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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에피소드 54. 나이 듦에 대한 권리이자 의무에 대하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6. 2.

  새벽, 스마트 폰을 뒤적거리다가 페북 친구가 올려놓은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을 접했어요. 눈물이...

  모름지기 나이가 먹었으면 어떤 위치에 있던, 인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권리이기도 하고 의무이기도 한. 저 같은 경우엔 김미숙이란 이름으론 무엇인가를 말하기에는 모자라 김은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싶은 거죠. 김은 이라는 이름에 뭔가 무게가 실린다면 내가 속한 사회, 나라, 세계, 우주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새벽 그 기사를 접하고 흘린 눈물을 닦아주었어요. 그리고 부끄럽지만 미래의 어느 날은  분명 더 많은 것을, 진심을 다해, 힘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자신에 대한 확신에 가슴이 뿌듯해져 왔어요. 청년처럼.


 


  대학 4년, 졸업하고 플러스 1, 2년 뭐랄까, 되게 짝사랑했던 같은 과 남학생이 있었어요.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남학생이 나에게 한 말을 지금까지 내 삶의 모토로 삶고 있어요.


  “우리는 모두 촛불이어야 한다. 크기와 상관없이. 촛불과 촛불이 모이면 주변을 밝힐 수 있고 세상을 그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다소 진부한 이야기였지만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그 남학생을 어찌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어쩌면 그 남학생이 그 말을 했기 때문에 내 삶의 모토가 된 것은 아니구요, 아마 어렸을 적부터 종교 안에서 자랐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 즉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의 개념에 몰두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때는 내 달란트는 시인이 되는 것이었고 시인이 되어 탁한 세상을 좀 맑게 하고 싶단 순진한 생각을 했죠. 뭐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사는 일에 취해 달란트나, 의무나 책임감 같은 것을 잊어버린 듯 살았지만 이 나이 먹고 보니 내 달란트의 용량과 색깔에 대해 사색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어느 지점에 도착해 내 달란트와 용량과 색깔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죠. 얼마나 다행인지요. 더 늦지 않아서. 아마도 사람들도 나름 자신의 삶에 대한 정리를 할 때쯤이면 이런 지점에 도착하며 저처럼 고민을 하다가 누구랄 것도 없이 어떤 도착점에 이르게 될 것 같아요. 자신에게 맞는 용량과 색깔을 찾아. 그것이 한 인생의 면면한 흐름이라는 것이 기쁜 오후예요.

  슬쩍 지나치듯 언급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제가 갈멜 수도원에 가려고 성소모임에 나갔던 적이 있다는 말.ㅎㅎㅎ 그때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많은 절망을 했고 또 솔직히 인간이 무서웠어요. 제가 너무 바보 같아서 아주 나쁜 사람을 만났는데 도저히 세상을 그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었죠. 나라는 인간은 세상에 살면 민폐가 될 뿐이야. 수도원에 처박혀 기도나 해야 돼. 어쩌면 내가 세상에 이대로 산다면 틀림없이 어리석은 나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이 있을 거야. 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좀 엄살이 심했죠. 그때나 지금이나 저에겐 약간의 과대망상증이 있는 듯해요. 그 과대망상증이 때론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삶의 균형을 잡지 않으면 병이 되기도 하겠죠.

  제가 50 이전까지는 요. 절대 제 고민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살았어요. 남들이 모두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탐닉과 함께 어떤 우열감과 오만. 근데, 속은 참기 힘들 만큼, 날마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힘들었거든요. 세상에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어요. 발설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고민들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던 거죠. 믿기세요? 나이 50이 되도록 그런 것을 몰랐다는 게. 그만큼 저는 어쩌면 가볍게 세상을 살고자 했던 것 같았어요. 하나님이 세상에 인간을 내놓은 것은 ‘삶을 향유’하라는 축복 말고 또 있을까, 이런 류의. 그런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것 또한 온당치 못한 삶의 자세라고. ㅎㅎㅎ 참 철이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친구에게 슬쩍 제 고민을 비춘 적이 있었어요. 그 순간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그 애도 나만큼 고민이 많고,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시달리며 겪어내고 극복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저 깊은 곳까지, 처음으로 그 애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아요. 늘 그 친구가 저의 가로등이 되어 준 셈이죠. 어쩌면 어느 정도까지는 나침반의 역할도 해준 셈이고요. 감사하죠. 그 애가 추천해주는 심리학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며 나 자신을 치유하게 되었지요.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참 신기하죠.

  제 나이에 이르게 되면요. 인간들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되어요. 누구랄 것도 없이. 나 자신조차, 내 안의 어떤 부분은 나쁜 부분,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는 걸요. 그래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부분은 시간이 말해주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오늘은 또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 갈 수 있을지요?