 영원을 본다. 그들은 항상 언어, 징후, 신호, 상징들에 민감하다. 시인들은 감각적 명증화 속에서 실재를 조형해낸다. 시인들은 남자와 여자들을 꿈이나 점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판단의 방식 문제가 아니다. 혼돈 속에서 시인들의 사법적 명료성이 또 한 번 번쩍인다. 시인들은 남자와 여자들을 이념과 욕망이 발화되는 부분으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살아 있는 전체로 본다. 남자와 여자들은 저마다 완전한 세계다.

 

P. 57

시인은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고)고 했다. 시인들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특이한 시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시인들은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보고도 놓친 것을 용케도 찾아낸다.

 

P. 85

시인은 자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 어디에 살든지 농경시대의 농부들은 대지의 자식들, 기후의 예측자들, 씨앗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은 자연 세계의 중심에서 제 삶을 꾸리는 탓에 풍경 감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익히 잘 아는 중심의 둘레에 모르는 것, 낯선 것이 동심원을 이루면서 펼쳐진다. 모든 편에서 세계는 모르는 것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살며, 또 이미 아는 것의 테두리 속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에 의하여 혼란되지 아니한다.

 

P. 86 - 87

시인은 견자(見者). ‘본다는 것은 지각의 시작점이다. 사물과 세계를 본다는 것은 앎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관조하는 행위이다. ‘본다는 것은 지각의 단초가 되는 행동이다. 사물이 지각되는 바대로 존재한다면, 시인은 그 지각의 특이성과 확장성으로 주목받는다. 시인이 드러내는 지각의 특이성은 항시 다르게 보기, 낯설게 보기의 결과로 나타난다. 시인은 새 보는 곡예사(曲藝師)“(정현종, 세상 초록빛을 다해)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비를 움직이는 비애“(김수영 “)로 수박을 물의 보석상자, 과일가게의 냉정한 여왕, 심오함의 창고, 땅 위의 달!“(파블로 네루다 수박을 기른 도래“)로 보는 게 시인이다. 시인은 모래알 따위의 가장 작은 것을 우주적 크기로, 가장 짧은 시간을 우주적 시간으로 바꾼다. 보라, 한 시인에 따르면, 한 알의 모래는 하나의 세계이고, 한 송이 들꽃은 하나의 천국이다. 또한 한 점은 무한이고, 찰나는 영원을 품는다. 바로 그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시인은 본다.

시인은 한 사람의 생애를 살되 한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 한 시인은 여러 사람으로, 여러 겹의 생을 살아낸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안의 자기와 대면한다. 보통은 자기 안의 자기는 한 사람이지만 시인의 경우 그 자기가 여럿이다. 삶이라는 수수께끼 앞에서 시인들은 여러 사람으로 그것에 대처한다. “시인은 일곱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아틸라 요제프, 일곱 번째 사람) 시인은 어느 시대에나 최후의 인간이다. 최후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최후까지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P. 94

음악은, 리듬은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 우리 발걸음을 안정되게 이끄는 힘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아이가 가만히 흥얼거리는 노래는 불안을 진정시키고, 공포를 덜어내는 그 악구(樂句), 언제 흩어져버릴지 모를 노래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도약이다.

 

P. 94 - 95

시는 통음 난무하는 자들의 외침, 산부(産婦)의 허공을 짓는 비명, 사물들의 속삭임, 편물 기계들이 내는 소음들, 새벽이나 황혼 같은 기후들이 내는 소리, 악마와 연인의 목소리, 얼음과 바람이 내는 소리들을 주의 깊이 경청하고 이를 세계에 중계한다.

 

P. 95

시는 목소리이고, 속도와 리듬의 흐름이다. 시의 흐름 안에는 무수한 선들이 있다. 책이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 운동들을 품고 있듯이,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성의 선, 지층 및 영토서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존재하듯이. 시를 읽는 것은 그 선들을 따라가며 질료적인 세계와의 만남, 그리고 감각적인 상상의 세계와의 만남이다.

