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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조서/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르 클레지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7. 8. 24.

 



 



이번 회 차 토론 작: 르 클레지오의 조서

장소: 그린 파파야

일시: 2017.08.25 19:00

발제자: 김은


조서/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


調書:소송 절차의 경과와 내용을 인정하기 위해 법원이나 기타 기관이 작성하는 문서

작성 절차가 적절한 방식을 준수하였는지 여부와 작성된 내용 등이 후에 증거가 된다.



1. 작가 르 클레지오에 대해:

르 클레지오는 1940년 4월 13일 태어난 프랑스의 작가이다.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일컬어지는 르 클레지오는 1940년 남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지만,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을 영국이 점령한 것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프랑스어를 ‘작가 언어’로 택했다. 영국 브리스틀 대학과 프랑스 니스 대학에서 수학했고, 니스의 문학전문학교 (Institut d’etudes Litteraires)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주하여 교사로 일하였다. 1964년에는 액상프로방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3년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멕시코 초기 역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스물셋의 나이에 첫 작품 『조서』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르노도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1980년 『사막』을 위시한 그의 전 작품으로 「폴 모랑 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열병』, 『홍수』, 『물질적 법열』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천혜의 작가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94년에는 잡지『Lire』에서 행한 설문조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6년부터 2년간은 군 복무로 머물렀던 방콕에 체류하면서 불교와 선(禪)의 세계를 접했고, 1967년∼1973년까지는 멕시코와 파나마에서 머물며 남미 인디언의 삶에 매료되기도 했다. 이후 르 클레지오는 서구적 사유틀을 버리고 자연과 합일되는 새로운 존재의 모델을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적 변모는 시적 산문의 정수인 『성스러운 세 도시』를 비롯, 모로코인 아내와 함께한 사막 기행문 『하늘빛 사람들』, 『황금 물고기』 등에 순도 높게 담겨 있다. 1980년에는 사막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웅숭깊고 아름답게 그린 소설『사막』으로 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폴 모랑 문학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여전히 산과 바다, 태양과 대지 사이에서 자발적 유배자의 삶을 살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한림원은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르 클레지오를 선정하면서 “인간성 탐구, 관능적 엑스타시, 시적 모험, 새로운 출발의 작가”로 작가를 평가했고, 르 클레지오는 "약간의 의구심과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기쁨과 유쾌함을 동시에 느꼈다"라는 말로 수상소감을 전했다.

르 클레지오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 문단과 교류해온 작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 문학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프랑스 문화에 대해서도 "일부 사람들이 프랑스 문화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믿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프랑스 문화는 결코 죽지 않았으며 매우 다양하고 풍성할 뿐 아니라 쇠퇴의 위험에 놓여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표작

<황금 물고기>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 순수문학으로는 이례적으로 출간되자마자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킨 이 작품은 예닐곱 살 때 유아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된 한 소녀의 인생 역정을 그리고 있다. 현대 문명의 난폭함과 현대인의 정신적 공황을 다뤘던 르 클레지오의 초기 작품과 달리 서양 문명을 탈출하여 자연으로 회귀함으로써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과 원시의 힘을 그려낸 후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도 모른 채 예닐곱 살에 인신매매 단에 납치되어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세상을 표류하던 한 어린 소녀의 ‘근원 찾기’를 작가 특유의 서정적 언어로 아름답게 그려낸 이 작품은 1997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순수문학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켰다.

<조서 調書>

'자신이 군대에서 탈영했는지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뛰쳐나왔는지 잘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아담 폴로는 산 중턱의 빈집에서 버려진 한 마리 짐승처럼 살고 있으며, 외부와는 최소한의 접촉만 가진다. 그가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미셸이라는 여자뿐인데 그녀와의 관계도 확실치 않다. 그에게 세상은 낯설기만 하고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카뮈의 뫼르소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문명사회의 폭력에 희생되는 왜소한 인간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서구 문명의 인위성에 대해 비판하며 작품 속의 시선이 마치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듯이 서술(펜 카메라 기법, pen-camera)되어 눈길을 끌었다.

