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내내 울었다.
저절로 ...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죽은 구는 꼭 술에 취해 곤히 잠든 사람 같았다.
나는 길바닥에 앉아 죽은 구를 안고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바람에서 새 옷 냄새가 났다.
비가 올 것 같아.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좋겠다.
아니야 비가 오면 안 되지.
깊은 밤 잠 못 드는 몸처럼 이리저리 뒤척이던 걱정과 바람.
쇄골까지 내려온 구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니 푸석한 머리칼이 한 움큼 빠졌다. 손에 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버릴 수 없어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밤은 천천히 가고 구는 오지 않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구는 숨 쉬지 않았다. 죽은 구를 안고 있었지만 그와 죽음이란 개념은 전혀 연결되지 않았고 같은 극을 띤 자석처럼 강렬하게 어긋났다. 모든 것,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서서히 굳어가는 구를 집까지 옮기고 그로부터 수십 일이 지난 후에도 그랬다.<13 - 14쪽>
네가 올 줄 알았다.
오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분명 너를 기다렸지만, 내가 죽기 전에 오길 바라는지, 죽은 후에 오길 바라는지……혼란스러웠다. 살아 있을 때도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해 종종 너에게 선택을 미뤘고 때문에 핀잔을 들었는데,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나는 내 마음을 읽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죽는 모습을 너에게 보이기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너에게 그런 짐을 떠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 부재만큼이나 네 남은 생에 지우기 힘든 얼룩과 상처를 남길 테니까. 죽기 전에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은 없었다. 없는 줄 알았다. 말해야 할 것은 너와 함께했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다 하였을 테고, 그럼에도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말이 되어 나와 버리는 순간 본질에서 멀어진다고, 말이 진심에서 가장 먼 것이라고, 너는 나의 그런 마음까지 알고 있으리라 믿었는데……<15쪽>
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25쪽>
이곳은 적막과 空의 세계. 벌판도 바다도 하늘도 아닌……그저 공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끝없는 공허……속에서, 실체 없는 나를 분명히 느끼며 눈이 아닌 온몸, 온 마음으로 나는 본다. 하지만 나는 혼자, 여기서 이렇게 너를 충분히 느끼고 있어도, 네가 내 옆에 있어도, 너는 여기 없다. 아니……내가 없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분명 여기 있다. 나는 여기 있고 너도 여기 있는데, 나는 여기 없고 너는 여기 없다. 이렇게 빤히 보이는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지만 닿을 수 없으니 우리의 우주는 전혀 다르다.
겹치지도 포개지지도 않고 미끄러지는 세계.
담은 분명 여기 있지.
하지만 이곳은 담이 없는 세상<34 - 35쪽>
운다. 담이 울면서 나를 먹는다. 저것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진물인지 모르겠다. 저걸 다만 운다고 말할 수 있나. 자기가 지금 울고 있다는 것을 담은 알까.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까.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마음도 네가 먹어주면 좋을 텐데. 나도 안다. 맑고도 우스웠던 우리의 첫키스와 그 겨울밤을 떠올리던 또 다른 밤도 나는 다 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63 - 64쪽>
힘든 일할 때 시간이 빨리 가면 좋잖아.
그 속도로 내 삶이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좀……무서워. <67쪽>
구는 세상을 보고 나는 구의 등을 보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 그런 건 싫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 구는 그런 말에 위로를 받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불행한 미래 땨위 상상할 여지도 겨를도 없었으니까. 구의 몸을 껴안고 그 등에 내 머리를 기대고 있는 그 시간으로 충분했으니까. 다른 위로는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68쪽>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어린 날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 나쁜 짓도 좋은 짓도 부끄러운 짓도 같이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비슷한 공간이 만들어졌고, 떨어져 잇을 때에도 그것은 같은 울림을 만들어냈다.<83쪽>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 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84쪽>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 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90쪽>
나는 구가 걱정되었다. 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몸은 건강하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걱정하는 마음, 그 마음이 점점 커져서, 내가 상처를 겁내는 마음을 가려버렸다.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가려버리듯. <96쪽>
우리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분명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함께일 때 가능했다. <103쪽>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소중했다. 함께이기에 마음의 그늘이 지금보다 연했던 그때, 비슷한 빛깔의 감정을 속삭이며 같은 곳을 바라보던 우리는 밤마다 밤꽃 향기에 취해 있었다. <104쪽>
나는 내가, 너를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되잖아. 앞으로도 쭉 안 될 것 같잖아.
구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구의 눈동자는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네가 있든 없든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151쪽>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끈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166쪽>
너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네가 여기 있어야 나도 여기 있어.
밖을 봐. 네가 밖을 봐야 나도 밖을 본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담아,
이 바보야. <170쪽>
살아 있을 때는, 죽으면 죽은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이나 극락 같은 곳이 아니더라도, 곡물을 체에 거르면 크고 무거운 것은 남고 작고 가벼운 것은 걸러지듯, 몸을 버리고 가벼워진 혼끼리 따로 모이는 우주가 있을 거라고. 이미 한 번 살아보고 죽은 자들이나, 그 우주에서는 몸에 매여 살던 이승에서처럼 각박하게 지내기보다는 유유자적 너그럽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고독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야 죽었다고 사라지진 않을 테지만, 물질에 가까운 욕심이나 이기심에서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허기도 병도 몸도 없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가질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야 죽음이 좀 덜 무섭고, 또 그렇게 생각해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더라도, 기다리면 만날 수 있으니까. 먼저 간 그곳에ㅐ서 조용히 편안히 보채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테니까. 시간은 상대적이라던데, 이승의 백 년이 저승에서는 열흘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열흘만 기다리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노마도 이모도 보이지 않고,
여기 네가 있다.
나는 너와 있는데, 너는 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여기 없거나 내가 여기 없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싶다가도, 고통스럽게 나를 뜯어먹는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있든 없든 그건 어디까지나 감각의 영역일 텐데,나는 죽은 자다. 죽어 몸을 두고 온 자에게 감각이라니 무슨 개소리인가. 하지만 느껴진다. 나는 분명 너를 느끼고 있다.
이모는 이모에게 가정 간절한 누군가의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노마는 노마에게 가장 중요한 누군가의 곁에.
지금 내가 네 곁에 있듯.
그럴 거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런 믿음이 필요하다.
네가 지금 죽더라도 우리 영혼이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아직 노마도 이모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태어났고 죽었지만 아직은, 다시 태어나지 못했으니. 다시 태어나 다른 존재로 만난 너를 내가 사랑하게 될까. 다른 존재인 나를 네가 사랑해줄까. 그 역시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 아닌 그 어떤 너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이승에서 너를 사랑했던 기역,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 볼 수 있기를. 살고 살다 늙어버린 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같이 기대해보자. 너와 내가 혼으로든 다른 몸으로든 다시 만나길. 네가 바라고 내가 바라듯, 네가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후에, 그때에야 우리 같이. 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천 년토록 살아남아 그 시간만큼 너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천만년 만만년도 죽지 않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171 -174쪽>
- 작가의 말
그리고 또 많은 날 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하고 분명 살아 있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 <2015년 3월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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