 

 

 

P. 97

좋은 시는 젊다. 그것은 감각의 쇄신을 이루고, 세계의 쇄신을 의미의 살[]로 드러낸다. 시들은 저를 둘러싼 모르는 세계라는 외부성에 의해서만 성립되고 의미를 품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그 세계와 부딪칠 때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세계의 확장이자 의미 영역의 확장이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장미가 무엇이고, 먼지가 무엇이고, 비가 무엇이고, 애탄 근심이 무엇이고, 시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직도 시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P. 99

시에서 말들은 감각들의 통역관이다. 말은 이 세계에 대한 모호한 느낌들을 자명한 것으로 통역한다. ‘에게서 저 세계로, 혹은 저 세계에서 에게로. 랭보는 나는 타자다. 구리가 나팔이 되어 깨어난다 해도 이는 구리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말이라는 감각들의 통역관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계의 타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이런 시구를 남겼다. “세상의 표면은 뒤덮고 있는 수억만 개의 얼굴들”(부산한 거리에서 나를 엄습한 생각) 우리는 이 수억만 개의 얼굴들의 세계 안에서 단 하나의 타자로 살아간다.

 

 

P.101

사람의 기억은 말의 집적이다. 그 세계에서는 삶의 궤적, 경험한 모든 것들, 어떤 찰나의 풍경, 심지어는 이미지조차 말이다. 당신이 떠나고 난 뒤 당신이 부재하는 자리에 말이 고인다. 그 말은 당신의 부재를 파먹으면서 세균이 증식하듯 빠르게 증식한다는 뜻이다. 이미 말들 속에 부재하는 당신은 너무나 많은 당신으로 들어앉아 있다.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쉼보르스카, 미완성 육필원고 부분). 그리운 것은 지금 여기에 없다. 그리움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움이란 대상의 부재를 이상화하는 가운데 이상 증식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리움이란 자양분을 취하고 자라난다.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그리움이 생겨난다. 말은 그것에게 건너가는 다리이다. 말이 없다면 그리움에게 다가갈 수 없다. 끊긴 다리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그리움은 대상의 부재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를 그리움의 포로로 만든다. 우리는 그리워하면서 그리움의 존재로 탄생한다.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게 바로 말이다. 우리 기억 안에는 주인을 잃은 말들로 넘치고 붐빈다. 이는 그만큼 그리운 것들이 많다는 증거다.

 

 

P. 106

시인들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시는 말을 채집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일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한다.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든다. 말의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 말의 제의(祭儀)로서의 시, 그 제의를 주재하는 집정관으로서의 시인. 좋은 시들은 가장 나쁜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남음으로 이끈다. 환멸과 지리멸렬 속에서도 자진하지 않고, 기어코 살도록 돕는다. 시인들이 항상 세계의 의미화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더 자주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P. 109 - 110

한 번 죽은 자는 다시 죽지 않는다. 펄떡이던 심장이 멈추고 뇌사에 도달하며, 몸통과 사지의 경직이 시작될 때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죽음은 단 한 점의 모호함도 없는 자명함 그 자체다.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절대 경험이다.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어떤 찰나, 저녁의 거무스름한 물, 생리하는 개들, 처제들의 상상임신 같은 것, 이런 모든 모호함들은 시의 자궁이다.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에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P. 144

두말 할 것 없이 시간은 시가 맹금의 눈으로 노려보고 탐구해야 할 유력한 화두 중 하나다. 인간의 실존 자체가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성립되는 까닭이다. 우주의 시간은 사물들을, 살아 있는 것들을, 제 안으로 빨아들여 부패와 변형을 일으키는 강력한 동력이다. 꽃은 피고 지고, 달은 야위었다가 차오르고, 파도는 왔다 간다. 사람은 초, , , , , , , 계절 들로 삶을 쪼개고 분절하면서 그것을 겪어낸다. 우리가 혼재된 시간 속에서 겪어내는 경험들, 의미화되거나 의미화가 되지 못한 채 유산되어버리는 것들, 삶의 모든 찰나와 여정들, 이게 모든 시간의 일이다. 우리는 저마다 시간이라는 우주적 규모의 도서관에 꽂힐 책을 쓰고 있다.