<라가>

2006년에 발표한 『라가 - 보이지 않는 대륙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이러한 르 클레지오의 자연 친화적 문학 경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조화롭고 밝고 균형 잡힌 세계를 찾아 끊임없이 지구를 누비며, 다양한 문화의 소통과 공존을 모색해온 르 클레지오가 이번에는 물의 땅, 섬의 대륙 ‘오세아니아’로 눈길을 돌렸다. 르 클레지오의 발길이 닿은 곳은 남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이다.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에 의해 ‘뉴헤브리디스 제도’로 불리던 이곳은 1914년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통치령으로 지배를 받다가 1980년에 ‘바누아투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바누아투의 여러 섬 가운데 ‘라가’ 섬을 여행하고 쓴 이 에세이에서 르 클레지오는 이곳의 자연과 전통을 관찰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문명을 펼쳐 보인다. 또한 식민지 개척자들의 폭력과 노예무역의 비극적인 역사, 그리고 문명의 공존을 위협하는 세계화에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르 클레지오의 혁명>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 중 가장 자전적인 것으로 실제로 “여전히 나의 국적은 모리셔스 섬이며 감성적으로도 모리셔스 섬의 주민”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정신적 모태 모리셔스 섬과 그 섬에 정착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장장 5대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다른 민족들과의 사이에서의 개인의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삶과 그 선조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관심이 옮아가기 시작하면서 조상의 기억과 족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자신의 뿌리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확인 작업이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아프리카인>

클레지오가 아버지의 사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는 자전적 이야기이다. 평생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라는 인간의 삶을 상상세계 속에서 살려내면서 작가 자신의 정신적 모태인 아프리카 대륙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떨어뜨려 놓은 조약돌 하나하나를 더듬어 나아가면서 아버지와의 기억과 결합하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읊조린 『아프리카』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불어를 구사하는 작가"로도 평가받는 그는 <섬>, <사막>, <하늘빛사람들>, <황금물고기>, <허기의 간주곡> 등의 작품을 비롯해 평전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등이 있다. 이 중 <허기의 간주곡>은 르 클레지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될 시점에 프랑스에 출간된 작품인데 그가 서울에 체류했을 때 집필된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었다.

한편 르 클레지오는 2007년~2008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로 임해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2011년 6월에는 제주 세계7대자연경관 홍보대사, 2012년에는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을 맡은 바 있다.


2. 오늘의 책 조서에 대해

A. 줄거리

이 작품은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 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무더운 여름 어느 한때 한 사내가 열어젖힌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키가 무척 크고 등이 구부정한 그 사내의 이름은 아담, 아담 폴로였다. 거지 행색의 그는 방 귀퉁이에서 거의 꼼짝도 않고 몇 시간이고 앉아 사방에서 햇빛의 반점들을 찾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보통은 되도록 몸에 닿지 않도록 늘어뜨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병든 짐승들, 교활해서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선, 위험을, 땅바닥에 바싹 붙어 다가오는 위험을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그 위험과 맞닥뜨리면 바싹 움츠려 자신의 몸을 감추는 짐승들 같았다. 혼자서 바닷가 집에서 혼자서 생활하면서 미쉘이라는 과거의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그녀와의 영하에 근접하는 날씨에 벌어졌던 강간이 실제였는지, 아닌지는 판단 어렵지만 그가 그렇게 믿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그녀를 기다리고, 그녀가 찾아오고, 그녀를 찾아 밤거리를 찾아다니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는 일들이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 외딴길로 쇼핑을 가기도 하고, 동물원에 가기도 하고, 해안가를 산책하다 익사체를 보기도 하며, 그는 지금 맴돌며 남의 집에서 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하게 연설을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 시간은 고작 38분정도(14시 10분과 14시 48분 사이)였지만, 연설이 아닌 군중과의 구분 모호함, 즉 군중 속에 함몰된 자의 소리 높인 지껄임이 되어 그는 정신병원에 끌려간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병원에서 그를 분석하는 정신분석의사들에 의해, 몽상가로 규정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B. 작가인 르 클레지오가 책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1)존재론적인 인간에 대한 탐구

책 73쪽에서 작가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엘레아학파의 시조인 파르메니데스(Παρμενίδης, 기원전 510년 경 - 기원전 450년 경)의 인간 존재론을 인용한다.

(73쪽)

"존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게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만일 생겨났다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언젠가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면 그 또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은 꺼져 버린 것이고 소멸은 조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잠깐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살펴보자.

