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이란 제목의 시집 한 권을 내고 싶었고, 시골학교의 영어 선생이 되어 착한 아내와 함께 두메에서 농사지으며 책이나 읽고 살았으면, 이라는 촌동네 소박한 소반 같은 꿈을 꾼, 시인 백석, 백기행.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일명 기행이라고 소개되던 남자. 1930년대의 흥성하고 눈부셨던 백석의 시간을 지나 이제 김연수의 소설이 그리는 순간은 1958년 기행의 시간이 “일곱해의 마지막”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되었다.
기행은 원하는 대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 "희망과 꿈 없이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시를 붙들려 하지만 번번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시를 향한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개인을 내리누르는 현실의 무게가 압도적이라면 그 마음은 끝내 좌절되고야 마는 걸까. 속수무책의 현실 앞에서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마음,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65쪽)
작가 김연수는 러시아 시인 벨라의 말을 빌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고, 꿈꿀 수 없는 곳에서 개인은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한다.
작가 김연수는 이 소설에 대해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이루지 못한 꿈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다시 쓰인다.
60년 전 그에게서 시작되어 마침내 지금 우리에게 도달한 빛“이라는 말로 책소개를 한다.
“그래도 꿈이 있어 우리의 혹독한 인생은 간신히 버틸 만하지. 이따금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며 내 소박한 꿈들을 생각해. 입김을 불면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볍고 하얀 꿈들이지.”(223쪽)
버릴 수 없는 하얀 꿈을 꾸며 작중 기행은 천불(저절로 생겨나 순식간에 숲 전체를 태우며 나무들을 숯으로 만드는)을 보며 기행의 가슴도 은은하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앞에 불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살길이 열리는 것이기에.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웠다. 천불에 휩싸여 선 채로 타오르는 숲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60년 전 백석에게서 시작해 우리에게 도달한 빛, 그 빛에 휩싸인 삶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 누군가에 의해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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