 

P. 160

예언자 없는 사회에서 누군가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소임을 맡을 적임자는 시인이고 철학자지만 오늘의 시인은 철학을 잃고, 철학자는 시를 잃었다. 이들은 무력하다. 오늘의 시가 가끔씩 찰나의 섬광들로 예언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지만, 대개는 욕망의 꿈틀거림이고, 불화(不和)의 부르짖음이다.

 

P. 171

시는 햇빛을 튕기는 영롱한 아침 이슬이거나 폭설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벚꽃의 낙화, “꽃가루의 눈썹이 열린”(파블로 네루다) 봄날 외딴 길에 저 혼자 청초한 제비꽃 한 송이이거나 새벽 연못 위에서 홀연 우아한 자태로 솟은 수련꽃, 저녁 강물 위에서 타오르는 석양빛이거나 숫눈 내려 하얗고 고즈넉한 길, 이 모든 때와 장소를 스쳐가는 아름다움에 반향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화창(和暢)이거나 세계의 여리고 착한 것들을 경멸하고 학대하는 온갖 종류의 악들과 빛을 누르는 악의(惡意)를 향한 노호(怒號)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는 꽃의 피고 짐, 열매의 맺고 떨어짐, 세계의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발효와 정액의 일들, 그리고 비밀의 분출이 일으킨 기적들에 기대어 도취와 신명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시는 그 모든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니 마음을 보살피는 일쯤은 되겠다.

 

P. 177

시인이란 사랑하는 이의 심장으로부터 오는 가을, 내가 모르는 체위로 사랑을 하는 것, 앙상해진 심장 가까이 나침반을 대어보는 일, 펄럭이는 바람을 타고 나뭇잎 묻은 영혼이 오는 사태에 대해 쓰는 자다.(시인 유진목)

 

P. 189 - 190

좋은 시는 지옥에서 올라온 물건, 놀랍고 의외의 것, 예기치 않은 사건이다. 시는 직관으로 직관을, 무의식으로 무의식을 드러낸다. 이 창의성의 총체, 이외의 발상,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 시가 종이에 쓰이고 종이에 인쇄되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누가 시가 전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때로 시는 거울이다. 거울은 다양한 상징체다. 거울은 온전하거나 깨져 있거나 상관없이 인간 내면과 그 안에 축적된 경험의 깊이를,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과 그 밑에서 균열하는 집단 무의식의 흐름들을 통찰하고 살피는 장치다. 탈모더니즘의 세계에서 이것을 비추는 거울은 속절없이 깨져버린다. 깨진 거울을 주체에게 달칠 불운의 징조로 보는 건 옳은가? 어쨌든 우리는 그 거울을 통해 자기 영혼과 무의식을 비춰보고 객관 세계를 들여다볼 수가 있을 테다.

 

 

 

 

P. 232 - 233

현실의 비극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진 채로 그저 입 다물고 있을 때 서정시인은 자신이 아주 멍청한 존재임을 드러낼 뿐이다. 세계를 뒤흔드는 고요한 사상과 폭풍을 일으키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갖지 못한 서정시인은 비루해진다.

 

 

P. 256 - 257

시는 번개들을 낚아채는 피뢰침이다. 우리는 마른 하늘에 떠다니는 번개들을 보지만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오직 직관의 시들만이 번개들을 낚아채는 기적을 만든다. 시는 논증이나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전에도 없는 말이요,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상징이다.

 

P. 271

좋은 시들은 시가 말의 무덤이거나 수사(修辭)이기 이전에 리듬이고 속도라는 걸 일러준다. 시를 쓴다는 건 사물과 세계에 제 리듬과 속도를 찾아 되돌려주는 일이다. (중략) 리듬이란 정신의 율동이고, 세상을 가로질러가는 마음의 속도다. 모든 사물들은 저마다 리듬이 있고, 세계는 속도의 밀도로 만들어진 물질이다. 시는 바로 그 리듬과 속도에 반향하는 리듬과 속도다. 시인들은 시를 쓸 대 리듬을 탄다. 리듬의 즐거움이 없는 시는 죽은 시다.

 

P. 272

시인은 시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다.

 

P. 273

마음은 비항상성이고, 여여하지 못함에 잠겨 있는데, 그 마음이 어느 찰나 세계의 낱낱과 함께 환하게 깨어난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