파르메니데스의 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단지 기원전 450년경에 65세였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이며 존재(being)하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일 뿐, 비존재는(nonbeing) 실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고(思考)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참된 실체는 완전히 충실한 '존재' (to eon)이며, 이것이 유일하고 불변하며 불멸하는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그러므로 여타의 철학이 인정하는 사물의 다양성이나 운동 및 변화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모두 허위이거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사유(思惟)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했던 밀레토스 철학과 피타고라스 철학으로부터 실체를 본질과 형상으로 극명하게 구별하게 하는 시금석이 되었으며 이 후의 철학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하는 합리주의를 낳게 되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를 다양성 속의 제일성(齊一性)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사물의 기원에 관한 밀레토스 학파의 이론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들의 철학은 만물이 하나의 근본 재료로부터, 혹은 유일자(有一者)에 의해 변화의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그러한 변화의 개념에 반대하면서, 만물의 배후에 단일한 실체가 존재한다면 변화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논거와 변화하는 현상이란 근본적으로 일종의 환상이라고 논리적 논증에 의해 비판하였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 변화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볼 때 생각할 수 없는 것이거나 표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는 "어떠한 것도 비존재로부터 존재로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존재화(存在化)라는 개념이나 생성된다는 개념은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모든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기본 주장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떤 것이 비존재로부터 존재로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어떤 것에 관해 그것이 한때 비존재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의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물이나 한 사물의 상태가 비존재로부터 혹은 비존재로 변환될 수 없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 역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것이었다. 존재 혹은 실재란 현존하는 것 자체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판명한 논리에 의해 변화에 관한 어떤 것도 생각될 수 없으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은 존재 혹은 현존하는 것일 뿐이며, 그러므로 존재란 절대적이며 변화 생성될 수 없고 충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는 전적으로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어떤 것이 비존재로부터 존재하게 된다는 주장을 일축함으로써 생성이나 변화의 개념이 갖는 모순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어떤 것이 존재화한다"는 명제는 어떤 모순을 포함하고 있을까? 파르메니데스는 그 모순은 어떤 것이 존재나 비존재 둘 중의 하나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조리 있고 일관성 있게 내세울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변화의 개념의 배후에 있는 가정(假定)은 어떤 것이 비존재로 혹은 존재로부터 존재로 변화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이러한 가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모순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즉 만일 누군가가 탈레스나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어떤 것이 실체로부터 발생한다고 논거한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존재로부터 발생하였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비존재로부터 발생하였다고 한다면 그는 비존재가 어떤 것이라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비존재가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분명한 모순이다. 왜냐하면 모든 실재하는 어떤 것은 이미 명백히 존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재의 전구조의 기원에 관한 광범위한 문제를 설명하려 하든, 아니면 단순히 작고 특수한 사물을 설명하려 하든 간에 변화를 설명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 난점은 동일하다. 즉 어떤 형태의 존재가 존재나 비존재로부터 발생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는데, 존재가 존재로부터 발생한다면 그 존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비존재로부터 발생한다면 그 비존재를 유(有 : being)로 상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변화와 생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어떤 것이 존재하며, 변화 후에도 그것은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변화와 운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모든 실재를 그러한 방식으로 파악한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 라는 사실이다. 이 경로에는 말하자면 만들어질 수도 파괴될 수도 없는 대단히 많은 징표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하고 확고부동하며 끝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에는 다양한 차이들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존재하거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하는 둘 중 어느 하나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한 공간의 존재는 다른 공간의 존재만큼 많으며 빈 공간도 없다. 이러한 생각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실재는 물질적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공백도 없을 뿐 아니라 또한 변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는 생성되지도 파괴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존재는 불가분적이며, 영원하며 완전하다.

