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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소설화

E.T의 인생 철학 1. - 심즉리(心卽理)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7. 2.

  선생님 이 이른 아침, 전율이 일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나이 탓인지, 새벽잠이 없어졌어요. 자정을 넘은 시각, 그것도 오래 뒤척이다 잤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녘 여지없이 깨어 캄캄한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만 갑니다. 그러다보면 부유스름히 비쳐드는 아침빛에 내 마음조차 서서히 밝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며 여전히  내가 살아있음이 좋은 시각,

  처마 끝으로 빗방울인지, 혹은 이슬들이 모였다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소리인지, 모를 것들이 ‘똑똑’ 느리게 떨어지는 소리도 좋고. 어딘가를 향해 종종거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필시 아파트 경비원일 듯싶은 이의 이른 빗질 소리, 짹짹거리는 작은 것들의 내짓는 생명의 소리, 이런 것들에 잠시 넋을 놓을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이 시각에 전율이라니?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강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살인과 죽음의 충동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아 사실은 어제 좀 흥분했습니다. 도대체 이건 뭔가? 내 성정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 또 남에게 독한 말조차 하는 걸 꺼려하며 텔레비전 속의 비열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에도 채널을 돌리는 그런 나인데, 내 깊은 내면에 늘 도사리고 있다고 인지되는 살인과 죽음의 충동이라니, 어불성설이며 나라는 존재의 자아마저 무너뜨리고 말 것 같은 공포감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는데.

   참말로 이건 뭡니까? 그 이면에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논리가 있고 그것은 곧 어릴 때 내가 놓여 진 환경에서 연유했다니. 그동안 수많은 심리학 서적을 읽었음에도 풀 수 없었던 이 수수께끼를 몇 분의 동영상 강의로 풀 수 있었다니. 아마도 그 서적들을 탐독할 무렵에는 더 큰 심리학적 문제를 해결하느라 그것들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큰 산이 턱 숨통을 막아오는 지금에야 비로소 이 문제의 비밀이 풀려야할 그런 시기가 아니었는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끊임없이 나는 나 자신을 까발려서 바람에 햇빛에 말리고 싶다는 상상을 합니다. 도대체 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세세히 고찰되어 온전한 나의 삶,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나의 삶을 다만 몇 년이라도 살다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또 하나,

  얼마 전에 언뜻 나비잠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언급 했던 일인데요. 그때 제가 ‘나비잠 하우스’라는 단편을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90여 매를 목표로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30매쯤에서 손을 놓고 있었던 상태였어요. 클라이막스를 향해 언덕을 올라야하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그런데 이번 강의는 이 단편을 쓸 수 있는 추진력을 단박에 얻었습니다.

   소설 속 남자의 집 내부는 온통 엘피와 시디들. 책들과. 오디오와 그랜드 피아노로 채워져 있고 남자는 끊임없이 바흐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듣는데. 이상하게도 주인공인 허접하고 소외된 인생을 살고 있는 내가 그의 집에 살러 갔을 때 발견한 아이들의 동화책은 책꽂이의 가장 높은 곳, 손에 닿기 힘든 곳에 배치해 놓은, 나의 내면에 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이죠. 불현듯. 선생님의 강의를 생각하다가.

   이 작품의 열쇠는 바로 살인과 죽음의 충동 즉,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논리로 풀어나가면 되겠구나, 지금 흥분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단편은 일 년 전쯤에 시작했는데도 헉헉대고 있었는데, 참 신기하죠. 하여 인간과의 인연이든, 작품과의 인연이든 다 때가 있고 순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닌가하는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전율 3.

   어젯밤 드디어 875매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처음부터 소설의 배치를 바꾸고 마지막 장을 6장으로 마무리하며 그 6장의 제목을 심즉리(心卽理)로 설정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온 종팔이 어머니 금수에게 무심한 듯 그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겨울이 꼭 나쁘지만은 않지요.”

“그랴지. 마음이 이치인 게, 봄은 봄의 이치대로, 겨울은 겨울의 이치대로, 어디 나쁜 것이 있겄어?”

금수는 마음으로만 그리 물었다.>

또한 혼자 흥분해 떠들고 있는 심재술을 등장시켜 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따, 고것이 뭐시 중요현가? 배창시가 우선 따땃해야지.”>

   심심할지도 모르는 마지막 장을 마무리하며 드는 생각에 저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제 무의식 저 밑바닥에 죄와, 벌과 용서의 구조가 이렇게 작품 속에서 환치될 수 있구나. 결국 마지막은 이런 길,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제 대학 전공이 중문학이었잖아요. 3년 내내(우리 때는 전공을 2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사서삼경을 배우고 뭣도 모르고 아니면 학점을 따기 위해 중국문학에 몰입해 있을 때, 저도 모르게 주입된 어떤 사상들이 이렇게 불쑥 제 글속에서 툭 튀어나오다니.

   만물의 이치는 성에 구현된다는 성즉리(性卽理)설을 주장했던 남송의 주희의 사상에 반해 정은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며 본심이 天理(천리)임을 믿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자고 하여 心卽理(심즉리)설을 주장한 육구연의 사상을 왕수인은 성과 정을 모두 포함하는 마음 자체가 곧 천리라는 주장을 펴는 양명학으로 완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왕수인의 심학은 맹자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맹자는 사람의 본성을 선한 근거로 보고 “모든 사물의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고 함으로써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선한 자아의 회복에 두고 있으며 자아의 회복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良能(양능)이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 良知(양지)이다.”라고 하여 사람에게는 양지, 양능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이치에 따라 살게 되면 그것은 곧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사는 인간의 바른 도리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입니다. 이 양지, 양능설을 확대 심화시킨 것이 왕수인의 심즉리설이며 인간의 마음에 인간의 감정 욕망까지를 포함하여 설명하려고 했다는 것이 제가 쓰고 있는 소설에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불현듯 또 깨달았습니다.

   참 신기하죠. 이렇듯 내 삶을 형성해왔던 모든 것들은 늘 내가 쓰는 글 속에서 자기의 주장을 펼치며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세상에 드러나길 원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쓰면 되겠지요. 아니 선생님 말씀처럼 적당한 제어, 욕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야하는 저만의 숙제가 남겠지만....

   이제 어젯밤에 프린트한 초고를 읽으며 다시 토요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늘 든든합니다. 영원한 저의 나침반이 되어 주세요. 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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