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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유디트 헤르만작 <여름 별장, 그 후> 민음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2. 1. 1.

 

 

 

햇살을 등에 업은 눈발이 하나 둘 흩날리다 사라진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눈발은 스스로 춤을 추는가, 내 시선은 그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어디선가 아침 고요를 뚫고 길냥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배가 고프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추운 날에 배경음악이라도 되겠다는 것인가, 입가에 저절로 핀 미소를 머금고 길냥이의 다음 울음을 기다린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왠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맴돈다. 절대 길냥이의 울음이 들려오지 않는 것 때문이 아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게 기다렸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눈물을 머금는 그런 시시콜콜한 어떤 것들의 짜깁기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게 되었다.

 

여기 특별한 것도 없는 시시한 이야기들을 아름답고도 슬픈, 바로크 음악처럼 되풀이되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언어의 마술사가 엮어놓은 한 편의 장시 같은 단편들이 있다.

 

 

 

 

 

독일문학의 신성 유디트 헤르만의 데뷔작.

 

 

여름 별장, 그 후(민음사)

 

1998년 출간된 이 작품은 '독일문학이 고대하던 문학적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브레머 문학상, 휴고 발 상, 클라이스트 상을 차례로 수상한 바 있다. 소통이 단절된 인물들과 어긋난 사랑의 양상을 포착하는 재능, 극히 사실적이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문체가 돋보인다.

 

표제작 '여름 별장, 그 후' 외에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헤르만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삶을 애써 방기한다. 그런 태도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각각의 삶의 조건들이 타인과의 일치를 가로막고 스스로 마음을 닫아걸게 만들었음이 암시된다. 삶에 대한 갈망과 과거의 상처로 인한 체념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신인 특유의 멋 부리기나 기이한 설정이나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 않으면서도 자기 세대의 목소리를 내는, 오직 자기가 경험한 것, 자기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며 언어를 찾아내고 싶고, 그 언어로 세상과 교류하고 싶고 그걸 창작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지면서도 절제와 암시의 예술을 보여준다.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안개 속을 걷는 듯, 안개가 목에 감기는 듯한 느낌으로 발목을 적셔가며 안개의 골을 빠져 나왔을 때처럼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한 것들이 가슴에 또렷하고 오랜 여운을 남기는 문체의 풍미를 드러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을 짧고 간결한 몇 마디로 엮어내는 독특한 스타일, 군더더기 없는 병렬 어법의 문체는 마치 설명 없이 지나가는 무성 영화의 장면처럼 한 컷 한 컷 보여주며 조용히 시작해서 조용히 끝을 내며 그 사이 뭔가 일어나긴 했는데 거창하지도, 시끌벅적하지도 않는 그런 묘사들 말이다. 즉 보고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볼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믿을 수 있을까?

 

 

 

유디트 헤르만 (Judith Hermann)

1970년 독일 서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자유 대학교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98년 발표한 데뷔작 여름 별장, 그 후는 극히 사실적이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문체로 소통이 단절된 인물들의 모습과 어긋난 양상의 사랑을 포착해 낸 작품집으로, 25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고 17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을 통해 독일 문학이 고대했던 문학적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1999년 휴고발 상과 브레머 문학상, 2001년에 클라이스트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은 여행을 주제로 한 단편 소설 일곱 편을 묶은 책으로, 오늘날 젊은 세대가 처한 파편화된 세계와 그들의 복잡한 내면을 잘 그려 냈다는 평을 받았으며, 2007년에 독일에서 영화화되었다. 2009년에 발표한 알리스는 주인공이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며 느끼는 아픔과 고독을 담담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써 내려간 소설로, 슈피겔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고 프리드리히 횔덜린 상을 받았다. 2014년 첫 번째 장편 소설 모든 사랑의 시작을 발표했으며 에리히프리트 상을 수상했다. 현재 베를린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