변화의 개념에 관한 내용을 그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점을 증명하여 그 개념을 부정하더라도 그 개념을 상식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평범한 범부(凡夫)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삶으로부터 변화하는 상황과 사물을 매순간 목격하며 그 사실이 엄연한 현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현상과 실재를 구분함으로써 변화에 대한 상식적인 사고 방식을 거부하였다. 그에 의하면 변화란 현상을 실재와 혼동한 결과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며, 현상과 실재에 대한 명료하고 분명한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현상과 실재에 대한 이러한 구분의 배후에는 파르메니데스가 믿었던 통념과 진리의 차이가 존재하며, 그 점이야말로 철학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실재가 진리의 토대라면 현상은 통념의 오류를 조장할 뿐이다. 비록 상식은 사물과 존재가 변화의 과정에 있으며 언제나 연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감각에 근거한 이 견해를 이성의 활동에 의해 충분히 검토하여 올바른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조류를 그는 충분히 조성하였던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만일 만물을 구성하는 단일한 실체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운동이나 변화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탈레스도 이와 유사한 점을 지적하였는데, 우리의 감각으로는 실재하는 참된 구성 요소나 재료가 감각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의 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플라톤은 존재의 무변화성과 완전성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이념으로부터 가시계(可視界)와 가지계(可知界)를 확실히 구분하는 철학을 구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이데아의 개념을 추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망명한 그리스 인들에 의해 세워진 식민지였던 엘레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거의 평생을 보냈다. 그는 실재가 단일 실체로 구성된다는 철학적 주장에 논리적 합의를 추론해 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그는 인간의 감각과 상반되는 결론, 즉 운동이나 변화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논리 철학은 많은 이들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비난과 냉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제자 제논으로 하여금 당대의 철학을 논박하는 논증을 펼 수 있도록 하였다. 파르메니데스가 65세에 이르렀을 때 제자였던 제논과 아테네를 방문하여 젊은 소크라테스와 만나 담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면 작가는 이 시점에서 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언급했을까?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극중 주인공인 아담 폴로는 태초의 인간 아담과 태양의 신 아폴론을 연상시키는 그 이름은 문명 이전의 사회, 신화적 세계로 회구하고자 하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주인공이 보이는 광기 어린 행동은 바로 그 회귀로의 몸부림이라고 말하고 있다.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분간되기 이전의 영혼과 육체로 이분되기 이전, 자연과 인간과 신이 혼융되어 완전한 하나를 이루고 있던 신화적 세계 속의 아폴론으로서, 아담 폴로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세계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역자는 해설에서 말하고 있다.


B) 작가의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222~223쪽)

(1)

사람들은 우주의 고정된 단 하나의 점에 도달했고, 이제는 거의 영원하다. 말하자면 하나의 신이다. 왜냐하면 존재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창조되었어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리적 고착도 아니며, 엄밀히 말해 신비주의 혹은 고행도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신과의 소통 가능성 추구나 영원성에 대한 욕망이 이러한 표현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아담이 물질을 이겨내려 한다거나, 그 물질과 동일한 원동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물질을 이겨내려 한다면 그것은 아담의 더욱 큰 나약함이 될 것이다.

솔직히 이것은 욕망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 전 그것이 솔직히 지상에서 피울 수 있는 담배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아담을 움직이는 것은 성찰과 명철한 명상이다. 인간이라는 자신의 육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감각의 총체로부터 출발하여, 그는 증식과 동일화라는 이중의 체계로 자신을 소멸시킨다. 그 두 가지의 여건 덕분에 그는 현재, 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래에서도 추론 할 수 있다. 그 단어들의 정확한 가치, 즉 단어들이라는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혹은 가깝거나 먼 곳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차츰차츰 그는 자기 창조를 통해 스스로를 소멸시킨다. 그는 일종의 공동 시를 쓰는 것이며 아름다움, 추함, 이상, 행복으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망각과 부재로 끝을 맺는 것이다. 곧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그 자신도 아니다. 그는 사라지고, 극소량이 되어 끊임없이 움직이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기술한다. 그는 이제 외롭고 영원하다고 거대한 흐릿한 유령, 쓸쓸한 노파들의 공포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스스로를 창조하고, 죽고, 살고, 다시 살고 어둠 속에 잠기고, 영원한 단 한 번에서 나온 수백 번, 수백만 번, 수십억 번이 되고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된다.


Q1)

즉 작가가 말한 인간 존재란 혹은 삶이란,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된다. 라는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

부.조.리 즉 삶이란 모순이며 의미가 없다.


(2) 작가는 이러한 인간 존재론의 인식을 벗어나, 그가 살고 싶은 세계는 다음과 같다는 것을 아담을 통해 말한다.

1.아담이 미셀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146쪽)

대체 넌 나처럼 마지막 남은 빛의 잔재 한가운데로 와 잠들고 싶지 않니? 넌 정말로 내게 평온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니? 맥주나 차를 마시면서, 창밖으로 스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우리는 옷을 벗고, 서로의 육체를 바라보는 거야.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헤아려보기도 하며, 똑같은 날을 수천 번 되풀이 하지 않으련? 신문도 읽겠지.

도대체 이 집의 사람들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네가 한번이라도 말해주면 좋겠어. 누가 알로에 잎사귀에 그런 것들을 새겨놓았는지, 누가 그 짐승을 죽였는지, 용맹함을 드러내는 투명하고 푸른 두 눈의 흰 쥐를, 어지러이 엉킨 소귀나무 관목숲에 어쩌면 못박혀 죽었는지도 모르는 그 쥐를, 그러면서도 썩지 않고 향기를 내며 오늘도 분명 뜨거운 열기에 몸이 온통 꿰이고 있을 그 쥐를.(146쪽)

2. 아담은 초등학생 노트에 자신이 꿈꾸는 삶에 대해서 쓴다.(227 ~ 228쪽)

시내를 걸으며 나중에 내게 쓸모가 있을 법한 물건들을 보아두고, 필요하다면 지금 있는 언덕 위의 집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될 때 들어가 살 수 있는, 폐허라도 좋으니 빈 가건물을 찾아두고, 또 그 개와 다른 많은 짐승들을 만나고, 장난도 치고, 공중 목욕탕에서 목욕도 하고 미셀에게서 5천 프랑을 빌려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만일 내가 뭐든지 일거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일, 몸으로 때우는 일, 그러니까 레스토랑의 접시 닦이라든가 시체 안치소에서 염을 하는 사람, 혹은 영화사의 단역 배우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난 족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원할 때마다, 이를테면 하루에 한 번, 담배 한 갑& 글을 쓸 수 있는 종이, 그리고 또 하루에 한 번 맥주 한 병을 살 수 있을 만큼만 벌 텐데. 나머지는 다 사치다.. 나는 미국에 가고도 싶다. 사람들 말로는 그곳에서는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한다. 남부 지방에서 햇볕을 쬐며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글이나 쓰고 술 마시고 잠이나 자면서 말이다. 난 또 수도회에나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3. 도자기 굽는 사내를 보고 (228 ~ 229쪽)

나도 시골에 그런 집을 한 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자갈투성이의 산비탈, 이글거리는 돌들 아래로는 뱀, 전갈, 붉은 개미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리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내리쬐는 한 뙈기의 자갈밭을 구해 그 땅 한 가운데에 불을 놓을 것이다. 나무판자들, 유리잔, 주물, 고무, 눈에 띄는 모든 것들 다 불태울 것이다. 그렇게 불을 가지고 직접 온갖 종류의 조각을 하리라. 온통 새까맣고, 바람과 먼지 속에거 불에 그을린 작품들, 나는 나무 등걸들에 불을 던져 넣어 태울 것이다. 모든 것을 비틀리게 하고, 모든 것을 시커멓게 만들고, 모든 것을 바스락 소리를 내는 가루로 칠하고, 그리고 불길이 높이 솟구치게 하여, 무거운 소용돌이 모양의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게 할 것이다. 대지에는 오렌지색 혀들이 돌아 널름대며 하늘과 구름에까지 이르리라. 창백하게 질린 하늘은 여러 시간 동안 그 혀들과 싸울 것이다. 수많은 벌레들이 날아와 불길 속에 뛰어들고, 아무 색도 없는 불길의 근원에 머리부터 처박을 것이다. 그리고 열기에 둥싱 떠올려져, 눈에 보이지 않는 기둥을 타고 오르듯 불길을 따라 기어오르다 탄소 입자들로 변해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잿가루의 비로 내 머리와 드러낸 어깨 위로 다시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러면 불길의 숨결이 그들 위로 불어, 내 피부 위에서 그것들이 몸을 떨도록 할 것이다. 그 숨결은 그들에게 새로운 발과 새로운 앞날개가 돋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어 대기 속에 일으켜 세우고, 그러다 마치 연기의 파편들처럼 흐릿하고 우글거리는 그들을 자갈들 틈새에, 산자락 아래에 내팽개칠 것이다.

한 오후 5시쯤이면 태양이 승리를 거둘 것이다. 태양이 불길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땅 한가운데에는 완벽한 원을 이룬 검은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눈에 덮인 풍경처럼 하얄 것이다. 불길이 일던 곳은 마치 태양의 그림자,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 같으리라. 그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불에 그을린 나무들, 벼락을 맞은 듯 녹은 금속의 덩어리들, 뒤틀린 유리잔, 잿더미 속에 마치 물방울처럼 방울진 쇳물뿐이리라. 기괴한 줄기와 섬유질의 접합 부위, 탄가루가 들끓는 틈새를 지닌 알 수 없는 식물 같은 것들이 온통 자라나 있으리라. 그러면 나는 경련을 일으킨 듯 떨고 있는 그 형태을 모두를 집안으로 가져가 어느 방에다 쌓아둘 것이다. 그리고 하얀 자갈들로 이루어진 산과 불에 탄 정글 한가운데서 살아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더위와 연관되어 있다. 열기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메말라 썩어버린 세상을 재구성할 것이다. 단순히 열기로, 열기로 인해 모든 것은 하얗고 단단하게 고정될 것이다. 마치 북극의 빙하 덩어리처럼 그것은 물질적 조화를 이룰 것이고, 그 덕분에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진정 아름다우리라. 낮은 더위에 더위를 더한 것이 될 것이고, 밤은 석탄보다 더 칠흑 같을 것이다.


Q2)

1,2,3.의 아담의 입으로 말한 작가가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일까?


2)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아담이 말하고 싶은 것/ 연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 (264 ~ 266쪽)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똑같고 모두 형제들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들 모두 똑같은 몸뚱이와 똑같은 정신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백주에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이 약간 우습게 들리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말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 형제이며 똑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싶으십니까? 내 형제들이여. 우리들 모두 대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우리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대지가 얼마나 우리와 닮았는지 모르십니까? 대지에서 싹트는 모든 것, 대지에서 사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형상, 우리의 스타일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십니까? 그리고 우리의 육체하고 그래서 우리 자신들과 뒤섞인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 예를 들어 여러분 주위를, 좌우를 살펴보십시오. 이 경치 속에 우리 것이 아닌, 여러분 것도 아니고 제 것도 아닌 단 하나의 사물이라도, 단 하나의 요소라도 있습니까? 진열장에 반사되어 제 눈에 보이는 이 가로등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려보지요. 예. 이 가로등은 우리 것이며, 주물과 유리로 만들어졌고, 우리들처럼 똑바로 서서 꼭대기에 우리 머리와 흡사한 머리를 달고 있습니다. 저기 바다에 있는 돌로 만든 방파제 역시 우리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손과 발에 알맞게 세워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원했더라면, 천 배는 더 조그맣게 만들 수도 있었겠지요? 아니면 천 배나 더 크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동굴과도 유사한 집이 있습니다. 우리 얼굴처럼 구엄이 뚫려 있고, 우리 엉덩이처럼 의자들로 가득 차고, 우리의 등처럼 침대가 있고, 땅을 모방한 마루가 있는, 결국 우리를 모방한 집 말입니다. 우리들 모두 똑같은 동지들입니다. 우리들은 괴물들을 창조했습니다. 괴물들, 예 그렇습니다. 마치 이 텔레비전 수상기나 저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 기계 같은. 그러나 우리는 우리 본성의 한계 내에 머물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재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위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말들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여, 마치 신 자신처럼, 신 자신처럼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예, 여러분께 그걸 말씀드립니다. 바다와 나무와 텔레비전 사이에는 다른 점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인이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능이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자, 텔레비전, 그것은 바로 우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금속과 합성수지 덩어리에 우리의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왔습니다. 금속과 합성수지 덩어리가 우리에게 대답을 하고 우리의 눈과 귀를 붙잡아 맵니다. 그 물건을 우리의 배와 연결시키는 탯줄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빛나는 이 쓸모없는 물건이 우리로 하여금 그 속에서 표류하도록 하며, 우리가 약간의 쾌락에, 예, 모두에게 공통된 즐거움에 빠져 그 속에서 길을 잃도록 합니다. 형제들이여, 저는 텔레비전입니다. 여러분도 텔레비전이며, 텔레비전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독특한 해부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우리들 모두는 사각형이며, 온통 까맣고, 온통 전기를 사용하며, 온통 웅웅대는 소리와 음악 소리로 울립니다. 눈과 귀가 그것에 쏠리면 우리는 그것의 목소리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그 화면 속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알아보게 됩니다. 내 형제들이여,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사랑을 공유하듯 그 영상을 공유합니다. 그리하여 희미하고 어렴풋한 우리의 동질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투명한 물감으로 표면을 덧칠한 아래로 진하고 뜨거운 피 같은 것이 흐르며 한쌍이 더 있는 염색체 같은 것이 마침내 우리들을 가지고 하나의 종족을 다시 만들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 - 너무나 오랫동안 고립되고, 서로 오해하고, 서로 불신한 탓에 - 가장 끔찍한 보복을 당하게 되지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결국에는 티라노사우루스나 세라토사우루스, 데이노테리우스, 피로 뒤덮인 거대한 프테로닥틸과 마주쳐, 그것들에 대항해 함께 싸우게 되지나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희생과 제물을 바치는 상황이 올지 말입니다. 그러면 형제들이여, 더 이상 텔레비전도, 나무도, 짐승들도, 대지도, 타이츠를 입고 춤추는 무용수들도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영원히 우리들만, 오직 우리들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Q3)

작가의 이러한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 빛과 어둠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분리에 대해 아이러니, 서구의 물질문명이 이루어낸 현재의 세계의 거부가 이성화되지 않는 태초의 인간인 아담의 세계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작가의 아담의 세계로의 회귀는 니체의 초인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우리 안의 초인을 깨워, 즉 아담은 니체의 초인이며 아담의 세계로의 귀환은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초인을 깨우기 위해서는 내가 믿고 습관적으로 따르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 여기서는 서구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새로운 인간, 유희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


프리드리히 니체 (1844~1900)는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을 지닌 독일의 철학자로서 쇼펜하우어의 대를 잇는 현대철학의 시원으로 서양 철학사에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그는 그때까지 인류 역사상 전해오던 모든 관념과 믿음 체계를 도전하고 반박합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규범과 체제에 순응하도록 처음에는 훈육이나 교육 등에 의해 수동적으로 길들여지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나중에는 사람들 스스로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관리, 감독하는 능동적 길들이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점차 삶에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마치 한 무리의 가축 떼처럼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가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야 하는 낙타와도 같은 허무주의에 빠져 인생을 살게 된답니다.

그러므로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철학적 선포를 통해 서구 문명의 가장 중요한 중심 축이었던 종교까지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그에 따르면 종교란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만든 굴레 중에서도 가장 고차원적인 것으로, 인간이 매달려 있는 것은 실존적 신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를 넘어 절대적 힘에 매달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즉 신앙이 곧 종교라 말합니다. 그런 만큼 인간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각자 안에 지니고 있는 초인을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니체의 우버멘쉬, 초인사상으로서, 초인이란 자신을 뛰어넘는 혹은 극복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즉, 지금까지 나 자신을 사회적 규범의 틀 안에 묶어두었던 한계를 뛰어넘는 창조적 인간을 뜻하는 말로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초인을 깨우기 위해서는 내가 믿고 습관적으로 따르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내 안의 초인을 일깨운 인간은 무거운 짐을 지고 뜨거운 사막을 끌려가는 낙타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유희하듯 삶,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환희롭고, 모든 것이 경탄스러운 삶. 그것이 바로 길들여진 가축처럼 무리를 이루어 휩쓸린 삶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인류역사를 창조적 에너지로 이끌고 있는 거대한 힘, 이 힘을 니체는 영원회귀의 힘이라 부르며 이 힘이야말로 인류 문명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르 클레지오의 아담과 니체의 초인은 닮은 꼴입니다. 광장에서 연설하는 것도.(나의 생각)


또한 이러한 생각을 하는 증거로써 아담은 미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17 - 18쪽)

그는 미셀을, 어쨌건 언젠가는 그녀가 가지게 될 아이들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았고 그는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가 되면 그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들려 주리라. 이를 테면 지구가 둥글지 않다거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아이들은 예외 없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말하리라. 그러면 아이들은 더 이상 길을 잃을 염려도 없을 것이고 또 지난번 해변에서 보았던 아이들, 소리치고 고함지르며 고무공을 쫓아다니던 그 아이들처럼 행동하게 될 99퍼센트의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Q4)

현실의 삶에서 나의 존재론적 의미를 찾는다면?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기.


Q5)

내가 살고 싶은 현재, 미래에 대한 꿈은?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듯 설명하기.


Q6)

책을 읽고 토론 후의 소감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